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의 열기가 떠들썩하다.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은 정 반대의 시간 속에 살고있는 우리들마저도 졸린 눈을 부비며 TV 앞에 앉게 만들었다. 혹은 출근 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이던가.

하지만 이번 월드컵이 여느 때와는 달리 무언가 미적지근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극적으로 첫 원정 16강 진출에 성공했던 만큼 브라질 월드컵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물며 조 추첨식만 하더라도 한국은 러시아, 알제리, 벨기에와 한 조에 묶이면서 최상의 결과라며 들떴지 않았던가. 뭐 물론 브라질,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스페인 등의 쟁쟁한 팀을 피했다는 것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갔을 테지만.

그런데 막상 월드컵이 다가오자 거리는 조용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런 탓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무언가가 뒤틀리고 말았다. 아니나다를까, 월드컵을 앞두고 펼쳐진 평가전에서 불안감은 현실이 됐고, 결국 러시아전 무승부 이후 낙관했던 알제리전에서 졸전을 펼치고 말았다. 당시 알제리전을 두고 출근을 해야하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밤을 샜던 기자는 전반전이 종료되자 답답한 마음에 TV를 끄고 잠이 들었다. (미안하다 흥민아... 너의 눈물을 보지 못했구나.)

아직 벨기에전이 남아 있고, 16강 진출 희망 역시 남아 있지만 한편으론 섭섭한 마음이 큰 것이 사실이다. 물론 혹자의 말마따나 내가 그들을 위해 직접적으로 해준 것은 없지만 말이다. 아마도 이러한 감정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월차를 내고 영동대로 거리 응원을 나간 김대리도, 그날만큼은 취업 고민을 잊어보자 TV를 켠 모 대학교 취업준비생도 답답함을 느꼈으리라. 어디 그들 뿐이랴? 축구를 보고 싶은데 난데 없는 박치기를 봐야 했던 포르투갈 조세씨도, 사자인줄 알았더니 앙칼진 고양이였던 국가대표들의 집안 싸움을 봐야했던 이들 모두 섭섭할 따름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흔한 월드컵 베스트 11이 아니다. 분명 그들이 하고 싶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그 말을 대신 전해주고픈 베스트 11이다. 이름하야 '미안하다! 베스트 11'.



'미안하다 베스트 11' 선수들을 뽑기에 앞서 팀 컬러를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많은 포메이션 중 어떤 것을 선택할 지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결국 선수를 뽑기보다는 감독을 정해 그의 전략과 포메이션을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


■ 미안하다! 잔디가 푹신했다... 이란 카를로스 퀘이로스 감독

▲ 이란 대표팀 카를로스 퀘이로스 감독(사진=FIFA 홈페이지)

우리에게는 '주먹감자'로 친숙한 이란 대표팀 퀘이로스 감독의 전략은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 나선 32개 팀 중 단연 돋보였다. 4-2-3-1 포메이션의 수비 지향 축구는 말 그대로 수비를 두텁게 하면서 역습 기회를 잡는 포메이션이지만, 퀘이로스 감독은 이를 다르게 해석한 듯 보였다. 그는 '역습'이 아닌 '수비'에 초점을 맞춰 극 수비 지향의 4-5-1 이른바 10백을 월드컵 무대에서 선보였다.

물론 이를 두고 단순히 그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이러한 이란의 전략에 아르헨티나는 대처법을 찾지 못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만약 아르헨티나에 메시가 없었더라면, 이란은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나이지리아에 이어 다시 한 번 무승부를 거뒀으리라.

하지만 '축제'를 지켜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팬들에게 있어 '침대축구'라 불리는 그의 전략은 따분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안정환 해설위원의 말마따나 눕고 싶다면 경기장이 아닌, 집에 가서 눕도록 하자.


▲ 미안하다! 베스트 11 포메이션

'미안하다 베스트 11'은 퀘이로스 감독이 내세운 4-2-3-1(혹은 4-5-1) 포메이션을 조금 변형해 구성했다. 우루과이의 악동 수아레스를 필두로 한 3-3-3-1 포메이션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만들고 보니 과르디올라 감독이 FC 바르셀로나에서 시도했다 실패로 끝난 포메이션과 비슷하다. 당시 FC 바르셀로나의 3-3-3-1의 실패 요인으로는 높은 활동량을 요구 받은 선수들의 체력적 한계와 불안한 수비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미안하다 베스트 11'은 그러한 약점을 완벽히 해결했다. 10명 모두가 하프라인 안쪽에서 주로 활동하는 10백 전술이기에 선수의 체력 부담은 줄어들고, 수비벽 역시 탄탄하기 그지없다. 상대 팀에 메시만 없다면.


■ 깨물어서 미안하다! 우루과이의 악동 루이스 수아레스

▲ 이빨 통증을 호소하는 수아레스(사진=FIFA 홈페이지)

우루과이가 죽음의 D조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2승 1무를 기록하며 대이변을 만들어낸 코스타리카에 이어 조 2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우루과이의 영웅 루이스 수아레스가 있었다.

지난 시즌 막판에 무릎 부상을 입은 수아레스는 회복을 위해 코스타리카 전의 참패를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전에 투입된 그는 2골을 기록하며 팀에게 귀중한 1승을 안겼고, 이는 곧 우루과이의 16강 진출의 발판이 됐다. 우루과이로서는 영웅의 귀환이었다.

그러나 25일 치러진 이탈리아 전에서 수아레스는 악동의 본능을 참지 못하고 사고를 저질렀다. 심판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는 사이 성큼성큼 페널티 박스 안쪽으로 들어간 그는 키엘리니의 어깨를 '핵이빨'로 냅다 물었다. 더군다나 키엘리니가 자신을 뿌리치자 이빨을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수준급 연기까지 펼쳐보였다. 지난 남아공 월드컵에서 '신의 손' 이후 또 다시 월드컵 무대에서 사고를 친 그에게 FIFA측의 중징계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 따봉해서 미안하다! 무적(無籍)의 스트라이커, 박주영

▲ 벨기에전에서 박주영은 과연 자존심 회복에 나설까?(사진=SBS 중계 캡쳐)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의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이룬 박주영이지만, 러시아전과 알제리전에서 보여준 그의 성적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러시아전에서는 이렇다 할 슈팅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급속한 체력저하를 보여주며 팬들에게 '따봉'만을 남겼다. 알제리전에서는 전반전 내내 단 한 차례의 슈팅조차 하지 못했다. 반면 그와 교체 된 이근호와 김신욱이 골 장면을 만들어내면서 박주영의 입지는 더욱 흔들렸다.

브라질 월드컵에 나선 박주영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대표팀 홍명보 감독은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활동하는 선수'만을 기용하겠다는 처음의 원칙을 깨고, 아스널에서 방출된 무적(無籍)의 박주영을 대표팀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박주영은 평가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며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끝내 홍명보 감독과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오죽하면 그를 두고 '0골 0도움 1따봉 1미안'이라고 했을까.

다만 그를 선발에서 제하는 것 역시 마냥 쉬운 일 만은 아니다. 이근호, 김신욱 등의 카드는 '조커'로서 빛나는 것이지, 선발 출전으로서는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또한 박주영이 전방에서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해준 덕분에 후방 수비가 안정성을 찾았고, 또한 상대의 체력이 소모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결국 벨기에전의 라인업을 떠나서 10백을 지향하는 '미안하다 베스트 11'으로서는 박주영을 흔쾌히 '최전방 수비수'로 기용하게 됐다.

▲ 10백이 아니라면 김신욱 카드도 고려할 만하다(클릭하면 커집니다)


■ 닌자라서 미안하다! 4강을 꿈꿨던 일본의 카가와 신지

▲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 카가와 신지(사진=FIFA 홈페이지)


일본을 두고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했다. 앙금이 남아있고, 많은 부분에서 우리와는 다른 일본이지만, 한편으로는 놀랍도록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적어도 브라질 월드컵에서 보여 준 일본의 대표 스트라이커 카가와 신지의 모습은 한국의 스트라이커 박주영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일본은 25일 콜롬비아 전에서 1:4로 완패하며, 1무 2패로 탈락이 확정됐다. 월드컵을 앞두고 4강에 진출할 수 있다며 자신만만했던 일본은 그렇게 침묵했다. '드록신'이 자리를 비운 코트디부아르를 상대로 제법 멋진 선취골을 뽑아냈던 일본은 오히려 한 명이 퇴장당한 그리스와는 졸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임한 콜롬비아에게는 흠씬 두들겨 맞고 말았다.

패인은 에이스 카가와 신지의 침묵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을 무승의 원인이라고 지목한 카가와 신지는 코트디부아르와 그리스 전에서 118분 동안 단 한 번의 슈팅조차 날리지 못하며 '슈팅제로'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콜롬비아전에서는 이러한 것을 의식했는지 수 차례 슈팅을 날렸지만, 결국 무득점을 기록하며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카가와 신지를 비롯해 AC 밀란 소속 혼다 게이스케, 마인츠의 오카자키 신지 등 역대 최강 라인업을 자랑했던 일본은 결국 에이스 스트라이커의 부진을 극복하지 못했다. 마지막 벨기에전만을 남겨 두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웃 나라 일본의 탈락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상대에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기척을 지운 '닌자 축구'의 진수를 보인 그를 레프트윙백으로 선택했다.


■ 집안 싸움해서 미안하다! 사자의 탈을 쓴 고양이, 카메룬의 뱅자맹 무칸조, 베누아 아수에코토

▲ 막장의 끝을 보인 베누아 아수에코토(사진=FIFA 홈페이지)

1990년 이태리 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쓰며 '불굴의 사자'로 불리운 카메룬이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막장의 끝을 보여줬다. 몸싸움이 치열한 종목인 축구이지만, 전반 39분 알렉스 송이 보여준 행위는 한때 유행한 영화 '옹박'을 연상케 했다.

당시 알렉스 송은 크로아티아 공격수 만주키치의 등을 팔꿈치로 가격, 그대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당하면서 팀의 0:4 대패에 일조했다. 카메룬의 막장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0:4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칸조와 아수에코토가 다투기 시작했고, 급기야 아수에코토가 무칸조에게 박치기를 날렸다.

스포츠맨쉽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의 행동은 곧 카메룬 팀 자체의 문제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퇴장당한 송과 부상당한 에투가 빠진 카메룬은 브라질에게도 1:4로 대패하며 불명예스러운 월드컵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미안하다 베스트 11'에서는 막장 드라마를 연출한 카메룬의 3인방을 모두 기용하고 싶었으나, 다른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 명을 제외해야만 했다. 싸워야 할 상대를 잘못 찾은 무칸조와 아수에코토를 각각 라이트윙백과 레프트 풀백으로 선택했다.


■ 퇴장 당해 미안하다! 아주리 군단의 몰락,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

▲ 우루과이전에서 퇴장당하고 만 마르키시오(좌)(사진=FIFA 홈페이지)

죽음의 조라 꼽힌 D조의 희생양은 결국 이탈리아와 잉글랜드가 됐다. 스페인과 함께 우승 후보로 꼽힌 3강의 탈락은 축구 팬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카테나치오(Catenaccio)라 불리는 빗장 수비로 대표되는 이탈리아는 노장 피를로의 고군분투로 잉글랜드를 잡으며 산을 넘은 듯 보였지만, 이변의 주인공 코스타리카에 이어 우루과이에게 마저 1점 차이로 패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이탈리아로서는 25일 우루과이전에서 비기기만 하더라도 16강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이탈리아는 빗장 수비에 집중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전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피를로의 짐을 덜어 준 마르키시오가 퇴장당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후반 14분, 마르키시오는 우루과이의 리오스의 정강이를 발바닥으로 찍었다는 이유로 레드 카드를 받았다. 마르키시오로서는 고의성이 없는, 억울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탈리아는 수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패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팀 동료 키엘리니는 수아레스에게 물리기까지 했다.

개막전부터 유난히 판정상의 논란이 많은 브라질 월드컵이지만, 경기 중·후반에는 심판의 성향을 읽고 대처하는 것도 선수로서의 능력이다. 잉글랜드전에서 기막힌 선제골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겼던 마르키시오로서는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 늙어서 미안하다! 삐걱대는 티키타카, 스페인의 사비 알론소

▲ 지쳐버린 스페인의 심장 사비 알론소(사진=FIFA 홈페이지)

무적함대가 침몰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낡고 말았다. 호화 찬란한 라인업으로 기대를 몰았던 스페인이 네덜란드전에서 1:5로 대패한 데 이어 칠레에게까지 패하며 16강에 탈락하고 말았다. 원인은 세대교체의 실패였다.

유로 2008과 2012에 연달아 우승을 차지한 스페인이었지만, 월드컵을 앞두고 꾸준히 지적받아온 전력의 노쇠화는 끝내 스페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한창 시절 날이 선 듯한 패스로 점유율을 높이는 티키타카를 선보였던 주역들은 세월의 흔적을 피하지 못한 채 헐거워진 모습을 보였다. 스페인 중원의 핵심 사비 알론소를 비롯해 사비 에르난데스, 이니에스타, 다비드 비야, 카시야스 등은 사실상 자신들의 마지막 월드컵을 쓸쓸히 떠나보내야 했다.

스페인의 패배가 주전 선수들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을 대체할만한 신성(新星)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야의 뒤를 이을 공격수로 지목됐던 페르난도 토레스는 박주영과 함께 영국 언론이 선정한 월드컵 엔트리 워스트 11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만약 사비 알론소가 4년만 젊었더라면, 만약 카시야스가 4년만 젊었더라면 무적함대 스페인은 브라질 월드컵에서 돛을 활짝 펴고 나아갔을 것이다.


■ 실책해서 미안하다!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 56년 만에 월드컵 무승... '캡틴' 제라드

▲ 무너진 '캡틴' 제라드(사진=FIFA 홈페이지)

'캡틴' 제라드가 다시 한 번 실책으로 울었다. 이탈리아에게 패하며 승점이 간절한 시점에서 우루과이를 만난 잉글랜드는 후반 39분, 제라드의 헤딩 실수로 무너지고 말았다. 길게 찬 골킥을 걷어낸다는 것이 그대로 뒤로 흐르고 말았고, 오프 사이드 위치에 있었던 수아레스에게 그대로 연결되며 실점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지난 4월 27일, EPL 36라운드 첼시와의 경기에서도 제라드는 슬라이딩 실책으로 뎀바 바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말았다. 당시 11연승을 달리던 리버풀의 연승 행진 역시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 2개월이 지난 지금, 제라드의 실책으로 우루과이에 패한 잉글랜드는 코스타리카를 상대로도 무승부에 그치며 56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무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잉글랜드로서는 심각한 자존심의 타격이었다. 잉글랜드의 탈락이 확정되자 언론들은 발다퉈 패배의 요인을 분석했고, 로이 호지슨 감독의 전략 실패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제라드를 주 원인으로 꼽았다. 실책을 제외하고서라도 흐름을 바꿔주는 역할을 해야하는 제라드가 이를 수행치 못하고 개인 플레이에만 급급했다는 평가다.

결국, 유럽발 3강이었던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가 미끄러진 헤딩, 낡은 심장, 못된 발로 인해 나란히 이른 귀국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 열쇠로 문 열어줘서 미안하다! 알제리전 키 플레이어 윤석영

▲ 벨기에전은 수비력 불안 극복이 관건(사진=FIFA 홈페이지)

한국 대표팀의 수비력 불안을 두고 누구 한 명의 문제라고 꼬집기에는 드러나는 문제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선수들간의 위치가 겹치면서 상대에게 연신 빈 공간을 내줬고, 공에만 집중하다가 선수를 놓치기 일쑤였다. 더위에 지친 러시아를 상대로는 급급하게 버텨냈으나, 결국 알제리전에서는 대량 실점을 내주고 말았다.

그래도 굳이 알제리전 참패의 원인이 되는 수비력 불안을 놓고 한명을 지목하자면 윤석영이라 할 수 있다. 믿었던 만큼 실망도 컸다. 적어도 홍명보 감독은 윤석영을 알제리전의 키 플레이어로 삼은 듯 했다. 알제리전을 앞두고 가진 대표팀 인터뷰에서 홍명보 감독은 레프트 풀백으로 나서는 윤석영을 대동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윤석영은 자주 자신이 마크해야 할 선수를 놓쳤고, 실점의 계기까지 내주고 말았다. 알제리전 공격의 핵이었던 손흥민에게 연결하는 플레이 역시 실수가 잇따랐다.

대표팀 발탁 과정에서부터 홍명보 감독의 기대를 업었지만, 평가전에서부터 러시아전, 알제리전에서 보인 그의 성적은 기대감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변명하자면 경험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물은 엎지러졌는 것을. 한편으론 알제리전에서 빠른 취침을 유도해 피로감을 덜어주었으니 내심 고맙기도 하다.


■ 공룡이라서 미안하다! 파키케팔로 사우르스, 포르투갈 페페

▲ 브라질 월드컵 악행의 첫 발을 딛은 페페(사진=FIFA 홈페이지)

축구 팬들에게 있어 페페의 악행이야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도 너무했다. 2013 FIFA 발롱도르를 수상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그렇게 동료의 박치기를 보고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전날 라이벌 리오넬 메시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봤을 그였기에 웃음 끝에 걸리는 쓴 맛은 더욱 진했다.

한편 포르투갈에게는 끔찍했던 페페의 박치기는 독일에게는 오히려 약이 된 듯 했다. 전반 10분,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뽑았던 뮐러는 페페의 박치기 기운을 받아 두 골을 추가하며 브라질 월드컵 첫 해트트릭의 주인공이 됐다. 이를 지켜봐야 했을 페페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페페가 '미안하다 베스트 11'에 합류하면서 팀의 아쉬운 부분을 긁어 줄 무투파 4인방이 완성됐다. 최전방에서는 수아레스가 '핵이빨'로 상대를 물어 뜯을 것이며, 여차하는 순간에는 페페의 묵직한 박치기가 날아들 것이다. 아, 심판에게 걸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무칸조와 아수에코토가 집안 싸움을 일으켜 심판의 눈을 돌릴 테니깐.


■ 나라 잃어 미안하다! 정성룡

▲ 알제리전 당시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냈던 정성룡 골키퍼(사진=FIFA 홈페이지)

'미안하다 베스트 11'의 대미를 장식할 골키퍼를 두고 한동안 고민했다. 두 경기 동안 무려 7골을 내준 무너진 수호신 카시야스와 한국 대표팀의 수문장 정성룡이 고민의 원인이었다. 수치상으로는 정성룡이 그래도 앞서 있다. 러시아전에서 1점만 내주며 선방한 정성룡은 두 경기 동안 5골을 내줬다. 카시야스보다는 2골 적은 셈이다. 둘 모두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고, 나라 잃은 표정으로 자신의 실책을 얼마나 뼈저리게 느끼는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제껏 쌓아 온 커리어와 상대 팀의 전력 비교 상 정성룡 쪽으로 무게가 실리게 됐다.

알제리전에서 보인 정성룡의 경기력을 두고 외신 역시 혹평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 언론은 '재앙'이라는 표현을 쓰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물론, 감정이 격해 있는 건 이해해야 한다만서도.

경기 초반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던 정성룡은 시간이 흐를수록 급격히 집중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공이 한국 진영 쪽으로 넘어올 때마다 보는 이 마저도 몸이 떨려, 절로 숨죽이며 지켜보게 됐다. 몰입도 만큼은 여느 경기보다도 높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정성룡은 코너킥 상황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며 알제리에게 두 번째 골을 내주고 말았다. 갈 곳을 잃어 버린 그의 손이 애꿎은 허공을 가를 때, 공은 이미 골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이 때를 기준으로 피로도가 급격히 올라갔고, 3번째 실점을 내주자 미련 없이 TV를 끄고 말았다. 거리 응원에 나선 군중들도 이 때를 기점으로 자신들의 흔적만을 남겨둔 채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 정성룡vs김승규, 벨기에전 수문장은 누가 될 것인가?(클릭하면 커집니다)


삽화=석준규(lasso@inv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