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로리그를 진행중인 온게임넷 정소림 캐스터 ]



e스포츠가 시작된 지도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만큼 많은 선수, 관계자들이 e스포츠라는 영역을 거쳐 갔고 지금은 e스포츠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동안 계속 e스포츠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번에 만난 정소림 캐스터도 그 중 한명이죠. 2000년 iTV를 통해 게임 캐스터 생활을 시작한 정소림 캐스터는 그간 다양한 게임 리그를 중계했고 이후 온게임넷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뒤에도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3 같은 게임 리그를 맡아 매끄러운 방송 진행으로 많은 e스포츠 팬들에게 인정받았죠.

시청자들에게는 발랄한 캐스터로, 선수들에게는 다정다감한 누나로 긴 시간 e스포츠 무대에서 모습을 보여온 정소림 캐스터. 인벤에서는 정소림 캐스터를 만나 그녀의 10년이 넘는 방송생활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그 시간동안 시청자들 앞에서 항상 밝은 모습을, 때로는 시청자와 같이 감동하며 눈물을 보이는 정소림 캐스터의 게임 방송 이야기를 한번 만나보세요.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앞서 독자분들에게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게임 캐스터 정소림입니다. 게임 방송사인 온게임넷에서 스타크래스트2, 워크래프트3 뿐만 아닌 다양한 게임 리그 및 방송을 맡아 진행했습니다. 인벤을 통해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네요.





e스포츠 리그에서 여성 게임 캐스터는 흔하지 않은데, 어떻게 게임 캐스터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게임 방송 쪽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다른 방송국에서 MC와 리포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방송 리포터가 아닌 교사가 되고 싶어서 임용 고시를 준비하던 중 스타크래프트가 나왔죠. 이전까지 게임이라곤 윈도우에 기본으로 설치된 지뢰 찾기나 카드놀이 정도의 게임밖에 몰랐었는데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알고 나서는 완전히 푹 빠져 종일 스타크래프트만 했어요.

그러던 중 iTV에서 게임방송 쪽으로 활동하던 이정한 해설이 어느날 저한테 연락을 했어요. 이정한 해설은 제 대학 선배인데 제게 연락해 자신이 담당하던 프로가 있는데 주중에는 시간이 되지 않아 그만두게 되어서 후임 진행자 오디션을 볼 거 같다고, 한 번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마침 저도 스타크래프트 덕에 게임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응모한 오디션에 합격해서 게임 캐스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의 어떤 부분에 재미를 느껴서 빠져들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프로 게이머처럼 실제로 사람들을 상대로 한 플레이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제가 만든 건물에서 병력이 나오고, 그 병력으로 상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게임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었겠지만, 그전까지 게임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제게는 정말 신선한 세계였거든요.

아침에 일어나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다가 점심때가 되어 빵을 먹다가 문득 창 밖을 보면 이미 어두워져 있을 정도로 몰두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 가지에 빠져들어 사는 성격은 아닌데 이상하게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살 정도였어요. 이런 게 운명일까요?


그렇다면 스타크래프트 중계는 언제 처음으로 맡게 되셨나요?

제가 입사하던 시기에는 TV에서 스타크래프트뿐만 아닌 다양한 게임 리그를 중계했어요. 철권, 포트리스와 함께 피파도 중계했을 정도로 여러가지 게임 리그가 활성화 되어 있던 시기였거든요. 오디션에 합격해서 방송사에 입사하게 되었는데, 2주도 안 되어서 리그 방송을 맡게 되었습니다. 초보 캐스터로서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스타크래프트야 제가 즐기던 게임이었으니 방송을 진행하기에 충분한 지식이 있었지만, 나머지 게임들이 문제였어요. 그나마 철권이나 포트리스는 금방금방 따라갔는데 피파는 그게 안 되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축구라는 종목에 대한 이해에다 팀별로 선수에 전략까지. 제가 외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죠.

그만큼 피파를 진행할 때 긴장도 많이 했는데, 한 번은 방송 중에 어찌나 긴장했는지 골이 들어간 상황에서 나오는 리플레이를 실제 경기 상황인 줄 알고 또 골이 들어갔다고 이야기를 한 거죠. 그 순간 리시버에서 PD님이 '대체 뭐하는거야!'라고 소리치고, 저 역시 깜짝 놀랐죠. 게임 캐스터를 시작하고 약 한 달 후에 생긴 일인데, 13년이 지금이 되어서 다시 돌이켜봐도 긴장되는 순간이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스타크래프트를 중계하셨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세세하게 순간까지 기억나지 않지만, 스타리그의 하부리그인 챌린지리그와 듀얼 토너먼트를 진행했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대회를 엄재경 해설과 김창선 해설, 그리고 저 셋이서 중계를 했는데 아무래도 듀얼 토너먼트나 챌린지리그는 스타리그보다 긴장이 덜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방송에 들어갈 수 있었죠. 그리고 무대 전면에서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마련된 중계실에서 방송을 진행하다 보니 두 해설과 사랑방에서 이야기 하듯이 편한 분위기에서 경기를 중계했던 게 팬분들도 마음에 드셨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아마 그런 편안한 진행이 제 중계 스타일하고 어울렸고, 그래서인지 그 시기가 편안하고 즐겁던 때로 기억에 남아있죠.


많은 사람이 정소림 캐스터 하면 워크래프트3 중계도 빼둘 수 없다고 이야기 하죠.

워크래프트3은 제가 전담해서 리그를 맡은 게 아니라 가끔 대타를 들어갔어요. 정일훈 캐스터가 워크래프트3 방송을 진행했었는데 어느날 저에게 워크래프트3 리그를 하루 정도 대신 진행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일단 수락은 했는데, 제 성격상 게임에 대해 잘 모르고 중계하는 걸 싫어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악몽 중 첫 번째가 방송 5분 전인데 내가 해야하는 프로그램이 어떤 게임으로 하는 리그인지도 모른 채 PD가 빨리 방송 들어가라고 재촉하는 꿈일 정도로요.

그래서 그 프로 한 번 대타를 뛰기 위해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워크래프트3에 대해 공부했어요. 비록 대타로 들어가는 방송이지만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죠. 정말 이 악물고 공부해서 방송에 들어갔고, 중계 끝나고 나서는 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는 주위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가 긴장이 풀린 나머지 저녁 식사 후에 맥주 두 병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WCG 워크래프트3 중계에서도 정소림 캐스터를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죠. 방송 리그보다는 WCG에서 워크래프트3 중계를 더 많이 한 거 같아요. 경기 흐름이 스타크래프트보다 느리지만 너무 느린 것도 아니고, 게임이 천천히 흘러갈 때에는 게임에 관한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WCG에서 같이 중계를 맡은 오성균 해설도 저하고 중계 스타일이 잘 맞아서 보시는 시청자분들도 중계를 즐겁게 보신 거 같아요.

편하게 중계했다고 해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워크래프트3은 스타크래프트처럼 매번 WCG 우승을 차지한 게 아니라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한 적이 정말 많았어요. '안드로 장'이라고 불리던 장재호 선수가 있었음에도 WCG에서는 우승 한 번 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었어요. 옆에서 선수들이 좌절하는 걸 보고 같이 마음 아파해주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서 정말 안타까웠어요.

그러던 중 2010년 WCG에서 김성식 선수가 한국 선수로는 WCG 사상 처음으로 워크래프트3 부분 우승을 차지한거에요. 저는 선수들이 WCG 우승 문턱에서 계속 좌절하는걸 지켜봐왔고, 경기 끝난 후에 남몰래 울기도 했을 정도로 워크래프트3에 대한 애정도 강했는데, 그렇게 바라던 한국 선수의 우승이 확정되자 오성균 해설과 둘이 정말 펑펑 울었어요.

워크래프트3을 사랑하는 팬들이시라면 그 순간의 감동을 잊지 못하셨을 거에요.


[ ▲ 몇 년간의 아쉬움을 김성식 선수가 풀어버린 바로 그 순간 ]



정말 많은 게임을 중계하셨는데, 그럼 스타크래프2는 처음에 어떻게 접하셨나요?

프로리그 방송을 하던 중 어느 날 스타크래프트2로 종목 전환을 할 거고, 미리 준비하라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직접 마트에 가서 자유의 날개 패키지를 구입해서 즐기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스타크래프트2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여러 해 게임 캐스터를 하면서 느낀 점인데, 게임에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화려한 3D 그래픽을 보인다고 해도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스타크래프트가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직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던 부분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고, 워크래프트3이 생각만큼 흥행을 하지 못했던 것도 전체적인 경기 상황에 한눈에 딱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느꼈어요.


프로리그에서 스타크래프트2로 종목을 전환할 때 스타크래프트와 병행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유닛 이름이나 기술 이름이 혼동되지는 않으셨나요?

저도 처음 두 게임을 병행할 때 용어나 유닛 이름을 많이 틀릴 줄 알았는데 그 부분은 의외로 힘들지 않았어요. 방송 전 회의에서도 자연스러운 용어 변경을 위해 스타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2의 유닛 이름을 혼용해서 사용하자고 했었죠. "스타크래프트에서의 마린은 스타크래프트2에서 해병이죠" 이런 식으로요.

사실 병행 시즌때 경기를 중계하는 중계진보다 스타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2, 두 게임을 동시에 하는 선수들이 더 힘들어 했었어요.


어떤 면에서 선수들이 힘들어하던가요?

한 가지 게임에 매달려서 연습을 해도 성적이 잘 나올까 말까 하는 상황에서 두 가지 게임을 동시에 해야 하니 연습은 연습대로 안 되고 성적은 성적대로 안 나왔으니 정말 힘들었을 거에요. 그리고 스타크래프트는 병행 시즌을 마지막으로 더는 하지 않는데 당장 프로리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습은 해야 하고, 이런 부분에서 선수들이 힘들어 했던 거 같아요.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병행 시즌 당시 팬들에게 정말 혼났던 일이 있습니다. 선수들이 저하고 인터뷰만 하면 자꾸 울더라고요. 한 번은 이제동 선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이제동 선수가 멋지게 활약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팬들이 많은데, 한마디 하시죠'라는 질문이었어요. 그런데 질문에 대답하던 이제동 선수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만큼 선수들이 병행시즌 때 성적 부담도 많았고, 연습도 하기 힘들어서 그런 질문에 눈물이 터진 게 아닌가 생각해요. 기회가 된다면 해명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프로그램이 끝나고 이제동 선수나 인터뷰 때 눈물울 보인 선수들에게 다가가서 '누나가 좀 심한 질문을 했니?'라고 물어보면 '그런 게 아니라 누나가 물어보면 눈물이 울컥 나오려고 하더라고요'라고 답했어요. 같이 방송하는 중계진들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자 저보고 힐링캠프라고 놀리더군요.

제가 자꾸 선수들을 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상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똑같은 질문을 해도 선수들의 진솔한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런 능력 말이죠. 선수가 힘들어서 눈물을 흘리는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오히려 선수들의 힘든 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인터뷰가 좋은 인터뷰라고 생각해요.


방송 인터뷰 중에 선수들이 눈물을 보이면 남자인 저도 당황스러울 거 같은데 어떠시던가요?

사실 선수들이 처음 눈물을 보였을 때 '내가 과연 잘 한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팬 분들이 선수들을 아끼다보니 선수들이 눈물을 보이면 저에게 쓴 소리를 하시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똑같은 질문을 다른 캐스터가 하는 것 보다 제가 하는 것이 선수들의 마음에 더 와닿는 거니까요. 선수들의 진솔한 마음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면 좋은 인터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잘한건가?'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게 저만의 고유한 인터뷰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럴때가 아니면 언제 이제동 선수나 지금은 은퇴한 염보성 선수가 힘들다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걸 볼 수 있겠어요.


같이 중계하던 해설진들의 반응도 궁금하네요.

마침 프로리그에서 계속 연패하다가 제가 중계하는 경기에서 연패를 끊고 이긴 선수가 있었어요. 경기 후 인터뷰를 진행해야 하는데 같이 중계하던 이승원, 김정민 두 해설이 옆에서 농담으로 '울려 울려'라고 하는 거에요. 하지만 지난 인터뷰에서 선수를 울렸다가 데인 기억 때문인지 인터뷰를 딱딱하게 진행을 했죠. 감정 싹 빼고.

방송 끝나고 나서 '내가 잘한 건가? 왜 이런 부분을 신경 써야 하지?' 하는 생각에 다음 인터뷰부터는 원래대로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어쨌든 그 눈물의 인터뷰 덕분에 저를 싫어하는 분들이 꽤 늘었던 거 같네요.





종목 병행때문에 힘들었던 선수들이 스타2에만 집중하기 시작한 이후 선수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예전처럼 눈물의 인터뷰를 진행하던 횟수는 많이 줄었죠. 하지만 선수들이 다른 부분에서 마음고생을 하는 거 같아요. 스타1 시절에는 e스포츠 최고 종목으로 인기를 얻었는데 스타2로 넘어오면서 인기가 예전만 하지 못하니 선수들이 아쉬워해요.

그럼에도 어린 친구들이 한결같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매번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 대견하다는 생각만 들어요.


개인리그보다는 프로리그를 많이 중계하는데, 정소림 캐스터가 느끼는 프로리그의 매력은?

개인리그는 올라올 수 있는 선수들만 경기를 할수 있는 대회인데 반해 프로리그는 다양한 선수들이 출전하죠.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개인리그에 못 올라가면 영영 못 보지만 프로리그는 많은 선수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점이 프로리그만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선수 개인의 명예를 위한 개인리그도 중요하지만 '팀'이라는 것을 위해 다 같이 환호할 수 있는 것이 프로리그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군단의 심장에 들어오면서 게임의 패턴이 다양해진 것도 프로리그에 더 재미를 살려주었어요. 다양한 선수들의 다양한 게임을 프로리그에서 만날 수 있거든요.


e스포츠 전문 캐스터 중 여성 캐스터는 정소림 캐스터와 이현주 캐스터 두 명이 있는데, e스포츠 캐스터가 여성이 하기에는 힘든 직업인가요?

일단 제 사심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그 덕에 제가 아직까지 e스포츠 캐스터를 하고 있는거 같아요. 그래서 여성 후배가 들어오는 걸 바라지도 않고요. 농담입니다.

게임 캐스터라는 직업이 성별 구분없이 쉽지가 않아요. 모든 스포츠 중에서 가장 경기 내내 많은 말을 하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게 e스포츠라고 생각하거든요. 말을 하는 속도로만 따지면 경마 수준인데, 경마는 시간이 짧죠. 반면 e스포츠는 3~4시간씩 그 속도로 말해야 하니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 원래 목소리도 굵고 낮은 편인데, 목소리 톤을 높여서 중계하고 나면 현기증이 날 때도 있어요.

생각해보면, e스포츠에 어울리는 여성 캐스터의 조건은 꽤 까다로운거 같아요. 목소리가 예쁜 여성 캐스터들이 몇 있었는데 오래 활동하지 못했죠. 팬들이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큰 무대에서 박진감 있고 파워풀한 목소리로 중계를 진행해야 하는 데에는 어울리지도 않았죠. 그리고 예쁜척해도 안되고, 너무 얌전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푼수 같아도 안되는, 정말 힘든 직업인 거 같아요. 그동안 e스포츠를 통해 팬들이 머릿속에 만들어 온 '여성 캐스터'의 조건에 들어가기 위해 감수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이미 팬들의 눈높이는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새로운 여성캐스터가 데뷔하기에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요. 게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함께 순간순간 발휘되는 재치와 유머까지 함께 갖춰야 하는데 이게 참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저 역시 부족한 부분이긴 하고요.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10년 넘게 새로운 여성 캐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요?


[ ▲ 이승원, 김정민 해설과 프로리그를 중계 중인 정소림 캐스터 ]



그래도 여성 e스포츠 캐스터에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 같아요. 그런 분들을 위해 조언이나 충고가 있으시다면? 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괜찮습니다.

너무 힘든 일이기에 솔직히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말리고 싶은 게 제 심정이긴 해요. 하지만 그렇게 힘든 일이기에 매력이 있는 일이기도 하죠. 그렇기에 저 역시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즐겁게 캐스터일을 하고 있죠.

그리고 '여성'이기에 많은 팬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죠. 외모나 센스, 그리고 말 한마디 잘못해서 질타를 받기도 해요. 팬들에게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기에 마음이 강하지 않다면 상처 입기 쉬워요. 저도 처음에는 e스포츠 관련 기사나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댓글 보기도 겁났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고칠 부분이 무엇이 있나 하는 마음에 이제는 팬들의 의견을 읽어보고 있긴 해요. 하지만 이 단계까지 오는데 마음고생이 정말 많았죠.

이런걸 다 극복하고도 나는 꼭 e스포츠 캐스터를 하고싶다라는 마음이 있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직업이에요. 남성 캐스터에비해 많은 것을 요구받고, 마음도 강해야 하지만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10년 이상 정소림 캐스터를 응원해 준 팬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저 자신이 부족한 점이 정말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좋게 봐주시기에 부족한 부분들이 가려진다고 생각합니다.

SNS를 통해 제게 '오늘 하루 정말 힘들었는데 퇴근해서 정소림 캐스터의 중계를 보니 그 피로가 한 번에 녹았어요!'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신 분이 있었어요. 저 역시 힘든 하루였는데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뿐인데 나에게 이렇게 즐거움을 얻는 분들이 있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지'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어요.

방송일을 하면서 제가 힘들고 지치는 순간마다 제 방송을 보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여기까지 온 거라 생각합니다. 정말 부족한 사람인데, 제가 이 일을 아직 할 수있는 건 팬들의 성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항상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모습 그대로 마지막까지 즐거움을 드리며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방송했다는 캐스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