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는 프로그래머에게 왜 무리한 요구를 하는가?


강연을 맡은 넥슨 고세준 팀장이 꺼낸 화두에 좌중의 공기가 달라졌다. 곳곳에서 쿡쿡대는 웃음과 함께 호기심이 자욱히 번져나온다.


기획자와 개발자는 동료임에도 적이다. 기획자가 천상에 있는 게임의 미래와 이상향을 그린다면, 개발자는 현실적인 레벨에서만 그 이상향을 구현할 수 있기에. 때문에 함께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는 동료임에도, 언제나 둘은 부딪치기 마련.


"현재 시스템 상에서 그것은 구현할 수 없습니다."라는 거절의 대사를 오늘도 듣는 이 땅의 라이브 개발자들에게, 어떻게 원하는 기획을 효과적/현실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지, 메이플스토리의 라이브 개발을 진행하면서 겪은 노하우가 묻어나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메이플스토리는 오래된 RPG 게임이다. 때문에 사냥과 레벨업이 그 주 컨텐츠다. 이런 메이플스토리에서 장르를 넘어선 최초의 시도는 소위 '디펜스 게임'의 접목이었다.


생각했던 대로 몰려오는 적들을 막아내는 형태의 프로토 타입을 제작해보니, 너무 재미가 없었다고. 광역 공격스킬이 많은 메이플스토리기에, 제자리에 서서 특정 스킬 하나만 누르고 있으면 모든 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다. 극복해야 하는 도전 요소를 넣기 위해 회피율이 높은 보스몬스터를 넣어 보았다. 허나, 아무리 회피율을 세밀하게 조정하더라도 특정 직업군은 절대로 해당 몬스터를 처치할 수 없는 직업간 불균형에 의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것.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통해 나타난 결과물이 바로, 네트의 피라미드. 보스몬스터를 공격할 시 게이지가 추락하고, 스테이지가 진행될수록 보스몬스터의 숫자가 증가하기에, 해당 몬스터들을 피해서 다른 몬스터들을 처치해야하는 플레이의 묘미가 생긴 것. 뿐만 아니라 해당 보스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는 커맨드형 필살기를 넣어 색다른 재미를 추구했다.





이번엔 메이플스토리에 레이싱 장르를 시도하면 어떨까?


그런 고민에서 출발, 역시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았더니 역시 재미가 없더란다. 직업간 기동력이 다르기 때문에 그저 달리는 레이싱은 직업간 불평등을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상황.


그냥 달리는 것 대신, 몬스터 처치를 통한 경쟁은 어떨까? 골인 지점이 단순히 결승점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어떨까? 고민 끝에 듀얼 레이드 시스템이 등장했다. 최종 목표인 보스의 처치를 향해 두 팀이 서로 경주를 펼치고, 먼저 도착하는 팀이 상대하는 보스의 체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형태. 양 팀의 맵은 분리되어 있어 상대의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서로의 진행과정은 계속해서 체크할 수 있고, 내가 처치해야하는 보스의 체력과 적이 처치해야하는 보스의 체력이 경쟁적으로 줄어드는 레이싱을 구현한 것이 바로, 듀얼 레이드 - 안개바다 유령선.



[ 서로의 진행상황을 체크할 수 있는 시스템 ]



[ 보스의 HP가 2종류로 존재하는 듀얼 레이드 시스템 ]



때로는 구현하고 싶은 것이 시스템의 한계에 마주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메이플스토리도 마찬가지.


강하고 복잡했지만, 어느새인가 유저들이 단순한 패턴을 파악해버려 이제는 아이템 창고로 전락해버린 기존의 보스들과는 다른, 강하고 똑똑해서 유저들이 도전할 가치가 있을만한 Smart한 보스몬스터를 만들고 싶었다고. 위협적인 유저를 우선해서 공격하게 만들고, 정해진 딜레이마다 사용하는 필살기 대신 언제든 위기가 찾아올 때 필살기를 발동하며, 필요하다면 먼 곳으로 도망가서 스스로 회복을 하기도 하는 똑똑한 보스 몬스터를. 그러한 기획의도를 개발팀에 전달하자마자 들려온 이야기는 "현재 시스템 상에서 그것은 구현할 수 없습니다."였고, 좌중의 웃음이 짙어져 갔다.


여기에서 강연자가 강조한 부분은, 해당 시스템에 대해 기획자 또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메이플스토리의 경우 프레임 표현의 최소 단위가 30ms인데, 이러한 시스템적인 특징을 모르고서 모션을 100ms 단위로 만들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기획자가 프레임 표현의 최소 단위가 30ms인 것을 알고 있다면, 애초에 디자인 자체를 90ms나 120ms단위로 만들게 되어 문제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는 설명.


정확하게 어느 기술적 난제가 있고, 어떤 부분을 해결하면 전체의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몬스터가 유저를 공격하는 패턴이 단순하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그로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결론을 얻게 되면,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현재의 단순한 시스템 대신 누적데미지, 힐러의 치유량, 한 번에 크게 들어오는 피해량 등을 계산해 우선 순위를 새로 정하는 알고리즘을 추가하기는 것 만으로도, 기존의 몬스터에 비해 월등히 Smart한 녀석을 만들수 있다.


정해진 시간마다 스킬을 써서 종국에는 유저들에게 모든 패턴을 낱낱이 읽히는 상황인데 해당 스킬의 패턴들의 속성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이 문제라면, 전체적인 패턴 집합들을 기획해 그 패턴 모음을 무작위로 진행하는 기능을 추가하는 것으로 원하는 해결 방법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기획자가 시스템의 가능/불가능 영역을 이해하고서 기획을 진행하게 되면, 개발자의 대답이 달라진다. "현재 시스템 상에서 그것은 구현할 수 없습니다."는 익숙한 대사 대신, "어려울 것 같긴 한데 견적 한 번 내보겠다." 내지는 "가능은 하지만 작업할 데이터량이 많아질텐데 괜찮겠느냐" 같은, 전혀 다른 대사를 접하게 된다. 만들고자 하는 형태는 같은데도 말이다.


그렇게 탄생한 스마트 몬스터가, 사자왕 반 레온이다.





강연이 진행되면서, 나와야할 이야기가 안나오고 있어 슬슬 근질거리던 때, 드디어 이야기가 나왔다. 바로, 메이플스토리의 유일한 PVP - 대난투.


성장과 육성을 위해 사냥으로 경험치를 얻는 고전적인 RPG게임, 일률적인 성장루트만을 가진 메이플 스토리에서 다양한 루트의 성장방식을 구현할 필요를 느꼈고, 그렇게 PVP가 탄생한다.


허나, PVP는 메이플스토리에서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우선, 게임 서버의 구조 자체가 PVP에 어울리지 않는 형태. 애초에 PVP를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데미지 판정을 클라이언트에서 처리하고, 그 결과값만을 서버로 전송하는 형태로 디자인 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서버와의 패킷 교환 주기도 상당히 느리다. 이것이 몬스터 사냥시에는 별다른 위화감이 없지만 사람이 대상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A가 B를 공격했는데 B의 모니터에서는 그 공격을 한참 뒤에야 인식하게 되는 결과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구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500여종에 이르는 많은 스킬들의 디자인이 전부 몬스터를 대상으로 맞추어져 있고, 몬스터의 체력이 어마어마하게 높기에 그 수치 또한 크다. 반면 캐릭터의 체력은 물약을 통한 회복수치를 고려, 상당히 작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유저의 공격이 유저를 향하는 순간 한 방에 죽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HP 7천짜리 캐릭터의 공격력 ]



그 첫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은 PVP 전용 서버를 구축하는 것으로 찾았다. 반응이 10ms 이하인 PVP 전용 서버에서 모든 PVP 관련 데미지 판정을 처리하는 것. 단, 이러한 새로운 시스템을 현재의 모든 컨텐츠에 적용하는 것은 들어가는 코스트가 너무 많고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PVP 서버는 철저히 PVP 관련 내용만을 처리하도록 그 적용 범위를 한정한다.


두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은 모든 스킬들을 다시 밸런싱 하는 대신, PVP에서만 적용되는 별도의 규칙을 통해 따로 적용시키는 방법. 500여개의 스킬을 일일이 변환하는 대신, 총 29개의 유사 스킬군으로 분류해 해당 스킬군 별로 PVP에 별도로 적용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PVP를 만들자는 제안에 대한 개발자의 최초 반응은 역시 '불가'였으나, 구현 가능한 부분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Casual, Light, Easy, No Stress를 표방하는 메이플스토리만의 PVP - 대난투가 완성되었다고.


간편하고 가볍고 쉽고 즐거운 PVP를 만들기 위해 도입한 시스템은 의외로 많다. PVP에 참여하는 동안 실시간으로 Battle Point를 얻을 수 있고, 그 곳을 벗어나면 획득한 포인트만큼 보상을 얻게 된다. 사용자가 적은 채널에서 소외당하는 일이 없도록, 4단계로 등급화된 채널에서 원한다면 하위 채널로 입장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형평을 맞추기 위해 하위 채널 입장시 해당 채널의 한계 레벨에 자동으로 맞춰지고, 고차의 스킬이 제한이 걸리게 된다.


또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데미지 표기를 하지 않는 것. Cool, Hit, Miss 등의 텍스트 아이콘으로 데미지표시를 대체해서, 지나친 분석을 통해 하드코어하게 컨텐츠가 흘러가는 것을 방지했으며, 기타 스탯 변화 아이템의 사용을 금지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또한 즐길거리를 다양하게 제공하고자 Free for all 방식의 데쓰매치와, 팀전투인 팀 데쓰매치, 유저가 플레이하는 똑똑한 보스와의 대결을 컨셉으로 잡은 아이스나이트 모드를 추가했다.


그 결과, 기존의 메이플 스토리가 사냥으로만 성장할 수 있는 단순구조에서, PVP를 통해 경쟁의 재미와 성장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화를 이루어 내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장르를 넘어선,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선 이러한 도전의 의미에 대해 강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잘 되는 라이브 게임에서 무리를 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젊음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물론 새로움을 위해 기본을 잃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쇠퇴할 수 밖에 없는 게임에 이러한 도전을 통해 젊음과 활력을 불어넣어 더욱 오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