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시리즈는 인벤 글로벌 기자 존 팝코(John Popko)가 작성한 페이커 특집 기획기사입니다. 기사는 총 8부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편은 이지훈편으로 페이커와 이지훈의 라이벌리에 대해 담고 있습니다.


‘이지훈’ 이지훈의 카서스가 미드라인에 나타나자 용산 이스포츠 스타디움 관중들에게서 커다란 함성 소리가 터져나온다. 그의 맞은편에는 신예 ‘페이커’ 이상혁의 르블랑이 웃고있다. 솔랭에서 이름을 날리던 슈퍼 루키의 겨우 두 번째 LCK 경기였다. 붉은 SKT T1의 유니폼에 색깔을 맞춘 헤드셋을 착용하고 집중된 표정. 이 때만 해도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르블랑의 본 모습처럼 그 누구도 페이커의 미래를 알수 없었다.

그리고, 르블랑처럼, 페이커는 마법을 부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니언들이 밀려들고 페이커는 세계 리그오브레전드 이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을 예고하듯 완벽한 경기를 선보였다. 이 경기는 아직까지도 리그오브레전드에서 가장 완벽한 게임 중 하나로 남아있다. 웬만한 사람이면 패배할 만한 라인전 매치업 승리부터, 아무도 보지 못한 킬각을 잡는 것까지. 심지어 너무도 태연한 모습과 자세로 마치 이보다 쉬운 일은 없다는 듯이 상대의 의지를 온전히 꺾어 버렸고, 상대는 빠르게 항복을 선언했다.

이 경기는 아직까지도 페이커의 명경기,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경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경기에서 페이커가 칭송받는 모든 이유가 다 나왔다. 혁신적인 움직임, 천재적인 결정력, 그리고 피아니스트 이상의 피지컬로 키보드를 다루는 능력.

적의 항복으로 넥서스가 스스로 파괴되자 온게임넷 카메라는 페이커를 단독으로 확대한다. 11/0/2 KDA를 기록한 페이커는 옅은 미소를 짓는다. 화면은 페이커의 모습에서 이지훈의 다소 찡그린 얼굴로 전환된다. 팀의 일방적인 패배와 본인의 1/1/1 KDA에 실망한 모습이다. 이 경기는 이스포츠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라이벌리 중 하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페이커를 상대로 한 번도 강했던 적이 없었다.


운명적인 대립

페이커가 커리어 동안 겪은 수많은 맞대결 중에서 이지훈과의 대결이 가장 이상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페이커 커리어 극초반부터 시작된 맞대결 중 첫 2년은 평범했다. 널리 알려진 페이커의 압도적인 첫 르블랑 경기를 제외하곤, 협곡에서 그들의 만남은 대부분 간단한 페이커의 승리로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라이벌리는 2015년에 시작된다.


SKT T1에게 2014년은 어려운 한 해였다. SKT T1 S와 K 두 팀 모두 롤드컵 진출에 실패했고, 최상급 경기력을 펼치기에 부족해 보이는 선수가 많았다. 게다가 변경된 규정으로 한 개의 구단에서 한 팀만 참여 가능하다는 점으로 인해 SKT T1을 비롯한 KeSPA팀들은 로스터를 통합해야만 했다.

2015년은 리빌딩의 해였고, 사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SKT T1 선수들은 은퇴를 하거나 해외로 눈을 돌렸고, 몇몇 핵심 기둥만이 남게 되었다. 어리고 뛰어난 선수들이 탑과 봇 라인을 책임질 수 있었고, 베테랑 정글러가 남아있었다. 사실 가장 큰 고민은 미드 라인이었다.

선택지는 두 개였다.

첫 후보는 페이커였다. 더 확실한 선수가 있을까? 최고의 폼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 최고 스타를 보유한 팀은 많지 않았다. 아니, 없었다. 2014년 페이커의 활약상은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어디까지나 기존에 페이커가 보여줬던 말도 안되는 경기력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뿐. 팀원들의 실력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선수인 페이커의 능력은 그대로였다. 극소수의 선수만이 발견할 수 있는 플레이들을 페이커는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내며 졌으리라 확신되는 한타를 뒤집었다. 그리고 여전히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고 있었다.

2014년의 SKT T1은 질만한 경기를 페이커의 능력으로 어거지로 이긴 경우가 많았다. 특히, 2014 NLB 서머에서 페이커의 경기력을 살펴보면 지금까지도 슈퍼캐리 하면 떠오르는 경기들이 대부분이다. 마치 팀이 다양한 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던지고 있을 때, 페이커 혼자 능력으로 팀을 지역 최고봉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2년차의 페이커는 여전히 최고의 선수였고, 진정한 챔피언이었다. 전 년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슈퍼루키는 이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어있었다. 게임을 사랑하는 마음과 승리를 향한 갈망, 그리고 만족하지 않는 천재 — 페이커는 경쟁 게임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선수였다. 게임을 캐리하는 그의 화려한 모습은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화려한 우승 커리어가 있음에도 아직도 스물도 안 된 소년이었다. 페이커를 선택하는 것은 절대로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두 번째 후보는 이지훈이었다. 사실 이지훈은 아마추어 팀인 GSG를 이끌고 NLB를 우승했던 것 외에는 이룩한 게 많지 않았다. MVP 블루 소속으로는 LCK와 NLB에서 조기 탈락을 면치 못했고, SKT T1 S로 이적했을 때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2014 OGN 챔피언스 준결승에 진출했을 때에도, SKT T1 K보다 좋은 성적이었지만 큰 호응이 없었다. 페이커의 하품이 더 화제가 되었을 정도이니.


하지만 사람들은 이지훈이라는 선수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페이커나 다양한 탑급 선수들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선수였을 뿐이다. 이지훈도 마찬가지로 이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이스포츠가 발전하길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다른 관심사도 많았다. 이지훈은 지적인 성향이 강했고 문학과 해외 고전 게임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솔로랭크 닉네임 Jon Irenicus (발더스 게이트 2 등장인물), 일모도원(日暮途远, 오자서) 등은 그의 취향을 잘 보여준다. 이지훈이 특히 주의깊게 읽었던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였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공리주의에 대한 이 책은 그의 커리어에 많은 영향을 줬다.

그의 게임플레이는 달랐다. 이지훈이 자신의 닉네임으로 계산적인 추방자 존 이레니쿠스를 고른 것은 그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 이지훈의 유별난 특징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지독하게 지루했다는 것이다. 그의 게임 플레이는 기술적인 반짝임이나 피지컬보다는 섬세한 포지셔닝과 정확한 타이밍이 전부였다. 이지훈은 그만의 방식으로 게임을 이겼다. 그 방식을 상대나, 해설자들, 그리고 전 세계 팬들이 좋아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모두의 즐거움을 희생해 본인과 팀에게 성공을 이끄는 스타일이었다. 대단한 건 확실하지만 리그오브레전드 이스포츠 씬에서 재미있는 게임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당황스러운 선수였다.



페이커 스타일의 경기는 비주류 챔피언을 골라 맵 전체를 샅샅히 뒤져 킬을 올리고 한타를 이겨 승리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이상적인 이지훈의 경기는 기본적인 컨트롤 메이지를 골라 미네랄 캐듯 충분히 파밍을 하고 상대의 숨통을 조금씩 조여 승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지훈이 경기를 하면 60분을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했고, 초장기전에는 600 CS도 넘겼다. 시차가 다른 해외에서 시청하는 팬들에겐 최악이었다. 카페인에 중독된 팬들조차도 잠재울 수 있는 위험한(?) 경기력의 보유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방법이 효과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페이커 본인조차도 이지훈은 만났던 미드라이너 중에 가장 뛰어난 미드라이너 중 하나였다고 얘기한 바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패배하더라도 이지훈은 홀로 빛나는 적이 잦았다. 페이커의 그 압도적인 르블랑 상대로도 1/1/1의 KDA를 기록한것 처럼 말이다. 이지훈은 경기의 중요 포인트를 잘 알고 있었고, 가장 힘든 매치업을 상대하면서 파밍이 가능했으며, 다른 팀원들에게 자원을 더 주더라도 스스로 성장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대부분 그의 팀원들은 그 기회를 잡지 못했지만.

경기를 읽는 능력이 좋은 사람들에게 이지훈은 강한 선수였고, 드디어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는 로스터에 속하게 된다. 바로 새 SKT T1의 로스터였다. 사실 이 모든 요소들을 살펴 봤을 때, SKT T1의 선택은 어려웠다. 슈퍼루키를 믿고 다른 라인업에 잘 적응할 수 있게 기도해야할까? 아니면 이미 팀워크를 형성하고 시너지를 만들어낸 익숙한 선수를 선택해야할까?


SKT T1이 내린 결론은 ‘둘 다’였다.


스프링 식스맨

SKT T1의 식스맨 로스터는 아직까지도 굉장히 논란이 많은 선택이었다. 당시에도 굉장히 이단아 적인 선택이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와 인기 없는 수면제 선수를 번갈아가며 기용하겠다는 것이니, 팬들과 분석가들은 머리를 긁적였다.

당시 결정에 대한 정확한 해명(?)은 영원히 들을 수 없을 테고, 수천가지 이유를 상상해볼 수는 있겠지만, 더 다재다능한 팀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페이커와 이지훈이 코치진의 생각을 언급한 바 있다. SKT T1 감독 ‘카터’ 최병훈 또한 이 결정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코치진은 돌발적인 상황 까지 생각해 선수 기용을 준비해야 하고, 그에 대처한 방법 중 하나가 식스맨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동기부여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밖에서 볼 때 선수가 완벽해 보여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리고 미리 팀의 다음 상황까지 생각해야 하는 데다가 경기 결과를 떠나서 내용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를 보고 팀의 문제를 미리 대처해야 하는 일도 많다. 모든 선수가 열심히 연습하고, 코칭스태프는 돌발적인 상황까지 생각해 선수 기용을 준비한다. 그런 준비 중의 하나가 식스맨 기용이고, 상황에 맞아 좋은 결과를 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식스맨 체제가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중요 포인트 중 하나는 동기부여였다. 페이커는 아킬레스의 무력을 가졌지만 SKT T1은 그의 약점인 발뒤꿈치도 가리고 싶어했다. SKT T1은 페이커와 이지훈을 데리고 스타팅 경쟁을 시키려 했고, 특정 경기에 알맞게 기용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2015년 초반에는 그 변화가 잦았다.

스프링 시즌이 시작하자 둘의 스타일은 음과 양만큼이나 달랐다. 페이커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모든 플레이들을 계속 보여줬다. 수많은 위험도 높은 챔피언 픽, 다양한 밴 유도, 그리고 슈퍼플레이를 포착하는 능력. 페이커의 피지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고 엄청난 기세로 상대를 썰어나갔다.



이지훈의 기술은 덜 뛰어났을지언정 상황에 따라 더 효과적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스프링 메타에서 그런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이지훈에게 제라스나 카시오페아를 쥐어주면 페이커조차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냈고, SKT T1의 다이나믹을 바꿨다.

그의 거북이 같이 웅크린 플레이스타일 덕분에 벵기는 미드라인에 시야를 꼭 확보하지 않아도 됐고 다른 라인이 더 빛나도록 도울 수 있었다. 게임 초반 임팩트는 덜했지만 상대 미드라이너가 CS를 자유롭게 수급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용 싸움에 나타나는 것을 충분히 막았다. 페이커와 이지훈을 모두 상대해봤 ‘어메이징’ 모리스 슈테겐슈나이더의 말은 그들의 스타일을 잘 설명한다.

“이지훈이 포함된 로스터의 게임스타일은 아마도 페이커가 있는 로스터보다 강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확히 그 스타일을 제외한 모든 다른 스타일이나 시나리오에서는 페이커가 이지훈보다 좋은 선수였다.”


두 선수의 정규 시즌 스탯으로 판단하자면 식스맨 실험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명확했다. 페이커는 4.4 KDA를 기록했고 이지훈은 9.2를 기록했다. 어메이징의 분석은 적어도 스프링 시즌 동안에는 주효했다. 승률 면에서는 이지훈 75%, 페이커는 70%였다. 스프링 결승전에서 SKT T1은 승률이 높은 쪽을 선택했고 해당 결승에서 GOAT를 투입하지 않고 스윕으로 우승한다.

당시에 이지훈은, “선발 라인업 경쟁에 대해서 항상 시끄러웠다”고 말했는데, 사실 “시끄러웠다”는 표현은 정말 순화된 표현이다. 시끄러운 정도를 봤을 때 그 수준이 마치 불꽃놀이가 터지는 메탈크로스 콘서트에 퉁구스카 대폭발이 일어난 정도였다. 아무리 식스맨 전략이 성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리그오브레전드 커뮤니티 대부분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국내외 팬들은 모두 페이커 한 명 만을 원했다. 영향력 많은 인물들도 이따금 식스맨 전략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몬테크리스토’ 크리스토퍼 마이클즈는 인벤 글로벌과의 대화에서, “사실 페이커의 최전성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수많은 경기들을 못 보게 된거나 다름없다”고 말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지훈은 그런 반응들을 이해했고 어마어마한 압박 속에서 한 경기 한 경기 플레이해 나갔다. 그렇게 이룩했던 최고의 스탯과 플레이오프 MVP 수상에도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은 여전히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성과를 올리더라도 페이커 대신 이지훈이 출전했을 때는 마치 마이클 조던 대신 제임스 하든을 투입한 것과 같은 반응이 나왔다. 이지훈은 여전히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지만 선택받은 자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지훈은 화려한 불꽃놀이 대신 식상한 유채화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그 분의 강림을 막고 있었다.


식스맨 전략은 계속됐다. 이지훈은 게임과 그의 팀을 사랑했고, 그의 팀이 이기길 원했다. 모든 논란은 악명 높았던 2015년 MSI에서 마침내 폭발했다. SKT T1은 결승까지 달렸고, 강해진 EDG와의 승부만이 남았다. 모두 알다시피 EDG의 모르가나가 아직까지 패배한 적 없는 페이커의 르블랑을 5세트에서 잡아냈고, SKT T1의 국제전 전적과 페이커의 르블랑에 최초로 패배를 안겼다.


EDG의 전략은 칭송을 받았지만, 커뮤니티의 수많은 사람들은 EDG가 해당 픽을 선보일 기회조차 없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SKT T1이 5세트까지 가게 된 이유가 이지훈을 기용해 1:2로 시작했기 때문이라 믿었다. 페이커는 4세트나 되어서야 등장했고, 등장한 즉시 게임을 지배했다. 이지훈에 의해 EDG가 히든 카드를 꺼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선발로 나왔던게 페이커였다면...

페이커 입장에 있는 그 어떤 선수였더라도 이 결과에 의해 사기가 꺾였을 것이다. 가장 큰 대회 중 하나인 MSI 결승에서 패배했다는 것. 가장 긴장되는 순간, 게다가 무패의 시그니처 챔피언을 사용했음에도 졌다. 분명 가슴아픈 일이다. 심지어 선발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 패배를 겪은 페이커는 갈림길에 서있었다.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다시금 보여줄 것인가. 사실 앞선 전설적인 선수들은 1-2년간의 성공 가도 이후 퇴보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왔다. 페이커도 같은 길을 밟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때의 메타는 페이커에게 가장 힘든 메타였고, 이로 인해 슬럼프에 빠지거나, 다른 팀으로 이적하거나, 심지어는 그만둘 수도 있었다. 이보다 덜한 위기에 세 가지 모두를 한 선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페이커였다. 이전보다 더 고된 노력을 통해 같은 결과가 반복되지 않도록 연습할 뿐이었다.

이지훈이 넘어야 할 산은 더 높았다. 팬들의 분노는 곱절로 뛰었고, 보통 승리하면 해결되지만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페이커는 더욱 압박해오고 있었다.


준우승으로 대회를 마친 두 선수는 귀국길에 오르며 많은 숙제를 떠안게 됐다.


순교자의 삶

서머 시즌이 시작하자 페이커가 패배로 인해 어마어마하게 노력했다는 것은 자명하게 나타났다. 당시 페이커의 폼은 역대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반 플레이메이킹은 더 잦았고, 계산은 더 정확했으며, 챔피언 풀은 더 넓어져 중요 픽 다수가 늘어났다. SKT T1은 페이커와 플레이할 때 승리가 더 많아졌고 승률은 70%에서 83%로 치솟았다.

이지훈은 해당 시즌에 대해 회상했다. “내가 비교적 출전을 하지 못했던 섬머 시즌에도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았다. 상혁이가 상대적으로 실력이 올라오면서 내가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지만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코치진의 판단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지훈이 부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챔피언 풀이 늘어났고 리그 내 최상위 스탯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페이커보다 높은 승률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어진 기회마다 이지훈은 붙들고 놓지 않았다. SKT T1은 이지훈을 기용한 경기에서 서머 시즌 내내 단 한 세트만을 패배했다.

하지만 모두 상관 없었다. 스타팅 라인업에 대한 둘의 경쟁은 치열했지만, 페이커의 잽은 마치 원펀맨의 한방과도 같았다. 페이커는 이지훈보다 거의 세 배 많은 경기에 출장했으며 해당 대회 결승에서 홀로 스윕을 달성해냈다. 상대적으로 무미건조했던 경기에 승리한 이지훈에 대해서 팬들은 여전히 불만을 토로했다.


2015년 SKT T1의 롤드컵은 어마어마했다. 94%의 승률을 달리며 우승을 차지했고, 롤이스포츠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팀 중 하나로 항상 거론된다. 페이커가 왕좌를 다시 차지하는 장면은 역대 최고의 장면들을 모았을 때 빠지지 않는다. 이 대회에서 페이커가 펼쳤던 슈퍼플레이들을 모으면 대부분의 선수의 커리어 통합 하이라이트 이상의 영상이 나올 정도였다.

이지훈 또한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출전했던 네 경기 모두 승리했고 11.3 KDA를 기록했다. 개인 무패의 성적으로 소환사의 컵을 들어올렸다면 이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지훈의 삶은 오리겐을 상대로 한 준결승전에서 180도 변했다. 해당 경기까지 두 경기만을 출장했고 코치진은 오리겐을 상대로 이지훈이 더 알맞다고 판단했다. 이 날 SKT T1의 경기력을 봤을 때 좋은 선택이었다. 이지훈은 1세트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였고 2세트에서는 데스 없이 오리아나를 플레이해내며 두 세트동안 도합 8/1/11의 KDA를 기록했다. 세계 최대의 대회에서 이런 성적을 거두는 것은 어느 선수나 꿈꾸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지훈에게 현실은 가혹했다.

경기는 완벽했지만 SKT T1에서의 이지훈의 역할은 이날 완전히 바뀌게 된다.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2세트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지훈을 맞이한 것은 본인을 향한 환호가 아닌 페이커를 원하는 팬들의 함성이었다. 최고의 활약상을 보였음에도 경기장을 메운건 그의 라이벌의 이름이었고, SKT T1은 페이커가 시리즈를 마무리하도록 마지막 경기에 교체출장 시킨다.

교체를 받아들이는 이지훈은 프로답게 대처했다. 코치진의 판단을 믿으며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3세트에 쉬는 동안 솔로큐를 돌렸고, 경기 후 멋진 인터뷰까지. 하지만 이지훈조차 상처가 됐다고 말한다. 무대를 떠나며 많은 생각이 들었으리라. 팀에서 내 역할은 무엇인가? 이스포츠에서 내 역할은 무엇인가? 결국 사람들이 원한건 페이커가 아닌가?


앞서 언급됐듯이, 이지훈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이상을 믿었다. 그의 심심한 경기력에는 이런 믿음이 반영되진 않았지만. 그 플레이스타일로 이득을 본 것은 본인, 팀, 그리고 실제로 그런 파밍 위주의 게임플레이를 좋아하는 극소수의 이상한 팬들 뿐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본인을 향한 찬사를 희생해 팀의 이득을 취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때 이지훈은 그가 헌신하고 있는 또 다른 사회를 떠올렸다. 바로 이스포츠 그 자체였다.

2015년에 이지훈이 이룬 것은 정말 대단했다. 역대 최고의 선수와 페이스를 맞추고 심지어 여러번 앞서 나가기까지. 하지만 이 때 더 위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한 발 물러나는 것.

역대 최고의 팀과 함께 소환사의 컵을 들어올린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이지훈은 페이커를 위해 팀을 떠나게 된다. “나는 상혁이와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다시 한 번 느꼈고 앞으로도 많은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롤판의 발전을 위해서도”라고 이지훈은 말했다. 그는 대중들의 페이커에 대한 사랑에 반발하거나 화내지 않았고, 오히려 페이커가 게임과 본인도 사랑하는 이스포츠씬에 대한 가치를 알아봤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이지훈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지훈은 페이커의 커리어에 가장 중요했던 선수 중 한명이다. 우승에 일조했기 때문이 아니다. 더 잘 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식스맨 실험은 페이커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도달할 수 있게 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지훈은 페이커가 이스포츠계에서 온전히 빛날 수 있도록 본인의 영광을 희생했다.

‘야마토캐논’ 야콥 멥디는 “20년 후에 페이커의 경기를 다시 보게 되면, 더 많은 경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쉬울 것 같다. 페이커가 그의 최전성기인 2013년 부터 2015년 사이 더 무섭고 아름다운 활약을 한 경기가 더 많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너무 아쉽다. 사실 이지훈을 원망하는건 아니다. 페이커 옆에 그 어떤 미드라이너가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말했다. 그 시점에 이지훈이 물러난 것은 어떻게 보면 더 많은 ‘페이커 경기’를 팬들이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실제 이지훈이 물러난 것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SKT T1에서의 커리어가 끝나가는 것을 직감하고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딱히 믿지 않을 이유는 없고, 알려진 이유로 전해진 교훈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


이스포츠든 삶이든 누구나 자기 역할이 있다. 모두가 영웅이 될 순 없다. 가끔은 모든 영광과 감탄을 자아내는 자리를 위해 싸우기 보다는 본인의 역할을 깨닫고,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수도 있다.

이지훈은 자신과 페이커의 역할을 봤다. 그리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 팀을 떠났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겠지만, 이 게임과 이스포츠씬이 지난 10년간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리고 특히나 페이커가 그 성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첬는지를 살펴보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지훈은 항상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있고, 이번에도 그의 의도대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