결승전을 앞두고 킹존 드래곤X와 아프리카 프릭스가 봄의 왕좌에 앉을 준비에 한창이다. 어느 라인 하나 모자란 팀이 아니고 각자의 강점이 뚜렷한 만큼 재미있는 대결을 기대하는 팬들이 많다. '칸' 김동하와 '기인' 김기인의 탑 라인, '피넛' 한왕호와 '스피릿' 이다윤, '모글리' 이재하의 정글 싸움, '비디디' 곽보성과 '쿠로' 이서행의 미드 라인 구도 모두 흥미진진할 것만 같은 매치업이다.

사실 봇 라인 구도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이 킹존 드래곤X의 든든함과 다재다능함에 표를 던지고 있다. '고릴라' 강범현의 노련함이 '투신' 박종익의 화려함을 잘 막아줄 것이며 '프레이' 김종인과 '크레이머' 하종훈은 모든 면에서 '프레이' 쪽에 우세하다는 평가다. '크레이머'는 '프레이'와 달리 주요 무대 경험이 전무하고 경력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러한 평가에 무게를 실어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평가는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근 '크레이머'의 폼이 가파른 상승 궤도라는 점 때문에 위와 같은 평가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KDA만 높은 원딜?
좋게 말하면 안정감, 솔직히 말하면 하는 게 많지 않은 원딜


이번 스프링 스플릿 정규 시즌이 흘러가면서 아프리카 프릭스는 거의 매번 상위권에 자리 잡았다. 고급 신인 '기인'의 변화무쌍한 플레이와 '쿠로'를 중심으로 한 미드-정글의 안정감, '투신'의 화려한 이니시에이팅이 잘 버무려진 결과였다. 모두가 톡톡 튀면서도 준비한 전략을 경기 내에서 최대한 끌어내는 운영. 하지만 그 속에서 유독 '크레이머'가 주목받기 힘든 것도 아프리카 프릭스였다.

물론, 경기를 빠르고 깔끔하게 끝내는 팀일수록 원거리 딜러가 주목받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3코어'부터 힘을 발휘하는 원거리 딜러의 특성상 경기가 무난하게 흘러가면 원거리 딜러가 힘을 제대로 갖추기 전에 승리를 거두곤 하니까. 오히려 팀이 위기일수록 원거리 딜러가 빛난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크레이머'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아프리카 프릭스라고 해서 무조건 의도했던 대로 경기를 끌고 갔던 것도 아닐 뿐더러 장기전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빛났던 건 '크레이머'의 후반 캐리력이 아닌, 아프리카 프릭스 특유의 합이었다. 딱 맞는 퍼즐과도 같은 그들의 능력. 그래서 아프리카 프릭스가 승리하는 경기에서는 유독 MVP를 선정하는데 애를 먹었다. 누가 확 튀는 느낌보다는 전체적인 팀워크로 승리한 경기가 잦았으니까.

아무튼 쉽게 이야기하면 '크레이머'가 승기를 굳히는 역할을 했던 경기는 아프리카 프릭스 입장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이는 객관적인 지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정규 시즌 내내 '크레이머'가 기록한 KDA는 7.86으로 원거리 딜러 3위에 해당하는 높은 수치였다. 원거리 딜러는 최대한 죽지 않으면서 킬과 어시스트를 많이 기록하는 것이 덕목 중에 하나니까 '크레이머'가 정말 잘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킬 포인트에서는 평균 2.5로 뒤에서 4등이었다. 정규 시즌 내내 아쉽다는 평가를 들었던 bbq 올리버스의 '고스트' 장용준보다 0.02 높은 기록. 오히려 전체 킬 개수에서는 '고스트'보다 낮은 순위였다. 이를 종합해보면 '크레이머'는 '죽지만 않는 원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 조합상 바루스가 메인 딜러 역할을 안해도 되긴 하지만, 대미지 차이가 심하다.

실제 '크레이머'의 정규 시즌 플레이를 보면 위와 같은 결론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강철의 솔라리 팬던트'를 구매했던 것처럼 극단적인 예시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기는 경기나 상황에서도 '크레이머'는 뛰어난 대미지 기록량을 보여준 적이 드물었다.


크게 달라진 '크레이머'
여전한 안정감에 캐리력 장착 완료


그렇게 시작된 포스트 시즌. 아프리카 프릭스는 정규 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 2라운드부터 여정을 시작했다. 그들의 상대는 숙적 SKT T1을 꺾고 올라온 kt 롤스터였다. 많은 이가 kt 롤스터의 우세를 점쳤다. 기세도 그렇고 전 라인 기량에서 이긴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프릭스는 이런 평가를 비웃으면서 세트 스코어 3:1로 승리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프릭스 입장에서 더욱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레이머'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빛을 내뿜었기 때문이었다.

말파이트와 벨코즈라는 조커 카드를 기용해 완벽한 승리를 거뒀던 2세트에도 그랬지만, 카이사를 꺼냈던 3세트와 케이틀린으로 맹활약했던 4세트에 '크레이머'가 엄청난 캐리력을 자랑했다. 3세트에 '크레이머'가 기록한 대미지 총량은 약 15,500으로 전체 1위였다. 심지어 2위였던 '유칼' 손우현의 탈리야보다 약 5천 가량 대미지를 더 기록한 수치였다. 캐리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들었던 '크레이머'와 카이사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지만, 이는 고정관념이었음이 양 팀의 3세트로 확인됐다.

그리고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4세트에는 케이틀린의 캐리력을 '크레이머'가 숨김 없이 선보였다. '쿠로'의 야스오가 더 주목받긴 했지만, 승기를 굳힌 건 누가 봐도 '크레이머'의 케이틀린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몸을 던져가면서 어그로를 끌어주는 팀원들을 믿고 우직하게 총알을 상대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그 결과, '크레이머'의 케이틀린은 4세트에만 24,700이라는 어마어마한 대미지를 기록했다.



그렇다고 '크레이머'의 기존 강점이었던 안정감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2세트에 0데스, 3세트와 4세트에 각각 1데스씩만 기록했다. 상대가 어떤 콘셉트의 조합을 가지고 오더라도 '크레이머'는 여전히 잘 죽지 않았다. 결론을 내리자면 '크레이머'는 기존의 안정감을 그대로 유지한 채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캐리력 측면에서 큰 발전을 거뒀다.

플레이오프 2라운드 3세트와 4세트는 잘 풀린 '크레이머'가 판만 깔리면 어떤 캐리력을 뿜어낼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 경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크레이머'는 예전부터 베인 장인으로 불릴 정도로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거친 캐리력을 뽐냈던 선수다. 프로게이머 생활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공격성을 많이 줄였을 뿐. 하지만 그런 '크레이머'도 초반에 무난하게 성장하고 팀원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과거 거침없었던 '크레이머'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비결은 '승부욕'
그를 맹수로 만들어 준 코치진, 그리고 그의 흡수력


잘 길들여진, 그래서 남을 공격할 의지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던 '크레이머'의 야수성을 다시 끄집어낸 건 아프리카 프릭스의 코치진이었다. '크레이머' 역시 최근 승부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는 과거 교체 출전했던 SKT T1전 승리 이후에 "다른 원거리 딜러 선수가 출전하는 걸 보면서 속으로 부글부글했다. 다음 세트에 내가 출전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행복했다"고 했다. 평소 '크레이머'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항상 인터뷰 말미에는 코치진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했다. 잠들어 있던 '크레이머'의 승부 근성을 일깨워주고 이를 '크레이머'와 팀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아프리카 프릭스 코치진의 힘이었다.

아프리카 프릭스의 최연성 감독은 과거 인터뷰를 통해 승부욕이 부족한 선수들을 어떤 식으로 교육하는지 언급했다. 기본 바탕이 되는 건 '더블 스쿼드' 속에서의 무한 경쟁이었다. 실제로 아프리카 프릭스는 스프링 스플릿 내내 정글러와 원거리 딜러를 달리 기용했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스피릿'과 '모글리', '크레이머'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주전 자리를 꿰차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는 아프리카 프릭스에 긍정적이었다. 특히, '크레이머'의 성장세가 정규 시즌 후반부터 드러나더니 이번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만개했다.

임혜성 코치 역시 이에 대해 동의했다. 그는 '크레이머'의 성장 배경으로 코치진의 끊임없는 동기부여를 꼽았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흡수력과 노력을 '크레이머'의 최대 강점이라고 말했다. 원래 승부욕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발전 속도가 더뎠던 '크레이머'에게 아프리카 프릭스 코치진의 동기부여가 큰 힘이 되었다.

이제 아프리카 프릭스, 그리고 '크레이머'에게는 단 하나의 상대만 남았다. 킹존 드래곤X와 '프레이'다. '프레이'는 산전수전 다 겪은 최고의 베테랑 원거리 딜러 중 한 명이다. 플레이 메이킹 능력이 남다르고 중요한 순간마다 뛰어난 피지컬과 상황 판단 능력으로 판을 짜는 역할을 곧잘 해낸다. 누가 봐도 '크레이머'가 불리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크레이머'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이제 승부욕을 겉으로 표출할 줄 아는 맹수와 같은 원거리 딜러로 성장을 마쳤다. 뛰어난 후반 캐리력 역시 플레이오프 2라운드를 통해 증명했다. 그런 '크레이머'가 '프레이', 더 나아가 킹존 드래곤X를 상대로 어떤 경기력을 보여줄까. LCK를 사랑하는 모든 팬의 시선이 이 대결 구도에, 그리고 '크레이머'의 플레이에 집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