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게이머라면 들어봤을 그 이름, '존 로메로'가 GDC 2022에 연사로 참여했다. 그는 또다른 전설인 존 카맥과 함께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울펜슈타인 3D', '둠' 등 현대 FPS 그리고 3D 게임의 방향을 제시한 작품을 제작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 뒤로도 여러 개발사를 거쳐 게임을 개발해왔으며, 워렌 스펙터를 전격 지원해서 '데이어스 엑스'를 출시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2015년부터 로메로 게임즈를 설립, 둠의 신규 에피소드 및 금주법 시대를 무대로 한 전략 게임 '엠파이어 오브 신'을 출시했다.

그가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울펜슈타인 3D를 냈던 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2년으로, 당시에는 텍스처맵을 입힌 3D 슈팅 게임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시기였다. 흔히 말하던 386~486 컴퓨터 시대로, 이 당시에는 GPU도 없고, 해상도도 320*200에, 기가바이트는커녕 몇 백 메가바이트라는 단위도 쉽게 듣기 어려웠다. 윈도우 이전이라 마우스는 거의 쓰지 않고 DOS 명령어를 치는 게 일상적이던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게임이 아이들을 위한 놀이라는 인식이 짙었던 만큼, 피가 튀고 사체가 적나라하게 남아있는 연출 때문에 이후에 출시한 '둠'과 더불어서 당시엔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그 옛날 PC 게임 환경에서 어떻게 게임을 개발하고 테스트를 진행해왔을까? 그리고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 게임을 출시하고, 사람들에게 마케팅했을까? 로메로는 울펜슈타인의 첫 기획부터 출시까지, 그 6개월을 회상하면서 청중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나갔다.

▲ 로메로 게임즈 존 로메로 디렉터


■ 1992년 1월: 울펜슈타인 3D 시작부터 알파 구축까지


울펜슈타인 3D의 첫 시작은 1991년 크리스마스부터 시작됐다. 이미 그는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커맨더 킨, 카타콤 3D 등 5개의 게임을 개발했었던 상황이었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발전된 사양의 PC를 활용한 새로운 작품을 크리스마스 휴일 동안 고민했다.

당시는 CPU는 흔히 386이라고 부르는 인텔 80386에, 16비트 컬러 VGA, 사운드 블래스터 오디오 카드를 쓰던 시절이었다. 이를 활용할 차기작은 '커맨더 킨7'이었고, 1992년 1월쯤에는 이미 프로토타입을 개발해서 데모를 여러 차례 진행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로메로는 지난 6개월 동안 계속 시리즈를 이어왔던 커맨더 킨을 또 만들기보다는 다른 작품을 만들기를 희망했고, 에이드리언 카맥도 이에 동의하면서 울펜슈타인 3D의 개발이 시작됐다.



▲ 당시 게임 개발에 사용하던 PC의 스펙은 16비트 컬러 VGA에 사운드 블래스터 오디오, 386 CPU였다

로메로는 커맨더 킨7 개발이 취소된 이후 만들 신작의 방향을 텍스처맵을 활용한 또다른 3D 게임으로 잡았다. 이미 전에 카타콤 3D로 이러한 작품을 만든 경험도 있었고, 이를 좀 더 색다르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주제로 색다른 작품을 만들지는 정하지 않은 터라 다른 팀원과 논의가 필요했다.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맡은 톰 홀은 '호버탱크 3D'를 더 발전시키자고 제안했지만, 로메로는 그보다는 클래식 게임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기로 하면서 1981년에 출시된 뮤즈 소프트웨어의 '캐슬 울펜슈타인'을 언급했다. 애플2 시절 출시한 이 게임 시리즈는 이드 소프트웨어 멤버들이 모두 다 즐기던 작품이었고, 이를 3D 슈터로 만들자는 로메로의 제안이 채택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진행됐다.

▲ 논의 끝에 뮤즈 소프트웨어의 '울펜슈타인'을 새롭게 3D 슈터로 만들자는 안이 채택됐다

제작이 결정되자마자 에이드리안 카맥이 아이디어를 시각화하기 위한 알파 버전 타이틀 화면 및 캐릭터 스프라이트 작업에 들어갔다. 이를 짐 놀우드가 커맨더 킨 엔진에 적용하고, 에이드리안 카맥이 그에 맞춰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추가 스프라이트 작업을 진행하는 식으로 알파용 빌드를 만들어나갔다. 그 시기에 로메로는 커맨더 킨의 퍼블리싱 담당자였던 어포지의 스캇 밀러와 만나 사업 계획을 전달, 여러 가지로 지원을 받았다.

스캇 밀러는 우선 16비트 컬러 VGA를 하나씩 더 구해줬다. 그 덕에 존 카맥이 이전보다 더 큰 화면에서 코딩을 좀 더 쾌적하게 할 수 있었고, 업무 효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래픽을 담당하던 에이드리언 카맥 역시도 더 다양한 색상을 더 빠르게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개발 속도가 몇 배는 빨라졌다.

그 시점에서 로메로는 스캇 밀러와 게임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유저에게 먹힐지 의논하고 있었다. 최초에는 각 에피소드마다 10단계의 스테이지를 만들고, 첫 에피소드가 끝난 뒤에 다음 두 에피소드를 즐기려면 따로 구매하는 그런 방식으로 기획됐다. 여기에 맞춰 존 카맥이 에이드리안 카맥이 만들고 짐 놀우드가 엔진에 적용한 애셋을 1주일만에 렌더링해서 테스트를 진행했다.

레벨디자인은 3D 텍스처맵이 아닌 2D 매트릭스를 기반으로 했으며, 레이어는 커맨더 킨에 사용한 것을 활용했다. 톰 홀이 아이콘과 아이템을 디자인하면 에이드리안은 게임에 사용할 무기와 적 디자인 및 각종 애니메이션을 작업했다. 당시 컨셉은 '런앤건'으로, 달려나가면서 나치들을 빠르게 소탕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지 않을까? 라는 로메로의 아이디어가 요약된 단어였다. 그에 맞춰서 개발팀원들은 이런저런 고민 없이 달리고, 쏘는 재미를 극대화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당시에는 폭력적인 표현에 대한 수위 조절이나 그런 것은 자신들의 고민거리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 당시 레벨디자인은 커맨더 킨 때와 동일하게 2D 매트릭스를 기반으로 제작했다

▲ 개발 당시에는 게임을 최대한 단순하고 재미있게 만드는 것에만 신경썼다고


■ 1992년 2월~3월: 비밀벽 등 디테일 구현의 비하인드 스토리


1992년 2월, 자금난을 겪기 직전이던 이드 소프트웨어는 시에라 엔터테인먼트에 투자 및 인수 제안을 받았으나, 결국 이는 무산된다. 그래서 당시 개발 중이던 울펜슈타인 3D의 개발 속도와 퀄리티를 둘 다 높일 필요가 있었고, 로메로는 어떻게 하면 유저에게 '재미'를 줄 수 있을지에만 집중했다.

그 중 하나가 총을 쏘면 적이 듣고 바로 반응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당시 기술로 이를 구현하기가 어려워서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해야 했다. 결국 그는 백그라운드 데이터에 사운드존을 컬러로 구분하고, 같은 사운드존에서 있으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바로 오는 식으로 시스템을 기획했다. 그렇게 해서 문이 닫혀있으면 사운드존이 달라서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문을 열면 사운드존이 동일해져서 적이 소리에 반응하게 되는 구조가 완성이 됐고, 이전보다 더 실감이 나는 적의 반응을 구현할 수 있었다. 다만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마저도 적이 반응해버린다는 단점이 있었고, 이를 해결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존 카맥은 그 까다로운 작업보다는 로메로가 비밀벽을 만들자는 제안을 더 반대했었다. 빠른 슈팅이라는 경험에 벽을 밀어버리는 요소는 굳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고, 이런 예외 코드를 기반으로 치트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요소가 재미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로메로가 간청하자 존 카맥은 이를 구현했다.

▲ 당시에 기술 제약이 있었지만, 어쨌든 레이어를 토대로 적이 소리에 반응하게끔 설계했다

▲ 존 카맥은 끝까지 밀 수 있는 벽을 추가하지 않겠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로메로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 1992년 4월~6월: 로고 및 음악 작업, 그리고 디스켓 양산, 출시


3월에 토대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자 4월에는 사운드 및 출시를 위한 밑작업이 진행됐다. 혹시라도 모를 저작권 이슈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수소문 끝에 뮤즈 소프트웨어 사가 갖고 있었던 모든 권리를 5,000달러에 양도받았고, 퍼블리싱 담당자인 스캇 밀러의 제안대로 당시 제작이 완료된 에피소드3까지의 버전을 체험판으로 미리 제작해서 판매한 뒤에 그 뒤 에피소드를 추가로 내기로 했다.

실제로 에피소드3까지 나온 버전을 미리 접한 테스터들은 호응을 보냈으며, 이에 힘입어 이드 소프트웨어는 나머지 에피소드도 빠르게 작업해나갔다. 아울러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던 만큼, 유저들에게 도움이 될 공략집도 세트로 팔기로 했다. 이드 소프트웨어에서는 이런 판매 전략에 다소 의문을 품었지만, 어포지의 제안에 따라 공략집도 제작했다. 그 무렵에 울펜슈타인이 PG 등급으로 나온 것이 이슈가 되긴 했으나, 그때는 '둠'만큼 크게 불거지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가장 힘들었던 작업으로 디스크마다 제각각 나뉜 파일을 다 모으고 인스톨한 뒤 이를 확인해서 압축, 플로피 디스켓에 담는 작업을 손꼽았다. 조금이라도 파일 관리가 잘못되면 디스켓 하나하나 다 찾아봐야했기 때문이었다.

▲ 당시에는 플로피 디스켓에, 공략집도 같이 판매했다

그리고 5월, 에피소드3까지 포함된 체험판이 제작되면서 3개월 동안의 크런치 모드는 끝났다. 그 사이에 로메로와 홀은 공략집을 제작했다. 정원에서 총을 쏘면 열쇠가 나온다거나 하는 여러 비밀들부터 초창기 작업물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긴 가운데 로메로는 힌트 매뉴얼에 자신이 테스트했을 때 가장 빨리 클리어했던 기록을 적어넣었다. 당시 스피드런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어찌보면 그때 이미 그렇게 빨리 클리어하기 위해 사람들이 도전하는 재미를 무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았을까 회고했다.

그런 절차를 거쳐 1992년 6월 15일, 전설적인 작품 '울펜슈타인 3D'가 완성판으로 출시됐다. 로메로는 마지막으로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돌아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과정을 거쳤지만, 게임의 근본인 '재미'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는 점은 동일했다는 점과 이를 살리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기획자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 존 로메로가 작성한 공략집 일부, 그가 최단 시간 클리어한 기록도 같이 적혀있다


■ Q&A


Q. 울펜슈타인 3D와 둠 이후 폭력과 비디오 게임의 상관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슈가 불거지지 않았나. 또 일부 국가에서 판매 금지가 되기도 했는데,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회사 밖에서 일어난 일에 크게 신경 안 썼다. 살점이 터지고 유혈이 낭자한 게임은 1992년에 크게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게임은 재미있게 즐기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폭력적이라거나 그런 건 크게 신경 안 썼다. 어떻게 해야 더 '재미'를 줄 수 있을까, 그런 부분에만 신경을 썼다.

독일에서는 나치 관련 콘텐츠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폭력성 때문에 판매가 안 된 것까지는 전해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런 여지가 있겠다 싶지만,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게임을 만들 때 어떻게 해야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지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고, 그래서 그때는 별로 신경을 안 썼다.


Q. 데모를 배포할 때 어느 정도까지 잘라서 내야 판매에 도움이 될지 판단한 기준이 무엇인가?

에피소드를 3개를 우선 만들었는데, 각 부분을 유저가 궁금해할 만한 시점에서 끊어버렸다. 성을 탈출한 장면에서 에피소드1이 끝나는 그런 식이다. 각 에피소드를 10단계로 나눈 이유는, 그렇게 10단계를 클리어하고 나서 각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다음 에피소드를 바로 보고 싶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이 부분은 그때 이미 여러 게임을 만들어서 경험이 쌓인 덕도 있다. 그 1년 전인 1991년만 해도 게임을 2개 만들었으니 말이다. 결국 이 부분은 여러 가지로 시행착오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스캇 밀러가 도움을 준 것도 컸고.


Q. 울펜슈타인 콘솔 버전이나 둠과 관련된 스토리도 듣고 싶다.

울펜슈타인 3D가 나온 뒤에, 일본의 한 회사에서 닌텐도 버전의 울펜슈타인의 판권을 계약했다. 그 뒤에 꽤 시일이 지나서 일본 권리를 행사했다.그런데 그때 일본쪽 기준을 맞춰야 하다보니, 여러 가지로 수정해야했다. 그 중 기억나는 게 유혈 표현이나 개가 죽는 그런 장면을 수정하는 거였다.

울펜슈타인 3D 이후에, 사운드나 이펙트 같은 건 둠에도 많이 재활용됐다. 울펜슈타인 3D까지가 아마 여러 가지로 재미있었던 경험이 많았고, 둠 이후부터는 사람이 늘다보니 여러 가지로 일이 있었다. IP 자체는 아직도 잘 나가고 시일이 지나면서 더욱 쿨해지고 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웃음).


Q. 울펜슈타인3D 개발할 때 가장 힘들면서 재미있던 도전 과제는 무엇이었나?

존 카맥을 설득하는 거였다(웃음). 밀어낼 수 있는 벽도 그렇고, 내가 어떤 기획을 들고 나오면 존 카맥이 "이건 안 돼"라고 얘기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내가 왜 이런 걸 만들어야 하는지, 게임에 재미를 더하려면 이런 게 꼭 필요하다고 설득을 해야만 했다. 그게 내게는 무엇보다 힘든 일이지만,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다.


Q. 그 시절엔 도트 찍고 할 때 어떤 프로그램을 썼나? 또 빌드 수정은 어떻게 했나?

여러 번 저장하는 것도 당시에는 정말 싫었다. 왜냐면 그럴 때마다 약간씩 용량이 낭비가 되곤 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마저도 플로피 디스켓에 담기냐 안 담기냐 기로에 서게 만들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래픽 관련 프로그램은 Mac의 i그래프를 썼었다. 그리드가 8픽셀 블록 구조로 된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다가 그렸다. 게임 내에서 구현할 때는 그걸 스크립트에다가 함수로 표현해서 이 그래픽을 불러오는 식으로 용량을 줄였다. 그런데도 빠르게 달리는 속도감을 내기 위해서는 벽 텍스처가 굉장히 빠르게 렌더링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일일이 나오면 빠르게 로딩이 안 되니까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많았다.

빌드 수정을 이야기하니까 울펜슈타인 3D 이후에 유저들이 이를 뜯어보고 더 어렵게 만들어서 즐기는 그런 게 유행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래서 둠은 오픈소스로 만들었다. 모드로 만들어서 유저들이 다르게 즐기는 것도 재미를 추구하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70년대~80년대 게임을 90년대에 와서 모드를 새롭게 깔거나 혹은 모드로 만들어서 즐기던 때였다. 그런 게 게임의 또다른 재미이지 않을까 싶다.


Q. 레벨 테스트는 어떻게 했나? 레벨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했으며, 또 테스트 과정에서 문제는 어떤 식으로 수정해나갔나?

이 부분에서 울펜슈타인 3D는 아트 디렉터가 중요한 게임이라고 하겠다. 레벨 디자인을 할 때 앞서 사운드존처럼, '색'의 조합이나 여러 시각적인 요소를 동원해서 설계를 해나갔으니까. 그리고 방마다 다른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타일을 만들어야할지, 또 어느 시점에서 벽의 재질이 달라질지 등등 설계할 때 아트적인 관점이 필요했다.

QA는 그때 개발에 참여했던 6명 전원이 같이 진행했다. 플레이하면서 버그가 생기거나 재미가 없다 싶으면 바로 공유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한 뒤에 수정했다.


Q. 울펜슈타인 3D 이후로 게임 개발 관련 기술이 엄청 발전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바뀌지 않은 것이나, 혹은 지금도 유용한 조언이 있다면 무엇인가?

버그를 발견하면 즉시 고치라는 점이다(웃음). 디버깅은 하루가 지나서 하면 너무 꼬인다. 만들어서 바로 테스트하고, 또 고치고 바로 테스트하면 코드의 구조도 복기가 되면서 좀 더 빠르게 수정할 여지가 있다. 물론 당시에는 어셈블리로 작업했으니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무언가 하고 나서 바로바로 실행하고 디버깅도 바로 하는 게 결론적으로는 나중에 꼬이지 않고 프로세스가 원활히 돌아가는 지름길인 것 같았다.

프로그래머한테 할 조언이라면 코딩만 하지 말고, 플레이를 QA에게만 넘기기보다는 직접 짠 걸 플레이해보길 권한다.


Q. 개발 과정이 인디 개발 느낌인데, 현대 인디 게임씬은 어떻게 보고 있나?

나는 게임잼을 여러 번 하기도 하고, 또 게임잼에서 여러 번 참가했다. 작년에도 여러 게임잼에 갔었는데, 내 생각에 인디는 게임 산업계의 핵심이다. 혁신이 탄생하는 곳이자,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다듬어가는 요람이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도 많은 인디 게임을 하면서 영감을 얻고 있다. 어디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보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또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가미하거나 변주하고, 그런 식으로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나 싶다. 그 좋은 사례가 마인크래프트이지 않을까.


Q. 울펜슈타인 3D에 공략을 보지 않으면 모를 비밀 같은 걸 구현한 이유가 무엇인가?

울펜슈타인 3D를 만들면서 그 제한된 용량 안에 재미를 더 넣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빠르고 간결한 슈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게임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갖가지 비밀을 소소하게 넣어둔 것이다.

사실 게임을 만들 때 어떻게 해야 새로운 재미를 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기획자의 주요 업무다. 마치 어떤 장난감을 봤을 때, 어떤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런 감각이라고 할까. 만들어진 것뿐만 아니라 만들 수 있는 걸로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재미를 전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