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모두를 즐기는 이들도 꽤 있긴 하지만, PC와 콘솔 게임을 주로 즐기는 이들에게 '보드게임'이란 영역은 다소 복잡미묘한 위치에 놓여 있다. 제대로만 하면 지금 하는 게임들 못지 않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제대로 하려니 뭔가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고 달려들어보자니 같이 할 친구도 필요하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하다. 간단한 게임부터 해볼까 하면? 그건 또 별로 재미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흥미는 있되, 가까워지기는 어려운 상태로 평행선을 달리는게 일반적인 비디오 게이머와 보드게임의 관계. 나라고 뭐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렇기에, '플레이X4' 한 켠에 자리한 '보드게임 작가 존'을 보면서도 이게 어떤 개념인지 한 번에 와닿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게임 개발에서 '작가'라고 하면, 시나리오 라이터가 이에 대응되는 포지션일텐데, 그들을 위해 따로 공간을 만드는 행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작가 존은 그리 크지 않았다. 9개 정도의 테이블에 게임 작가들이 앉아 있었고, 참관객이 다가서면 게임을 소개하고, 플레이 방법을 알려주는 형태였다. 개중에는 무료로 게임을 배포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올해 처음 유치되는 공간이다 보니 약간의 어색함이 감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보드게임을 잘 모른다는 거였다. 어째서 이런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참여한 '작가'분들은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를 묻고 싶었는데,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자연스러울지조차 감이 안 잡혔다. 그렇게, 부스 주변을 서성거리다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보드게임작가협회'라는 명찰이 보여 말을 걸었고, 살짝 물어볼까 하고 시작한 대화가 자리를 잡기 시작해선 꽤 심도 깊은 인터뷰가 되었다.


▲ 보드게임작가협회 이주화 협회장



Q. 시간을 내 줘서 고맙다. 먼저, 간단히 본인을 소개해줄 수 있는가?

보드게임 작가들을 지원하는 단체인 보드게임작가협회의 협회장 이주화라고 한다. 보드게임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작가로서 게임 제작도 하고 있다.


Q. 말이 나와서 그런데, 보드게임 업계에서 '작가'라는 호칭의 의미가 무엇인가?

일반적인 PC게임의 개발자에 대응하는 개념이겠지만, 세부적으로는 조금 다르다. 이걸 이해하려면 보드게임 산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약간 알아야 편한데, 간략히 설명하자면 보드게임의 뿌리는 우리가 아는 게임 산업이 아닌, 독일 근방의 유럽권에서 시작된 서적, 출판 산업에 있다.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두 산업의 유사점은 표지를 보면 되는데, 모든 보드 게임은 포장 표지에 작가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서적 또한 표지에 작가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던가? 심지어 '할리갈리'도 초판본 표지를 보면 작가인 'Haim Shafir'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이 작가들을 중심으로 시장이 구성된다. 보드게임 산업에는 수많은 유명 작가들이 있고, 이 작가의 골수 팬들은 게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일단 작가명부터 보고 게임을 사가곤 한다. 비디오 게임의 경우 개발자도 영역에 따라 여러 포지션으로 갈리지만 보드 게임은 사실상 게임의 핵심을 한 사람이 만들어내고, 개인 단위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작가'라는 호칭을 쓰는 편이다.


Q. 이전에는 플레이X4에 작가 존이 따로 없었는데, 올해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건가?

보드게임작가협회 외에도 보드게임산업협회가 존재하고, 산업협회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참가하게 되었다. 또한, 지난 주 열린 보드게임페스타에도 비슷하게 작가 존이 운영되었다. 앞서 말했듯, 보드게임 산업에서 작가의 위치는 꽤 중요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봄, 가을에 열리는 보드게임 행사인 '게임마켓'같은 경우는 사실상 엄청나게 큰 작가 존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 '작가 존'이라는게 사실 비디오게임업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면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산업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개념을 철저히 숨기려 하고, 보안에 만전을 기한다. 작가 존은 비디오게임으로 치면 PD가 기획안을 들고 대중에게 선보이는 건데 아마 굉장히 위험할 거다. 게임 룰에 대한 저작권 보호는 법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편인데,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셈 아닌가?

하지만 보드게임업계는 그런게 없다. 앞서 말한 출판업계와의 유사성이라 생각해도 되는데, 어떤 작가가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방문했을 때, 출판을 거절하고 출판사가 이 내용을 배껴 책으로 내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보드게임은 비디오게임처럼 개발사가 만드는 형태가 아닌, 작가가 만들고 판권을 회사가 계약하는 형태이다 보니 작가 로열티를 빼돌린다거나 배낀다는 건 상식적으로 통용이 되지 않는 개념이다. 같은 '게임'의 카테고리를 지니지만 비디오게임과는 다른 보드게임 업계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 '보드게임존'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작가 존은 올해가 첫 구성


Q. 보드게임작가협회에 소속된 작가는 몇 분 정도 계시고, 협회가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가?

지금으로서는 100여 분의 작가 분들이 소속되어 있다. 물론, 아직 전업으로 작가 활동을 하는 분들은 많지 않다. 국내 작가 분들 중에도 몇몇 분은 해외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전업 작가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 대부분은 본업을 병행하면서 본인만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또한, 아직 퍼블리싱의 단계를 겪지 않은, 도전의 단계에 계신 작가분들도 소속되어 있다.

역할을 설명하자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도움을 준다. 말했다시피 대부분의 작가 분들은 전업이 아닌 부업으로 작가 활동을 하고 있고, 당연히 게임 개발 외 다른 영역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 계약서는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마켓에 입성해야 하고, 좋은 퍼블리셔와 그렇지 못한 퍼블리셔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등이다.

그 외에도 소속 작가들끼리 주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의 게임을 테스트, 피드백하고 조언과 감상을 남기기도 한다. 보드게임은 인터넷 연결을 통한 테스트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많은 오프라인 테스트를 요구하는데, 같은 분야의 종사자들이 모이는 테스트는 굉장히 값진 자리이다.


Q. PC, 콘솔 게이머로서 보드게임을 플레이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부끄럽지만 보드게임의 매력이 뭔지, 그리고 어떤 게임을 하면 보드게임의 매력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겠다. 좀 알려줄 수 있는가?

그런 사람이 매우 많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가 옆에서 알려주지 않는 걸 혼자서 알아보고 공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며, 어려운게 자연스러운 거다. 나만 해도 지금은 협회장을 하고 있지만,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PC, 콘솔 게임만 했지 보드 게임은 접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30이 넘어서야 첫 보드 게임을 해보고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임을 사 모으다 보니 집의 창고가 가득 찼고, 결국 나만의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어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보드게임 카페를 열었다.

너무나 많은 보드게임이 있고, 그만큼 좋은 게임이 많아 쉽지는 않지만, 이런 보드게임만의 매력을 알려주면서도 비교적 쉬운 게임이라면 '서머너 워즈'와 '센추리: 향신료의 길'을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PC, 콘솔 게이머라면 조금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혹시 '다크 소울' 플레이 해 봤는가?

물론 해 봤다.

'갓 오브 워'는?

그것도 플레이했다.

잘 모르는 사실인데 그 두 게임 전부 다 정식 보드 게임이 있고, 많은 이들이 플레이하고 있다. IP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PC, 콘솔 게임이 보드 게임으로 만들어진 사례는 굉장히 많고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 게이머들에게는 이런 게임들이 아마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 한국어로도 정식 출시된 '갓오브워', 쉽게 구매할 수 있다.


Q. 솔직히 전혀 몰랐다. 반성해야겠다. 앞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보드게임 작가로 나섰다고 했는데, 그만한 각오를 할 만큼 매력적이었던건가?

말했지만, 나도 PC, 콘솔 게이머였고 당연히 게임 개발에 대한 꿈은 꾸고 있었다. 코나미, 캡콤, 이런 이름들을 접하며 게임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도 저들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나?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게임 개발이라는 과정이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기에 게임 개발에 참여하려 하면 어떻게든 가능은 했겠지만, 게임 개발은 알다시피 대표적인 집단 창작 아닌가?

게임 개발을 전부 좌지우지하려면 PD가 되어야 하지만, 내가 PD를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크레딧에 이름 한 줄 올라가는 수많은 개발진 중 하나가 되는 건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게임 개발을 꿈꾸기보단 그냥 게이머로 남는 길을 택해왔었다.

하지만, 보드게임은 아니다. '작가'의 이름이 표지에 붙고, 작가가 게임의 모든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온전히 '내가 만드는 게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아마 게임 개발이라는 옛 꿈이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뭐... 이렇게 되었다.


Q. 작가 협회에 있으니 실제로 게임을 제작하기도 할 텐데, 어떤 게임을 제작했나?

지금까지 몇 종의 게임을 제작하긴 했는데, 하나만 말하자면 최근 개발한 'Last Message'가 있다. 범죄자와 형사, 피해자로 역할을 나누어 진행하는 추리 게임인데, 프랑스 퍼블리셔와 계약하면서 정식 출시되었다. 이 게임이 올해에 보드게임 최대 커뮤니티인 '보드게임긱(BoardgameGeek)'의 시상식인 '골든긱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수상까지는 아직 모르지만, 노미네이트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다.

▲ 이주화 작가의 'Last Message', 표지 우상단에 작가명이 기재되어 있다.


Q. 이런 보드게임 하나를 제작하는데 보통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나?

보드게임의 제작 과정은 비디오 게임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개발 기간을 특정하기가 정말 어렵다. 비디오 게임은 기획안이 나오면 이후 개발 과정은 개발 인력이나 개발비, 인프라 등을 고려해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지만, 보드게임은 각각의 부분을 만들어내는 과정보다 게임의 핵심 로직의 비중이 훨씬 크기 때문에 이를 얼마나 빠르게 해내냐에 따라 제작 기간이 달라진다.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떤 음악은 몇 달 동안 아이디어를 모아 만들었다고 하고, 반면 또 어떤 곡은 단 5분 만에 멜로디가 생각났다고들 하지 않나? 보드게임 제작 또한 유사하다. 아이디어만 번뜩이면, 굉장히 빠르게 제작될 수도 있으며, 많은 이들이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 '밸런싱'작업은 비디오 게임에 비해 변수가 적기에 사실 테스트만 충분히 할 수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Q. 보드게임 시장이 한국 내에서 계속 커지고 있다고 했는데, 앞으로도 보드 게임 산업이 계속 성장하리라 믿는가?

비디오게임 시장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없지만, 글로벌 단위로 볼 때 보드게임 시장은 이미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보드게임산업은 아직 그 중 일각이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이 맞다. 작가분 중에는 14개국 언어로 번역된 게임을 만든 분들도 계시며,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분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이 문화는 다양할수록 좋고 인간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놀이를 원한다. 보드게임 또한 비교적 덜 알려졌을 뿐, 재미가 진짜인 이상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플레이X4 현장에서도 보드게임의 인기는 꽤 높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