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픽 과정부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채 조합을 구성하는 팀은 없다. 연습 과정에서 좋은 결과를 냈기에 대회에서도 그때의 과정과 결과가 나오길 바라면서 챔피언 조합을 갖추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선수들이나 코치진 대부분은 인터뷰에서 '준비한대로, 실수를 줄이기만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7일 종각 LoL 파크에서 2019 스무살우리 LCK 스프링 스플릿 담원 게이밍과 샌드박스 게이밍의 2라운드 대결이 열렸다. '승격 동지'이자 상위권 팀 간 대결이었던 만큼 관심이 집중됐다. 두 팀 모두 많은 것을 준비해왔고 그걸 풀세트 접전 속에서 잘 보여줬다.

양 팀의 1세트 밴픽 구도가 흥미로웠다. 담원 게이밍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뚜렷하다는 걸 밴픽 전략의 결과물로 넌즈시 드러냈다. 하지만 이를 경기 내에서 완수하지 못했고 샌드박스 게이밍이 깔끔하게 승리했다. 담원 게이밍은 한 번 삐끗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패배의 쓴맛을 봤다.


'요릭 카운터' 이렐리아
승부수 띄운 담원 게이밍 '상체 주도권'이 핵심



담원 게이밍이 레드 진영이었던 1세트. 담원 게이밍은 블루 진영이었던 샌드박스 게이밍의 요릭에 대한 카운터로 레드 진영 5픽 이렐리아를 가져왔다. 보통 블루 진영은 1픽이, 레드 진영은 5픽이 핵심이라고들 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담원 게이밍이 원하는 바는 확실했다. 바로 '탑 라인 주도권'이 핵심이었다.

최근 자주 선택받고 있는 요릭의 핵심은 '안개 망령'이다. 이들과 함께 라인을 강하게 밀고 상대와의 딜교환을 수월하게 할 수 있다. 안개 망령은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광역 스킬 대미지에는 한 번에 녹아내리지 않지만 일반 공격이나 단일 대상 스킬에는 한 번에 쓰러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렐리아가 요릭의 카운터 중 하나로 분류된다. 이렐리아의 Q스킬 '칼날 쇄도'는 단일 대상 스킬이자 일반 공격 판정이기 때문에 요릭의 안개 망령을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다. 또한, 그러면서 패시브 '아이오니아의 열정' 스택을 빠르게 쌓을 수 있기도 하다. 만약, 요릭의 W스킬 '망자의 진'에 갇혀도 칼날 쇄도로 단숨에 빠져나올 수도 있다. 요릭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받아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렐리아가 요릭의 카운터로 분류되기 때문에 담원 게이밍 입장에서는 '플레임' 이호종의 이렐리아가 꾸준히 '서밋' 박우태의 요릭을 압박해야 했다. 라인전이 끝난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렐리아는 1세트 내내 단 한 번도 요릭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말아야 하는 임무를 받은 셈이었다. 그래야 요릭의 존재 이유가 삭제되고 이렐리아의 강함이 끝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캐니언' 김건부의 리븐 선택도 상체 쪽에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이렐리아와 리븐을 조합하면 상대의 요릭-올라프 조합과의 힘싸움에서도 밀리지 않고 상황에 따라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리븐은 벽을 넘어다닐 수 있는데 올라프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도 사소하지만 중요한 포인트였다. 요약하자면, 탑 라인 쪽에서 리븐은 이렐리아와 함께 올라프와 요릭에게 압박을 가하기 용이한 챔피언이었다.


실제로 담원 게이밍은 경기 내내 탑 라인 쪽에만 집중했다. '캐니언' 리븐의 초반 정글 동선만 봐도 단숨에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리븐은 자신의 레드 버프를 시작으로 돌거북 캠프에 이어 위쪽 바위게를 사냥했다. 그런 뒤에 상대 블루 버프 지역으로 들어가 올라프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를 통해 '플레임'의 이렐리아는 요릭과의 라인전 구도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초반부터 요릭과의 CS 격차를 크게 벌리는 데 성공했다.


샌드박스의 대처
반대쪽 집중에 이은 탐 켄치 밀착 수비


샌드박스 게이밍의 대처는 '우회 전략'이었다. 담원 게이밍이 탑 라인 쪽에서 자꾸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쪽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작부터 아래쪽 라인에만 신경썼다. '서밋'의 요릭은 최대한 안전하게 CS를 받아먹으면서 죽지 않는 플레이를 행했다.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이렐리아와 딜교환을 시도했다. 그러는 사이에 애쉬-브라움 조합이었던 '고스트' 장용준과 '조커' 조재읍이 상대 이즈리얼-탐 켄치 바텀 조합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았다.


'온플릭' 김장겸의 올라프도 탑 라인 쪽에는 발도 잘 들이지 않았다. 미드 라인이 반반 정도의 양상, 바텀 라인에서는 아군이 주도권을 잡자 올라프도 그 쪽으로만 돌아다녔다. 마치 '캐니언'과 정글 캠프를 남북으로 갈라 사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올라프 정글의 초반 핵심 포인트인 '깔끔하게 첫 드래곤 사냥하기'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어찌 보면 넓은 의미의 '대각선의 법칙'을 따랐다고 할 수 있겠다.

계속 양 팀의 선택이 교차했다. 샌드박스 게이밍이 바텀 주도권을 활용해 1차 포탑을 파괴하자 담원 게이밍은 협곡의 전령을 풀어 상대 탑 1차 포탑을 파괴했다.

여기서 담원 게이밍은 색다른 선택을 했다. 보통 상대에게 바텀 1차 포탑을 내준 대신 상대 탑 1차 포탑을 파괴하면 탑 라이너와 바텀 듀오가 자리를 바꾸게 마련이다. 하지만 '플레임'의 이렐리아는 그대로 탑 라인을 지켰다. 처음부터 상대 요릭을 계속 마주하면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이렐리아가 맡았던 특명이었으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또한, 자신들이 상체 쪽에 집중했던 만큼 상대는 하체에 힘을 실었던 것을 담원 게이밍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탑 라인 쪽 시야 주도권을 잡았던 것처럼 샌드박스 게이밍은 바텀 라인 쪽에서 그랬을 터. 온전한 1:1 혹은 정글러와의 2:2 구도가 계속 이어지길 원했던 이렐리아 입장에서는 상대의 영토나 나름 없었던 바텀 쪽에서 요릭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 요릭도 계속 탑 라인에 자리잡았으니 담원 게이밍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1세트 중에 가장 큰 사고는 이맘때쯤 발생했다. 샌드박스 게이밍이 상대 시야 공백을 활용해 탑 라인 쪽 삼거리 수풀 속에 올라프를 복병으로 급파했다. 이를 확인하지 못한 채 마음 놓고 라인을 정리하던 이렐리아는 올라프와 요릭의 먹잇감이 됐다. 이렐리아는 순간이동으로 합류하는 '쇼메이커' 허수의 사일러스를 기다리다가 점멸까지 쓴 채 전사했고 사일러스도 요릭에게 킬 포인트를 내줬다.

▲ 이때 '서밋'의 요릭은 2킬을 독식한다.

이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생각보다 컸다. 담원 게이밍은 1세트 내내 탑 라인 쪽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만큼 이렐리아의 어깨가 무거웠다는 뜻이다. 샌드박스 게이밍이 바텀 라인 쪽에서 원하는 모든 걸 얻어갔기 때문에 그쪽 균형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그래서 이렐리아가 계속 요릭을 압박하는 그림이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올라프와 요릭의 급습으로 이렐리아는 쓰러졌고 요릭이 2킬을 독식했다. 이 한 방으로 담원 게이밍이 1세트 밴픽 과정부터 그렸던 그림이 찢어졌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완전 반대 양상이 펼쳐졌다. 점멸까지 쓰고 죽었던 이렐리아는 쉽사리 스플릿 구도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상대 정글러 위치가 노출되지 않을 때 앞으로 나가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 반대로 2킬을 기록하며 성장에 박차를 가했던 요릭은 궁극기 '안개 마녀'까지 대동한 채 맵 전역을 활보했다.

이미 균형이 깨졌던 본대 쪽에서는 당연히 샌드박스 게이밍이 담원 게이밍을 압도했다. '도브' 김재연의 르블랑과 '고스트'의 애쉬는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충실히 했고 대미지도 많이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건 '조커'의 브라움이었다.

사실 담원 게이밍 입장에서는 탑 라인에서 발생했던 사고가 뼈아팠지만 어느 정도 복구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베릴' 조건희 탐 켄치의 존재 때문이다. 탐 켄치는 궁극기 '심연의 통로'로 맵을 넓게 쓸 수 있는 강점을 지닌 챔피언이다. 무게추가 기운 탑 라이너 간 구도에 영향력을 행사해 다시 이렐리아가 편한 쪽으로 방향을 틀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1세트에 강승현 해설위원이 강조했듯이 '조커'의 브라움이 상대 탐 켄치에 대한 집중 수비를 잘 해내 이러한 변수 플레이를 막았다. 빡빡한 시야 장악을 통해 팀원들에게 탐 켄치의 위치를 계속 알려주는 역할을 1세트가 끝날 때까지 수행했다. 이 모든 것이 결합된 결과, 담원 게이밍은 힘없이 무너졌고 샌드박스 게이밍이 상대 전략에 대한 맞춤 대처에 성공하며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탑 라이너 간 상성 우위를 계획했던 담원 게이밍의 1세트 밴픽은 실패로 끝났다. 이렐리아가 요릭을 상대로 쥐고 있었던 주도권은 사고 한 방으로 상대에게 넘어가 다시 넘어오지 않았다. 이렐리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초반부터 많은 것을 양보했던 리븐과 이즈리얼-탐 켄치도 이렐리아가 힘을 잃자 같이 무너졌다. 담원 게이밍이 밴픽 단계에서 조합을 갖출 때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던 최악의 구도가 1세트에 그대로 재현된 셈이었다. 그만큼 샌드박스 게이밍의 좋은 대처가 돋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