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게임단 감독들은 '롤드컵 선발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국가대표 선발전'이라 말한다.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이라는 무대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드러나는 표현이다. 티켓은 단 한 장만 남아있었다. 자격을 갖춘 팀은 두 팀, KT 롤스터와 삼성이 만났다.

KT 롤스터는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삼성을 상대로 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KT 롤스터의 승리를 점쳤다. 삼성이 약한 팀은 아니지만, 기록이 그랬다. 19세트 전승. 열아홉 번의 경기를 치르는 동안, KT 롤스터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경기 전부터 '크롤확'(크트 롤드컵 확정)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졌었다.

삼성의 패배를 예견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스코어'와 '앰비션'. 팀의 기둥이라 평가받는 두 정글러의 '인간상성' 관계 때문이었다. 강찬용은 고동빈을 만나면 뭘 해도 안됐다. 강찬용은 분명히 잘하는 정글러인데, 고동빈만 만나면 내뻗는 주먹이 모두 카운터로 돌아왔다. 한 대를 맞고, 두 대를 맞고, 어느 순간 주먹을 뻗을 수 없게 된다. 자존심 강한 그의 마음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강찬용과 고동빈은 닮은 구석이 정말 많다. 둘은 모두 포지션을 변경해 정글러가 됐다. 시기도 비슷하다. 2015년 스프링 시즌, 소속한 팀 감독의 요청을 받아 자리를 옮겼다. 팀의 오더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것도 같다. 둘의 활약은 팀 승리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다만, 먼저 빛을 본 건 고동빈이었다. 고동빈은 포지션을 변경한 첫해에 팀을 롤드컵으로 이끌었고, 그해 올스타에 정글러로 선발되어 '그라가스 그 자체'라는 평가를 들었다. 2016년에는 명실상부 LCK 최강 정글러가 됐다. 반면, 강찬용은 포지션을 변경한 첫해를 잘 보내지 못했다. 또한, 삼성으로 소속팀을 옮긴 후 팀을 4강까지 이끌고도, 고동빈의 존재 때문에 '팀의 강점이자 한계'라고 평가받았다.

롤드컵 선발전, KT 롤스터의 니달리 선픽은 KT 롤스터가 삼성을 상대로 어떤 시나리오를 써왔는지 대놓고 드러나는 장면이다. 고동빈에게 니달리만 쥐여주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전적만 가지고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고동빈은 자신감도 있었고, 준비기간 동안 강찬용의 모든 것을 연구했다. 정글 루트, 습관, 생각, 버릇까지.

▲ 강찬용의 모든 것을 드리웠던 고동빈의 그림자

1세트는, 고동빈의 '강찬용 연구 결과'의 정수다. 과감한 인베이드로 강찬용의 초반 레벨링을 망가트리고 칼날부리와 고대 돌거북, 붉은 덩굴정령(레드버프)까지 모조리 빼앗는다. 이후, 아군 정글을 돌고 정글 한 캠프를 마무리한 고동빈은 와드 두 개와 '매복 덫'(W스킬)으로 상대 정글 상단은 완벽하게 장악했다. 강찬용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스코어의 장막'이 강찬용에 드리운 순간이었다. 강찬용이 무엇을 하건 고동빈은 알 수 있었다.

고동빈의 완벽한 계산을 어그러뜨린건 '코어장전' 조용인이었다. 조용인은 봇 라인의 귀환 타이밍에 탐 켄치의 궁극기 '심연의 통로'로 강찬용이 '스코어의 장막'을 빠져 나가게 도왔다. 고동빈의 시야덕분에 마음놓고 탑을 압박하던 '썸데이' 김찬호는 생각치도 못한 로밍에 당황하며 킬을 내줬다.

봇 라인 정글 주변에 '스코어의 장막'을 다시 드리우려던 고동빈의 시도는 조용인의 방해로 또 한 번 어그러졌다. 고동빈은 강찬용이 올 수 있는 길목에 와드를 배치하고 카운터 정글링에 나선다. 강찬용이 바로 온다면 와드에 보일 것이고 귀환을 한 후에 온다면 충분히 카운터 정글을 하고도 남는다는 계산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조용인의 탐 켄치가 불쑥 나타났다. 고동빈은 여기서 첫 데스를 기록하고 '스코어의장막'은 망가져버린다. 강찬용은 장막이 걷힌 후, 채 1분이 지나기도 전에 킬을 올렸다.

▲ 고동빈은 강찬용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1세트에 승리했지만, 강찬용은 여전히 고동빈의 그늘 아래 있었다. 2세트 8분 경, 고동빈은 미드 라인 교전에서 질리언을 잡고 갑자기 상대 1,2차 타워 사이를 질주해 반대편 정글로 돌진했다. 와드를 통해 강찬용의 그라가스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고동빈은 이 교전에서 점멸을 미리 사용한 후, 쿠거 폼 w스킬인 '급습'으로 도망가는 그라가스를 잡아낸다. 강찬용의 모든 행동을 예상한 스킬 활용이었다.

고동빈에게 계속 휘둘린 강찬용은 실수까지 범한다. 3세트, 아군 정글에 들어오는 고동빈을 탑, 미드 라이너와 함께 노렸지만 아쉽게 놓쳤다. 25분 경 벌어진 한타에는 상대 진영을 끊어놓으려다 딜러가 아닌 서포터에게 돌진하면서 아군을 브라움 궁극기 '빙하 균열'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었다. 이 교전 승리로 KT 롤스터는 사실상 3세트 승부를 결정지었다.

강찬용은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 3세트 종료 후, 팀원들과 모여 상대 니달리에게 흔들리지 말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수도 있는 4세트, 후회하지 않기 위해 몇 번 해봤던 스카너를 꺼냈다고 말했다. 스카너라는 챔피언에 대해 모르는 선수는 없다. 스킬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특징이 있고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분명 알고 있다. 그러나 오랜만에 챔피언을 상대하면 주로 거리 유지, 혹은 피해량 계산에서 실수를 하게 된다.

▲ 강찬용에 대한 고동빈의 예상이 처음으로 빗나가는 순간

스카너를 뽑아든 강찬용은 4세트만에 처음으로 고동빈을 앞서는 장면이 나왔다. 상대 정글 지역에 수정탑과 시야를 장악하고 정글 싸움을 노린 강찬용의 스카너는 미드 라인 지역에서 에코를 잡고 선취점을 잡아낸다. 또한15분 경, 스카너의 궁극기 '꿰뚫기'로 고동빈을 제압하고 상승세를 이끌었다. 고동빈은 오랜만에 상대하는 스카너의 궁극기를 잊고 있었다.

고동빈은 생각하지 못한 챔피언의 등장에 분명 당황했었다. 현재 패치의 정글 챔피언은 1티어로 렉사이, 그라가스, 엘리스를 꼽는다. 고동빈은 니달리의 빠른 정글링과 카운터 정글에 강하다는 니달리로 강찬용을 잡을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니달리가 4세트에 금지되고 생각하지 못한 스카너가 등장하면서 고동빈의 경기력이 이전과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마지막 5세트, 삼성 팀원들은 계속 좋은 활약으로 강찬용을 도왔다. 초반, 고동빈이 탑 타워 다이브를 통해 '큐베' 이성진의 케넨을 잡는데 실패했고 강찬용은 곧바로 미드 라인 갱킹을 통해 리산드라를 잡았다. 갱킹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는 이성진의 플레이와 상대 도주로를 예측하고 점멸을 아끼지 않은 '크라운' 이민호의 갱호응이 굉장히 좋았다.

강찬용은 팀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활약으로 팀원들에 보답했다. 중반 용 한타에서 아군 진영의 뒤를 파고드는 리산드라에 고치를 맞춰 궁극기 조차 쓰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 매 세트 내내 좋은 활약을 보였던 '룰러' 박재혁은 승부의 쐐기를 박는 24분 경 한타에서 상대팀의 집요한 공격을 뚫고 살아나가 승리로 이끌었다. 640일 동안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상대를 잡아내고 롤드컵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KT 롤스터가 준비한 삼성 공략은 실패했다. 강찬용만 견제하면 정글 싸움을 통해 승리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코어장전' 조용인, '큐베' 이성진, '룰러' 박재혁, '크라운' 이민호가 모두 활약하며 계산이 틀어졌다. 삼성은 더이상 강찬용만 무너지면 패배하는 팀이 아니었다. 삼성의 라이너들은 KT 롤스터의 예측보다 더 많이 성장해 있었다.

강찬용이 수비적인 성향의 커버형 정글러가 됐던 이유는 각 라인을 담당하는 라이너들의 기량이 부족한 것도 분명 작용했다. 강찬용은 숱한 정글 싸움의 패배를 통해 자신의 팀이 KT 롤스터의 합류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계속 차선의 선택을 통해 극복하려 해왔다. 싸움만 났다 하면 언제든 달려오는 팀원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고동빈과는 처지부터가 달랐다. 그렇게 강찬용은 '삼성의 한계'가 되어버렸다.

지난 1년 동안 삼성의 최전방을 책임졌던 강찬용. 그는 자신의 활약에 팀의 승패가 달렸던 무거운 짐을 묵묵히 계속 짊어지고 팀원들을 롤드컵 선발전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강찬용의 어깨에 힘이 빠지자 생각지 못한 힘이 들어왔다. 뒤에서 자신을 따르던 동생들의 손길이 강찬용의 짐을 들어 올려줬기 때문이다.


혼자만 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삼성의 무게는 더이상 강찬용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강찬용의 어깨 뒤에는 '코장이'가 있었고, '큐베'가 있었고, '룰러'가 있었고, '크라운'이 있었다. 도와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동생들이 어느새 성장해 있었다.

5년의 기간 동안 수없는 좌절로 포기해왔던 '꿈의 무대' 롤드컵. 강찬용이 드디어 그 자리에 가게된다. 어느 팀을 만나더라도 겁나지 않을 것이다. 강찬용은 롤드컵 선발전을 통해 마침내 자신의 한계를 넘었다. 어느새 든든해진 동생들과 함께라면 더이상 겁나는 게 없지 않을까? 강찬용의 롤드컵 선전을 응원한다. 어떠한 성적을 거두든 상관없다.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하고 왔으면 좋겠다.



 



*사진 및 이미지 출처 = O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