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8일 저녁 5시. 30명의 눈동자가 프로젝트 화면으로 향했다. 화면 속에는 수염이 지저분한 한 남자가 딴청을 피우고 있다. 그는 삐딱한 고개를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창 밖을 보는 학생처럼 멍하니 있던 그는 돌연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쇼파에 드러누워 낮잠을 잔다. 알 수 없는 중얼거림 후에는 빗자루를 들고 방을 청소하더니 나중에는 가방을 메고 방을 나가버린다.


정정한다. 30명의 눈동자가 프로젝트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것은 대한민국 서울의 어느 한 곳의 일이다. 2011년 1월 28일 저녁 5시. 이 영상은 전 세계 44개국, 169개의 장소에서 상영되었다. 서울의 30명을 포함해 전 세계의 6500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영상을 지켜보았다.



▲ 타카하시 케이타의 키노트. 내내 이런 표정이다



화면 속에서 알 듯 모를 듯 기이한 행동을 보여준 인물은 타카하시 케이타. 괴혼, 노비노비보이 등 독창적인 게임들을 발표해 온 유명 게임 개발자다. 정체를 알고 나면 '그답다'는 생각이 드는 이 영상은 48시간 동안 즉흥적으로 게임을 만드는 글로벌 게임 잼의 키노트 영상이다.


글로벌 게임 잼의 목표는 간단하다. 48시간 안에 게임 만들기. 전세계 44개국, 6500명의 사람들이 이 미션에 도전했다. 그리고 이틀 후 세상에는 이 전에 없던 1480개의 새로운 게임이 탄생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48시간 만에 게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인벤에서는 글로벌 게임 잼 서울 행사장 현장을 찾아, 그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 Welcome~





■ 자기 소개하고 키노트 함께 보기


참가비 한 푼 없이 진행되는 글로벌 게임 잼은 48시간 동안 사용할 장소를 찾는 것도 일. 다행히 올 해는 넥슨에서 교육장을 무료로 제공해주었다. 오후 4시. 하나 둘 씩 참가자들이 행사장을 찾기 시작했다. 행사장을 찾는 이들의 표정은 여러가지 다짐들을 담고 있었다. 48시간 동안 잠 한 숨 안 잘 각오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48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게임을 꼭 만들어 내겠다는 꿈도 읽을 수 있었다. 가방에서 노트북들을 꺼내는 움직임부터 범상치 않았다.


WiFi를 설정하고 글로벌 게임 잼 홈페이지에 등록하는 기본 과정을 거쳐 커다란 스티커 종이에 이름을 써서 옷에다 붙이는 것으로 명찰을 대신했다. 이날 행사장을 찾은 사람들은 함께 게임을 만들어야 할 동료들. 물론 혼자서 게임을 개발해도 되지만 각자의 힘을 합치는 것은 정해진 시간안에 게임을 만들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행사가 시작하기 전까지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하는 참가자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참가자부터 군대를 막 제대한 참가자, 게임사에서 현업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참가자들까지.



▲ 이번 행사는 넥슨의 도움이 컸다. 행사장부터 컴퓨터, 간식까지




▲ 참가자들을 위한 선물도 넥슨 제공




▲ 스티커 종이로 이름표 만들어 붙이기




▲ 일찍 온 참가자들은 자기소개의 시간을...



각자가 어떤 기술들을 가지고 있는지 공유하는 것은 중요했다. 누구와 어떤 게임을 만들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즉흥적인 행사이기 때문. 함께 게임을 만들고 싶은 사람, 또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에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미리 알아두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꼭 무슨 대단한 게임 개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함께 이야기하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사소한 능력들도 힘이 된다.


시간이 되자 함께 키노트를 감상했다. 정해진 시간에 함께 키노트를 감상하는 것은 글로벌 게임 잼의 중요한 식순. 전세계의 참가자가 모두 보는 이 키노트에서는 제한된 시간에 게임을 만들 때 놓치기 쉬운 점들에 대한 선배 참가자들의 조언이 담겨있다.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방법이라는 타카하시 케이타의 키노트 영상이 이어졌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독특한 그의 영상에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다들 눈 모양이 ^^ 이렇게 되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무럭무럭 샘솟을 준비가 되었다.



▲ 다 같이 키노트 영상을 감상중





■ 게임위 멸망? 시끌벅적 아이디어 장터


글로벌 게임 잼에는 매번 하나의 주제가 던져진다. 무작정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듣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게임으로 만든다. 올 해의 주제는 Extinction(멸종). 무거운 주제였다. 명확히 이 주제를 대변하는 게임도 좋다. 하지만 아주 가볍게 이 주제에 접근해도 된다. 이제는 각자가 이 주제를 듣고 아이디어를 떠올릴 차례. 각자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 글로벌 게임 잼 2011 행사의 테마 발표. n은 애교로...




▲ 테마를 듣고 아이디어 정리에 열중하는 모습



이 주제를 담을 수 있는 게임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았다. 문득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는 구제역이 떠오른다. 죽어가는 소에 재빨리 백신 주사를 맞춰야 하는 게임을 떠올려본다. 그러나 구제역의 전염 속도는 너무도 빠르고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소들을 살릴 수 없는 그런 게임? 외부 요인도 집어넣자. NPC들이 자꾸 지역을 이동하면서 구제역을 퍼뜨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떠오른 생각들은 포스트잇에 적어둔다. 그리고 이런 아이디어들을 아이디어 장터에 제출한다. 몇 개의 자리가 마련되고 시간별로 어떤 아이디어들을 이야기할 지 순서를 정한다. 이를테면 6시에 1번 테이블에서는 인구증가로 인한 인류멸망에 대한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아이디어를 낸 참가자는 '호객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홍보해야한다.



▲ 멸종이라는 단어에서 이런 아이디어가 나오다니




▲ 미리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아이폰에 정리해 온 듯




▲ 정리된 아이디어는 장터에 공개한다




▲ 30개의 서로 다른 아이디어가 뚝딱 만들어졌다




▲ 이런 게임 좋아요!




▲ 이 게임의 아이디어도 꽤 구체화 되었다. 게임위 심의 위원인 주인공은 몰려드는 심의에 적당한 이유를 찾아 심의를 해줘야 하는데, 새로운 법이나 규제들이 점차 생겨나면서 결국 우리나라 게임계가 멸망하는 시나리오...



순식간에 30개의 서로 다른 게임 아이디어들이 만들어졌다. 이런 아이디어들은 아이디어 장터를 통해 다른 참가자들과 공유되고, 함께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개인이 가진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특히 기획자들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만들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했다. 마음이 맞는 참가자들끼리는 먼저 손을 잡기도 했다.



▲ 자유롭게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게임 아이디어를 들어본다




▲ 그림을 그려가며 아이디어 설명을...




▲ 아무도 찾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 행사를 진행한 정성영씨는 문자메세지로 퀘스트를 주는 현실 게임을 제안해 또 다른 재미를 주기도 했다.





■ 프로그래머는 귀족? 팀원 구하기는 어려워


첫 날 가장 중요한 일은 팀원을 구하는 것이다. 아이디어 장터를 통해 어떤 아이디어를 게임으로 승화시켜낼 것인지 공유한 참가자들은 함께 팀을 꾸렸다. 그러나 이 작은 인력시장에도 불균형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는 기획, 프로그램, 아트가 한 명씩 있으면 대충 모양새가 갖춰지지만 참가자들의 비율이 꼭 이렇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가장 귀족은 프로그래머. 많은 참가자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게임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프로그래머의 수는 많지 않았다. 좋은 아이디어에는 여러 명이 팀원으로 참가했다. 어떤 팀은 아티스트가 부족하고 어떤 팀은 많았다. 즐겁고 그리고 치열한 팀원 구인 광고가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



▲ 아티스트 구합니다~




▲ 그런데 이 쪽은 아티스트 풍년. 개발자 구합니다~



그래도 팀을 꾸리지 못하는 참가자들은 함께 아이디어를 좁혀나가는 과정을 거쳤다. 동그란 스티커를 3개씩 받아들고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에 투표를 한 것. 많은 표를 받은 아이디어는 그만큼 함께 할 동료들을 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생각의 차이를 좁혀가며 함께 게임을 만들 팀을 꾸려갔다. 거꾸로 아예 아무런 아이디어 없이 팀원부터 꾸린 경우도 있었다. 일단 팀원을 모은 다음 아이디어 회의를 하겠다는 생각.


일단 팀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은 모두 자유. 48시간을 어떻게 쓰는가는 전적으로 팀의 결정이다. 밥을 먹으러 가도 되고 커피를 마셔도 된다. 찜질방에 가도 되고, 그냥 각자 집으로 흩어져도 된다. 48시간 안에 하나의 게임을 만들라는 미션은 팀을 꾸리는 순간 바로 시작되었다.



▲ 팀을 만들지 못한 사람들은 아이디어 투표를 통해 의견을 좁혀간다



▲ 팀이 짜여지자 바로 게임 개발 준비에 들어간다. 집에서 아이맥을 가져온 참가자




■ 그리고 48시간 후...


글로벌 게임 잼 행사장을 다시 찾은 것은 이틀 후. 9개의 팀이 각자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것으로 행사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9개의 팀은 각자 팀과 게임에 대한 소개를 하고 실제 게임을 시연해보였다. 시연을 보는 동안 다른 참가자들은 게임에 대한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포스트잇에 기록하고, 개발자들이 공감이 가는 것들을 골라 읽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 게임을 발표하는 것으로 행사는 마무리 되었다.



팀에 주어진 자유로운 48시간. 여기에는 밥을 먹는 시간 잠을 자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시간들을 제하고 나면 막상 게임을 만드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게임을 만들지도 정해야 하고 실제로 게임을 만드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결과물은 흥미로웠다. 그 중에는 '이게 48시간만에 만들 수 있는 게임인가?' 싶은 것들도 있었다. 첫 날 아이디어를 공유할 때 나왔던 것들 중에는 너무 방대해서 시간 안에 만들 수 없어 보이는 것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 Disaster (재앙)라는 제목의 이 게임은 버튼 연타만으로도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 마이크로 소리를 인식해 지구로 떨어지는 운석을 파괴하는 게임. 지구를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아봅시다는 소리에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아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 늦게 와서 혼자 만들었다는 한 참가자. 지구 멸망을 앞두고 동물친구들을 탈출시키는 아이폰 게임. 깔끔한 그래픽으로 감탄의 목소리들이 절로 나왔다




▲ 게임이라는 결과물보다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얻은 수확이 더 클 때도 있다




▲ 발표를 듣고 의견을 포스트잇에 남겨 서로 공유하는 모습



하지만 함께 48시간을 보냈던 참가자들이 서로의 게임에 환호와 호응을 보낸 것은 만들어진 게임이 훌륭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모든 게임이 시간 안에 의도한 모습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제한된 시간 안에 게임을 만든다는 미션에 필요한 것은 팀워크일 수도 있고 프로젝트 관리 능력일 수도 있다. 게임에 대한 열정일 수도 있고, 개인이 가진 뛰어난 개발능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 게임 잼은 이런 것들을 미리 갖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게임 잼은 경쟁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48시간 안에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목표는 아닐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운 열정이 가득했던 글로벌 게임 잼 행사는 그래서 스스로 '취재'가 아니라 직접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최초의 행사였다.





※ 글로벌 게임 잼 행사를 통해 만들어진 1480개의 게임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직접 내려받아 플레이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