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 스릴러의 옷을 입은 러브크래프트 공식


이것들을 기억한다고 말하면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말하지 않아도 나잇대를 대충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최근 배우 샤론 스톤의 자서전으로 논란이 된 영화 '원초적 본능'이나 '위험한 정사' 등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는 에로틱 스릴러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었습니다.

TV에서 심야 시간에 틀어준 이들 영화를 볼 때면 배우들이 몸을 섞는 매혹적인 장면들 때문이었는지,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징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몰래 이런 걸 본다는 긴장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조여온 심장은 미칠 듯이 뛰곤 했죠.

게임도 에로틱 요소와 스릴러. 이 두 특징을 엮으려는 움직임이 여럿 있었습니다. 결과는 그리 신통하지 않았지만요. 대개 어설픈 노출에 집중해 게임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플레이 경험을 전달했죠. 극단적인 폭력과 성적 요소를 강조한 '아고니'가 그랬고 오늘 소개할 무비 게임즈 루나리움의 전작, '러스트 포 다크니스'도 만족스러울 재미를 주진 못했습니다.

사실 폴리곤 덩어리가 몸을 맞대고 있는 것만을 위해 몇만 원을 투자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러스트 프롬 비욘드'가 주는 재미가 더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스팀 평가도 매우 긍정적으로 올라왔고 메타 크리틱 점수도 65점으로 빨간 딱지를 면했죠. 과연 무엇이 게임으로서의 재미를 조금이라도 전하도록 만든 걸까요?


* 성적인 내용과 혐오감을 불러올 수 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명: 러스트 프롬 비욘드(Lust from Beyond)
장르: 1인칭 액션 / 어드벤처
출시일 : 2021. 3. 12.
개발 : 무비 게임즈 루나리움
배급 : 무비 게임즈 S.A.
플랫폼: PC(Steam)

관련 링크: '러스트 프롬 비욘드' 오픈크리틱 페이지


섹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게임의 타이틀이기도 한 LUST. 즉 성적 욕망입니다. 뭐 사실 이걸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이미 프롤로그 영상이나 사전 게임 소개 이미지 등을 통해 그 적나라함을 적나라하게(적나라하게가 1+1이니 트리플로 적나라하다는 뜻입니다) 드러내고 있죠.


물론 게임에 들어서자마자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검열 모드를 설정할지 물어보는데 이때 이걸 켜면 문제가 있을 만한 장면은 모두 모자이크로 처리됩니다. 그런데 이 검열모드가 후방주의를 완전히 해결해준다기보다는 불편함을 더하는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문제랄까요.

일부 상황에서는 검열 모드를 켰을 때 내용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자이크가 화면을 덮습니다. 이게 과하게 화면을 가리도록 만들어졌기에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검열 모드에서는 정말 가려야 할 부분만 딱 모자이크 처리가 되죠.

그런데 왜 화면을 이렇게 많이 가리냐고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게임 내에서 생각지도 못한 많은 부분에 성적 요소가 담겨 표현됐기 때문입니다.

▲ 모자이크만으로 음란해지는 손전등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여체나 남근을 기괴하게 상징하는 동상 따위부터 고스란히 드러나는 신체 부위들. 여기에 성적 묘사는 행위 묘사를 아무런 제약 없이 담아내고 한 발짝 더 나아가 BDSM 요소글 담으며 충격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성인 등급에 미터기가 있다면 등급 표시눈금은 아마 천장을 뚫고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갔을 겁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게임을 플레이하며 그냥 지나쳤을 부분도 모자이크 때문에 머릿속에서 괜히 한 번 더 해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징적인 요소들의 음란함을 생각하며 두 볼이 절로 뜨거워지는 걸 깨닫게 되죠. 이게 모자이크가 있으면 더 야해 보인다는 그런 거랄까요? 모자이크가 없어도 충분히 그렇지만요.

아직은 군데군데 애니메이션이나 캐릭터의 디테일에 어설픈 부분이 느껴지지만, 기본적으로 높은 해상도와 광원 효과를 지원하며 나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래픽 역시 이런 묘사에 힘을 실어주는 부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만듦새가 훌륭한 편이다 보니 와 닿는 성적 흥분도도 높아질 수밖에 없겠죠.

물론 이런 요소들을 방해하는 게 없었다면 정말 야한 것밖에 남지 않은 게임이었을 겁니다.




섹스와 스릴러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적 묘사에도 우리가 마냥 흥분하지만은 못하는 건 긴장감을 더하는 게임의 플롯과 그 이상의 기괴함에 이유가 있습니다.

'러스트 프롬 비욘드'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 나갑니다. 하나는 주인공 빅터가 이교도 스칼렛 로지(Scarlet Lodge)의 위협을 받는 현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꿈인 줄 알았던 이세계, 루스트 가아(Lusst'ghaa)에서의 체험으로 나뉩니다.

▲ 광기가 뿌리내린 블랙무어

중반까지는 그 정체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스칼렛 로지는 이미 도시 하나를 점거하고 그들의 야욕을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경찰이나 시장까지 장악한 상태다 보니 공권력은 그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믿지 못할 존재로 그려집니다. 가장 믿을 수 있어야 할 이들까지 플레이어를 옥죄여 오는 상황이 그려지고 있는 셈이죠.

여기에 스칼렛 로지의 교단원들은 광신도라는 표현만으로는 쉽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믿음에 취해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무한으로 채워주는 욕망과 이들의 목표에 반하는 이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무한으로 즐기는 게 좋은 건 갈비뿐이라는 옛 현인들의 말이 떠오를 정도로요.

신에게 바칠 인간을 별 모양으로 귀엽게 잘라 걸어놓는가 하면 거대한 곤봉을 들고 주인공 빅터를 쫓아오기도 하는데요. 특히 스칼렛 로지의 정체가 본격적으로 밝혀지는 블랙무어 호텔에서 이교도들이 뒤쫓는 장면은 긴장감이 가히 최고 단계까지 치솟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 겨우 따돌린 후에야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을 정도인 이교도원

호텔 옥상 건물 위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빅터. 여기에 몸을 반쯤 드러낸 세디스틱한 복장에 제 물건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곤봉을 휘두르며 쫓아오는 스칼렛 로지 교도원들. 지금쯤이면 괜찮겠지 싶을 때 옥상 문을 벌컥 열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이들의 모습은 퍽 공포스럽습니다.

'러스트 프롬 비욘드'는 이렇게 플레이의 공포감을 한창 끌어올릴 때는 플레이어에게 별다른 대응책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훅훅 소리를 내며 눈에 불을 켠 그들의 시야 밖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죠. 대항할 수 없는 공포. 기본적인 호러-스릴러의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람들에게 엄청난 수준의 성적 고문을 가하는 이교도들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구간. 여기서 '만약 그들에게 잡혔다면...' 이라는 가정이라도 한순간 아랫도리부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이벤트긴 하지만 쓰러진 빅터에게 교단원이 정말 그런 위해를 가하는 순간을 플레이어가 1인칭 시점으로, 마치 내가 당하는 듯 보여주기까지 하니 그저 좀비나 귀신 따위가 주는 죽음의 공포와는 결이 다른 체험이긴 합니다.

▲ 1인칭 시점으로 플레이어를 고문하려하는 교단원의 모습을 꽤 공포스럽게 묘사합니다

사실 중반부를 넘어서면 총을 구하고, 시잉원으로서 숨겨뒀던 힘이 트인 다음에야 어느 정도 적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죠. 이때는 게임이 스릴러에서 다음 단계로 이동한 뒤라 그 쓰임새가 다르긴 하지만요.

그럼 스릴러, 그다음 단계는 어디로 갈까요?



섹스와 스릴러와 러브크래프트

포탈, 혹은 특수한 상황에서 오갈 수 있는 루스트 가아는 '기괴하다'라는 표현이 너무 정숙하다 싶을 정도로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개발자가 H.R. 기거나 일찍이 초현실주의적 작품으로 이름을 떨쳤던 벡신스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이야기할 정도니 어느 정도 설명이 되겠죠.

바로 와 닿지 않는다면 기거가 참여한 '에이리언' 시리즈나 벡신스키의 영향을 잔뜩 받았다고 평가받는 만화 '베르세르크'를 떠올리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겁니다. 끈적끈적하면서도 에이리언 머리통을 보듯 매끈한 배경과 사물은 그 위를 걷고 만지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 경험을 줍니다.


▲ 루스트 가아의 모습은 기괴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스트 가아의 경험은 이 징그러운 세계 위에 펼쳐지는 러브크래프트식 문법으로 더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현실이 집단으로 무리를 이뤄 나약한 개인으로서의 인간 '빅터'를 괴롭힌다면 이세계 루스트 가아는 감히 범접할 수조자 없는 절대자, 혹은 신 이상의 존재가 미약한 '빅터'를 언제든 없애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죠.

나 자신이 너무나 하찮다 보니 감히 대적할 힘조차 낼 수 없죠. 여기에 플레이어를 제외한 스칼렛 로지나 그에 대항해 플레이어를 이끄는 컬트 오브 엑스터시(Cult of Ecstasy) 모두 그 세계의 뜻에 움직이는 이들입니다. 그 어느 곳에도 쉽게 동화하지 못하는 동떨어진 인물로서의 빅터의 고독감과 무기력함을 플레이어가 함께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신적 존재와 그를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대립이죠.

물론 절대자 입장에서는 인간이 개미나 미생물 따위를 대하듯 하니 대립이라는 표현이 성립할 수조차 없겠지만요.

여기에 '네크로노미콘'이라는 절대 마도서를 떠올리듯 루스트 가아를 연구한 '우주의 본질'이라는 책이 게임과 이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성질을 담아냅니다. 러브크래프트 사후 정립된 크툴루 신화의 모습을 곳곳에서 살필 수 있는 거죠.

▲ 게임 해석에 키가 되는 책. 마치 크툴루 신화의 네크로노미콘과 같습니다

게임으로 봐도 크툴루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크툴루 신화를 기반으로 한 게임 중에서는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콜 오브 크툴루: 다크 코너 오브 디 어스'의 게임 플레이를 여럿 빼다 박았죠.

발이 빠지는 음습한 세계관에 누구도 플레이어의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세상. 그리고 무기가 존재하지만, 사실 그다지 큰 힘은 내지 못하고 괴생명체가 주는 공포는 주인공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러스트 프롬 비욘드' 역시 공포에 정신력 수치가 떨어지면 버튼 입력도 제멋대로 이루어지고 화면도 울렁거리죠. 게임이 주인공 빅터의 심정을 플레이어게 억지로 넘겨 체험하도록 하는 셈입니다.

결과가 어쨌든 끝끝내 이런 극악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진실에 다가가는 모습도 '콜 오브 크툴루: 다크 코너 오브 디 어스'가 보여줬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비록 크툴루 신화를 직접 다룬 건 아니지만, 최근 '콜 오브 크툴루'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여느 게임보다 심연의 공포를 전하는 건 '러스트 프롬 비욘드'가 한 발 더 앞서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섹스와 스릴러와 러브크래프트, 그리고 섹스

이야기는 다시 돌아 성욕. 그리고 그 욕망의 충족으로 돌아옵니다.

루스트 가아는 인간들의 언어로 황홀경의 땅, Land of Ecstasy로 불립니다. 욕망의 신 아우브아브라크 아래 무한한 오르가슴을 제공하는 구조물로 멈추지 않는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이죠. 결국, 괴이한 모습으로 이 땅의 진리를 받아들인 이들과의 성적 교감이 플레이어의 시점에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기괴한 '무언가'와의 성행위 묘사와 쾌감에 몸을 맡긴 모습은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닙니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남성과 여성의 신체. 이를 그대로 담아낸 이미지와 누드니 성인이니 하는 스팀 태그를 보고 게임을 즐긴다면 기대했던 흥분감은 절로 식어버릴 수밖에 없죠.


게임은 그 어떤 작품보다 강한 성적 만족, 쾌감, 섹스를 묘사하지만, 결국 이처럼 과도한 성적 콘텐츠가 주는 불편함을 오히려 느끼게 합니다. 나아가 이런 불편함을 느끼도록 도모한 게임 디자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허술하고, 너무나 짧았던 전작을 생각해 보면 이번 작품에서 개발진의 눈이 뜨인 것인지. 아니면 전작에서는 원래 의도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지만요.




그간 비슷한 장르의 게임들이 워낙 수준 미달의 만듦새를 보여줬기에 '러스트 프롬 비욘드'가 마치 제작 의도를 그럴듯하게 전한 완벽한 작품쯤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번 작품만 똑 떼어놓고 보면 캐릭터 애니메이션은 나무토막이 움직이듯 경직됐고 오브젝트의 구분이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퍼즐을 풀어나가는 것도 영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길 찾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눈에 보이는 문은 모두 눌러보고 구멍이란 구멍엔 모조리 머리를 들이밀어야 했죠. 자유로운 어드벤처 형태로 보이지만, 2개의 결말이 게임 종반 즈음에야 결정되는 선형 구조를 취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모션 블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겪는 멀미 현상은 근래 작품 중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심합니다. '파블로프'나 '하프라이프: 알릭스' 같은 VR 슈팅 게임도 울렁거림 없이 몇 시간씩 해낼 정도인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3D 멀미라는 걸 느꼈을 수준이죠. 직역에 가까운 한국어화로 그 뜻을 겨우 알 수 있는 점도 영 아쉬운 부분이고요.

하지만 '러스트 프롬 비욘드'는 한 시간 남짓이었던 전작들에서는 보여줄 수 없었던 숨겨진 흐름까지 꼼꼼하게 짚어내며 단순히 성적 묘사가 게임 전부가 아니란 걸 제대로 보여주긴 했습니다. 전작 경험 없이 즐겨도 충분히 흐름을 쫓아갈 수 있고 또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으니 자연스레 전작도 해보고 싶어지고요.


사실 이번 작품이 본편이고 '전작들이 프리퀄'이라고 생각하면 나름 납득가는 구성이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아니었지만요.

어쨌든 게임에서 뭘 원하든, 생각하는 모양새와는 많이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