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게임이 없다. 심각한 문제다.

그 옛날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춘궁기의 고난을 상징하던 보릿고개가 있었다면, 오늘날 게이머들에게는 가을고개가 있다. 여름 즈음 시작되어 E3, 게임스컴, TGS로 이어지는 연례 게임 행사에서 수많은 신작들이 발랄하게 모습을 드러낸 후, 전년도에 공개한 작품들 중 다수가 실제 출시되는 연말 시즌까지의 공백기.

대부분은 게임 출시 트렌드고 나발이고 마이페이스로 출시 일자를 잡는 게임들이 조금은 있기에 크게 와닿지 않지만, 아주 가끔은 올해처럼 가을이 허전한 경우가 있다. 드문드문 등장하는 게임들에 눈길이 가긴 하지만, 이미 나처럼 일상 생활이 박살나버린 하드코어 게이머들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별똥별일 뿐. 예전같으면 너무 게임에 심취해버린 내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다고 생각하고 말았겠지만, 주변에 생각보다 '게임 불감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그간 출시된 좋은 게임들에 쾌락 적응을 끝내고, 만족의 역치가 높아져버린, 이미 틀린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제 이 가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의 초가을이 유독 힘겹게 느껴진 이유도, 아마 10월 말부터 시작되는 대작의 폭풍 때문이었을 거다. 즐거운 인디 게임도 많고, 부담없는 F2P 게임도 많지만, 역시 코어 게이머들의 입맛에는 대기업의 양념이 더해진 AAA급 게임이 답이니까. 바로 다음 주부터 연말까지 이어질 2022년 최후의 출시 파티 속 게임들을 정리해 보았다.

게임명: 고담 나이트
장르명: 액션 어드벤처, RPG
출시일: 2022. 10. 21
한줄요약: 배트맨 없는 배트맨 게임
개발사: 워너 브라더스 게임스 몬트리올
서비스: 워너 브라더스 게임스
플랫폼: PC / XBX|S / PS5
흥미 포인트: DC판 마블 어벤저스가 될 것인가?

고무줄 없는 팬티, 앙꼬없는 찐빵을 넘어 배트맨 없는 배트맨 게임이다. 사실 배트맨이 없다지만 큰 상관은 없다. 배트걸이 나오니까. 요즘같은 평등의 시대에 성별이 뭐가 문제랴. 어차피 복면 둘둘 쓰고 나오는데. 배경은 이전의 '아캄 시리즈'와 똑같이 고담 시. 그리고 주인공은 배트맨의 사이드킥으로 활동했던 4인방. 로빈과 나이트윙, 배트걸, 그리고 레드 후드다.

이 게임의 특이점은 장르가 '액션 어드벤처 RPG'라는 것. 레벨 시스템이 존재하고, 2인 코옵이 가능하고, 네 개의 캐릭터들을 원하는 대로 바꿔가며 플레이할 수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최근 3부작에서 게임의 방향성이 변했던 것과 유사한 변경점이다. 지형과 적만 존재하는 세미 오픈월드였던 '아캄 나이트'와 달리 일반 시민들도 돌아다니는 본격적인 오픈 월드로서의 고담 시를 배경으로 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 아캄 나이트와 달리 락스테디가 아닌 워너 브라더스 게임스 몬트리올이 개발했지만, 이들 또한 아캄 오리진에서 꽤 괜찮은 개발력을 보여주었던 만큼 기대해볼만 한 작품이긴 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꾸 스퀘어에닉스의 마블 어벤저스의 DC판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있다.


게임명: 베요네타3
장르명: 액션
출시일: 2022. 10. 28
한줄요약: 올누드 누나의 건법(Gun法) 액션
개발사: 플래티넘 게임즈
서비스: 닌텐도
플랫폼: NSW
흥미 포인트: 이 장르가 아직도 먹힐까 과연...?

본인의 머리카락으로 옷을 지어입고 다니는데 싸우다 보면 머리카락을 사용해야 하기에 격렬하게 싸울수록 점점 노출도가 올라간다는 발칙한 설정의 마녀가 총 달린 하이힐과 쌍권총을 장비한 채 역시 해괴한 무브먼트로 싸운다는, 말만 들어도 기괴한 컨셉이지만, 그 기괴함만큼 매력이 대단했기에 게이머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던 '베요네타' 시리즈의 3번째 작품.

2017년 첫 발표 이후 개발 기간이 너무 길어져 '하프 라이프' 해버린 것 아니냐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지만, 플래티넘 게임즈는 어떻게든 게임을 완성시켰고, 출시를 목전에 두었다. 게임의 알파이자 오메가요, 이 게임의 존재 이유인 베요네타의 기상천외한 컨셉도 그대로다.

문제는, '논스톱 클라이맥스 액션'이라는 역시 기이한 장르명을 자칭하지만 결국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부터 이어져 온 스타일리쉬 액션 장르인 이 게임이 지금에 이르러 먹힐 수 있는가이다. 전작인 2편이 출시되었던 2014년에도 이미 끝물에 가까웠던 장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만큼이나 게임의 깊이를 중시하는 요즘 게이머들에게 이 장르가 먹혀들지는 까 봐야 아는 거다.


게임명: 콜오브듀티: 모던 워페어2
장르명: FPS
출시일: 2022. 10. 28
한줄요약: 캠페인 하면 아직 우리다 이거야
개발사: 인피니티 워드
서비스: 액티비전 블리자드
플랫폼: PS / XBOX / PC
흥미 포인트: 돌아온 비누 중사

2018년에 출시되어 저물어가던 '콜오브듀티' 프랜차이즈의 이름을 다시 신의 의자 다리 정도까지 올려둔 '모던 워페어 리부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그 사이 콜드 워와 뱅가드라는 간식거리가 잠깐 출시되긴 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신경쓰지 말자. 사실상 지금 콜오브듀티라는 이름값에 어울리는 시리즈는 이 모던 워페어 리부트 시리즈일 뿐, 나머지는 그냥 워존 컨셉 변경용 패치 같은 거니까.

어쨌거나, 러시아와 치고박은 나머지 뉴욕이 쑥대밭으로 변해버린 이전의 세계관은 러시아의 진정한 전투력이 확인되서인지 없던 일로 되었으며, 이에 따라 다발성 장기부전과 과다출혈로 저승길을 건넜던 존 '소프' 맥태비시 대위가 개발자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군복무를 시작했다. 끔찍한 건 계급도 중사로 롤백되어 버렸다는 것. 이 정도면 소프에게 어디가 지옥일지는 꽤 명백하다.

오랜 세월 부침을 반복한 시리즈이지만, 기대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선형 캠페인이라는 한계점이 뚜렷한 장르에서도 아직 더 많은 재미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전작인 모던 워페어 리부트가 증명했고, 시리즈 팬들에게 진정한 콜옵 캠페인은 인피니티 워드가 방향타를 잡는 본가 시리즈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게임명: 승리의 여신: 니케
장르명: TPS
출시일: 2022. 11. 04
한줄요약: 총기에 반동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개발사: 시프트업
서비스: 레벨 인피니트
플랫폼: 안드로이드 / iOS
흥미 포인트: 실제로는 싸우느라 볼 시간도 없음

누가 봐도 그냥 미소녀인데 전쟁 기계라고 이름붙인 무언가가 나와 어정쩡한 은엄폐를 보여준 후 총기 반동이라는 전투적 리듬에 맞춰 위아래위위아래 쉐킷을 반복하는 훌륭한 게임...일 거라 예상되었지만 막상 테스트에 돌입하고 나니 생각보다 깊이가 있는데다 전투가 긴박한 나머지 기대했던 것들을 볼 시간조차 없다는 반전의 게임.

물론, 시프트업은 전작부터 라이브2D기술에는 도가 튼 모습을 보여주었고, 김형태 대표의 아트 스타일이 라인을 드러내는 쪽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이들이 그저 순수히 좋은 게임을 만들었는데 게이머들이 눈에 뭐가 씌워져 있어 그런 것만 보이는 뭐 그런 건 아니다. 누가 봐도 노린 건 맞다.

하지만, 눈만 흐뭇한 게임이 될 거란 기대에서 예상외의 훌륭한 게임성까지 보여주면서 호평받는 기대작 반열까지 올라선 상황. '승리의 여신: 니케'는 이번 기사에서 꼽은 유일한 모바일 게임이다.


게임명: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장르명: 액션 어드벤처
출시일: 2022. 11. 09
한줄요약: 테이큰의 리암 니슨보다 무서운 아버지
개발사: 소니 산타 모니카 스튜디오
서비스: 소니
플랫폼: PS5
흥미 포인트: 그 아버지한테 대놓고 개기는 아들

명실상부 올해 최고의 기대작이자, 게임 이름만으로 고티를 노려볼 수 있는 게임. 솔직히 과장 같지만, 그만큼 전작의 위상이 높디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디 오더 1886'까지만 해도 약간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 정도였던 소니의 퍼스트 파티 산타모니카 스튜디오가 너티 독의 뺨따구를 날릴 정도로 위상이 올라서게 해준 게임이 바로 전작인 '갓 오브 워'였기 때문이다.

게임의 흥행이 어떨지는 사실 별로 의심하는 이들도 없다. 전작이 워낙 대단했기에 배경과 서사가 바뀌어도 딱 그 정도 수준만 유지하면 최다 고티도 노려볼 만한 게임. 올해는 '엘든 링'이라는 걸출한 경쟁작이 있겠지만, 전작을 넘어서는 임팩트와 깊이있는 서사를 보여준다면, 그 엘든 링을 꺾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걱정되는 점은 그 누구라도 재수 없으면 바로 걸려 버리는 소포모어 징크스. 전작만큼만 해도 좋다지만, 진짜 전작만큼만 해버리면 쾌락적응을 끝낸 게이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크레토스의 어깨 위에는 많은 것들이 올려져 있지만, 사실 가장 무거운 건 이 게이머들의 기대일 거다.


게임명: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용군단
장르명: MMORPG
출시일: 2022. 11. 29
한줄요약: 미워도 다시 한 번
개발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PC
흥미 포인트: 이번 악역이 그래서 누구래?

겉보기엔 모진 삶을 겨우 연명하는 게임으로 보이기 쉽지만, 사실 아직도 전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MMORPG인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9번째 확장팩.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또 음흉한 뭔가가 음모를 꾸몄고, 그 음모의 냄새를 맡은 티탄 감시자가 티르의 등대에 불을 밝히자 이 불빛을 본 용들이 어디선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배경은 이쯤 설명하고 게임으로 넘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건 '용군단'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용 조련술. 드래곤 길들이기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드래곤을 길들여 오렌지족마냥 온갖 튜닝을 가할 수 있는데, 여기서 포인트는 확장팩 초기부터 비행을 풀어버린다는 점이다. 콘텐츠 소모 속도 조절을 위해 중반 이후에나 풀리는 비행을 미리 풀어버린다는 건, 새로운 필드인 '용의 섬'의 레벨 디자인도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이뤄질 거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새로운 종족인 드렉티르와 짝꿍으로 맺어진 직업 기원사도 게임의 신 요소다.

하지만, 많은 게이머들이 궁금해하는 건, 이번엔 또 누굴 무찔러야 하냐는 점. 이미 숱하게 적용된 확장팩에서 이미 악당들이란 악당들은 죄다 조지고 부수고 무찔렀는데, 누가 아제로스에 꿀이라도 발라둔 건지 정체모를 벌떼가 또 달려들었다. 설마 또 어디 숨어있던 트롤들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게임명: 워해머 40,000: 다크 타이드
장르명: 협동 FPS
출시일: 2022. 11. 30
한줄요약: 숨겨진 협동 게임의 강자
개발사: 팻샤크
서비스: 팻샤크
플랫폼: PC, XBX|S
흥미 포인트: 아는 사람만 아는 게임을 넘어서길

솔직히 팬심으로 넣었지만 잠재력은 충분한 게임. 개발사인 팻샤크는 피드백이 느려도 너무 느린지라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이들의 전작인 '버민타이드' 시리즈는 협동 슈터는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모범이 될 정도로 잘 만든 게임이기 때문이다.

'버민타이드' 시리즈와 달라진 점이라면, 역시 세계관의 변경. 기존 작품들은 워해머 판타지를 기반으로 했기에 총기는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이고 망치나 날붙이로 악당들의 골통을 부숴야 했는데, 몰락하긴 했어도 시기 상 엄청난 세월이 흐른 '워해머 40,000'이 배경인 이번 게임은 총기가 주인공이 되면서 '슈터'라는 장르에 걸맞는 작품이 되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네 캐릭터를 조작하는 협동 게임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다른 게임은 많지만, 무지막지한 몬스터 웨이브를 오로지 파티의 힘만으로 뚫어내야 하는 로망에 가까운 플레이를 가장 잘 보여주었던 '버민타이드' 시리즈의 느낌을 이번에도 구현할 수만 있다면 대성공이다. 지독하게 안 해주던 한국어화도 이젠 해 준다니 다행이다. 이제 영어 보고 도망가는 사람은 없을테니...


※ 그 외 후보에 있었다가 탈락한 작품들

스컬 앤 본즈: 유비소프트의 야심작인데 야심이 너무 커서 출시일이 내년 봄으로 밀려버렸다...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3: 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