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지난 11일 진행한 카운터사이드 2주년 쇼케이스를 보다가 눈에 들어온 단어였다. 원래 카운터사이드는 출시 초에는 스킵이 없었지만, 지난 6월 업데이트로 모의작전에 전투 스킵 기능을 추가했었다. 그리고 다른 콘텐츠에는 행동력을 한 번에 몇 배씩 투입해서 그만큼 보상을 얻어가는 중첩작전이라는 과도기적인 방식을 선보였는데, 25일 2주년 업데이트 이후에는 모의작전에만 지원되던 전투 스킵이 다른 콘텐츠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한때 '자동전투'의 '자'만 들어가도 거부 반응을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자동전투가 게임을 망친다라는 악평까지 달릴 정도였었다. 그렇지만 최근의 양상은 다소 다르다. 오히려 이제는 스킵해버리겠다고 해도 호응이 올 때가 있다. 물론 카운터사이드 2주년 업데이트는 스킵 기능 확장 외에도 다양한 편의성 및 메인스토리 업데이트 같은 굵직굵직한 사항들이 발표되긴 했지만, 스킵 기능 관련 발표 당시 채팅창에 상당수의 유저들이 호응을 보냈었다.

눈을 돌려서 다른 게임을 보아도 최근의 트렌드는 이전과 달라진 눈치다. 자동전투 지원은 기본에, 이제는 아예 건너뛰어버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출시된 블루 아카이브는 모든 콘텐츠에 소탕, 스킵 기능을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심지어 소탕권 같은 재화도 필요가 없다. 국산 게임도 아니고 아직 출시되지 않았지만 2차 CBT에서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낸 소녀전선2도 전작과 달리 3성 클리어 같은 조건 없이도 소탕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채택했다.


▲ 최근 출시된 블루 아카이브나, 현재 개발 중인 소녀전선2에서는 소탕 기능을 적극 채택했다

소탕 기능이 없더라도, 최근 여러 게임들의 업데이트 방향을 보면 불필요한 반복 전투에 소모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거나 반복 전투 화면을 띄우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경향이 눈에 띄었다. 에픽세븐은 와이번 뺑뺑이라 불리는 토벌은 그대로 뒀지만, 모험에서는 만렙 캐릭터에겐 필요 없는 여분의 경험치를 다른 캐릭터에게 추가로 주거나 다른 캐릭터에게 경험치를 먹일 수 있는 '펭귄'이라는 재화로 바꿀 수 있게끔 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쫄작에 드는 시간을 줄였다. 엑소스 히어로즈는 게임이 종료되도 탐험은 계속 진행하는 방향으로 편의성을 개선했다.

물론 이와 같은 흐름이 모든 게임에 적용된 건 아니다. 아직도 많은 게임들이 자동 전투를 반복하는 걸 기본 플레이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그 플레이 방식을 크게 건드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여러 게임들이 전투의 편의성을 개선하는 방향에서는 앞서 말한 것 같은 공통점이 느껴지고 있다.

그 흐름은 예전이었다면 다소 상상하기 어려운 방향이다. 소녀전선2 얘기가 나왔었으니 소녀전선이 국내 출시됐던 2017년을 생각해보자. 그때 소녀전선이 호평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가 자동전투에 의존하지 않고 아기자기하면서도 전략성 있는 차별화된 게임플레이였다. 당시는 자동전투하면 대강 시스템을 짜고 양산형으로 빨리 출시해서 수익을 뽑기 위한 게임이라는 인식이 짙었고, 많은 게이머들이 자동전투를 게임성을 해치는 원죄처럼 보던 때였다. 실제로 당시에 서비스를 시작했던 많은 수집형 RPG들이 출시 초 그런 비판을 포함해 썩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시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반응이 달라졌다. 이젠 아예 자동은커녕, 한 번 깨면 그냥 버튼 한 번 누르고 끝인데 그것도 이제는 게임의 특성이라고, 혹은 편의성 패치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프린세스 커넥트 리:다이브 등, 스킵권 같은 중간 단계를 거친 작품들이 호응을 얻으면서 점차 그런 식으로 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게임은 직접 플레이해야 제맛이라는 코어 유저들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달갑지 않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자동전투도 내키지 않는데, 심지어 이마저도 생략해버리는 게임이라고 하면 유저가 즐길 것이 무엇이 있냐는 생각이 들 테니 말이다.


게임사나 혹은 리서치 앱에서도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줄곧 길게 플레이하게 만들 무엇이 없으면 유저들이 이탈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그래서 잔존율 및 고착도를 평가할 때 플레이타임도 상당히 중요한 지표로 작용했었다. 그런데 유저들을 오래도록 붙잡아두는 대신, 가볍게 플레이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변화하게 된 게임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체로 캐릭터를 수집해서 육성하는 과정과 그렇게 육성한 캐릭터를 써야만 하는 구간이 확실히 나뉘어져있다. 돌이켜보면 수집형 RPG라는 장르의 특성이 그렇긴 하다. 매번 뺑뺑이 돌리고 흔히 말하는 쫄작하다가 뭐 업데이트되면 다시 각잡고 스테이지를 뚫어가는, 그런 방식이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 각각의 방식에 대해서 선택과 집중이 최근에서야 재조명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저마다 다르긴 하지만 별 소득 없이 똑같은 사냥과 파밍을 몇 시간이고 줄창 반복하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별 소득이 없다고 한 이유는, 핵앤슬래시와 달리 앞서 언급한 수집형 게임들은 똑같은 사냥을 반복한다고 해서 아주 좋은 템을 얻는 게임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루틴은 레벨업하고 승급 및 장비 강화 재료를 얻기 위한 과정이고, 그 과정을 거친다고 드라마틱하게 강해지지도 않는다. 딱 예상 가능한 정도만 강해지고, 그걸 거르면 근손실이 오듯 뒤쳐지는 게 일상이었을 뿐이다.

흔히 말하는 헬스애호가, 운동매니아들이 근손실하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하지 않던가. 게이머 입장으로 바꿔보자. 하루 게임을 안 해서 실력이 줄어들거나 레벨이 남들보다 뒤쳐지거나 진도가 늦어진다고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근손실 못지 않게 불안하지 않던가. 더군다나 그간 나온 게임들은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PVP의 비중도 꽤 컸다. 그래서 계속 쫓기듯이 혹은 습관적으로 플레이하다가 갑자기 놓게 되면, 그대로 이탈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 역대급 보상이라는 말을 듣고 복귀해서는 또다시 반복사냥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루틴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 ...꿀통단이라 죄송합니다ㅜㅜ 그래도 에덴조약 3장 한섭 출시까지는 함께 간다

최근 수집형 RPG는 그런 부담은 줄이는 한편, 메인 게임플레이뿐만 아니라 그간 소홀했던 캐릭터, 스토리까지 신경을 쓰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유저들이 특정 콘텐츠에서 강박적으로 뒤쳐지지 않기 위한 루틴 위주로 게임을 설계한 대신, 육성을 위한 숙제는 빨리 끝내고 여유롭게 게임을 둘러보면서 숨겨진 매력을 찾아가게끔 유도하는 식으로 변했다.

클리셰 덩어리에 반성문 1억장이라는 밈까지 더해져서 스토리가 유치하다고 비판받았던 에픽세븐은 사이드 스토리도 한 차례 고치고 에피소드2부터는 왕도적이지만 각 캐릭터 간의 구도를 살린 퀄리티 있는 스토리를 내기 시작했다. 카운터사이드는 관리자의 롤과 캐릭터 간 관계, 구도가 엉성하다는 초반의 문제를 시즌1을 멋지게 마무리지으면서 평가가 반전됐다. 그리고 그 스토리를 쉽게 즐길 수 있게 1주년 업데이트에 한 차례 개선을 거치면서 구글플레이 매출 15위까지 역주행하는 성과가 났었다. 블루 아카이브는 인게임 식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은행을 털자' 등 캐릭터마다 확고한 특징을 잡았고, 서브컬쳐의 본산지인 일본에서도 호평을 받을 만큼 유저를 사로잡을 스토리를 구축해두었다. 여기에 가벼운 게임플레이에 개그와 감동적인 스토리를 언제든 즐길 수 있게 배분하면서 접근성도 높였다.

이런 시도들이 부각되는 이유들은, 유저들의 플레이스타일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전 PC, 콘솔 때는 어느 한 게임을 붙잡으면 줄창 플레이하면서 하드 콘텐츠까지 최단 시간에 빨리 돌파하고 득템하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런데 모바일 수집형 RPG는 두세 개는 기본이고 많게는 5~6개도 더 하지 않던가. 처음에는 PC와 콘솔 게임 시절 용납될 수 없던 '자동전투'의 부정적인 면모가 부각됐지만, 그것이 하나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뒤에는 플레이 방식이 달라진 셈이다. 요즘에는 모바일 게임 유저들은 게임 하나만 줄곧 파고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수집형 RPG를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만 나온 것까지 포함해 10개를 하고 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집형 RPG를 한다 싶으면 보통 게임을 여러 개 하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제각각 있어서, 혹은 원래 하던 게임이 있는데 새로 나온 것까지 해서 등등. 각자 이유는 다양할 테지만,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유저들이 여러 게임을 하게 됐으니 그 필요에 맞춰서 게임사들이 편의성을 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루틴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계속 풀로 가동해서 펌핑하는 루틴보다는, 완급을 조율해서 오래도록 이것저것 곁들여서 수집하고 어느 하나 마음에 꽂히면 집중하는 플레이 스타일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 반복 루틴으로 붙잡아두기보다는 그냥 스쳐지나가기 일쑤였던 캐릭터, 스토리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자동전투, 반복사냥을 넘어서 이제 스킵이 되기 때문에 게임을 마치 인스턴트마냥 소비한다거나, 혹은 수동조작의 재미도 모르게 된다는 걱정은 이해가 된다. 한때 자동전투, 반복전투를 체계를 갖춘 뒤 고만고만한 캐릭터를 내세워 유저끼리 경쟁 붙이는 게임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오던 흐름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흐름은 국내에서 캐릭터가 아닌, 장비나 펫 뽑기 형태로 변용되어서 나타나고 있긴 하다. 그 안에서도 자세히 보면 자동전투 안에 돌발 상황을 유저에게 빨리 알려서 대처하기 위한 시스템이나, 그런 상황이 서로 일어나지 않게끔 설정하는 등 여러 가지 발전을 거치고 있긴 하다. 다만 그런 장르의 게임이 BM이나 여러 이슈가 겹쳐진데다가 비슷해보이는 유형의 게임이 자주 나오다보니 좋게 보일 수 없다고 할까.

그렇지만 앞서 말한 '스킵'은 육성을 위해 진득히 붙든다는, 유저들이 PC 온라인 게임부터 익숙해진 흐름을 포기해야 하는 이면이 있다. 그리고 그 느슨해진 기간을 넘기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 숙제가 생겨버린다. 이를 풀기 위해서 최근에는 더 발전된 기믹이나 스테이지 디자인, 스토리, 프로모션 등등을 게임사들이 선보이고 있다. 예전에 지존급 OP 캐릭터 하나만 달랑 어필하던 낡은 방식을 벗어나, 전체적인 맥락으로 게임을 보게 만들어야 유저들이 짤막짤막한 루틴을 하루하루 반복하고 다른 곳에 잠시 눈을 돌려도 결정적일 때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캐릭터가 중요한 수집형 RPG에서는 캐릭터 하나뿐만 아니라, 그 캐릭터가 활동하는 세계관과 활약을 담아낸 스토리까지 중요해졌고, 그에 대한 주목도도 점차 높아지면서 그간 국산 게임의 약점으로 손꼽혔던 그 부분이 조금씩 해소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한때 국산 게임, 특히 모바일 게임이 스토리가 좋다는 말을 하면 알못 소리를 듣던 시절도 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게임들이 몇몇 보이고 있지 않던가. 플레이타임의 절대량을 여러 이유에서 덜어낸 대신, 그만큼 유저의 시선을 잡아두기 위해 다른 부분에 투자하는 비중이 달라지는 등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자동전투, 반복전투가 싫고 모바일에 경도되는 게임 시장의 상황이 싫은 유저들 입장에서는 이 일련의 흐름이 고만고만하게 보일 것이다. 여러 번 반복플레이 해도 재미있게 만들 역량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스킵은 원래 있었던 재미없고 비효율적이던 루틴을 개선한 것이었으니 좀 다른 걱정이라 하겠다.

그러니 '스킵'의 시대가 됐다고 해서 게임이 퇴화한다는 것은 다소 기우가 아닐까 싶다. 그보다는 유저들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부분을 개발사가 덜어내고, 그래서 부족해진 부분을 다른 식으로 채워나가는 시대의 변화로 보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근손실 못지 않은 경험치 손실, 재료 손실이라는 육성 부담감과 경쟁을 앞세워서 억지로 플레이타임을 유도했던 이전과 달리 한 번의 플레이에 심혈을 기울이고, 나머지는 부담없이 지나치면서 그간 신경쓰지 못했던 부분도 눈을 돌리게 하니 말이다.

이처럼 '스킵'의 대두는, 그간 매너리즘처럼 자동전투를 고만고만한 양상으로 채택하던 모바일 게임 시장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반복전투를 스킵하는 대신 PC MMORPG 시절 스킵이 국룰이었던 스토리나 캐릭터에 신경쓰는 비중도 높아지고 있고, 플레이타임이 짧아진 만큼 한 스테이지 한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때도 임팩트를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반대로, 스토리와 캐릭터만으로도 유저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자신감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그런 선택도 가능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진득히 자동 반복사냥하게 만들어서 플레이타임을 늘려야 한다는 짐을 벗어던지고 자신있게 스킵 그리고 더 많은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된 국내 개발사들이, 앞으로 어떤 게임을 보여주게 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