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으로 가는 버스 안


짧은 거리지만 그래도 여행길인데 설렘은 별로, 잘 해야 한다는 낯선 두려움이 앞선다. 오늘 인터뷰를 할 사람은 올해 26세의 게이머, 이대범 씨. 그 또래의 여느 청년처럼 온라인 게임이 가장 큰 취미이다. 하지만 그는 평범하지가 않다.



군 제대 후 8개월이 지났을 때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 다행히 대수술 후 목숨만은 건졌지만, 이대범 씨는 전신마비 상태로 살아야 했다. 말도 전혀 할 수 없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손, 그중에서도 가운뎃손가락뿐. 매일 반복되는 재활치료, 이대범 씨의 유일한 낙은 온라인 게임, 리니지다.



‘수호사와 수호연’이라는 이름의 마법사와 요정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이대범 씨. 손가락 하나로 겨우 마우스를 클릭해 캐릭터를 움직이다 보니 죽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움직임이 둔하고 채팅도 느려 다른 유저들로부터 일명 오토 프로그램으로 오해받아 죽는 경우도 많다. ‘몽환의 섬’에서만 플레이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레벨업은 더디지만 죽어도 경험치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유독 30대, 40대 연령층이 두터운 혈맹이라 그런지 이대범 씨의 사정을 알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요즘은 혈맹을 넘어 같은 서버 다른 유저들도 알아서 도와주는 분위기다. 본인 플레이도 힘든데 사냥터에 나갈 때마다 꼭 근처에 있는 다른 유저들까지 ‘힐’을 챙겨주는 이대범 씨의 작은 선행이 서버 내에 꽤 많이 알려진 탓도 크다.



원래는 서울에 살았지만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부터 이대범 씨는 춘천에 있는 어머님 집에서 내려와 치료 중이다. 어머님은 작은 점집을 하신다. 기자가 도착하자 은색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내주셨지만 좀처럼 쉽게 입을 댈 수 없었던 건 왠지 모르는 미안함 때문일까.



우선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 중앙, 병원 침대에 반쯤 기댄 상태로 누워있는 이대범 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 내내 느꼈지만, 이대범 씨는 참 웃음이 많은 사람이다. 이메일만 주고받다가 처음 얼굴을 봐서 그런지 반가운 눈치다. 왼손을 겨우 움직여 앞에 놓여 있는 넷북에 타자를 치기 시작한다. 메모장에 매우 큰 크기로 하나씩 입력되는 글자들.

이것이 말을 할 수 없는 이대범 씨가 주위와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 ▲ 리니지 유저, 이대범 씨 ]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오후 1시에는 이대범 씨가 재활치료 때문에 이동해야 했기에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가장 먼저 이대범 씨가 리니지를 실제로 플레이하는 모습을 봐야 했다.



시작부터 쉽지가 않았다. 우선 기자가 게임을 하기 편하도록 이대범 씨의 상체를 안아서 옮겨야 했고, 그 후에는 이대범 씨가 왼손을 마우스에 올리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엄지손가락을 책상 끝에 붙이고 미는 행동을 하기도 했는데 단 몇 분이라도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로 해야 하는 운동이라고.






겨우겨우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하고 리니지에 접속했다. 들어가자마자 채팅창으로 반기는 혈맹원들. 이대범 씨는 손가락 하나로 느리지만 일일이 혈맹원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또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제 그만 접속을 끊어도 된다는 기자와 자신의 플레이를 좀 더 보여주고 싶어하는 이대범 씨 사이에 사소한 실랑이가 있었다. 하지만, 말리기는 힘들다. 어느새 캐릭터는 텔레포트해서 사냥터로 이동했고, 주변의 유저와 파티를 맺고 사냥하러 떠날 채비를 한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보라고 손짓한다.

그동안 얼마나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었을까.



[ ▲ 오직 손가락 하나로 플레이하는 리니지 ]




왜 리니지를 시작하셨나요?

드디어,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나 수개월이 지난 후 이대범 씨는 휠체어에 탄 상태로 휴대폰 문자로 어머니께 넷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간절했었지만, 말을 전혀 할 수 없었던 상황. 다른 온라인 게임보다 보기 편한 그래픽과 쉬운 조작은 리니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리니지가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창이 된 것이다.



혼자 플레이하는 것도 힘이 드실 텐데 주변 다른 유저들에게 도움을 주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처음에 접속하니 한 손으론 컨트롤도 힘들고 도저히 할 게 없어서.... 그냥 몽환의 섬 마법진에 서서 지나가는 캐릭에 업과 힐을 넣었어요...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서요.. 근데, 그것도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몸 상태가 호전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었다. 무엇을 해보고 싶다기보다는 지팡이나 목발을 짚어서라도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가거나 거동이라도 조금 하고 싶다는 소박한 대답.



입과 턱을 움직일 수 없어서 인터뷰 내내 이대범 씨의 입가에는 침이 흘러내렸다. 이때마다 저만치 자리를 피해 계시던 이대범 씨 어머니가 나타나 닦아주신다. 어머니는 이대범 씨가 게임 하는 걸 싫어하시는 눈치다. 재활치료와 운동에 지금보다 더 전념했으면 하는 바람이시다. 하지만, 아들이 오직 게임을 할 때 미소가 밝아지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애써 모른 척 챙겨주실 뿐이다.



새벽 1시, 1시 반이 뭐유.. 토, 일요일만 되면 왼종일 컴퓨터만 잡고 있으니.. 운동을 더 했으면 좋겠구만... 지가 좋다니께 내버려 두는거유....” 어머니의 눈시울이 불거진다.



기자가 준비해간 질문이 거의 끝나간다. 기자가 목소리를 내어 질문하면 이대범 씨는 손가락 하나로 넷북에 글자를 입력해서 답변하는 식이다. 단어를 입력하고 있으면 기자가 “아, 그래픽이 좋아서요?”라며 그 부분을 이해했다는 식의 제스쳐를 취한다. 그러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대범 씨가 입력하는 몇몇 문장은 차마 기자가 소리 내 읽기가 힘들었다. 지금까지 이대범 씨가 겪었던 역경과 고난에 관한 너무 솔직한 문장. 그대로 읽다가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그만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말이 없어 한동안 침묵이 흐르자 이대범 씨는 기자가 아직 이해를 못 한 줄 알고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때 나는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 ▲ 손가락 하나로는 "Shift" 키를 누를 수 없다. 그래서 쌍자음은 "ㄱ ㄱ" 내지는 "ㅅ ㅅ"으로... ]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


만감이 교차한다. 머리가 노래진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기자의 얄팍한 글쓰기로 TV에 나오는 휴먼 드라마 흉내를 내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생각의 끈은 돌고 돌아 다시 춘천을 향한다.


이대범 씨가 누워 있던 병원 침대. 왼손이 항상 자리하고 있는 마우스 패드 아래에 뭔가 보였다. 아마, 푹신푹신한 시트 위에서 마우스를 쓰다 보니, 흔들리지 않도록 갖다 놓은 받침대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받침대의 모양이 심상치 않다. 기자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해 결국 인터뷰가 끝난 후 마우스 패드를 치워 확인했다.


그것은 사고가 나기 한참 전 이대범 씨가 형과 함께 어머니께 드린 감사패였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어머니께 자랑스런 두 아들이 되겠습니다.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 이대범 씨의 마우스 아래, 항상 이 액자가 간직되어 있다. ]




순간 비밀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던 이대범 씨.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진심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여기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하냐고...


현재 이대범 씨는 매일매일 재활치료를 받으며 회복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할 고통이 늘 함께한다. 극한의 상황도 끊이지 않는다. 어머니가 답답한 마음에 살짝 털어놓은 이야기가 아직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리니지라는 게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힘든 역경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대범 씨.


아마 지금쯤이면 자신의 조그마한 넷북으로 이 기사를 읽고 있을지 모른다. 이대범 씨가 최대한 빨리 이 모든 역경을 딛고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힘찬 응원의 메시지 한마디씩 부탁드린다. 나는 진심의 힘을 믿는다.





▶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리니지 인벤] 손가락 하나로 세상과 소통하는 리니지 유저 - 이대범군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