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개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은 꽤 오래 전 기억속에 묻어 두었던 추억을 되살리는 열쇠가 되었다. 게임으로서 '듄'을 접했을 때는 사실 알 수가 없었다. 사막이 뭔지, 가문이 뭔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접한 최초의 작품 '듄 2'는 그저 어려운 게임이었다. 단순히 주인공이 등장해서 나쁜 녀석들을 두들겨 패 주면 끝이던 대부분의 게임과는 뭔가 다른, 생각과 공부가 필요한 게임이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당시의 한계였다.

이후에도 몇 번의 듄 게임 시리즈가 나왔지만, 그리 인상깊게 다가오진 않았다. 아마 환경의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당시는 게임 하면 그냥 스타크래프트였으니까. 어쨌거나, 게임으로서는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듄' 그 자체는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외국에서 공부하던 이모가 영어를 가르쳐주겠다는 빌미로 가져온 원서가 프랭크 허버트의 '듄'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영어는 남지 못했지만 그 이야기는 남았다. 그걸 다 읽고도 왜 영어가 이 모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레토 아트레이데스부터 수천년을 이어진 모래 위의 대서사는 머리 속에 이미지화되어 아주 깊게 자리잡은게 확실했다. 영화를 다시 본 순간 이미지가 마치 화첩마냥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계되어 개발중인 게임 '듄: 스파이스 워'도 적잖이 기대하고 있었다. 엄청난 대작은 아니라 해도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텁텁함의 매력은 녹아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4월 26일, 아직 미완성인 '듄: 스파이스 워'가 얼리 억세스로 출시되었다.




RTS로 태어나 4X로

'듄: 스파이스 워'는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4X 게임이다. 일반적으로 4X게임은 턴제로 구축된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4X라는 장르가 많은 생각과 의사 결정을 요구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상황 판단이나 본능을 따르는 플레이보다는 장고를 거쳐 최적의 수를 계산하고,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턴제 게임이 가지는 묘미이고, 4X라는 장르적 특성은 이와 퍽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 아트레이데스, 하코넨, 밀수업자, 프레멘이 플레이어블 세력

하지만, 실시간 4X가 없는 건 아니다. 게임 내 속도만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면 실시간 4X도 그리 문제가 될 일은 없으며, 이미 출시된 게임 중 '스텔라리스'가 이와 같은 형태의 게임으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듄: 스파이스 워의 플레이 감각도 스텔라리스와 매우 유사한 편이다. '마이크로'가 아닌 '매크로'를 중시하는 대전략이면서도, 게이머가 답답함을 느끼지 않도록 게임 속도를 계속 조작해가면서 최적의 플레이를 하게끔 만든 그 설계 그대로다.

이래저래 듄 시리즈의 기념비적 게임이라 할 수 있는 '듄 2'와는 다른 모습이다. 듄 2는 현대적인 RTS의 시초라 불릴 정도로 기존의 게임관 대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게임이지만, 이번 작품은 딱히 충격을 주지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기존의 다양한 게임에서 볼 수 있었던 여러 요소들을 잘 섞은 후에 그 위에 모래를 두툼히 덮어 내어놓은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 병력만 잘 갖췄다면 미세 컨트롤은 크게 필요 없다.

그렇기에, 듄: 스파이스 워는 게임 장르 중 복잡한 편에 속하는 4X 게임임에도, 그리고 한국어를 지원하지 않음에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잘 어울린다. 애시당초 '듄'이라는 미디어는 4X와 잘 어울렸고, 실시간이기에 30년 전의 듄 2의 느낌도 살짝이나마 남아 있다. 게임의 근간 시스템은 생소하기보다 친숙하고, 4X 좀 했다 하면 금방 익힐 수 있다.

게임의 구조는 이렇다. 아트레이드, 하코넨, 밀수업자(스머글러), 프레멘으로 나뉜 네 세력이 한 지도에서 시작하고, 이 네 세력이 여럿으로 나뉜 중립 지역들을 확보하면서 자원을 쌓고 병력을 모으게 된다. 이후는 간단하다. 외교와 첩보, 전투를 반복하면서 행성의 패권을 차지하면 끝.

▲ 정치질은 패권 확보의 필수 과정

전투가 격해지면 진동이 생기는 바람에 샌드웜이 등장한다던가, 강철도 찢어버리는 모래 폭풍으로 인해 한 지역이 먹통이 되버리거나 충분치 못한 보급품으로 열사를 건너다 병력이 전멸해버리는 등의 변수를 고려하면서 차분히 싸움을 해 나가다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패권을 쥘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어느 4X게임이 그러하듯 반복적이지만 재미있다.

현 상황에서 게임으로서 아쉬운 부분은 아무래도 얼리 억세스 단계이다 보니 게임의 한계가 자주 보인다는 점 정도. 병종이 매우 적은데다 대부분이 보병진이기에 전투 상황은 상성과 지형의 의미 없이 그저 전투력 대결이 되버릴 뿐이며, 단순한 연구 트리나 진영별 특색의 부족, 그리고 4X 게임 치고는 퍽 작은 크기의 전체 지도와 무조건 네 개의 세력이 고정으로 등장하는 등의 한계가 있다. 게임 요소가 확충되면 모두 해결될 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 영화에 비하면 다소 귀여운 샌드웜, 어쨌거나 스치면 다 박살난다



모르면 그냥 게임, 알면 좋은 게임

정리하면, 얼리 억세스 상태에서 '듄: 스파이스 워'는 딱 그냥 돈 값 정도를 하는 게임이다. 대단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앞으로 개발 진척도에 따라 더 나아질 것은 확실하지만, 아마 게임 가격도 덩달아 오를 테니 앞으로의 가능성을 점쳐 좋은 게임이라 말하기도 뭣하다.

그럼에도 이 게임은 플레이 내내 꽤 즐겁고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게임의 구조와 무관하게 '듄'이라는 미디어를 굉장히 잘 녹여냈기 때문이다. 기존의 듄을 모르던 상태에서 작년 개봉한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듄'의 세계관은 꽤 복잡하면서도 방대하다. 각종 고유 명사와 생소한 개념들이 산재해 있으며, 서사의 흐름도 단순한 영웅의 일대기가 아닌 인물의 내면을 복합적으로 묘사하는 정치극에 가깝기 때문에 빠르게 파악하기 쉽지 않다.

▲ 전략 게임의 화면같지 않은 황량함

그리고, 이 게임은 일반적인 게이머층이 아닌 팬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온 몸으로 드러내듯 이와 같은 고유 개념들을 여과없이 게임 내에 속속들이 넣어 두었다. 대기 중 극소수의 수분을 잡아채 물을 얻는 '윈드 트래퍼'나 귀족 가문들의 협의체인 '랜드스래드', 다른 영상 미디어에선 보기 어렵지만 듄 시리즈에서는 단골처럼 등장하는 잠자리 비행기 오니솝터, 그리고 듄 시리즈의 마스코트인 샤이 훌루드(샌드웜)과 끝없이 펼쳐진 모래 사막까지 말이다.

물론, '듄'의 매력을 모두 담기엔 아직 모자라는게 맞다. 황제의 가문인 코리노 가문은 스파이스 상납을 받는 형태로 간접적으로만 등장했으며, 던칸 아이다호나 레이디 제시카 같은 인물들은 보좌진으로 등장하지만 일종의 버프만 줄 뿐 실질적으로 게임 내에서 보기는 어렵다. 사다우카르나 베네 게세리트,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귀족 가문들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 행성을 무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 부터 원작의 느낌이 잘 살아 있다

하지만, 얼리 억세스가 끝나고 정식 출시가 이뤄지는 시점을 기준으로 콘텐츠 확보만 충분히 되어 있다면, '듄: 스파이스 워'는 비록 대중적 인기를 끌 시대의 메타 게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리즈 팬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게임으로서 충분히 기능할 잠재력을 보여준다. 이번 기사는 정식으로 점수를 내는 리뷰가 아닌, 단순히 첫 인상을 담은 체험기이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평범하면서도 재미 구조를 확실히 갖추고 있으며, 세계관을 잘 녹여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좋은 게임이 될 재목임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듄: 스파이스 워'는 여전히 텁텁하다. 세상 누가 메마름과 먼지, 갈증을 좋아하겠냐마는, '듄' 시리즈의 팬들에게 장대한 사막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암투와 서사에 앞서 사막 그 자체로 매력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다. 얼떨결에 2라는 넘버링을 써 버린 RTS 장르의 시초 '듄 2'의 출시 이후 30년. 게임은 발전했고, 이전과 같은 진보는 찾아볼 수 없지만, 여전히 '듄'의 공기는 텁텁하기 그지없다.

▲ 팬들에겐 충분히 선물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