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삼하 서강대학교 MTEC 교수

게임을 하면 성적이 나빠질까요? 아니면 성격이 나빠질까요? 아직 게임에 대한 선입견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게임으로 인한 안 좋은 사례는 종종 보이지만 게임으로 잘 된 사례는 찾기 힘듭니다. 게임으로 꿈을 이룬 이야기, 게임으로 자수성가한 이야기도 분명 있을 텐데 말이죠. 게임 덕분에 꿈을 이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플레이엑스포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서강대학교 평생교육원(MTEC)의 최삼하 교수는 '게임 그리고 나의 꿈'이라는 주제로 게임에 대한 열정과 꿈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게이머, 학생, 부모님을 대상으로 들려줬습니다. MTEC은 게임 개발은 물론, 기획과 그래픽&애니메이션 등을 배울 수 있는 전문 과정입니다. 학기마다 20개 이상의 강도 높은 프로젝트를 진행하죠. MTEC 과정을 마친 졸업생 중에는 블리자드에서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이규영 졸업생, 엔씨소프트에서 몬스터 기획 및 AI를 구현하는 안아람 졸업생 등이 있습니다.

기사는 편한 전달을 위해 강연자 시점에서 서술했습니다.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현재 서강대학교 게임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그저 평범한 꼬마였습니다. 시골 어느 동내에서나 볼 수 있는 꼬마였죠. 지금은 우울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제 유년 시절은 굉장히 우울했습니다. 어떤 이유나고요? 제 아버지께서는 쉽게 말해, 시골에서 술도 많이 좋아하고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생계는 저희 어머니가 책임지셨죠. 그러니 자연스레 가정생활과 멀어지게 됐고,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 이혼했습니다.

이후 저와 제 동생은 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저희를 굉장히 어렵게 키우셨어요. 시골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셨고, 장사를 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들르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1살, 동생 나이가 7살이었습니다.

70, 80년대만 해도 한부모 가정이 아주 적었어요. 그때 저와 제 동생은 아주 우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힘들었고, 제 동생은 내성적이어서 맨날 집에서 그림만 그렸습니다. 이때 스케치북도 없어서 벽지에 크레파스로 그렸죠. 집안 온통 그림으로 채워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희에게 첫 인생 게임을 만나게 됩니다. 부루마불입니다.

▲ 첫 인생 게임 '부루마불'

요즘 여러분들은 디지털 게임을 굉장히 쉽게 접하지만, 그때만 해도 없었어요. 보드게임인 부루마불 정도만 있었죠. 저와 제 동생은 몇 날 며칠 부루마불만 했습니다. 때로 친구들을 모아 4명, 6명이서 하기도 했었죠. 부루마불에는 지폐가 있는데요. 하도 많이 해서 지폐가 꼬깃꼬깃해지니 다림질로 펴가며 게임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때 부루마불은 저와 제 동생의 우울함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어요. 지금도 이때 부루마불을 하던 장면들이 생생합니다.

전 디지털 게임을 국민학교 4학년 때 처음 해봤습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라는 게임이에요. 학교 앞 문방구에 동전을 넣어서 하는 게임이었죠.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하며 제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집에서 부루마불만 하다가 전자 게임, 애니메이션이 되는 게임을 처음 접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이후 오락실을 매일같이 들락날락했습니다. 지금은 PC방이겠지만, 그때는 오락실이었어요. 오락실에서 힘들거나 슬플 때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용돈이 많지 않아 여러 이상한 행동도 했는데요. 이때 오락실 한 판이 50원이었는데 용돈이 없어서 잔머리를 썼습니다. 당시엔 5원짜리 동전이 50원과 비슷했어요. 이 5원짜리에 스카치테이프를 칭칭 감으면 50원과 비슷해집니다. 주인아저씨 모르게 5원짜리 동전을 50원처럼 사용했죠. 아니면, 주인아저씨한테 사정해서 “청소라도 할 테니 게임하게 해주세요”라고 했었습니다. 그런 게임 키즈 시절을 보내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중고등학교를 보냈습니다.

대학에 가야 할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대학에서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반면 어머니께서는 제가 안정된 생활 하기를 원하셔서 경찰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저는 경찰이 되기 너무 싫었어요.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일단 재미가 없어 보였거든요. 저는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듯이 뭔가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면 굶어 죽는다”고 하셔서 학원에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찾다 찾다 실기 시험을 안 보면서 아티스트 ‘삘’이 나는 게 뭐가 있을까 하다 건축가를 찾았습니다.

당시 건축가는 실기 시험을 보지 않았습니다. 요즘에 빗대면 수능 성적만 봤었죠. 실제 건축과를 가면 스케치도 많이 그리고 그림도 많이 그려서 ‘아티스트 같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생활은 재밌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졸업을 하고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건축가는 굉장히 터프한 직업입니다. 현장에서 싸움이 나기도 하고 술도 많이 마셔요. 그리고 그때, 두 번째 인생 게임을 만납니다.

▲ 두 번째 인생 게임 '울티마1'

이때 ‘울티마1’가 애플2라는 개인 PC로 처음 나왔습니다. 지금 보면 굉장히 조잡하지만, 전 이걸 제 인생 게임으로 꼽습니다. ‘울티마1’을 하면서 ‘아 나도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가졌으니까요. 당시 ‘울티마1’이 다른 게임과 달랐던 점은 방대한 스토리였습니다. 오락실 게임은 길어야 한두 시간이면 끝나는데, ‘울티마1’은 보름 넘게 했는데도 안 가본 던전과 월드가 너무 많았어요. 그때 ‘이런 세계가 있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에 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게임 개발의 꿈을 조금씩 키워 나갔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배울 수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게임에 대한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이었을 거에요. 게임 대학원에 입학한 것에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습니다. 대학원을 마친 뒤로 따로 게임 개발을 공부하고, 게임사에 다녀보고, 여러 직업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는 대학원에서 게임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됐습니다.

전 수업할 때 “게임을 하면서 얼마든지 꿈을 꿔도 좋다”고 가르칩니다. 아직 부모님 중에는 게임에 대한 인식이 안 좋고, 게임을 하면 성적이 떨어지고, 장래가 불투명해지고, 인생의 낙오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게임 안에서 뭔가 한다고 생각하면 걱정부터 하시죠.

그러나 제 사례를 보면, 게임은 인생의 중심을 잡아주는 아주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유일한 창구였죠. 저희 어머니는 장성한 아들한테 굉장히 고마워하십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알아서 잘 커 주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니까요. 덕분에 어머니는 게임을 굉장히 좋아해 주십니다. 나이가 많음에도요.

혹시 ‘큐비 어드벤처’라는 게임을 아시나요? 2017년 구글 인디 페스티벌에서 Top3 안에 든 게임이에요. 개발사 유닛파이브 대표는 작년에 상을 아주 많이 받았고, 대만게임쇼와 미국 게임쇼인 팍스에 초청도 받았습니다. 유닛파이브 최준원 대표가 사실 제 동생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7살 동생이요. 저를 따른 건지 모르겠지만 똑같이 건축과를 나왔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와 동생이 게임 분야에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렸을 때 했던 부루마불과 스페이스 인베이더 영향이 큰 거 같아요.

▲ 최삼하 교수의 동생 유닛파이브 최준원 대표
[강연] 메모지 속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유닛5 최준원 대표

페이커는 전 세계적으로 핫한 프로게이머입니다. 혹시 페이커가 연봉 얼마 받는지 아시나요? 공식 연봉만 36억 원입니다. 그리고 대회 상금으로 더 받습니다. 그러면 e스포츠 대회 상금이 얼마냐? ‘도타2’라는 게임의 대회 결승전 상금이 260억 원입니다. 또한, 우리 학교에 프로게이머가 다니는데 저보다도 연봉이 훨씬 높아요. 아직 e스포츠가 우리나라에서 안 좋은 인식으로 비치지만, 북미나 유럽에서는 점차 알려진 스포츠로 활동하고 전망 있는 직업군으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가 내년이면 50살입니다. 꺾인 100년이라고도 하죠. 저는 50세가 돼가면서 또 꿈을 꿉니다. 먼저 e스포츠에 있어서 대한민국이 종주국이라는 이름을 다시 가져올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프로게이머 실력은 전 세계적으로 ‘넘사벽’입니다. 중국의 염원이 우리나라 선수를 이기는 거예요. 작년 북경에서 열린 롤드컵 결승에 우리나라 두 팀이 올라왔습니다. 반면, e스포츠는 우리나라 내에서 정책적으로 억압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e스포츠 종주국이라 당당히 말하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다음으로는 게임으로 진행되는 학교를 우리나라에도 만들고 싶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한 학교는 모든 행정과 수업이 게임으로 진행됩니다. 이 학교의 선생님의 반은 일반 선생님이고 반은 게임 개발자인데요. 학교에서 모든 일을 게임으로 만들어 학생이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이 학교 출신이 대학을 졸업했는데 성적이 우수하다고 해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학교가 생기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플레이엑스포에 온 여러분이 저보다 게임에 더 관심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게임 안에서 꿈을 꾸세요. 앞으로 할 일도 많고, e스포츠도 전망 있는 분야입니다. 이 자리가 여러분이 대한민국 게임 산업의 꿈을 꿀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