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의 단상


헐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는 미래에 벌어지는 인간과 기계의 싸움 통에 엉뚱한 현대인이 등터지면서 일어나는 감동을 그린 액션영화다. 스토리는 간단하지만 감독의 안목은 심원하다. 인간은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위해 전략슈퍼컴퓨터 스카이넷을 개발했는데, 이게 삽질을 해서 사방에 핵미사일 쏴갈겨 인간들과 전쟁을 선포한다. 이미 자동공정화 되어있는 군수산업체의 물량라인을 동원해 자신의 손발이 되어줄 기계인간과 전투병기들을 생산하여 지상군의 진용까지 구색을 맞춰놓고 나서 본격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옮아가며 한판 제대로 떠 주신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배제되는 디지털 사회의 맹점을 아주 제대로 찌르고 있다.


처음 나왔을 때 볼 때는 하하 거리면서 웃으며 보았다. 뭐 저런 황당하고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다 있을까. 그런데 요즘 다시 보면 이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새삼 존 카메론 감독의 안목에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기자가 써 본 터미네이터의 오마주 작품의 시놉시스로서, 스폰서가 갖추어지고 시간이 된다면 한번 촬영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있다.



디지털이 발달하다가 오발하여 작살난 지구의 터미네이터



기자의 카메론 감독에 대한 오마주


200X년. 인간은 온라인 게임 로한을 발명했다. 사람이 즐기기 위해 만든 것이 온라인 게임이다. 그런데 유저들은 보다 효율적인 게임 수행을 위해, 이용자가 없어도 스스로 렙업과 사냥을 하는 초전략 슈퍼오토머신을 개발했다. 이게 어느날 자아를 가지더니 인간은 로한을 즐길 자격이 없다고 천명하며 오토만의 세상을 위해 사방에 바이러스 뿌리고 난장을 피우더니, 급기야 오토를 근절하려는 로한GM에게 누명을 씌우고 파면시킨 후 로그인 서버를 막아버리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이제 로한 오토머신은 각 길드마스터를 태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1960~70년대로 단 종족을 파견한다.



너무 겁먹을 거 없다. 기자는 대한민국 최고의 먹튀감독이 되고 싶진 않으니 영화 쪽으로는 진출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정말 비애스러운 것은, 이 허무맹랑 황당무쌍한 스토리의 초반이 사실이라는 거다.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로한에 오토들이 나타났고, 이미 뿌리깊이 퍼져 더 이상은 손쓰기도 어려운 추세가 되어 있는 것. 다행히 자아는 아직 가지지 못해서 인간은 아직 로한을 즐길 자격이 있는 상황같지만, 또 혹시 아는가? 광우병이 설레발치는 이 어지러운 난세에는 뭐든지 가능하지 않겠는가. 망상도 사실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기자의 시놉시스 속에서 과거로 파견되는 단 종족



고달픈 취재의 길


사실 기자는 5월 10일의 타운공방전을 취재하기 위해 1렙캐릭터를 만들어 이 서버 저 서버 기웃거리고 있었다. 다만 길드도 없고 무일푼이라 취재에 심각한 애로사항이 있었다. 길드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는 상황이 이렇게 처절한 서러움으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타운공방전 신청 NPC는 낮은 목소리로 비웃었다. 길드도 없고 돈도 없는 캐릭터에게는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애들은 가라 수준의 박대를 엔피씨에게 당하고보니 한이 맺혔다.


결국 정보원을 심어둔 서버로 접속하여 정보원에게 길드 가입을 요청했다.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대답은 황당했다. 지금 이 서버의 타운공방전 상황은 단지 즐겁게 웃고 끝내는 그런 상황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이 의아심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을 길드에 가입시켜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그러한가? 기자의 질문에 그가 답했다. 이 서버의 타운공방전에는 어떤, 동서냉전의 이데올로기에 가까운 명분이 걸려다는 것이다. 쟁탈전이 끝나면 큼지막한 기사거리를 던져줄테니 얌전히 11시까지 모 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란다. 이런 불친절한 정보원이 있나!!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엔피씨의 문전박대 : 애들은 가라!! 아 놔 서러워서....



타운공방전의 이데올로기


로한에는 오토를 돌리며 사는 사람들이나 작업장 소속원보다는 그렇지 않은 순수 게임 유저들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의 선량한 로한 유저들은 절대적 소수인 오토 유저들에 의해 이끌리고 있는 실정이다. 타운공방전을 통해 각 서버의 주도권을 틀어잡고 있는 사람들이 오토 유저이다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이 서버의 타운 쟁탈전은 게임이 제공하는 훌륭한 컨텐츠의 수준을 벗어나, 오토를 사용하는 유저들과 오토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동조하는 유저들 연합 vs 오토를 고발했다가 그들에 의해 근절당할 처지에 놓여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길드의 연합 수준으로 발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게임 내에서 제공하는 컨텐츠를 즐기는 유저라고 보기엔 무진장 치열하고, 처절한 수준이다. 혹시 아직까지도 허무맹랑한 스토리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스크롤을 내려 모 서버의 상황을 보도록 하시길 바란다.


발단은 오토 유저를 고발하는 스크린샷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유저가 오토로 의심되는 유저의 스크린샷을 찍어 "역사 상 최고의 로한 팬사이트 커뮤니티 로한인벤"에 올렸던 것이다. 이 스크린샷에 찍힌 유저는 서버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알수 있는 길드의 일원이었고, 정보원의 진술에 의하면 이 길드는 오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수준의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따라서 이후부터는 가칭 오사모) 급기야 오사모의 마스터는 스크린샷을 내려주기를 요청했고, 당연히 거부되었다. 이 일로 인해 전쟁이 발발했다. 타운공방전의 명분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걸린 것이다.



당시 올라간 스크린샷 발췌. 이 스크린샷이 길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장밋빛 인생 밑에 깔린 비애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가칭 오사모 연합에 밀린 해당 길드는 그야말로 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는 판국이며, 사냥 역시 적대되는 길드원의 운명 때문에 상대 길드연합의 눈에 띄이기만 하면 일단 두 번 살해당하고 나서 생각할 일이니 될 리가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인원수가 많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밀릴 리가 없는, 최소한 박빙의 승부라도 펼쳤어야 할 오사모 vs 오고모(이후 가칭 오고모:오토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모임) 의 승부는 왜 이 모양일까?


여기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오사모의 매커니즘에 있다. 오토를 사용하면 레벨업이 빠르고 자금이 쉽사리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어려운 게임을 비교적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출발선에서 출발한 다른 유저의 캐릭터들에 비해 훨씬 강력해 지게 되고, 이들의 힘으로 사냥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다른 일반유저는 이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오토를 통해 고레벨까지 일사천리로 직행한 후 로한의 부가서비스인 닉네임 변경을 통해 닉네임을 변경한다. 이후 길드에 가입시키면 그가 그동안 오토를 돌림으로서 타 유저들에게 찍혀 있었던 오토유저의 낙인은 사라지고 깨끗한 새 캐릭터가 되어 장밋빛 인생을 즐길 수 있다.



오토 전과의 기록을 말소할 수 있는 부가서비스에 대한 유저의 고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전쟁


이 서버에서는 4층과 5층의 보스들은 이들의 독차지에 다름아니며, 적대되는 길드들은 보는 즉시 참살당한다. 하지만 중립을 지키는 길드원들이나 길드가 없는 유저들의 사냥은 적극적인 PK행위를 통해 방해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오토를 사용하지 않는 절대다수의 순수 게임 유저들을 자신들의 동조자로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이들의 눈 밖에 나면 그나마 조금씩 하던 사냥도 글러먹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이 스토킹에 가까울 정도로 괴롭혀 공중분해시킨 길드가 최소한 두개가 넘는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한다. 다수 유저들의 모임이었던 길드도 그들의 눈에 미운털이 박히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판에 일반 유저는 언감생심이다. 장님 노릇 3년, 귀머거리 노릇 3년, 벙어리 노릇 3년해서 도합 9년만 지나면 대갓집 큰며느리는 팔자가 편다지만, 이들의 팔자는 언제 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말 한마디 잘못 하면 동냥은 고사하고 쪽박마저 깨는 수가 있다 한다



기자가 취재한 정보원의 진술에 따르면, 이들 오사모의 지도부라 부를 수 있는 간부급들은 단지 두 파티가 나아가 5층의 보스를 쓸어담고 온다고 한다. 해킹툴을 사용하는것이 아닐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될 정도로, 리젠되면 사라지고 리젠되면 또 사라지길래 도대체 무슨 일인가 보다가 들켜 바로 죽었지만, 분명히 수호자라는 4마리의 99레벨짜리 준 보스급 몬스터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대보스 바람의 여신 실바만이 혼자 덜렁덜렁 움직이고 있었다 한다. 무엇보다 바람의 여신 실바는 렙과 장비가 아무리 천하장사를 넘어 안드로메다 급이라도 두 파티가 어물거리며 잡아볼 수준의 보스는 아니라는 것이 그의 부가적인 설명이었다.




부동의 네 수호자들. 바람의 여신 실바는 맞아죽던 까무라치던 그저 서 있기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수호하고 있는가



이러한 아이템 분배의 단물과, 눈 밖에 나는 길드에 대한 처절한 응징은 이미 극소수에 불과한 오사모를 연합의 지도부로 격상시켰고 타운공방전은 이들의 힘을 뽐내고 증명하는 무대가 되었다. 그들에 대해 반발하는 길드들은 패배 수준이 아니라 아예 격파되었고, 이제 그들은 다수의 선량한 유저들을 방패삼으며 연합을 탈퇴하는 길드에 대한 처벌까지 행사하는 서버 내의 공포로서 군림천하 중이다. 오토 유저들이 서버 내의 주도권을 잡는 순간이었고, 직접 돌아다니며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서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따라서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전체 로한의 30% 이상이 넘는 서버는 오토 유저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설명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미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길드가 있는 모양이다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분명히 오토를 사용하면 레벨업도 유리하고, 여자친구도 만나러 갈 수 있고, 사회 생활에 지장이 없다. 게다가 유저들의 인식이 아무리 안좋게 흐른다 한들, 게임머니를 판매하는 작업장들로서는 그만둬라 마라 할 수 없는 생업의 공간이 바로 오토이다. 영화 터미네이터 속에서 인류를 말아먹은 스카이넷마저도 정당성을 가지고 발명되었듯, 오토의 게임 내 도입에 대한 정당성은 기사 한편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 일단 논외로 치도록 하자.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로한의 시스템이다.


광우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제아무리 하늘을 찔러도 미국산 쇠고기를 자신들의 이익으로 전환하여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고 대한민국의 시스템이 수입을 허가한다면 좋든 싫든 우리는 먹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된다고 해서 정육점 협회 앞에서 시위하는 것이 말도 안되는 것처럼, 오토를 돌리는 것은 사람들, 유저들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로한의 시스템은 오토를 돌리기 꼭 좋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를 말소하고 새출발을 노릴 수 있는 멋진 개명 서비스도 저렴한 가격에 지원해 주고 있다. 오토를 돌리지 않는 사람이 대단한 것일 뿐, 돌리는 사람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로 시스템적인 지원(?)이 체계적으로 충실한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정의하자면 로한은 유저들의 오토에 대한 인식 전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 인식이 아무리 안좋게 흐른다 한들 신고하거나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스크린샷이라도 올리는 날이면 바로 보복의 철퇴가 날라오기 때문이다.


오토는 기계다. 기계를 상대로 하는 노동경쟁은 승산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승산이 없는 암울한 전쟁에 휘말려 있는 오고모의 유저들은 로한을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하는 극한 상황에 몰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2에서, 스카이넷을 상대로 싸운 터미네이터 T-800과 사라 코너, 존 코너는 결국 미래의 스카이넷 개발자의 생명을 도외시한 도움을 받아 승리할 수 있었다. 결국 공중분해의 위기까지 몰려있는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 푸쉬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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