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밀레니엄을 시작한다고 전 세계가 들썩거렸던 2000년, 기자는 아직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이른바 “이해찬 세대”라고 불리는 교육 정책에 휘말린 탓에 1학년에는 야간 자율학습 폐지 등 꽤나 여유 있게 보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야간 자율학습에 0교시, EBS 강제 시청 등등 기존보다 더 빡빡한 학교생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등하교 시간을 포함해 하루 18시간 이상 학교에 묶여있어야 했던 그 시절,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쉬는 시간에 돌려보는 대여점의 만화책이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PC방에서의 스타 한 판 정도. 몇 몇은 리니지, 포트리스 등의 온라인 게임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런 쪽에 시간을 투자하려면 수면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해 6월, 디아블로2가 발매되면서 수면 시간은 더더욱 줄었습니다. 매일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주로 하는 얘기가 “어제 나겔링을 먹었다”, “랜스 바바하려는데 스킬 어떻게 찍어야 손해를 안볼까” 등등일 정도로 인기 폭발이었기 때문이죠.

그 당시에 우리에게 가장 공포였던 것은 랙사의 주범 듀리엘이나 최종보스 디아블로 같은게 아닌, 렐름 다운(Realm Down)이었습니다. 자율의 탈을 쓴 야간 타율학습을 끝내고 자정 너머 집에 돌아왔는데 아시아 서버가 다운된 상태일 때의 기분은 “멘탈붕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정도였으니까요.




▲ "문 좀 열어줘..." 그리고 12년 후에 37의 벽이 우리를 반겼으니...




그리고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시리즈 신작인 디아블로3가 발매된 지도 벌써 한 달째입니다.

게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디아블로3라는 게임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면서 지난 한 달의 서비스를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 구세대와 신세대의 중간적인 맛? 익숙하지만 식상하지 않은 디아블로3


디아블로3가 정식 발매하기 전, 체험 행사나 베타 테스트를 통해 게임을 접한 유저들 중 많은 수가 게임이 재미있냐는 질문에 “아주 재미있거나 획기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플레이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있었다”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정식 서비스가 시작된 15일 새벽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잠깐 접속해서 플레이해볼까 했던 유저들 중 상당수가 점검을 위해 6시 30분경에 서버가 다운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등 타임머신 게임의 악명(?)을 시작부터 보여주었습니다.




▲ 이 퀘스트만 깨야지... 하면서 하다보니 어느새 디아블로가 죽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전작을 즐긴 유저나 그렇지 않은 유저 모두 디아블로3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상당히 짧은 편이었는데, 전작을 즐겼던 유저들에게 있어서는 큰 이질감이 없으면서도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이, 새롭게 시리즈를 접하는 최근 게이머들에게는 고정뷰와 적은 수의 조작키 등 LoL 등 AOS 장르로 익숙한 요소라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익숙함”은 자칫 “식상함”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 전작을 즐긴 유저들이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과도한 변화를 억제하면서 신규 유저들을 포용할 수 있는 대중성을 갖췄다는 점은 높은 점수를 줄만한 부분입니다.

최고 난이도인 불지옥은 전체 유저 수에서 클리어 한 인원이 매우 적은 편이나, 그 이전 난이도까지는 큰 고민 없이 적들을 썰어 넘기고, 파티가 강요되지 않는 ― 오히려 솔로잉이 더 편한 ― 플레이 스타일은 다른 유저와의 호흡이 강조되는 MMORPG나 패배의 부담이 큰 RTS, AOS와 달리 정통 Hack & Slash의 재미를 보여주었습니다.




▲ WOW 성공 이후, 레이드나 공성 등으로 복잡해지던 온라인 RPG
2000년대 초 이후로 괜찮은 Hack & Slash 게임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





■ 손맛은 옛날 그대로! 자연스럽게 조화이룬 그래픽과 사운드도 돋보여...


인벤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총 6000여명의 설문 참가자 중 절반에 가까운 2700여명이 “짜릿한 손맛의 액션성”을 디아블로3를 플레이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으로 꼽았습니다.

조금은 과장된 것 같으면서도 공격을 받으면 시원시원하게 날아가는 ― 설령 그게 적의 공격에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캐릭터라도! ― 물리 엔진 적용과 캐릭터의 이동, 공격에 따라 부서지는 지형지물 등은 Hack & Slash 게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타격감”을 잘 살려줍니다.




▲ 쿵 하고 쳤더니 퍼엉 하고 날아간다. 짜릿한 손 맛이 일품



캐릭터가 작게 보이고, 커스터마이징이 없다는 이유로 최신 게임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그래픽 측면도 세세한 부분을 살펴보면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게임에서 캐릭터의 디테일을 살리느라 배경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지만, 디아블로3에서는 캐릭터와 배경의 조화가 잘 이뤄져 오랜 시간 플레이하더라도 시각적인 부담이 적은 편입니다.

또한, 실제 던전을 탐험하는 것 같은 조명 효과와 멀리 보이는 배경(실제 플레이와 무관한)도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등 자연스러운 게임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많은 공이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멀리 보이는 배경들도 역동감이 있다.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배경으로 보이는 필드에도 진격이 가능



게임의 맛을 살리는 데에는 사운드도 큰 역할을 하는데, 타격감을 더 높여주는 효과음과 귀에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배경음악뿐만 아니라 쉽게 느끼지 못하는 환경음 등이 잘 어우러지면서 게임의 몰입도를 높여줍니다.



▲ 3막에서 배경으로 보이는 악마의 모습. 잘 들어보면 음산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게임의 재미를 더하는 사이드 스토리, 메인 스트림은 다소 아쉬워


전작과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을 한 가지 꼽자면,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각종 NPC와 용병 개념인 추종자와의 대화, 스토리 등이 대폭 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작에서는 퀘스트를 주지 않는 NPC는 단순히 상인이나 도구의 느낌이었지만, 디아블로3에서는 플레이어와 NPC, 혹은 NPC간의 대화를 통해 게임 속 정보를 얻거나 또 다른 재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 하지만 높은 분들은 그런 걸 몰라요! 모태 솔로집단인 기사단원에 그저 눈물만...



하지만 메인 스토리 쪽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전작들에서도 지적되는 사항이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배경 설정의 규모에 비해 게임 내에서는 이러한 스토리를 잘 살리지 못하는 평이 대다수 유저들의 의견이었습니다.

복선으로 보이는 요소들은 다수 등장하지만 본편의 스토리는 뭔가 급하게 수습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향후 확장팩을 위해 의도적으로 내용을 끊었다”, “발매 일정에 맞추느라 후반 스토리를 급히 끝냈다” 등의 추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이 양반이 바로 디아블로3에서 가장 많은 떡밥을 뿌리고 다니는 NPC





■ 서버 문제와 서비스 미숙, 가장 발목을 붙잡는 요인


이처럼 좋은 게임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한 달간 디아블로3에 대한 좋은 평가보다는 좋지 않은 평가가 많았습니다.

특히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은 서버 문제인데, 게임 서버와 경매장이 온전하게 돌아가는 날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지난 10일과 11일에는 하루 이상 정상적인 게임 플레이가 힘들 정도의 연장점검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안정적인 서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패키지 게임이지만 서비스 되는 방식은 여타 온라인 게임과 마찬가지인 디아블로3의 서버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서버 현황을 보면 멀쩡하게 서버가 굴러간 날을 찾는 게 힘들 정도이다.



서버 이외의 부분에서도 미숙함을 많이 보였습니다.

서비스 초기 많은 유저들이 계정 도용(통칭 해킹)으로 피해를 받는 상황에서 키로거 프로그램에 취약성이 있는 OTP 이외의 대응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복구 처리도 최소 1주일 이상 걸리는 등 계정 도용을 당한 유저들은 최소 1주일 간 그 계정을 사용할 수 없는 이중고를 겪게 만들었습니다.




▲ 해킹 신고를 해도 언제 복구 될지 알기도 어려운 상황



이 외에도 유저 간 거래 시스템의 허점을 노린 각종 사기가 횡횡함에도 이렇다 할 대처 방법이 없어 그동안 쌓아온 블리자드의 이름값을 상당 부분 깎아먹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 버그, 밸런스 문제도 심각해...

서버라는 물리적 문제 외에도 다양한 버그가 지난 한 달 동안 터져 나왔습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서버 불안정을 이용해 같은 아이템이 DB에 저장된 ― 이른바 아이템 복사 건으로 하루가 넘는 연장 점검으로 복사된 아이템을 삭제 조치했다고 했지만, 롤백으로 인한 피해 해결이나 경매장 오류 등에 대한 조치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 개인방송을 통해 복사가 알려지면서 결국 11일 관련 내용을 인정한 블리자드



또, 이른바 “흑형 앵벌”이라고 불리는 비정상적인 NPC의 공격력을 이용한 파밍, 특정 아이템이나 지형을 이용해 몬스터를 걸쳐놓고 잡는 길막 플레이, 마법사의 비정상적인 극대화 발동 등 다양한 버그가 있었음에도 수정이 이뤄지기까지 오래 걸리고, 이렇다 할 사후 조치가 없어 유저들 사이에선 “버그가 있을 때 안 쓰면 손해”라는 분위기입니다.


직업간 밸런스도 많이 지적되는 부분인데, 근접 캐릭터와 원거리 캐릭터 간의 불지옥 난이도 형평성 문제 ― 클리어를 위해 요구되는 스펙 차이가 몇 배가 된다거나, 몬스터의 특정 패턴이 극단적으로 근거리에게 불리한 등 ― 는 지속적인 패치를 하고 있긴 하나 만족스러운 수준까지 조정되기까진 시간이 필요해보입니다.




▲ 극단적으로 불지옥 파밍이 어렵자 NPC 버그에 의존해야 했던 근접 클래스
(인벤 수염매니아 님 팬아트)





■ 대작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아블로3는 여전히 인기 있는 게임입니다.

발매 초기 PC방 점유율 40%를 넘기는 등 무시무시할 정도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PC방 점유율 30%는 꾸준히 넘길 정도로 올 한해를 장식할 대작 게임임을 부정하긴 어렵습니다.




▲ 6월 19일자 게임트릭스 점유율. 2위인 LoL과 비교해도 더블 스코어라는 성적



악재에도 불구하고 디아블로3가 이러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게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 바로 “재미”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패키지 게임도 온라인화 되는 요즘 상황에서, 재미만 느끼고 끝나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서비스”가 된 만큼, 서비스 측면에서 드러난 허점들은 빠른 개선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6월 21일이면 대대적인 밸런스 조정이 이뤄지는 1.0.3 패치가, 그리고 앞으로 있을 1.1 패치에서는 플레이어 캐릭터 간에 전투를 벌일 수 있는 PvP가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아직은 만레벨을 찍고, 불지옥 난이도를 클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목적성이 없어 순환보다는 소비 위주로 게임 내 흐름이 흘러가는 가운데 이러한 변화가 과연 얼마만큼의 성과를 보일 수 있을까요?

단순히 많이 팔리고 플레이 된 “대작”으로 남을지, 전작들처럼 두고두고 회자될 “명작”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콘텐츠 패치의 완성도와 서비스 측면에서 성숙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