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게임 타이틀로 친숙한 사이버펑크라는 단어는 원래 1980년대부터 각광을 받은 SF의 한 장르였다. 기계, 컴퓨터, 인공지능 등이 접목된 사이버네틱스와 폐물, 불한당, 양아치 등 기성세대에 그리 호응받지 못한 요소들을 일컫는 펑크가 합쳐진 이 단어는 한때 최대 기대작으로 손꼽힌 작품과 엮여서 게임계의 해쉬태그마냥 자리잡기도 했다.

그래서일지 '사이버펑크'라는 단어가 붙으면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팀 렙타일이 2020년 갑작스럽게 공개한 '봄 러쉬 사이버펑크'는 조금 달랐다. 'Punk'를 'Funk'로 바꾼 것외에도, 흔히 생각하는 사이버펑크의 어둑하고 질척한 도시 분위기나 해킹, 의체 등의 묵직한 소재와는 다르게 힙한 음악과 도시를 파쿠르로 질주하는 모습이 담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만 수록된 불과 15초짜리 티저였지만, 구독자 4만 명도 안 됐던 인디 게임팀의 유튜브 채널에 30만 회가 넘는 조회수가 달리는 등 해외 유저들 사이에서는 꽤나 반응이 있었다. 21년 2월에 올린 공식 트레일러는 조회수 78만을 기록하고, 듀얼쇼커스 등 몇몇 외신에서는 2022년의 기대할 만한 인디 게임 중 하나로 손꼽기도 했다.

그래피티와 파쿠르라는 힙한 소재와 그에 걸맞게 펑키한 음악으로 해외 인디씬에서 나름 인지도를 쌓은 '봄 러쉬 사이버펑크', 국내에선 다소 낯선 테이스트를 풍기는 이 작품이 왜 해외 일각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또 어떤 게임인지 그 맥락을 잠깐 훑어볼까 한다.



■ 젯 셋 라디오에서 영감을 받은 개발 스튜디오, 팀 렙타일

▲ 카툰렌더링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작품, '젯 셋 라디오'

그래피티와 파쿠르는 사실 봄 러쉬 사이버펑크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미 그런 소재는 20년도 전, 세가에서 개발한 '젯 셋 라디오'부터 게임으로 본격적으로 다뤄졌기 때문이다. 2000년 드림캐스트용으로 처음 출시된 '젯 셋 라디오'는 국내에선 인지도가 낮았지만, 최초로 카툰렌더링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색다른 스타일과 힙한 음악, 서구권에 친숙한 그래피티와 파쿠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북미유럽권에 어필한 작품이었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면서 각종 묘기를 부리는 익스트림 스포츠 게임은 당시에도 여럿 있었지만, '젯 셋 라디오'는 여기에 스트리트 문화를 가미하면서 차별화를 꾀했다. 그래피티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기업과 결탁해 도시를 장악한 부패 경찰들을 골탕먹이고, 마침내 도시를 탐욕스러운 재벌 롯카쿠에게서 해방시키는 반항적인 스트리트 문화의 로망을 담으면서 서구권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젯 셋 라디오 시리즈는 이후 2002년 Xbox 독점으로 리부트작 '젯 셋 라디오 퓨처'를 선보인 이후, 기존 작품을 매번 차세대기 그리고 PC와 모바일에 이식하는 정도로만 연명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제시한 컨셉과 스타일은 다양한 서구권 개발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호버' 등 이를 오마주한 각종 작품들이 개발되거나 혹은 벽과 파이프를 자유로이 트릭을 활용해서 빠르게 돌파하며 도시를 누비는 액션을 작중에 차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 리부트 이후 시리즈의 맥은 끊어졌지만, 그 특유의 묘기와 분위기는 여러 서구권 개발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 영향을 받은 팀 중에는 네덜란드의 인디 스튜디오, '팀 렙타일'이 있었다. 팀 렙타일은 게임 개발자 교육을 받고 있던 팀 레메르스와 디온 코스터 두 명이 2011년 네덜란드 힐베르쉼에서 설립한 개발 스튜디오로, 메다봇츠와 록맨 등에서 영감을 받은 간단한 플랫포머 액션 '메가바이트 펀치' 이후 스트리트 색깔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한 스튜디오다.

공동창립자이자 디렉터를 맡은 디온 코스터는 어릴 적부터 인라인 스케이트와 힙합, 비보잉에 심취했던 인물로, 게임 개발자 교육을 받기 전 암스테르담에 있는 힙합 스쿨에서 댄스와 랩을 배우며 무대 데뷔를 꿈꿨다. 그러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중간에 진로를 바꾸게 된다. 세가 게임 팬이었던 그는 소닉 같은 속도감에 젯 셋 라디오처럼 자신이 스트리트 문화에 심취했던 경험을 게임에 녹여내 색다른 게임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졌고, 팀 렙타일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그 꿈을 실현하고자 하고 있다.

▲ 팀 렙타일의 대표작, 리썰 리그 블레이즈

본격적으로 그 스타일을 팀 렙타일에서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2014년 제작한 '리썰 리그'부터였다. 야구와 피구에서 영감을 받은 이 게임은 두 플레이어가 서로 볼을 쳐서 상대방에게 날리는 식으로 공방을 주고 받는 게임으로, 상대의 볼을 쳐내지 못하고 피격되면 체력이 감소한다. 볼을 칠 때마다 가속도가 붙고 대미지가 증가하기 때문에 계속 공방을 이어가다가 한 번에 아웃시키는 묘미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속도가 붙은 볼을 위로 가볍게 올려쳐서 숨을 돌릴 수 있는 번트 및 캐릭터마다 각기 다른 특수기를 더하면서 캐릭터마다 심리전 및 공방을 조율하는 대전 게임으로서의 면모도 갖췄다.

젯 셋 라디오 퓨처의 하수 시설 및 공사현장 등 배경을 오마주하고, 캐릭터 디자인도 그와 비슷하게 스트리트 스타일을 최대한 살린 데다가 젯 셋 라디오에서 볼 법한 아크로바틱한 묘기도 일부 가미하면서 리썰 리그는 서구권 유저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얻었다. 이에 힘입어 단독으로 격투 게임 대회인 '조 브레이커'를 2년 연속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팀 렙타일에서는 2D 그래픽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2017년 이후 업데이트를 중단했다. 그리고 이를 3D로 새롭게 재단장한 '리썰 리그 블레이즈'를 2018년 PC로 출시했다. 티저 영상 때부터 젯 셋 라디오 특유의 투박한 카툰렌더링을 떠올릴 그래픽을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젯 셋 라디오 시리즈의 OST를 총괄한 나가누마 히데키가 제작에 참여하면서 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 리썰 리그 블레이즈(우)부터 젯 셋 라디오 퓨처(좌)의 그래픽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선보이더니

▲ 2020년 그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신작, '봄 러쉬 사이버펑크'를 공식 발표했다



■ 반항적인 테마는 살리고 각종 무브와 편의성을 더한 정신적 후속작, '봄 러쉬 사이버펑크'


그리고 2020년, 팀 렙타일은 본격적으로 젯 셋 라디오의 스타일을 살린 신작 '봄 러쉬 사이버펑크'의 티저를 발표했다. 티저의 분량은 불과 15초였지만, 그라인드 슈즈를 신고 도시를 활보하는 장면과 도시 곳곳에 그래피티를 칠하고 주인공과 적대하는 세력이 단체로 댄스를 추며 등장하는 장면 등 젯 셋 라디오의 오마주를 가득 담아냈다. 또한 나가누마 히데키가 이번에는 프로젝트 초기부터 참여, 'Get Enuf' 등 특유의 비트를 살린 BGM을 티저 및 공식 트레일러부터 빠르게 선보였다.

그래픽 스타일은 젯 셋 라디오 퓨처에 가깝게 다듬은 반면, 트레일러를 통해 공개된 게임플레이의 전반적인 양상은 젯 셋 라디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은 달라졌지만 육교의 안전바와 버스터미널 천장의 파이프가 주요 트릭 포인트였던 시부야 버스 터미널의 구도나 언덕길의 점프대와 중앙분리대 파이프라인을 타고 도심을 누비는 도겐자카의 단면이 게임플레이 트레일러 일부에서 확인됐다.

또한 작중 핵심인 그래피티는 아날로그 스틱을 활용해 지정된 도형을 그려나가는 젯 셋 라디오의 방식을 채용했다. 그러나 도형을 그릴 때 커맨드에 가까운 형태로 딱 맞춰서 키를 입력해야 했던 젯 셋 라디오의 어려운 조작법은 단순히 도형을 유사하게 그리면 되는 식으로 난이도를 완화시켰으며, 중간중간 캐릭터의 하이라이트를 가미해 캐릭터가 직접 그래피티를 그리는 듯한 느낌을 한층 더 살렸다.


▲ 스프레이 캔과 그라인드 슈즈만 장비하고 미사일까지 쏘는 무장 세력과 싸우는 고인물이 되어야 한다

젯 셋 라디오의 또다른 정신적 후속작이라 불렸던 '호버'가 단순히 도시를 질주해서 하이스코어를 올리기 위해 트릭만 주구장창하는 작품인 것과 달리, 봄 러쉬 사이버펑크는 트릭과 그래피티를 활용해 도시를 무단으로 점거한 세력에 저항하는 그 테마를 계승, 발전시켰다. 유저는 도시를 무단으로 점거한 세력에 저항하는 '봄 러쉬 크루'의 일원으로서 동료를 모아 각종 무장 단체 및 깡패들의 방해를 뿌리치고 도시를 해방시키기 위해 이곳저곳 바쁘게 오간다는 것이 봄 러쉬 사이버펑크의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젯 셋 라디오와 젯 셋 라디오 퓨처에서는 무장 경찰과 사복 경찰, 그리고 기업에 고용된 깡패 정도가 적으로 등장하지만 봄 러쉬 사이버펑크에서는 헌병까지 등장하면서 더 스케일이 커졌다.

흑막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경찰, 깡패뿐만 아니라 군사력까지 동원하고 감시 카메라에 각종 경보장치와 드론을 활용해 도시 내 불순 세력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는 상황. 일부 특수 패턴을 가진 적이 출몰하지 않으면 단순히 경찰들을 밀쳐서 그래피티를 칠해 무력화시키는 게 대다수였던 젯 셋 라디오와 달리, 주인공 일행이 그래피티로 선전물을 그리자 바로 드론이 유도 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이 초반부터 공개됐다.

이를 피하기 위해 육교와 버스터미널 지붕을 각종 트릭을 활용해서 빠르게 주파한 뒤, 감시카메라와 경보 장치에 그래피티를 칠해 시야를 차단하거나 내부 회로를 망가뜨려서 무력화하는 등 트릭과 스프레이를 활용해 좀 더 역동적으로 적에 대처할 수 있게끔 했다. 경찰이나 헌병 등 무장세력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 세력권을 다투고 있는 스트리트 갱과의 레이스 등 스토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소개됐다.

▲ 마음 같아선 스프레이로 무력화시키고 싶지만, 명예(?)가 걸린 신성한 레이싱이니 속도로 승부를 내야 한다

또한 젯 셋 라디오 개발 당시인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최신 기기의 기능을 작중에 도입, 편의성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젯 셋 라디오와 젯 셋 라디오 퓨처에서는 맵 등 일부 메뉴를 제외하고는 개러지에 가야 그래피티 및 BGM 세팅 등 각종 메뉴에 접근이 가능했지만 봄 러쉬 사이버펑크에서는 핸드폰이 추가되면서 그런 수고를 덜었다. 또한 프로페서 K의 라디오를 주축으로 임무와 스토리가 진행되던 것과 달리, e메일 등 NPC와 소통하는 메신저 기능이 추가되면서 메인스토리 외에도 다른 캐릭터와의 서브 스토리가 확장될 가능성도 예고됐다.

여기에 핸드폰 메뉴를 통해서 '아웃핏' 메뉴가 공개되면서 젯 셋 라디오에는 없었던 캐릭터별 스킨 시스템도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스킨이나 스킨 판매 관련 정책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미 전작 리썰 리그 블레이즈에서 출시 이후 꾸준히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다양한 컨셉 스킨을 판매했던 만큼 이번에도 캐릭터별 스킨을 유료로 출시할 가능성도 있다.

▲ 시대에 맞춘 각종 편의 기능 확장뿐만 아니라

▲ 스케이트 보드, 자전거 등을 활용한 새로운 무브도 추가됐다

한편, "싱글플레이에 집중하고 있다"고 개발진이 밝힌 만큼 리썰 리그 블레이즈처럼 캐릭터 스킨을 전부 유료 판매하는 형태는 아니고, 일부는 유료 판매에 일부는 게임 내에 수집하는 형태로 출시될 확률도 높다. 특히 젯 셋 라디오 시리즈에서 업적 달성으로 얻을 수 있는 수집 요소가 타 게임 대비 다소 적다는 평을 받았던 만큼, 개발사에서는 이를 보완하고자 그래피티 등 여러 수집 요소들을 2022년 초부터 꾸준히 공개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젯 셋 라디오 퓨처의 멀티플레이 콘텐츠가 다소 부실하고 룰에 따라 캐릭터 밸런스가 천차만별이라 평이 좋지 못했는데, 이를 어떻게 재해석해서 낼지 궁금했던 팬들에겐 싱글플레이 위주로 개발 중이라는 소식이 다소 실망스러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인라인 스케이트만을 활용했던 젯 셋 라디오나 또다른 작품들과 달리, 봄 러쉬 사이버펑크는 스케이트 보드 및 자전거를 활용한 다양한 무브를 추가하면서 각기 다른 장비로 도시를 누비는 재미를 살렸다. 특히 캐릭터마다 능력치가 고정되어있고 변화가 불가능했던 젯 셋 라디오 시리즈와 달리, 트레일러를 통해 그라인드 슈즈를 다루던 캐릭터가 스케이트 보드를 장비하고 새로운 무브를 선보이는 등 한 캐릭터로 장비를 교체하면서 새로운 스타일로 도시를 질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봄 러쉬 사이버펑크는 당초 2021년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2022년으로 출시가 연기됐다. 해당 발표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었으나, 지난 1월부터 무브 티저를 시작으로 공식 홈페이지에서 개발자 노트를 갱신하면서 주기적으로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 봄 러쉬 사이버펑크는 오는 2022년 스팀, 닌텐도 스위치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이며 한국어판 출시 여부는 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