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다 가는 길이라고, 굳이 우리까지 따라가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참 좋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Yes 라고 말할때 No라고 외칠 수 있는 당당한 인재를 찾는다는 광고도 있었지만... 뭐,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당장 회사나 학교에서 No라고 말해보면 광고는 그냥 광고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인생은 실전이고 안타깝지만 되감기나 리스타트 버튼도 없다.

그래서 대세를 거부하고 당당히 No라고 말할 수 있는, 심지어 이렇게 No라는 답변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신기하다. 소니가 다수의 한글판 라인업으로 포문을 활짝 열어젖힌 2014 도쿄게임쇼에서, 자이네스의 고범석 대표를 처음 만났을때 기분이 그랬다.

고범석 대표와 서정훈 이사가 '엔더 오브 파이어'라는 횡스크롤 액션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올해 5월이다. 개발팀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월부터였지만 본격적인 개발이 그 즈음이란다. 처음 세팅된 인원은 6명. 뭐,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그냥 흔한 한국의 스타트업 게임사라고 생각했다.


그럼 뭐가 다를까? '엔더 오브 파이어'는 PSN을 통해 출시될 "비디오 게임"이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고범석 대표와 서정훈 이사가 몸을 담고 있는 자이네스는 온라인과 모바일의 풍랑에 휩쓸려 한국에서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는 비디오 게임을 만들고 있다. 출시되면 PS4나 VITA를 통해 즐길 수 있다. 하나 더, '엔더 오브 파이어'는 "스팀(Steam)"의 그린라이트까지 이미 통과했다.

한국의 개발사가 PSN을 통해 출시될 비디오 게임을 만들고 있다니. 신기하기보다 걱정이 앞선다. 일단 개발자를 구할 수나 있을까? 투자는 아마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소니의 PSN을 통해 출시될 예정이고 스팀의 그린릿까지 통과했다면 적어도 기본적인 완성도는 검증되었다는 뜻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다고 해서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서 걸어나간 이의 발자국을 따라 걸을 수 없으니, 한걸음 한걸음이 곧 새로운 도전일 뿐. 2014 도쿄 게임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작 게임들을 잠깐 제쳐둘만큼 신선했던 만남, 비디오 게임 '엔더 오브 파이어'를 만들고 있는 자이네스의 고범석 대표와 서정훈 이사가 주인공이다.

▲ 자이네스의 고범석 대표(좌측)와 서정훈 기획&마케팅 이사


사실 제일 먼저 나간 질문은, 첫 만남에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도대체 왜?' 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부분이 제일 궁금했으니까.

"뭐,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최근에 한국의 게임 시장을 돌아보면 다들 모바일 게임만 만드시더라구요. 그런데 우리까지 그럴 이유 있나요? 시선을 세계로 돌리면 전통적인 게임 시장은 온라인과 모바일이 아니라 비디오 게임입니다. 그래서 그냥 저희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투자요? 꿈도 못 꾸죠. (웃음)"

내가 봐도 그럴 것 같다. 요즘에는 모바일 게임을 만든다고 해도 안되고, 규모있는 RPG나 되어야 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할 정도로 개발사가 살아남기 힘들다.

"처음에 '액션에 특화된 횡스크롤 RPG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면 외부의 업계 분들이 관심있다고 해요. 그런데 모바일이 아니고 비디오 게임이라고 하면, 게임은 보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비디오 게임 접고 모바일로 만들어주면 얼마까지 투자해주겠다고 달콤한 제안을 주시는 분들까지 있었죠."

▲ 게임은 횡스크롤 방식으로 진행된다.


과연 어떤 게임일까? 고범석 대표의 설명에 의하면 엔드 오브 파이어는 던전앤드래곤이나 나이츠 오브 라운드 등 과거 오락실에서 유행했던 횡스크롤 방식의 액션 게임을 추구한다. 전통적인 횡스크롤 액션의 맛을 살리기 위해 사실적인 3D 그래픽에 타격 효과 역시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으로 유지했다.

"전통적인 맛은 살리면서 액션의 강도에 따라 날아가는 거리가 바뀌거나 물리 엔진에 따라 타격이 달라지는 등 새로운 기술을 꼼꼼히 적용했습니다. 덕분에 횡스크롤의 독특한 느낌을 유지하면서 약공격과 강공격, 회피와 구르기 등 다양한 액션을 도입할 수 있었죠.

물리 엔진이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무기의 타격에 따라 몬스터들의 신체 부위가 파괴되거나 절단되는 요소들도 있는데, 일단은 심의 때문에 만들어 놓고 보류중입니다. 타격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엔더 오브 파이어의 콤보와 액션은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쾅!'

▲ 무기의 타격에 따라 몬스터의 일부 부위가 절단된다.



게임의 뼈대와 몸통이 될 기본은 완성이 되어 있는 상태, 그러나 6명이 개발했다면 아무래도 볼륨과 첫인상의 측면에서 부족할 수 밖에 없다. 해보면 정말 재미있다고 인정받는 인디 게임들이 가장 많이 지적받는 부분 중의 하나도 전체적인 콘텐츠의 분량이기도 하다.

"근접, 원거리, 마법을 담당하는 세 직업이 있고 성장하면서 다양한 스킬을 배워나가는데 전투에는 세 종류의 스킬만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싱글과 3인 파티 플레이가 가능한데 멀티 역시 지원하고, 싱글 기준으로는 8~20 시간 정도를 플레이타임으로 잡고 있습니다.

현재는 10개 스테이지와 5개의 지역으로 다양한 배경과 400여종의 몬스터들이 완성되어 있는데, 현재 완성도가 약 70% 정도이니 출시 전까지는 다듬기 과정을 거치면서 좀 더 확장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6명으로 만들었으니 지금에서 만족하지 않고 콘텐츠에 대한 고민도 계속 해볼 생각입니다. (웃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도대체 왜 비디오 게임일까? 스타트업이 비디오 게임으로 시작한다면 척박한 한국 시장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심지어 자이네스는 게임 회사가 아니라 DB나 시스템 구축 분야에 특화된 기술 기반의 회사였다고 하는데.

"저도 개발자 출신으로 게임 좋아하고... 자이네스의 모든 분들이 좀 독특하다고 할까? 좋은 표현 없나요? (웃음) 남들 다 하는 것 말고 도전을 좀 해보고 싶었는데 꼭 모바일을 고집할 이유가 없죠. 물론 저도 게이머라서 한국의 시장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국내용이 아니라 유럽이나 북미 지역 등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잡았구요.

한국이라면 무조건 온라인 아니면 모바일, 특히 요즘 추세라면 스타트업은 무조건 모바일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클라우드 펀딩이나 해외의 인디 게임 붐 등 글로벌 시장의 변화를 참고하면, 비디오 게임 역시 스타트업 회사들이 도전해볼만한 시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례가 없어 어려울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거든요."




궁금한 부분은 또 있다. 우리가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고 있다고 광고를 한 것도 아닌데, 고범석 대표와 소니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고범석 대표는 적극적인 소니의 제안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처음에 게임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일단 출시는 해야 하잖아요? 저희는 규모도 작고 인디 게임이니까, 직접 여기저기 출시할 플랫폼이나 방법을 찾아다녔죠. 우연히 유니티 컨퍼런스에 갔다가 소니의 부스에서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너무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 같아요.

소니의 게임 사업쪽에 써드파티 릴레이션 팀이라고,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PSN에 대한 설명부터 출시 방법은 물론 물심양면의 지원까지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일 도쿄게임쇼 현장에서 유럽쪽의 관계자 분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이것 역시 써드파티 릴레이션 팀에서 주선해주셨습니다. 기댈 곳 없는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6명으로 비디오 게임을 개발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고범석 대표는 비디오 게임의 개발이 어렵다는 것도 일종의 편견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비디오 게임은 전례가 없습니다. 아무도 안가다보니까 결국 길을 잃어버린 셈이죠. '엔더 오브 파이어'를 보여드리면서 6명이 4개월만에 개발했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으세요. 그런데 지금 온라인이나 모바일 게임 만들고 있는 한국 개발사들의 실력이면 멋진 비디오 게임도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을 만들어본 경험자가 없어서 저희도 초보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적용해보니 되더라구요. 새로운 기술, 디자인, 기획...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저희가 생각해도 정말 빠른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모르는 점이 생겨도 물어볼 곳이 없다는건 단점이네요. 무조건 배우고 연구해야 합니다. (웃음)"




참고할만한 레퍼런스가 없다는 것은 참 막막한 일이다. 온라인은 안해본 콘텐츠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참고 자료가 많고, 모바일은 벤치마킹할 수 있는 게임이 한달에서 십여개 이상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비디오 게임쪽은 인디 게임이라도 직접 개발자가 거의 없다. '엔더 오브 파이어'의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테크니컬 디렉터 연삼흠 팀장, 아트 디렉터 기민지실장 역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다고.

"테셀레이션이나 PBR(피지컬 베이스 렌더링) 등 참고할만한 기술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기술을 활용하면 개발 기간도 굉장히 많이 단축되구요. 그런데 무조건 새로 배워서 써야하니 연구 반 개발 반 이렇습니다. 3D 이펙트 쪽도 한국에서 유행하는 화려하고 가벼운 느낌 말고, 무겁고 묵직한 이펙트를 줘야 하는데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있더라도 아마 엄청난 실력을 가진 소수의 분들이겠죠.

결국 엔더 오브 파이어를 개발하면서 기술쪽을 맡은 연삼흠 팀장님과 그래픽을 총괄하시는 기민지 실장님이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두 분은 원래 담당하시는 분야도 탁월하시지만, 저희 게임에 맞는 기술과 그래픽을 위해 지금도 배우는 분야가 있을 정도에요."




자이네스의 첫 게임 '엔더 오브 파이어'는 오는 올해 연말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의 게이머 분들이 '엔더 오브 파이어'를 언제쯤 만나게 될 수 있을까? 고범석 대표는 빠르면 올해의 지스타를 통해 만나볼 수 있게 될 것이라 전했다.

"PSN으로의 출시가 우선이 되겠지만 올해 5월, 딱 1달만에 스팀의 그린라이트를 통과해서 출시를 준비하고 있고, PC로의 판매도 고려중입니다. 개발 일정이 정말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후에는 모바일로의 이식도 고려하 있는데, 다만 저희가 추구하는 액션을 위해 조작이나 인터페이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희 게임이 대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처음 출시하는 게임이고 6명이 개발했으니까요. 그래서 대작과 직접 부딪히지 않도록 연말의 홀리데이 시즌 정도를 일정으로 잡고 있습니다. 올해 지스타의 소니 부스를 통해 참가하는 것을 논의 중인 상황이라서, 부산 지스타에서 직접 해보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렇게 되기를 꼭 바라구요. 첫 도전이라 설레고 많이 떨리는데, 한국의 게이머 분들도 애정으로 지켜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