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업 영역의 어떤 프로젝트건 간에 앞에 '비운(悲運)'이 붙는 것 만큼 슬픈 일이 없다. 핑계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냐만은, '비운'은 실수나 무능력이 아닌, '운'이 작용하는 거니까. 차라리 못 만들어서 망하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누가 봐도 괜찮은 결과물인데 시기와 악재가 겹쳐 흥행에 실패하는 것 만큼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

동시에, '비운'이란 수식어는 어떤 의미로는 칭찬에 가깝다. '비운의 XX'라는 표현은 곧 운만 따라주었다면 명작이 될 수 있는 포텐셜을 갖췄다는 뜻과 같이 때문이다. 아마 오늘 소개할 게임들도 그렇다.

1. 올해 출시됐고, 분명 좋은 작품인데 국내에선 아무도 안 하는 게임들.

2. 명작인데 이상하게 나만 하는 게임들.

3. 망한 것도, 안 팔린 것도 아닌데 망작처럼 비춰진 게임들.


스펠렁키2
유명한데 너무 어려워서 엄두가 안 난다


1983년작 고전 게임 '스페랑카(Spelunker)'의 패러디로 만들어진 '스펠렁키'의 두 번째 작품이자, 12년 만에 출시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오랜만에 출시된 데다 인디 게임임에도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보이고 있음에도 막상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스트리머용 게임이 되어 버린 타이틀이다.

이유야 뭐 뻔하다. 태생이 인디 게임이기에, 코어 게이머가 아니라면 직접 플레이하고 싶은 정도까지는 아니라는게 첫 번째. 그리고 대부분의 스트리머가 한동안 챕터1에 묶여 있을 정도로 극악의 난도를 보인다는게 두 번째다. 개발자인 '데릭 유'는 오히려 좋아했다니 뭐 할 말은 없지만, 개복치와 참피의 뒤를 잇는 급사의 아이콘이 될 정도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덕분에 좋은 평가에도, 스펠렁키2의 플레이 인원수는 단 한 번도 폭증한 적이 없다. 유명한데 나도 안 하고 너도 안 하고 스트리머들만 하는 게임. 개발자가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됐지만, 아무래도 이름값에 비하면 아쉬운 게 사실이다.


제노블레이드 DE
두말할 필요 없는 명작에 잘 팔렸는데도 타이틀 가격이 점점 내려간다.


2010년 출시된 '제노블레이드'의 리마스터 버전. 분명 리마스터임에도 '리메이크'급으로 일신한 그래픽에 원작에 포함되지 않았던 확장팩의 콘텐츠까지 꽉꽉 눌러담은 '혜자' 에디션이다. 게임 자체의 완성도는 말할 나위도 없고, JRPG에 큰 관심이 없는 게이머라 해도 한 번쯤 해보면 좋을 만한 게임이다.

게다가 판매고도 아름답다. 2021년 재무재표 기준으로 총 판매량만 140만 장. 시리즈 중에선 '제노블레이드2' 이후 두 번째로 밀리언셀러가 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하니... 설명하면 이렇다. 판매고의 대부분은 해외 판매량이고, 국내 팬층층은 강할지언정 두텁지는 못했다는 것. 그렇다. 이 게임은 국내 한정 비운의 게임이다.

출시와 함께 한국어화된 제노블레이드 DE의 초회판은 날개돋힌듯 팔려나갔다. 매니아 팬들의 기대와 애정이 워낙 강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어느 순간부터 신품의 가격이 조금씩 내려갔고, 7개월이 지난 지금은 7만원에 가까웠던 미개봉 신품의 가격이 2~3만원 대에 머문다. 게이머들은 수요에 비해 너무 많은 물량을 찍어낸 탓이라 유추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원작도 명작인데다 잘 뽑힌 에디션임에도 이런 가격 폭락이라면 이 또한 '비운'이라 부르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A Short Hike
산을 왜 오르는거죠? "그게 거기 있어서요"


전화를 해야 하는데 산 꼭대기가 아니면 핸드폰이 터지질 않아 산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기이한 스토리로 시작하는 인디 게임. 게임의 핵심은 섬을 돌아다니면서 산을 오르는 것이며, 게임 소개 또한 이것으로 끝나 있지만 이 게임의 진면모는 섬을 돌아다니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서브 콘텐츠에 있다. 엄청난 재미와 극도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급함 없이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섬 전역에 말 그대로 '빽빽히' 들어차 있다.

3D 게임임에도 도트를 사용했고, 그럼에도 거부감이 심하지 않은 독특한 아트 스타일도 특징적인 부분. 픽셀이 훤히 보이는 옛날 3D게임이 연상되지만, 실제로 게임을 해 보면 그보단 조금 다른 방식으로 구현된 현대 게임이라는 느낌에 가깝다.

전체적인 느낌은 '좀 더 활동적인 동물의 숲'. NPC들의 대사는 재치로 가득 차 있고, 게임을 하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원하면 빠르게 산을 오르면 되고, 느긋하게 섬을 돌아다녀도 그만. 평론가 및 유저 평가도 굉장히 좋은 편이지만, 이 게임 또한 다른 많은 인디 게임들과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 가장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했던 2020년 1월 기준으로도 스팀 동시 플레이는 200명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는 이들에게 'A Short Hike'는 지금 이 순간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또 다른 숨겨진 명작이다.


베어너클4
정녕 한국에서 '벨트스크롤 액션'은 끝난 겁니까?


무려 26년, 웬만한 게이머들의 나이를 넘길 긴 세월만에 출시된 '베어너클(영문판 Street Of Rage)'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30년 전 세계 게임씬을 장악했던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게임성? 두말 할 필요 없이 최고다. 끽해봐야 캐릭터 넷이면 많았던 벨트스크롤 액션 주제에 레트로 버전 캐릭터를 포함해 플레이어블 캐릭터만 17종. 심지어 전 시리즈 출격했던 주인공 '액셀'은 시리즈별로 따로 준비되어 있다.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 팬이 아직도 튼실한 서양권에서는 굉장히 장르의 계보를 잇는 작품으로 호평받은데다 무려 15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앞서 언급한 '제노블레이드 DE'보다 더 많이 팔린 작품이 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음... 사실 다른 곳에서 워낙 성과가 좋아 비운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국내에서만큼은 정말 아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드문 게임이다. 5월 출시 이후 반짝 이후엔 말 그대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달까.

나와 같은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애증의 게임. 너무 잘 만든 게임인데 이런 게임은 혼자 해서는 재미가 없다. 친구들하고 같이 악당들을 두들겨 패 줘야 제맛 아니던가. 그런데 하는 친구가 없다. 심지어 한국어 지원도 완벽한데... 하자고 꼬셔도 왜 넌 너만 하는 게임을 하자고 하냐며 핀잔만 듣기 일쑤다. 과거 오락실을 물들였던 장르의 귀환 치고는 아쉬운 상황. 게이머의 주축이 '오락실 세대'에서 '온라인 세대'로 넘어갔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게임 아재들에겐 비운의 게임이 아닐 수 없다.


크래쉬 밴디쿳4: 잇츠 어바웃 타임
원작 개발사 이름값이 있는데... 혹시 이 게임 아세요?


일본 게임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던 90년대 중반 혜성처럼 등장한 북미의 플랫포머 게임 '크래쉬 밴디쿳'의 네 번째 시리즈. 지금에 비하면 콘솔 게이머 인구가 극히 적었던 시절, 오로지 PS1으로만 플레이 가능했기에 국내에선 플레이해본 이가 정말 드문 게임이지만, 게임 원작 개발사를 들으면 깜짝 놀란다. 2020년 한 해 가장 뜨거운 이슈를 선물한 개발사. '언차티드'와 '라스트오브어스'의 개발사인 '너티 독'을 소니의 퍼스트 파티로 만든 게임이 바로 크래쉬 밴디쿳 시리즈다.

물론 너티 독도 이제 짬이 있어서인지(?) IP를 액티비전에 보냈고, 이번 작품의 개발은 액티비전 산하의 '토이즈 포 밥'이 맡았지만,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원작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잘못 만들었다가 너티 독에게 혼날게 두려웠는지, 전작을 존중하면서도 개발력을 극한까지 뽑아낸 모습. 점프와 회전 래리어트라는 단순한 조작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말 그대로 오지는 수준으로 디자인된 레벨과 독특한 시퀀스를 덕지덕지 발라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그게 뭔 게임인데?'라는 여론이 대다수. 애초에 크래쉬 밴디쿳 시리즈가 북미 시장에서 활약하던 시기와 국내 콘솔 게이머들이 성숙한 시기가 다르다 보니, 웬만큼 게임을 한 이들도 들어만 봤거나,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마 '언차티드4'를 플레이해본 이들이라면, 게임 내 미니게임으로 한 번쯤 해봤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한국 시장은 고려조차 안했을 테니 '비운'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애매한 타이틀이지만, 어찌됐건 국내에선 아는 이도, 하는 이도 없는 그런 게임일 뿐이다.


SUPRALAND
숨은 걸작이란 단어에 이처럼 적합한 게임이 있을까?


'토이스토리'에 나오는 플라스틱 군인들처럼 장난감 중에서도 질보단 양으로 승부하는 대충 만든 모양새의 인형. 'SUPRALAND'의 주인공이 그렇다. 스크린샷만 보면 누가 봐도 인디게임같은 모양새에 '재미보단 의미에 중점을 둔 게임이구나' 싶지만 막상 해보면 생각이 확 달라진다.

젤다 시리즈와 메트로이드의 느낌, 그리고 포탈의 퍼즐 감각을 갖춘 1인칭 메트로바니아 게임. 그러면서도 웬만한 FPS 못지 않은 액션감을 갖춘 게임. 'SUPRALAND'를 요약하면 이렇다. 1인칭으로 누비기에 충분히 넓은 세계는 수많은 비밀로 채워져 있고, 이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 또한 지루하지 않고 충분히 즐겁다. 아마 이 게임의 문제는 없다시피했던 마케팅과 그저 그런 인디게임같은 첫인상 뿐일 것이다.

메타크리틱 평론가 점수는 85점. 평론가 점수가 뭐가 중요할까 싶지만 유저 평점은 더 높다. 10점 만점에 무려 9.1점. 가격 경쟁력도 좋은 편이다. 스팀 기준 원가 20,500 원에 겨울 할인이 적용되는 1월 6일까지는 무려 '8,200 원'이라는 뜨끈한 국밥 한 그릇 가격에 걸작 게임을 손에 쥘 수 있다. 게다가 좀 뜬금없지만, 한국어도 지원한다.


If Found...
한국어 지원, 압도적으로 긍정적, 아무도 모름


일기장과 지우개라는 독특한 서사 장치와 그 어떤 게임에서도 보기 힘든 아트 스타일로 무장한 인디 비주얼 노블 게임. '이건 무슨 게임이지?'싶은 게임 전문 퍼블리셔인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가 유통을 맡은 게임으로, 왜 이런 게임이 있는지 몰랐던 게 의아할 정도로 스팀 평가와 메타크리틱 평론가 점수, 유저 평가 모두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한국어를 지원하고 있음에도 구글 검색에 걸리는 한국어 관련 문서 또한 거의 없으며, 스팀 총 리뷰 수가 350개에 달함에도 출시 이후 지금까지 최고 동시 플레이 숫자가 40명을 채 넘지 못한 말 그대로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다.

이 게임의 문제는 단 하나.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왕년의 개그콘서트에서 '안 유명한 애'역을 맡았던 개그맨 김기열 같은 포지션일까? 어디서 본 듯 하기만 해도 다행인데, 딱 보는 순간 '와 이런 게임이 있었네?' 싶은 신선함만 든다. 심지어 나조차도 이 기사를 기획하면서 찾기 전엔 이런 게임이 있는지도 몰랐다. 안나푸르나는 왜 한국어화를 해 놓고도 광고 한 번 안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