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흠 대표는 게임사 대표라는 직책이 아직 어색하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럴만 한 것이, 시작은 게임 업계였으나, 실질적인 근무 기간은 애니메이션 업계 쪽이 더 길었다. 처음에 패키지 게임 '야화' 제작에 모델링 인턴으로 시작했고, 그 뒤로는 10여 년의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조금씩 커리어를 쌓았다. 이후 게임 업계로 돌아와 지금은 판교의 자그마한 게임사 투락(toOrock)의 대표로 있다.

투락의 사내 비전은 조금 독특하다. 게임 이전에 IP의 완성도를 먼저 본다. 개성있는 IP를 만든 후, 세계관 및 아트를 입혀 여러가지 콘텐츠를 만든다. 게임은 그 결과물 중 하나일 뿐, 메인은 아니다. 굳이 스스로 '게임사'라 부르지도 않았다. 실제 투락의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듣고 나니, 게임사보다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제작사에 더 어울렸다.

"이런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냥 게임 내고 '자 끝났으니까, 다음 게임' 이러는 게 아니라, IP가 살아있는 콘텐츠라고 할까요. 한 번 게임 내고 끝나는 게 아닌, 생명력을 가진 IP를 먼저 만들기로 한 거죠."

회사는 대표 성격을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실제 투락 멤버들 역시 연경흠 대표 못지 않게 멀티플레이어 성격이 강했다. 2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지만, 대부분의 멤버가 자신의 전공 분야 외 다른 직군의 업무도 이해하고 있었다. 시니어급 이상 경력자가 대부분이라 척 하면 통한다고 연경흠 대표는 덧붙였다.

"업무적 능력 외에는 어떤 걸 보나요? 조직이 크지는 않다보니 개개인의 성격이나 성향 이런 게 특히 중요할 것 같은데요."

"기획 쪽에서는 게임쟁이라고 해야 하나... 게임에 정말 '미친'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그런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요.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 몇 개 막 파는 사람 말고, 정말 다양한 게임을 가리지 않고 하는 사람이 저희 입장에선 좋죠. 그리고 아티스트는 뭐랄까... '똘끼'라고 해야 하나? 범상치 않은 사람? 생각이 좀 남다른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 전에 일단 저희 IP를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요."

"그게 말로 들으면 참 간단한데... 조건에 맞는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저희도 그럴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게임 만들 때 큰 욕심 안 부리고 작은 게임 위주로 만들려 하는 겁니다. 그외 다른 프로젝트들은 협력사들 도움을 받고 있고요. 저희가 되게 여러가지 하는 것 같은데, 실제 직접 하는 게 생각만큼 많은 건 아니에요"



현재 투락은 2개의 IP를 제작 중이다. '마키나이츠(Machi Knights)'는 캐주얼 그래픽의 스팀펑크 세계관을 채용했고, '오디티걸즈(ODDITYGIRLs)'는 EDM에 푹 빠진 3명의 소녀가 주인공이다. 국내 게임시장 기준으로 본다면, 둘다 대중적인 소재는 아니다. 아트 스타일도 아시아 문화권보다는 서구권에 가깝다.

마키나이츠로는 총 2종의 게임이 나왔다. 첫 출시작은 동명의 모바일 전략 SNG로, 2013년부터 약 3년 간 개발했다. 완전히 밑바닥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이다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오래 걸렸죠. SNG가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리고 그 때는 게임이랑 IP를 같이 만들어야 하잖아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겪은 고생의 보상이라고 할까. 그 다음 작품인 '마키나이츠: 블러드 바고스'는 전체 개발 기간이 8개월 정도로 비교적 짧았다. 닌텐도 스위치 전용이기에 개발력을 한 데 집중할 수 있었고, 아트나 세계관을 전작 개발 당시 미리 짜놓았던 게 큰 도움이 됐다.

▲ '마키나이츠: 블러드 바고스' 이미지 및 실제 제작된 모형들


핵앤슬래쉬 액션 RPG 장르인 '마키나이츠: 블러드 바고스'는 닌텐도 스위치로만 출시됐다. 모바일과 거치형 콘솔의 중간 볼륨 정도 되는 게임 개발을 목적으로 뒀고, 스위치가 그런 포지션에 있다는 걸 확인한 후 개발에 착수했다. 현재 일본 닌텐도 e샵에 선출시된 상태로, 5월 9일부터 한국 닌텐도 e샵에서도 다운로드 코드 방식으로 판매된다. 물론, 한국어화는 예전부터 완료된 상태다.

"현지 유저들 반응이요? 재밌대요. 근데 게임이 좀 짧대요. 15,000원 정도 가격이라 뭐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짧은 건 짧은 거라고(웃음). 저희도 알고 있는 부분이고 당연히 개선해야죠. 실제로 1.04 업데이트 때 그쪽 관련해서 콘텐츠를 좀 넣었어요."

"이전 버전은 전체 플레이 타임이 어느 정도였어요?"

"스테이지가 총 60개고, 난이도는 4가지예요. 사내에서 게임 제일 잘 하는 개발자가 하면 5~6시간 정도 안에 깨더라고요. 물론, 저같이 게임 잘 못하는 사람은 20시간 줘도 못 깨고요. 일반적인 유저라면 10~12시간 정도면 다 깰 거예요."

"그럼 이번에 추가한 게 엔드 콘텐츠 같은 건가요?"

"그렇죠. 일단 난이도 모드가 들어갔고요. 지금 추가 모드 기획도 두 개 들어갔는데, 그중 하나는 일단 확정이에요.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의 디펜스 유즈맵과 비슷한 방식이라고 할까. 죽을 때까지 하는 아케이드 모드이면서 디펜스 방식인거죠. 두번째 모드는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적 유닛을 갖고 전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기획 중이에요. 물론, 이건 규모가 커서 아직은 못 만들고요. 어차피 두가지 콘텐츠를 동시에 개발할 수 있는 인력이 안 되다보니, 앞에 거 먼저 선보이고나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핵앤슬래쉬 게임에선 플레이어블 캐릭터 가짓수가 콘텐츠 양과 마찬가지다. 현재 '마키나이츠: 블러드 바고스'에는 총 3종의 캐릭터가 있다. 각 캐릭터 별로 사용 가능한 무기가 3종이므로, 총 전투 유형은 9가지인 셈이다. 이후 업데이트를 통해 신규 캐릭터 '테슬라'와 '보우'도 등장할 예정이다.

▲ '마키나이츠: 블러드 바고스' 공식 트레일러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시스템은 어떤가요', '콘텐츠는 얼마나 독창적인가요'라고 물었겠지만, 투락은 조금 다른 질문지가 필요했다. 세계관, 특히 아트워크에 먼저 눈이 갔다. 캐주얼한 스팀펑크 분위기의 '마키나이츠'는 이미 캐릭터 디자인만으로 충분한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국내에 머물지 않고, 글로벌 시장을 바라보고... 뭐 이런 멋들어진 대답을 예상했다. 한데, 연경흠 대표의 답변이 조금 의외다.

"그냥 저희는 디자인을 이렇게밖에 못 해요(웃음)."

"아, 전 처음부터 외국 시장 목표로 한 줄 알았어요."

"특정 시장을 목표로 시작한 건 아니에요. 근데 저희가 그림 그리면 항상 결과물이 이런 스타일이에요. 지금 저랑 같이 일하고 있는 진상용 이사님이나 신창환 감독님 스타일도 국내서 대중적인 느낌은 아니고요. 그렇다고 아, 망했다, 한국에선 안 먹히겠네 이러고 절망한 건 아니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죠.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판타지 세계관에 MMORPG가 강세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그쪽 게임 안 만드니까 자연스럽게 북미나 유럽 시장을 보게 되더라고요. 마침 거기는 콘솔 시장 규모도 크고, 액션 게임이나 전략 게임에 대한 인지도 역시 높고."

물론, 그렇다고 투락이 국내 게임 시장을 아예 배제했다는 말은 아니다. 엄연히 한국 기업인 만큼, 국내 게이머들에게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연경흠 대표의 생각이다. 실제로 국내 한정 판매에 딸린 머천다이징 굿즈도 한국 유저들이 대상이다.




투락은 '마키나이츠: 블러드 바고스'의 콘텐츠 업데이트 작업이 마무리되는대로 플랫폼 확장에 나선다. PS4 버전이 6월 중으로 출시 예정이며, 이후 XBOX와 PC, 그리고 모바일 출시를 목표로 뒀다.

IP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발사답게 이후 차기작에 대한 그림도 그려놓은 상태다. "현재 '마키나이츠' 세계관과 유닛들을 소재로 백병전을 하는 미니어처 보드 게임을 한창 개발 중이에요. 아직은 유닛 숫자가 적으니 소규모 단위의 전투밖에 안 되지만, 이후 IP가 더 정립되면 대단위 전투도 구현하고 싶어요."

보드 게임은 PC, 콘솔 게임 개발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일단 실물 미니어처 생산 및 유통 경로를 확보해야 하며, 보드 게임만을 위한 룰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의문에 연경흠 대표는 '국내 피규어 전문 회사와 함께 하고 있기에 생산이나 유통에서 큰 문제는 없다'고 답했다. 다만, 룰 북을 어떤 형태로 풀건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실제 룰 북을 생산할지, 아니면 앱 형태로 배포할지 내부적으로 논의 중입니다. '마키나이츠: 백병전(가칭)'은 내년 킥스타터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이제 '오디티걸즈'도 얘기해보고 싶어요. 이것도 아트가 참 독특한데요."

"사실 이건 처음에 게임 만들 생각이 없었어요. 유튜브나 SNS 기반 애니메이션이 목표였죠. 워낙 캐주얼한 IP이다보니 일단 게이머 외 일반 대중들도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이미지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게임도 같이 만들게 됐죠. 클리커 기반 방치형 모바일 게임인데, 6월 말에 국내 런칭할 계획이에요."

오디티걸즈 IP는 애니메이션을 포함해 총 3개의 콘텐츠로 출시된다. 연경흠 대표가 설명한 방치형 모바일 게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오디티걸즈 버추얼 월드'라는 이름의 콘솔 액션 게임이다. '마키나이츠: 블러드 바고스'와 마찬가지로 핵앤슬래쉬 액션 기반이지만, RPG는 아니다. 블러드 바고스가 레벨과 스탯을 비롯한 캐릭터 성장 요소가 강조된 게임이라면, 오디티걸즈 버추얼 월드는 상쾌한 스킬 액션 그 자체에 개발력을 쏟았다.

"오디티걸즈 버추얼 월드는 내부적으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어요. 퍼블리셔 의견을 따라 스위치에 먼저 출시될 가능성도 있는데, 아직 정확하지는 않아요."

"그럼 스위치 게임을 벌써 두 개나 내는 건데, 패키지로 출시할 생각은 없으세요?"

"안 그래도 왜 패키지 안 내냐는 피드백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저희 게임이 지금 15,000원~ 16,000원인데 패키지 유통 마진 내려면 가격을 최소 25,000원 정도는 받아야 해요. 원가를 그렇게 올릴 순 없죠. 그래서 소소하게 이벤트 개념으로 합본 기획하고 있어요. 킥스타터 통해 에이전시도 연결된 상황이라 이건 잘 될 것 같아요."

한편, 오디티걸즈 애니메이션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라바'와 유사한 스팟 애니메이션 형태로, 오는 9월부터 SNS나 유튜브 등지에 선보여질 전망이다. 지원사업 규모는 30편 제작 분량이지만, 내부적으로 100편까지 구상하고 있고, 내년 상반기 완성이 목표다.

"사실 전 애니메이션 감독이 꿈이었어요. 장편 기획도 몇편 썼고, 준비도 많이 했었죠. 그런데 애니 쪽엔 제가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재능의 한계라고 할까... 노력만으론 도저히 넘을 수 없어 보였어요. 고심하다 게임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나마 제가 해오던 것과 비슷한 게 스토리 기반의 콘솔 게임이었어요. 하나의 완성된 IP를 보여줄 수 있잖아요. 그거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온거죠. 물론, 저 혼자만으론 당연히 안 됐을 거예요. 신 감독님, 진 이사님 같이 능력있는 파트너들이 함께니 가능했던거지."

"오디티걸즈는 누가 디자인한 거예요?"

"진상용 이사님 작품이에요. 북미, 유럽 퍼블리셔를 만나든 아시아권 퍼블리셔 만나든 그 부분은 다 인정하더라고요. 디자인 독특하다고. 아시아에서 나올 법한 디자인은 아니라고. 저희 입장에서야 고맙죠. 그러니 이제 게임이랑 애니메이션 잘 만들어 봐야죠(웃음)."

▲ '오디티걸즈' 닌텐도 스위치 버전 트레일러

▲ '오디티걸즈' 모바일 버전 트레일러



오디티걸즈는 여성 유저들을 목표로 한 작품이다. 쉽게 성별을 가능할 수 없는 세 캐릭터. 연경흠 대표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모두 '여성'이란다.

"이름은 테스, 토스, 테론인데 모두 여자아이들이에요. 각자 성격이나 생활방식이 다르지만 하나 공통점이 있어요. 다들 EDM을 미친듯이 좋아하죠. EDM 클럽 만들어서 운영하는 게 얘네들 꿈이에요. 뭔가 삘 받으면 미친듯 춤추고... 흥이 넘치는 애들이죠."

"움직이는 거 되게 귀엽네요. 그런데 게임 만들고 애니메이션 만들려면 테스, 토스, 테론만 갖고는 부족할 것 같은데..."

"이미 조연급 캐릭터 많이 만들어놨어요. 지금 한 40명 정도 되는데, 연말까지 100명 채우는 게 목표예요. 진 이사님과 신 감독님 성격이 워낙 개구장이 같아서... 이런 캐릭터들 만드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에요."

▲ '오디티걸즈' 애니메이션 + Figure 영상


프레젠테이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회사는 아티스트 비중이 정말 크구나.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저나 신 감독님이나 아트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진 이사님도 영상 쪽 오래 계셨다보니 네러티브나 아트에 관심이 많으시고요."

"디자인 작업할 때 주로 어디서 영감을 얻나요?"

"제가 레퍼런스는 그냥 러프하게 줘요. 그걸 이리 주무르고 저리 주물러서 나온 결과물이 이런 거예요. 특히, 신 감독님이 캐릭터 디자인할 때 동물과 연관시키는 걸 좋아하시는데, 그 결과물이 많이 반영됐죠. 아, 자료 조사할 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계 도면들을 많이 참고했어요. 그걸 그대로 베끼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힌트를 얻은 거죠."

외국에서 살다 온 직원이 없냐고도 물었다. 외국에서 몇 년 살아보지 않고서야 나오기 어려운 캐릭터 디자인이라 생각했으니까. 연경흠 대표의 대답은 이번에도 예상을 빗나갔다.

"그런 질문 많이 들었는데, 저희 다 한국에서만 살았어요. 저나 디자이너들이나 그림 그리면 이런 것만 나와요. 그냥 그 사람 성향 같아요. 키덜트 문화 좋아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제 2 판교 테크노밸리 건물 안 작은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투락이지만, 그들의 미래는 생각보다 원대했다. 시간과 행운이 그들이 원하는대로 따라준다면, 조금 더 큰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기자만의 착각이었을까. 마지막으로 그들의 꿈을 물었다.

"일단 지금은 '마키나이츠: 블러드 바고스' 업데이트가 최우선이에요. 이거 잘 마무리되면, 지금 진행중인 프로젝트 모두 성공할 수 있게 또 달려야죠."

"그렇게 하나 하나 열심히 하다 보면 제가 좋아하는 '너티 독' 같은, 영화 같은 게임 언젠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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