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LCK 서머 순위를 보면 놀랍다. 지난 스프링 때 '동부 리그'에 있던 농심 레드포스(6위)와 리브 샌드박스(8위)가 '서부 리그'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 서머에서 농심은 단독 1위, 샌드박스는 3위라는 성적을 내고 있다. 스프링 순위만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고 있다.

두 팀은 스프링 후반부에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다.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빠르게 몇 달 사이에 가능성을 실현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어느덧 요즘 LCK에서 분위기가 가장 좋은 팀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스프링 최상위권 팀을 꺾는 것은 물론, 분위기가 좋다는 팀마저 제압했다. 샌드박스는 DRX-GEN-T1을 꺾고 3연승을 기록 중이고, 단독 1위 농심은 AF-T1-DK-KT-BRO를 꺾고 5연승을 내달리고 있다. 그런 두 팀을 막을 만한 팀이 없어 보이는 시기에 서로를 마주하게 됐다.

최근 분위기와 달리, 두 팀은 스타일상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왔다. 농심이 날카로운 판단을 앞세워 여기까지 왔다면, 샌드박스는 맹수 같은 감각과 멋이 묻어나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각기 다른 성향의 두 팀이 대결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붙어봐야만 알 것 같다.


상황별 최고의 판단 보고 싶다면 - 농심


요즘 농심은 상황마다 최고의 판단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팀이다. 불리한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알고 있다. 이는 최근 프레딧 브리온과 대결에서 잘 드러났다. 당시 농심은 1세트부터 탑-미드에서 모두 솔로 킬을 내주면서 시작했다. 그럼에도 상대의 유리한 '상체' 흐름을 끊어냄과 동시에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경기를 끌어갈 줄 알았다.

농심 특유의 정확한 판단의 핵심 역할은 '피넛' 한왕호가 맡는다. 경기 흐름의 맥을 짚는 '피넛'은 고전하는 라인을 풀어준다. 해당 판단 한번으로 상대에게 넘어갈 만한 분위기를 가져올 줄 안다. 경기를 보면, 괜히 팀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맏형이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팀을 전전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게이머의 경험이 플레이에 묻어난다.

거기에 많은 지표가 '피넛'의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LCK 정글러 중 '피넛'은 많은 부분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LCK에서 소수의 경기를 치른 정글러를 제외하고, 주요 지표면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단순히 자신의 성장만 하는 정글러라면, 해당 지표의 의미가 떨어질 수 있겠다. 하지만 '피넛'은 경기마다 핵심 라인에 개입하는 플레이로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지표를 만들어 낸다.

■ 2021 LCK 서머 '피넛' 한왕호 정글러 지표

KDA 5 - 2위 (1위 '말랑' 5.9)
분당 CS 6.8 - 1위
상대 정글러와15분 골드 격차 284 - 2위 (1위 '치프틴')
상대 정글러와15분 경험치 격차 471 - 2위 (1위 '치프틴')
정글러 중 솔로 킬 수 8회 - 1위



그렇다고 '피넛' 혼자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농심이 원하는 판을 만드는데 '켈린' 김형규의 역할 역시 크다. 앞서 브리온이 솔로 킬과 함께 탑-미드 라인전에서 앞서갈 때, 농심의 봇 라인 만큼은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다. '켈린'의 레오나가 감각적으로 상대를 잡아채는 플레이를 해내면서 가능했다. 해당 킬로 봇 라인 주도권과 동시에 '덕담' 서대길의 아펠리오스의 성장세에 힘을 실어줬고, 후반부를 바라볼 희망의 토대를 세울 수 있었다.

발이 풀린 '켈린'은 '피넛'과 함께 돌아다니며 '상체' 교전에 힘을 실어준다. '켈린'의 활약상은 서포터 중 경기당 어시스트 8.6(1위), KDA 3.6(1위)이라는 탄탄한 기본 지표가 말해주고 있다. '피넛'은 작년 LPL LGD에서 극적으로 롤드컵 마지막 티켓을 거머쥔 적이 있는데, 당시 서포터 '마크'와 함께 판을 만들어간 기억이 있다. 올해 '피넛'은 자신의 전성기를 이끈 챔피언 니달리와 서포터 '켈린'과 함께 작년 이상의 성적을 내는 중이다. 그리고 앞으로를 더 기대할 만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피넛-켈린'이 다른 팀원의 성장세를 도왔다면, 이에 보답하듯 '리치-고리-덕담'이 한타로 답한다. 한타에서 '리치-고리'가 뛰어난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앞세워 판을 만들고, '덕담'이 끝까지 살아남아 딜을 넣으며 변수 없는 승리를 완성한다. 상대가 유리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도 '덕담'이 살아서 딜을 하면 수적으로 불리한 한타 역시 뒤집혀 있다. 그렇게 농심은 각자 해줘야 할 역할 분담이 확실한 팀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가장 확실한 판단을 내려 서머 1위에 오를 수 있었다.


기세 + 멋 = '낭만' 샌드박스


리브 샌드박스는 확신할 수 없는 무언가를 계속 해내는 팀이다. 앞서 농심이 정확한 판단과 근거가 탄탄한 팀이라면, 샌드박스는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팀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세와 멋이란 걸 앞세워 '낭만'이라는 단어를 완성하고 있다.

샌드박스의 통계를 보면, 더 알 수 없는 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팀이나 개개인 지표가 뚜렷한 것도 아니고, 가끔은 기록이 아쉽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수치로 말할 수 없는 그 이상을 해내고 있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달라진 '서밋' 비에고

다음은 샌드박스의 '상체' 라이너들과 관련된 자료다. 분명 담원 기아전에서 '서밋' 박우태의 비에고 플레이는 아쉬웠다. KDA 뿐만 아니라 게임 내 플레이에서도 만족할 만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는데, 다시 등장한 비에고는 확연히 달라졌다. 기록상 다시 꺼내기 쉽지 않은 픽임에도 다시 뽑을 만한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해당 젠지전에서 '서밋'은 솔로 킬로 시작해 봇 라인으로 순간이동 활용 차이를 냈고, 협곡의 전령 전투마저 주도하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짧은 기간 사이에 180도 달라진 '서밋' 비에고의 모습이었다.

다른 팀원들 역시 리브 샌드박스가 공개한 보이스 영상처럼 '낭만'을 실현하고 있다. 해당 DRX전에서 '페이트' 유수혁은 "비에고 대 리 신 구도를 해보지 않았다"며 "그냥 'Swag'으로 하는 거예요"라는 당당한 말과 함께 리 신을 픽했다. 막상 경기에 들어간 '페이트'는 슈퍼플레이로 POG까지 선정된다.

'페이트'와 샌드박스 특유의 자신감은 아래 영상처럼 불리한 상황에서도 주저 없이 나온다. 7천 골드를 밀리고 두 개의 억제기가 깨진 샌드박스는 라이즈 궁극기와 함께 교전을 여는 장면이다. 그동안 많은 라이즈들이 상대의 중심부에 떨어지는 '공간 왜곡' 활용으로 실패를 경험했지만, 샌드박스는 그냥 거침이 없다. '페이트'의 기세는 '프린스' 이채환을 포함한 팀원들 모두가 함께 나누고 있다. 해당 장면에서 '프린스'는 칼리스타로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플레이를 소화한다. 화려한 마무리까지 더 해지면서 젠지전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해당 2세트의 결과는 패배였지만, 위기에도 과감한 샌드박스의 플레이는 젠지전을 승리로 마무리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양보 없는 명장면 대결, 한 번만 더 믿어줘



이런 두 팀의 최근 기세는 지난주 최고의 명장면 대결로 이어졌다. 각종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궜던 최고의 명장면은 샌드박스 '에포트' 이상호의 바론 스틸 장면이었다. 아무리 용감한 샌드박스라지만, 강타도 없는 서포터의 바론 스틸은 믿기 쉽지 않았다. 잘리면 더 불리해지는 상황이었기에 반대하는 팀원도 있었다. 그럼에도 '에포트'는 주도적으로 "한 번만 믿어줘"라는 말과 함께 바론 스틸을 해냈다. 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슈퍼플레이에 도전할 줄 알았기에 나온 결과다. 정말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도전조차 하기 힘든 플레이였다. 이렇듯 승부에 임하는 자세가 남다른 '에포트'가 현 샌드박스의 기세를 잘 나타내고 있다.



농심도 만만치 않은 슈퍼플레이 장면을 보유하고 있다. 해당 영상에서 '고리' 김태우의 야스오는 세 명의 상대가 들이닥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단순히 살아남은 것에 그치지 않고 역습까지 성공했다. LCK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가 그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기회를 본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고리'의 슈퍼플레이 역시 위기가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농심의 현 모습을 잘 보여준다.

두 팀이 보여준 명장면의 느낌은 결이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지난 한 주를 대표할 만한 명장면을 뽑아낼 만큼 두 팀의 기세가 좋다는 점이다. 위기 상황에서 최고의 판단을 내리거나 승부수를 던질 줄 안다. 불가능의 영역을 넘나드는 슈퍼플레이가 있었기에 당당히 연승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샌드박스와 농심의 대결에 더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다.


■ 2021 LCK 서머 스플릿 정규 시즌 35일 차 일정

1경기 리브 샌드박스 vs 농심 레드포스 - 30일 오후 5시
2경기 kt 롤스터 vs 젠지 e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