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흉흉하여. 최근 미팅에서 모 업체 관계자가 한 말이다. 그때는 함께 씁쓸한 웃음으로 넘겼다. 그런데 나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같은 말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미묘한 온도 차가 느껴졌다. 첫 번째는 일반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잔인하리만치 무차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게임 규제에 대한 감상이다.

두 번째로 떠오른 것은 이상하게도 사극의 한 장면이었다. 무소불위 절대권력이 두려워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백성의 삶. '실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라는 운을 먼저 떼고 시작하면, 지금처럼 ‘정부를 비판하면 처벌당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게임 규제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기란 쉽지 않다.

한 가정의 가장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데 직원 수가 천명이 훌쩍 넘고 가족까지 합하면 그 두 배, 세 배 이상 인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한 회사의 경영진이라면 '일단은 살고 보자'는 대처가 현실적이라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왜 게임업체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할까?’에 대한 대답도 내가 볼땐 여기에 있다.


[ ▲ 최근 게임 규제책을 담은 학교폭력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한 교과부 [링크] ]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도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청소년 보호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씌운 그들의 주장에는 논리와 합리가 완전히 빠져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게임, 즉 ‘게임=악’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그릇된 신념과 근본주의적 종교관이 팽배하다. 게다가 부정한 불로소득을 노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세력까지 합세하면서 정부 보도자료부터 모 일간지 기사까지 초등학생이 한달음에 쓴 판타지를 연달아 보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힘이 빠지는 것은 황당무계한 소설에 대응해야 하는 우리가 철저하게 빈손 이라는 사실이다.

여성가족부는 청소년 셧다운의 근거를 위한 연구 보고서에 수억 원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우리 쪽은 그것을 반박하기 위한 주먹구구식 PT 자료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연구결과의 과학적 정당성이나 근거를 의심받아 학계에서 사장되어버린 ‘짐승뇌’ 이론이 대한민국에서만 진리인 양 판을 치고 있는 것도 조삼모사를 연상시키는 일시적인 감정적 대응이나 잠깐 보여주기식 이벤트에서 그칠 뿐, 업계가 게임 이미지 회복을 위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획기사] 아이들의 뇌가 짐승이 된다? 여가부 토론회 짐승뇌 이론이란..


최근 뉴욕타임스는 하청업체의 근무환경에 대한 애플의 부도덕함을 폭로하는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애플은 자사의 홈페이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방대한 양의 반박 자료를 올렸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직접 고객들에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자료를 전달하고자 하는 애플의 대응방식이다.

애플의 자료가 등록된 직후 전 세계 수많은 애플 안티를 양산하던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사실’이 아닌 ‘하나의 가능성’으로 전락했으며 이제부터는 누가 더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자연스럽게 ‘소설’보다는 ‘논리’가 그리고 ‘상식’이 승리할 확률이 커지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전방위적인 폭격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썰렁하기 그지없는 게임산업협회와 각 게임사들의 홈페이지와는 가슴이 아프지만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 ▲ 애플 공식홈페이지의 반박자료 [링크] ]



캐주얼 게임제작사로 유명한 팝캡은 매년 유명 대학교 연구팀과 연계해서 게임의 순기능에 대한 논문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비주얼드 블리츠가 50대 이상의 성인들의 뇌 건강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과학적 실험에 입각한 구체적인 연구결과들이다. 정부기관도 공공기관도 아닌 일개 캐주얼 게임개발사가 대학 연구를 계속해서 지원하는 데는 상당한 비용이 들지만 이런 활동 덕에 팝캡은 전 세계적으로 '건강한 게임을 만드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미국에는 2003년부터 시작된 ‘차일즈 플레이’(Child's Play)라는 독특한 기부프로그램이 있다. 게임업계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프로그램으로 미국 전역 70개가 넘는 병원과 연계해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과 장난감, 그 외 원하는 선물을 기부하고 있다. 이외에도 게임 토너먼트와 플레이를 활용한 다양한 행사를 통해 각계각층의 기부활동을 유도하고 있다.

아마존, 베데스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닌텐도, 팝캡 등 굴지의 업체들이 함께하고 있으며 엔씨소프트 북미지사도 최상위 '플래티넘 스폰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작년 한 해에 차일즈 플레이 자발적으로 모인 금액만 한화 40억 원가량.

팝캡과 차일즈플레이의 사례에서 배울 점은 게임업체의 사회공헌 활동 자체가 단순히 '보여주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와 '직접'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 ▲ 차일즈 플레이의 플래티넘 후원사 중 일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업이 대거 참가하고 있다. [홈페이지]]




한편,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사람이 아이를 올바르게 양육해야 하는 책임을 정부에 돌리고 있다며 학부모들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는 크게 변했고 무작정 게임 탓을 하는 학부모도 있지만, 논리와 상식을 받아들일 줄 아는 학부모들도 다수다. 수십 년 전 어두컴컴한 오락실 세대의 학부모를 생각하며 비난으로 일관된 대응방식을 고수한다면 우리는 이미 승부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과연 ‘그들’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득세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얼까. 그건 학부모들이 각 게임업체로부터 자녀가 게임에 빠질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덜어줄 적절한 장치와 수단을 좀처럼 제공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이 합리적인 사고를 통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자식을 게임에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빠져 ‘그들’의 휘둘리기에 당해버리는 것은 지금 상황을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단언컨대 학부모들이 게임사들을 자녀의 여가를 건전하게 채워줄 가장 친근한 동료로 생각하기보다는 아이를 중독시켜 부당한 수익을 내는 사기꾼 업체로 보기 시작한다면 무슨 노력을 하든간에 앞으로도 영원히 해결책은 없다.


[ ▲ 어째거나 시대는 변했다. 우리가 이제는 부모가 될 차례 ]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과 정부 그리고 정치인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자. 단순히 선거철이 지난다고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이 마녀사냥은 앞서 말한 대로 논리의 싸움이 아니어서 앞으로도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업계 전체 힘을 합쳐 '그들의 억지'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중장기적인 치밀한 전략을 세우는 일이다.

산동네에 직원들을 출동시켜 연탄을 배달하고 사진을 찍어 홍보자료를 배포하는 일도 물론 뜻깊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 보면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게임 바로알리기’에 대한 적지 않은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다. 역사는 돌고 돌듯, 무차별적인 게임 탄압이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어서다.


최근 중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세금을 줄여주거나 게임 산업에 특화된 장려책을 펴는 등 IT 산업 전체를 육성하는 데 집중하는 반면, 국내 IT 계는 조립PC도 전파인증을 받지 않으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방송통신위원회의 발표가 알려지면서 소규모 업자들의 한숨은 더더욱 늘고 있다.

‘늦었다고 판단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다. 정치적 상황, 국민 정서 등 주위 환경 탓만 하며 이번에도 제시기를 놓친다면 지금의 3중 규제가 언제 10중 규제로 돌변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는 그대가 있다면 오히려 내가 되묻고 싶다. 바로 1년 전 오늘, 지금의 참담한 현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