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시리즈는 인벤 글로벌 기자 존 팝코(John Popko)가 작성한 페이커 특집 기획기사입니다. 기사는 총 8부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번 편은 '폰' 허원석 편입니다.


신을 거스르면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신으로 불리는 자를 꺾는 사람들은 역사에 새겨진다. 수십 년간 그래왔다. 스포츠에서 “신급”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을 무너트리는 사람은 영원히 기억된다. 안드레 이궈달라는 기껏해야 롤 플레이어(Role player)에 그치는 선수이지만 르브론 제임스를 수비한 것으로 NBA 결승 MVP를 수상했다. 버스터 더글라스는 42:1 배당을 뚫고 마이크 타이슨을 업셋하며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도 이런 선수가 있다면 바로 “폰” 허원석이다.

폰은 롤드컵을 우승한 적 있는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지만 유독 페이커와의 연결고리가 강하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아이콘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한 것으로 세계의 이목은 폰에게 집중됐고, 페이커에게 강한 선수라는 호칭과 함께 페이커의 커리어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선수가 됐다.

선수(先手) — 2013 말


폰이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던 시점은 페이커를 상대했던 WCG 2013 한국 대표 선발전이었다. 시즌3 세계 챔피언이었던 페이커는 이미 리그 오브 레전드 이스포츠의 GOAT로 여겨지고 있었다. 롤이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장면 중 하나인 제드 플레이와 함께 생애 첫 LCK 우승을 차지한 후 소환사의 컵까지 들어올린 페이커는 전 세계 사람들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국내 해외 내로라하는 선수들을 상대하며 페이커는 본인의 능력을 입증했고, 도전해오는 상대마다 간단히 꺾으며 피해자 명단을 늘려갔다.


폰은 이 거대한 산을 상대해야만 했다. 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선수였고, 유일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순간은 쓰레쉬 훅에 가려졌다. 짧은 MiG 블리츠 시절에는 일찌감치 그룹 스테이지에서 탈락했다. 한 때 SKT T1에 입단 테스트를 보기도 했던 폰은 결국 삼성 갤럭시 블루에 정착하게 된다. 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폰을 든든한 미드라이너로 평가했지만, 그를 페이커와 같은 반열에 두는 사람은 없었다.

WCG 한국 대표 선발전은 페이커에게 또 다른 업적을 위한 발걸음이었고, 폰에게는 알에서 깨어나오는 순간이었다.

이 경기는 지금도 회자되는 앰비션을 상대한 페이커의 데뷔전과 비슷했다. 삼성 갤럭시 블루는 시리즈를 지배했고, 폰은 니달리를 플레이하며 첫 세트에만 페이커를 상대로 솔로킬 2개를 포함해 3킬을 따냈다. 2세트에서는 빠른 트리플 킬을 확보하고 SKT T1의 퇴장을 배웅하며 본인이 나타났음을 알렸다.



이 대결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주목할 만 하다. SKT T1이 직전 대회로 인해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다고 할지언정, 이 시리즈에서 폰의 존재감이 나타났고 이후 발전하는 폰과 페이커의 라이벌리가 시작됐다.

폰은 처음으로 능력이 뛰어난 팀원들과 함께 플레이했던 대회였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폰이 어떤 선수인지 제대로 보게 됐다. 바로 눈에 띄었던 것은 그의 공격성이었다. 페이커처럼 피에 목마른 선수와 비교해도 폰은 더욱 야성적이었다. 페이커도 불 같은 공격성으로 유명했지만 폰의 화염은 더더욱 뜨거웠다.


폰이 라인전에서 야성적이고 거친 플레이를 했지만, 활약의 배경에는 팀의 지원도 컸다. 첫 킬과 함께 얻어낸 라인전 리드는 탑라이너의 로밍이 큰 역할을 했고, 이 리드로 인해 폰은 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었다. 이어진 다음 세트에서는 팀의 리드가 워낙 커서 폰의 트리플 킬이 큰 의미가 없어보이는 정도였다. 폰의 활약은 늘 인상깊었지만 삼성 갤럭시 블루의 경기력으로 인해 가려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팬들이 확실히 본 것은 이 경기에서 페이커를 상대한 폰의 경기력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초반 리드를 스스로 따내는 것과 페이커를 협곡의 신으로 만들었던 모든 플레이들을 억눌렀다는 것. 페이커와 페이스를 맞추고 심지어 더 앞서나가는 것. 폰은 평상시 SKT T1이 얻는 초반 이득들을 틀어막았다. 이를 두고 “몬테크리스토” 크리스토퍼 마이클즈는 이렇게 말했다. “폰은 정말 페이커 억제기였다. 그는 페이커가 상대하기 가장 짜증나는 선수가 되기 위해 희생을 했고 팀원들이 캐리하도록 두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폰의 이 능력은 본격적으로 발현되려 하고 있었다. 이 때보다 훨씬 더.

미들게임 — 2013-2014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좋게 폰이 페이커를 이겼다고 생각했고, 이 의견은 SKT T1이 해당 대회에 의지가 작았다는 의심으로 뒷받침됐다. 2013-2014 판도라TV 챔피언스 윈터시즌에서 SKT T1의 무적 행보로 인해 더욱 그렇게 보였다.


삼성 갤럭시 블루 또한 공 앞에 쓰러지는 볼링 핀처럼 SKT T1의 행진에 무너졌고 폰 역시 팀원들과 함께 빠르게 쓰러졌다. 8강 경기에서 페이커는 폰보다 월등한 활약을 보였고 3:0으로 간단한 스윕을 해냈다. 하지만 이 대회 이후, 페이커의 압도적인 모습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폰의 상승세는 이제 시작이었다.



폰은 본인이 크게 진화했다기보다는 로스터 이동을 하며 성공시대가 열렸다. 폰이 기존 팀이었던 삼성 갤럭시 블루로부터 삼성 갤럭시 오존으로 넘어가자 화제가 됐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페이커를 상대로 제대로 대항했던 선수가 유일하게 SKT T1에 위협이 되는 팀으로 옮긴 것. SKT T1은 당시 최근에 오존을 상대로 계속 승리했었지만 그럼에도 오존만이 SKT T1에게 강하게 대항하는 팀이었다.


2014 핫식스 챔피언스 스프링은 전환점이었다. “푸만두” 이정현이 건강 문제로 휴식을 취하게 되고 SKT T1은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페이커가 여전히 환상적인 활약을 하며 우뚝 서있었지만 팀은 무너지고 있었다. 한타에는 활기가 없었고 운영은 들쑥날쑥했으며 그 다른 누구도 게임을 캐리하기 위해 총대를 메지 못했다.

이 대회는 폰에게도 전환점이 됐고, 한 계단 올라서는 기회가 됐다. 오존으로 넘어와서 비로소 그의 플레이스타일이 빛났다. “댄디” 최인규와 “마타” 조세형이 그들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며 시야를 밝히는 것이 폰의 공격적인 플레이와 잘 어우러졌고 막강한 시너지를 불러일으켰다.

댄디와 마타도 뛰어났지만 “임프” 구승빈 또한 세체원 자리를 넘보는 선수였다. “루퍼” 장형석도 최상위 탑라이너였고 적응의 귀재였다. “다데” 배어진의 스타일에 비해 폰은 이 팀이 더 완벽해지는 데 있어 최적의 인재였다.


폰이 단순히 ‘버스를 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처럼 오존의 스타 라인업은 막강했지만, 이 로스터에서 폰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엄청난 피지컬을 자랑하는 선수임에도 폰은 자주 희생을 하며 팀을 위해 헌신했다.

팀 헤레틱스 감독 피터 던은 폰이 정글러와 서포터를 돕는게 팀의 성공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폰은 자신의 정글러가 더 잘해 보이게 만드는 선수였다. 심지어 정글러를 보조하는 플레이를 의도해서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페이커가 본인이 나서서 상대의 대응을 유도하고 자신의 라인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선수라면 폰은 넓은 범위로 압박을 더욱 공격적으로 하는 선수였다. 폰은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리드를 잡기 위해 정글러와 서포터를 활용하는 것에 매우 능했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이 그를 유능한 사이드 플레이어로 만들었다.”

팀이 필요할 때 폰은 항상 있었다. 야스오 같은 파워 픽과는 거리가 다소 있었지만 폰의 카운터픽 능력은 팀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가 오존에서 수행했던 가장 중요했던 역할 중 하나는 페이커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대부분 페이커의 임팩트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에서 그의 역할이 드러났다.

사실 폰을 혼자서 페이커를 이기는 한 명의 강적으로 묘사하기에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폰이 페이커를 상대로 확실한 리드를 잡고 있는 상황도 이전에 없던 일은 아니다. 분석가 켈시 모저는 “솔직히 페이커를 상대로 폰만 유독 뛰어났던 건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솔로킬을 딸 수 있는 선수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페비벤이나 캡스같은 미드라이너들도 페이커를 상대로 국제대회에서 솔로킬을 딴 바 있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으로는 폰이 자처해서 페이커를 중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역대급으로 뛰어난 팀원들과 발을 맞춰 시너지를 만들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솔로킬 몇 개로 인해 여타 다른 미드라이너들보다 페이커를 상대로 더 많은 승리를 따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WCG를 향한 길목에서 페이커의 무결점 질주에 훼방을 놨던 폰은 2014년 들어 마치 사이드 브레이크 처럼 더더욱 강하게 훼방을 놨다. 계속 승리와 우승을 하던 페이커였지만 폰은 2014년에 페이커가 더이상 우승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2014 핫식스 챔피언스 스프링 시즌에 SKT T1의 발목을 잡은 오존(이후 화이트로 팀명 변경)은 SKT LTE-A 롤 마스터즈 결승전에서 승리했다. 2014 핫식스 챔피언스 서머 8강에서 복수에 나섰던 SKT T1은 페이커의 리드와 함께 첫 세트를 가져가고 2세트에서도 강하게 몰아붙였지만 폰은 팀과 함께 경기를 뒤집으며 남은 세트를 SKT T1에게 악몽으로 만들었다.

페이커의 영향력을 줄이거나 결정력에서 앞서는 방식으로 매번 폰은 페이커를 끌어내렸다. 페이커에게는 롤드컵 선발전에서 둘의 맞대결이 가장 뼈아팠고, 이 시리즈를 기점으로 폰이 페이커의 천적임을 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게 된다. SKT T1과 삼성 화이트(전 오존)는 롤드컵 진출 포인트가 같았고 2시드를 위한 타이브레이커에서 폰은 페이커의 크립토나이트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0:3으로 꺾였던 페이커의 경기력에 대해서는 페이커에게 가장 깊이 빠져있는 팬들조차도 실드불가였다. 댄디의 완벽한 갱킹이나 페이커의 팀원들이 화이트를 상대로 무너지는것도 커 보이지 않았다. 폰을 상대로한 페이커는 천적을 만난 듯, 매 세트마다 솔로킬을 내줬다. “우리 계획은 내가 살아남고 다른 팀원들이 플레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페이커를 상대로 솔로킬을 따내니 균형이 무너진 것 같다”고 폰은 말했다. 페이커 역시 경기 후에 아쉬움 섞인 말을 했다. “삼성 화이트를 상대로 했던 순위결정전이 내 최악의 경기였다. 내 경기력이 너무 안좋았고 실수를 굉장히 많이 했다.”

이 경기 이후 페이커는 롤드컵 진출에 실패했지만 폰은 그 기회를 잘 살리며 롤드컵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활약을 한 팀에 일조했다. 폰은 맞상대한 모든 미드라이너를 압도하며 소환사의 컵에 페이커 이름 옆에 나란히 자신의 이름도 새기게 된다.


이후 페이커에게도 다시 기회가 왔다. SKT T1은 2015년에 리빌딩을 거쳤고, 폰을 비롯한 한국의 수많은 스타들은 막대한 자본을 등에 힘입은 중국 팀들에 넘어갔다.

체크메이트 — 2015

2015 MSI 결승전에서 SKT T1과 EDG의 맞대결이 성사되자 팬들은 승부에 대한 예측을 쉬이 하지 못했다. 전년도에 GE 타이거즈에게 고전했었지만 페이커와 SKT T1은 다시 한국에서 가장 강한 팀으로 올라섰다. 페이커가 플레이할 때(종종 교체되긴 했지만)는 모두가 보고싶어하는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였고, 그는 모두가 응원하는 스타로 밝게 빛났다.

반대로 폰과 EDG를 과소평가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EDG는 모든 대회를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승리했고, 당시 최근 대회들에서는 중국이 한국보다 더 강한 지역인것 처럼 보였다. 폰은 다른 스타 플레이어들과는 달랐고 자신의 새 역할에 특화된 선수였다.


“드렉신” 미하엘 랄로어는 폰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폰은 정말 유연한 선수였다. 으레 하는 말처럼 들릴 순 있지만, 폰은 2014 롤드컵 이후 2015 LPL 시즌을 들어서며 새로운 팀, 환경과 언어에 정말 빠르게 적응했다. 캐리해야할 때 캐리하는 능력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스타가 되게끔 보조하는 역할도 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커가 경기할 때 SKT T1은 막강했다. 특히 페이커의 능력에 걸맞는 팀이 받쳐줄 때는. 문제는 페이커가 항상 출장하지 않는다는 것. 결승전 첫 세 세트에서 페이커는 벤치에 앉아있고 SKT T1은 ‘이지훈’ 이지훈을 내세웠다. 그리고 SKT T1은 3세트 동안 1:2라는 열세에 빠졌다. 4세트가 되어서야 페이커가 출장하며 간단하게 게임을 승리로 이끌고, 최종 결정전인 5세트로 끌고 갔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은 LCK 우승과 함께 든든한 팀원들의 추진력을 얻은 페이커라면 우승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페이커가 4세트에 폰을 상대로 보였던 경기력은 2014년도 고전했던 모습과 상반됐고, 둘의 라이벌리에 끝을 고할 것처럼 보였다.



경기 전에 한 팀원은 경기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5세트에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했고, 감독은 이에 ‘뱅기’ 배성웅과 페이커는 결승전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무대는 SKT T1의 승리가 당연시되어 보였다. 특히나 페이커는 본인이 대회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무적의 카드인 르블랑을 픽하며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상황은 마치 소설에서 등장할 법한 완벽한 설정이었다. 가슴아픈 패배 후 다음 해에 돌아와 완벽한 승리를 하는 것.

그럼에도 폰은 침착했다. 페이커가 가장 자신 있는 챔피언을 골랐지만, 폰은 예상하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되어 있었다. 폰은 모르가나를 고르며 페이커의 전매특허 챔피언을 카운터할 준비를 했다. 심지어 EDG의 조합은 전부 페이커의 르블랑을 무력화하는데 중점을 두고 짜여져 있었다.

페이커의 르블랑은 많은 과제에 직면했다. 시비르의 주문 방어막은 한방 대미지를 중화했고 알리스타와 이블린의 단단함은 다이브를 방지했으며 마오카이의 스킬은 플레이메이킹을 억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폰은 모르가나의 고통의 그림자로 압박을 가하고 칠흑의 방패로 팀원들을 보호하며 조합을 완성시켰다.

이런 조합은 페이커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피터 던은 이 조합과 모르가나 픽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EDG의 전술은 오로지 페이커를 무력화하는 것에 집중됐었다. 모르가나는 게임을 이기는 픽은 아니었지만 페이커를 무력화하기 좋았다. 당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미드라이너인 폰에게 단순히 페이커를 억제해서 반반 갈 수 있는 픽을 쥐어줬다는 것은 그 때 페이커가 어느정도였는지 보여준다.” 페이커를 칭찬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픽은 효과적이었고 폰은 또다시 페이커를, 그것도 가장 높은 무대에서 이겼다.


사실 이렇게 큰 무대에서 무너진다면 이후 경기력이 하락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여러 번 본인을 이겼던 상대로 또 패했다면. 분명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페이커의 이미 엄청났던 커리어를 감안하면 이미 물러나도 이상할 것 없었다. 생각해보면 수많은 다른 선수들은 더 작은 일로도 무너진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진정한 레전드들과 나머지의 차이다. ‘크립토나이트’에 대항하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도전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전설들은 더욱 자극받으며 더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르브론 제임스를 예로 들자면 2015년도에 안드레 이궈달라에 가로막히고 우승과 MVP까지 내줬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자극받은 르브론은 바로 다음 해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 중 하나를 만들어내며 클리블랜드에 첫 우승을 안겼다.

비슷하게 버스터 더글라스가 마이크 타이슨을 업셋한 것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이 결과가 더글라스의 명성을 드높였지만 타이슨에게는 더 큰 변화를 야기했다. 해당 패배를 회상하며 타이슨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나 자신과 복싱에 대한 더 넓은 관점을 갖기 위해 그 경기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타이슨은 더욱 강한 모습으로 이후 두 개의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추가했다.

이런 수많은 전설들처럼 페이커는 물러나지 않았다. 패배에 매몰되지 않았다. 좌절의 순간마다 빠르게 돌아왔고 더욱 강해졌다. 페이커의 실력이 퇴보했다는 수많은 이야기가 오갈 때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강해졌고, 강해졌고, 더 강해졌다.

이것이 바로 페이커의 근본이었고 해당 패배는 그가 또다시 발전하게 만들었다.

MSI가 끝나고 페이커는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데 더욱 노력했고 챔피언 풀을 넓혀 나갔으며 팀원들과 더욱 강력한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2015년 롤드컵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국제 무대에서 우승한 지 1년이 넘게 지났고 롤드컵을 우승한지는 2년이었다.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명성은 여전했지만 다른 선수들은 계속 그에게 위협적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페이커는 그 위협을 떨쳐냈다. 2015년 롤드컵에서 페이커는 역대 최고의 활약을 하며 우승컵을 차지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폰과 페이커의 맞대결은 사실상 의미없었다. 팬들이 기대했던 박진감 넘치는 라이벌전은 없었다. 그룹 스테이지에서 짧게 끝난 둘의 맞대결은 싱겁게 페이커의 승리로 끝났다. 신이 인간을 상대한 것 같았다. 부상과 팀 이슈로 인해 폰의 경기력이 퇴보했었을 수도 있지만 페이커의 폼은 또다시 따라갈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갔고, 롤드컵에서 폰 뿐만아니라 모든 상대를 압도했다.



팬들이 원했던 맞대결은 이런 것이 아니었겠지만, 페이커는 딱 이런 대결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이 경기에서 나온 페이커의 압도적인 경기력은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깨끗했다. 라이즈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날아가는 주문 한 방 한 방은 마치 그동안 폰이 페이커에게 가했던 일격들에 대한 응수처럼 보였다. 또 다시 롤드컵을 우승한 페이커는 본인이 리그 오브 레전드의 정점에 있는 선수라는 것을 다시금 증명했다. 그와 폰의 미묘했던 라이벌리는 이렇게 전광석화와 같이 끝이 났다.


이후 다시는 폰은 페이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후 대결에서 다시는 이전과 같은 기세로 맞붙지 못했다. 하지만 폰은 여전히 페이커의 커리어에 의미 있는 라이벌로 이름을 남겼다. 폰은 리그 오브 레전드 역사에 자신의 업적들을 남김과 동시에 페이커의 가장 아픈 패배와 부활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페이커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더 잘 볼 수 있게 했다.

폰은 페이커를 꺾었지만 페이커는 꺾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