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20세기 초 영화 산업이 막 태동했을 때만 해도 누구도 영화를 예술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당시 예술은 문학이나 미술 작품이지 자본 집약적으로 제작된 영화는 어디까지나 상업적인 상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작품들이 영화로 나오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영화는 종합 예술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게임은 어떨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단순한 오락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체이싱 라이트'를 개발한 비트겐의 배상현 대표는 달랐다. 이러한 질문에 그는 거침없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에게 게임은 단순한 오락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더 없이 인디스러운 정신이 통한 것일까. '체이싱 라이트'는 세계 최대의 인디 게임 행사인 IGF(Independent Games Festival)에서 혁신상이랄 수 있는 누오보 부문 후보에 한국 최초로 선정되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기존의 인디 게임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비트겐의 배상현 대표다. 그는 왜 게임을 예술 작품으로 선택했을까. 그리고 그의 다음 목표는 뭘지 이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봤다.

▲ 비트겐 배상현 대표


Q. 먼저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비트겐의 대표이자 '체이싱 라이트'를 만든 배상현이다. 비트겐은 감독으로서 내 작품들을 만들기 위해 설립한 회사다. 그래서 회사로서의 성격도 일반적인 게임사와는 다르다. 직원을 고용해서 정직원으로 함께하는 그런 게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제작사에 가까운 구조다. 프로젝트 단위로 그때그때 팀을 꾸리는 형태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Q. 그때그때 팀원을 꾸린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현재는 '체이싱 라이트'를 개발한 팀원 모두 떠나서 혼자 남은 상태다. 일단 '체이싱 라이트'를 만들긴 했는데 화제성과는 별개로 이렇다 할 수익이 나지 않아서 다음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워낙 힘든 여건에서 개발해서 그런지 개발이 끝나자 팀원 모두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억지로 붙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현재는 혼자서 여러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Q. 원래는 어떤 걸 하던 회사인가.

원래는 미디어 아트 쪽을 목표로 설립한 회사다. 게임은 내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적절한 매체를 찾으면서 드로잉, 사진, 그림, 영상 작업들을 하다가 우연히 찾은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으로써 게임을 만든 거라고 봐주길 바란다.


Q. 비트겐의 첫 작품인 '체이싱 라이트'는 참 특이한 게임인 것 같다. 기존의 게임이 가진 틀에서 벗어난 그런 게임이던데, 본인은 어떤 게임이라고 정의하는가.

아무래도 어떤 게임이냐고 설명할 때 보통 장르로 설명하는데, 나도 '체이싱 라이트'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스팀에 게임을 등록할 때 장르를 선택해야 하는데 고민했을 정도다.

일단은 어드벤처라고 등록했는데 굳이 말하자면 '체이싱 라이트'는 하나의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게임이란 게 맞는 것 같다. 처음부터 액션 게임을 만들어야지, 어드벤처 게임을 만들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만든 거여서 이런 구분은 무의미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특정 장르에 업혀간다고 해야 하나, 규정되는 걸 싫어한다. 재미도 없고. 그래서 어떤 장르냐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내기 어려울 것 같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웃음).



Q. 뭔가 막 나가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Q. 게임의 물성을 탐구한다고 설명했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게임이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게임은 그 기준이 굉장히 넓다. 서양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게임'이란 용어는 놀이도 포함하지 않나. 그런 개념에서 본다면 게임은 단순히 레벨이나 캐릭터가 존재해야만 게임인 게 아니다. 서로가 은연중에 공유하는 규칙이 존재한다면 무엇이든 게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인터뷰도 내게 있어선 게임이다. 질문하고 답한다는 규칙이 존재하니까.

물론 이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정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항상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체이싱 라이트'처럼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어려운 그런 게임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뭔가 작품을 하나 만들 때 혁신할 게 아니면 만들지 말자는 생각을 한다. 그냥 좀 더 그래픽이나 연출이 좋은 게임을 만들 바에야 굳이 내가 안 만들어도 상관없지 않나. 실제로 오늘날 블록버스터급 게임들을 보면 답습을 거듭한 게임이 대부분이다. 나 역시 그런 게임들을 하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맞지만, 그러한 흐름에 내 작품을 하나 더 얹을 뿐인 그런 행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체이싱 라이트'을 통해 게임을 이런 식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Q. 일반적인 게임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됐나.

두 가지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그냥 어쩌다 보니 잘못해서 이 길로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웃음). 원래는 미디어 아트로 시작했는데 사진을 찍고 순수 예술을 한창 했는데 2015년쯤이었나 VR이 등장했다. 그때 VR이라고 하면 모두의 주목을 받지 않았나. 신기술이었고. 그래서 나도 VR 공모전에 나갔는데 만드는 것마다 상을 받으면서 되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0부터 100까지 쌓아 올린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더라. 그러면서 게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러면서 게임에 대한 가능성을 봤다. 사실 20대 초반에는 게임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는 평생 영상, 미디어 아트 길만 걸을 거로 생각했는데, 저렇게 게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비디오 게임이 가진, 매체가 가진 가능성이 굉장하다는 걸 알게 됐다. 단순하게 흘러가는 프레임을 앉아서 시청하는 게 아니라, 게임을 통해 직접 그 안에서 체험함으로써 오롯이 경험할 수 있게 된달까. 그런 의미에서 감동을 극대화하고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지 않을까 싶어서 게임을 개발하게 됐다.


Q. 자전적인 게임인 것 같은데?

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녹아든 것도 사실이다. '체이싱 라이트'를 발매하기까지 4년이 걸렸는데 그 과정에서 날아간 프로젝트만 7개가 넘는다. 처음에 그때그때 팀원을 꾸린다고 했었는데, 서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보자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어서 맨날 뭔가 될 것 같으면 일이 터지곤 했다. 그러면서 모두 쌓인 게 있다 보니 조금만 흔들리면 나간다고 그러고 게임 개발하기 싫다고 하고 그래서 4년 동안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결국 8~9명이었던 팀원도 다 떠나고 남은 건 나를 포함해 3명뿐이었는데 마지막으로 그만두더라도 하나는 만들고 그만두자고 생각해서 만든 게 바로 '체이싱 라이트'였다. 신기하게도 이걸 만들면서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다 풀리더라.

다만, 게임 속에서 '빛'을 쫓으면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경험을 녹여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 녹아든 거지 오롯이 내 자전적인 그런 게임인 건 아니다.


Q. 빛을 쫓는다고 했는데 '체이싱 라이트'에서 빛이 의미하는 건 뭔가.

인터뷰를 통해 답을 줘서도 안 되고 정확히 답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흔히 어떤 개념을 얘기하기 위해서 철학자들이 700~800페이지 분량의 철학서를 저술하지 않나. '체이싱 라이트'에서 쫓는 빛 역시 마찬가지다. 이건 내가 정의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정의할 수 없는, 못 하는 그런 영역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정의 내린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도 빛을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직접 '체이싱 라이트'를 해보고 느꼈으면 좋겠다.



Q. 오락으로서의 게임이 아닌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인터렉티브 드라마로서의 게임에 가까운 모습이다. 얼핏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게임 개발하다가 업계를 떠난 분들 가운데 PTSD를 느낀 분들이 있다고 하더라(웃음). 사실 원래 구상한 게임의 형태는 아니다. 아까 팀원들이 떠났다고 하지 않았나. 3명밖에 안 남은 상태였는데, 그 팀원들마저 떠난다고 하길래 떠나기 전에 언제까지 가능하냐고 물으니 두세 달 정도는 된다고 해서 그 기간 안에 가능한 게 뭔가 해서 찾아보니 지금의 형태가 됐다.

원래는 무대 위에 올라가는 모듈을 유저가 올리면 스스로 돌아가는, '스포어'처럼 유저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샌드박스 요소를 추구했는데 아무래도 당시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 할 수 있었던 차선책을 선택한 결과로 봐주길 바란다.


Q. 아무래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는데 예상한 결과인가.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발매 전날 농담으로 '야 100개만 팔려도 성공이야' 이런 얘기를 했을 정도다. 게임을 해보면 알겠지만 불쾌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일반적인 게임도 아니다 보니 상업적으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상업적인 흥행과는 별개로 비평적인 부분에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출시하고 보니 비평을 하는 분들뿐 아니라 유저들 가운데서도 호응하고 감동했다고 해서 깜짝 놀란 게 사실이다. 유저들의 평가와 관련해서는 지금 생각해도 예상보다도 좋은 결과를 낸 것 같다.



Q. 이번에 IGF 누오보 후보에 선정됐다. 기분이 어떤가.

가감없이 솔직히 말하면 난감한 심정이다. '체이싱 라이트'를 끝으로 게임을 더는 안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기작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벌지도 못했고 팀원도 떠나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 그리고 '체이싱 라이트'는 4년에 걸친 노력 끝에 탄생한 게임이다. 그때는 그래도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힘든 게 사실이다.

그래서 '체이싱 라이트'를 끝으로 게임을 만들 생각을 접었는데 출시하고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IGF 누오보 후보에 한국 최초로 선정됐다고 하니 기쁘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하지' 싶은 면이 더 크다. 앞으로도 게임을 만들어야 하나? 더 만들 순 없는데? 이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물론 기쁘지 않은 건 아니다. 처음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정말 기뻤다.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한 30분 정도 지나니까 오히려 냉정해지더라. 심사위원이 차기작이 기대된다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이제 만들 생각 없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투자 연락이 온다거나 개발 환경이 마련되면 또 게임을 만들겠지만, 당장은 힘들 것 같다. 그래서 현재는 그래픽 노블이라거나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등 혼자서 할 수 있는 부분부터 하고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작품은 내겠지만, 게임 개발로 이어질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게임에 대한 블루프린트가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인력과 자본이 없으면 불가능한 프로젝트다.



Q. IGF 누오보 후보에 선정되는 등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더 반응이 좋은 것 같다.

단순히 팔린 거로만 따지면 그래도 국내나 아시아권에서 평가가 더 좋았다. 자막과 대사가 워낙 빠른 게임이어서 그런지 외국에서의 판매량은 사실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런데 일반적인 유저가 아닌 창작자나 비평가들의 반응은 확실히 해외가 더 좋았다.

어떤 게임이든 수용하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있다 보니까 자막의 문턱을 넘은 분들은 좋게 평가해준 것 같다. 한편으로 한국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외국에서 비평적인 반응이 더 좋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비디오 게임 자체가 영미권에서 탄생해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보니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장르의 틀을 허물고 재구축하는 시도가 꾸준히 있어왔기에 이렇게 게임을 난도질하는 작품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잘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런 학문적이고 실질적인 경험이 축적되어 있는 것과 그들에게 있어선 낯선 변방의 한국 게임이 자신들과 코드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체이싱 라이트'가 해외에서도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Q.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게임을 개발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했는데 얼마 전에 '체이싱 라이트2'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앞으로도 계속 게임을 개발할 건가.

환경이 마련된다면 만들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힘들 것 같다. '체이싱 라이트2'는 가제인데 세상에는 나오겠지만, 게임은 아닐 확률이 90%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Q.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돈 되는 작품을 만든 후에 그렇게 번 돈으로 본인이 추구하는 작품을 만들 생각은 없는지 궁금하다.

아예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다. 사람이 땅만 파서 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현재 준비 중인 그래픽 노블이나 시나리오 작업은 그런 의도가 어느 정도는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고뇌 역시 게임에 담겨 있다. 게임 속에서 감독은 결국 떠난다. '체이싱 라이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 무대에서 도태되는데 그렇다고 감독이 옳고 선배가 틀렸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의견이 상보적인 역할을 한 것뿐이다. 현실과 이상이 대립한 결과물이랄까.

그런 현실과 이상에 대한 부분은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어서 무조건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진 않다. 사실 그런 게임조차도 만들 환경이 안되기에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기도 힘들다. 한편으로는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게임도 있지 않나.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열려 있다.


Q. 앞으로의 목표, 행보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다.

일단 작가로서 작업은 계속 해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 길이 남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 단순하게 오락적인 부분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무게를 가진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다.

지금까지 한 4천 편 정도의 영화를 봤는데, 그럼에도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체험을 선사한 작품은 영화가 아닌 게임이었다. 지금까지 본 어떤 영화도 나에게 '레드 데드 리뎀션2'같이 빠져나가기 힘든 진한 여운과 탈력감을 안겨주진 못했다. 오락으로서도 완성도가 높았지만, 추락하는 인간들의 군상극으로써도 이만큼 좋은 게임은 없었던 것 같다. 가능하다면 나도 그렇게 몇 십 시간 동안 피 말리게 만드는 체험을 선사하고 싶다. 순도 높은 체험 예술인 비디오 게임을 통해서만 성취해낼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본다. 지금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