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수들의 뛰어난 피지컬과 화려한 스킬 연계로 이뤄지는 한타 싸움이다. 그러나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잘하느냐 못하냐에 따라서 피지컬 차이와 글로벌 골드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밴픽 전략과 운영 방법이다.

핑크와드 코너는 치열함이 느껴지는 명승부 혹은 밴픽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경기를 선정해 보이진 않지만, 게임 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밴픽 전략, 전술과 운영에 대해서 다룬다.





묘수 : 바둑이나 장기 따위에서, 생각해 내기 힘든 좋은 수

묘수(妙手)는 바둑에서 유래된 용어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많이 쓰인다. 일반적으로 불리한 국면이나 어렵고 힘든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을 생각해냈을 때, 우리는 묘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바둑에서 묘수는 정수(正手)는 아니다. 불리한 상황에서 정해진 순서나 방법을 그대로 따라두게 되면, 결과 역시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생각의 틀을 깨고, 정석의 범주를 넘어설 때, 비로소 묘수를 내려놓을 수 있다.

정해진 길을 따르지 않고 두는 수는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묘수는 그 수에 대한 대응과 맞대응에 따라 꼼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묘수인지, 꼼수인지는 손을 쓴 사람의 역량에 달렸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수를 두고, 그 수를 이어갈 능력이 있을 때만 정도를 가지 않은 돌에 대해 묘수라고 일컫을 수 있다.

19일 상암 e스포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7 리그 오브 레전드 코리아 스프링 스플릿. 멤버 전원을 교체하며 사실상 신생팀이 된 아프리카 프릭스는 2016년 월드 챔피언십 준우승 멤버를 그대로 유지한 삼성을 만났다. 삼성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왔고, 큰 무대까지 함께 경험하며 승리하는 방법을 공유한 강팀이다. 반면, 아프리카 프릭스는 멤버를 교체한 뒤 처음 치르는 공식전이었고, '마린' 장경환의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들의 스타일도 정해지지 않은 팀이었다.

정공법으로 붙으면 불리한 상황. 아프리카 프릭스에게 묘수가 필요한 시점이다.




# 제 1국 #
탱커 챔피언에 대한 '마린' 장경환의 묘수 AD 케넨


삼성은 정석을 좋아하는 팀이다. 선호하는 챔피언도, 경기 운영 방식도, 안정적인 정수(正手)를 추구한다. 삼성의 1세트 챔피언 픽을 살펴보면 삼성 코치진이 만족했을 거라 확신한다. 마오카이는 탑 라인에 서는 탱커 중 가장 안정적인 챔피언이다. 렉사이, 라이즈, 애쉬는 삼성이 즐겨 사용해왔던 챔피언이고 여기에 타릭을 추가해 한타에 힘을 보탰다.

그런데 아프리카 프릭스는 마지막 픽으로 케넨을 골랐다. 삼성의 입장에서 아프리카 프릭스의 5픽 케넨은 정도(正道)를 벗어난 의문의 수다. AP 챔피언에 강한 마오카이를 가져온 입장에서 상대가 카시오페아에 이어 케넨까지 뽑으며 AP 비중을 높이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석대로 붙는다면, 삼성의 승리는 당연한 결과다. 아프리카 프릭스가 묘수를 내려놓는 순간이다.

장경환이 준비한 것은 AD 케넨이었다. 상급 공격 속도 정수를 사용해 공격속도를 13.5%까지 맞추고, 표식은 공격력으로만 채웠다. 반면, '큐베' 이성진은 AP를 상대하기 위한 룬을 준비했다. 룬 세팅으로 인한 스노우볼은 크게 굴렀다. 장경환의 케넨이 탑 1차 타워를 파괴했을 때 기록한 CS는 107개, 마오카이와는 47개 이상 차이가 났다.

AD 케넨에 대한 팀의 이해도도 좋았다. 장경환이 준비한 AD 케넨은 궁극기 '날카로운 소용돌이'의 낮은 피해량 기대치로 한타에서 AP 케넨만큼의 활약을 기대하기 힘들다. 대신, 패시브 '폭풍의 표식', e스킬 '번개 질주', 아이템 '얼어붙은 망치'를 활용한 추격과 일대일 대결에 특화되어 있다. 게다가 '마법사의 최후', '몰락한 왕의 검' 등 공격 속도 아이템은 케넨의 타워 공략 속도에 날개를 달아 준다. 장경환은 중, 후반부터 봇 라인 스플릿 푸시로 팀이 바론을 가져갈 기회를 만들어줬고, 상대 탑과 미드 라이너를 홀로 잡아내는 슈퍼 플레이를 보여줬다.







# 제 2국 #
묘수나 꼼수는 정수로 받는다 - AD 케넨에 대한 삼성의 대응

▲ 밴픽 싸움에서 이례적으로 정글 챔피언을 숨긴 삼성 코치진

아프리카 프릭스의 묘수는 성공했다. 1세트 승리를 거둔 아프리카 프릭스는 삼성이 마오카이를 다시 꺼내 든 것을 보고 AD 케넨을 또 한 번 착수했다. 그러나 AD 케넨은 정석의 범주를 넘어선 픽이었지만, 생각의 틀을 꺤 것은 아니었다. 삼성은 AD 케넨을 예상하고 있었고 묘수는 꼼수가 되었다.

라인전에서 상대가 압박을 하면 정글러를 부르는 게 정수다. 그러나 1세트에는 삼성의 정글러가 상성에서 밀려 라인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다. 삼성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 정글러와 싸움에서 이기고 라인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강력한 정글러였다. 삼성이 마지막까지 정글 챔피언을 숨긴 이유도 이 때문이다.

렉사이를 꺼내 든 아프리카 프릭스. 삼성 갤럭시는 렉사이와 교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그레이브즈를 선택해 정글러의 영향력을 높였다. '큐베' 이성진은 AD 방어룬으로 라인전에서 정글러가 올 때까지 좀 더 오래 버틸 준비를 했다. 기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크라운' 이민호의 탈리야가 상대 렉사이의 갱킹을 되받아쳐 정글러의 공백을 만든 것. '하루' 강민승의 그레이브즈는 곧바로 탑으로 올라가 스플릿 푸시의 핵심인 AD 케넨을 연거푸 잡아냈다. 아프리카 프릭스의 묘수가 정수에 막혔다.

패배하는 와중에도 장경환의 케넨은 빛났다. 초반 갱킹을 당하면서 성장에 제약이 있었음에도 상대 마오카이, 탈리야 등을 홀로 잡아내며 삼성의 인원 분배에 균열을 만들었다. 성장이 제 궤도에 오른 후에는 스플릿 푸시를 통해 상대 마오카이를 불러내 팀이 정면 싸움을 회피할 수 있었다. 정글 시야 싸움에서 교전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삼성은 장경환의 스플릿에 휘둘릴 가능성이 컸다.







# 제 3국 #
상대의 정석을 되받아친 아프리카 프릭스


삼성은 선호하는 챔피언 뿐만 아니라 경기 운영 방식도 정수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현재 메타에서 승리로 향하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봇 라인 타워 다이브다. 케스파컵에서 봇 1차 타워를 먼저 파괴한 팀은 32세트 중 28세트에 승리, 90%에 가까운 승률을 기록했다. 이미 지난 IEM 경기 결승전을 통해 삼성은 그들이 얼마나 봇 타워에 집착하는지 보여줬다.

어느 프로게임단이나 약속된 플레이는 존재한다. 삼성의 경우는 봇 1차 타워 다이브를 하는 시기를 약속한 듯 보인다. 바로, 상대 타워 파괴를 목전에 둔 순간이다. 삼성이 이런 약속을 할 수 있는 데는 봇 듀오인 '룰러' 박재혁과 '코어장전' 조용인의 강한 라인전에 기인한다. 라인전 우위를 다이브를 통해 극대화하고, 포탑 선취점으로 스노우 볼을 굴리는 것. 삼성뿐만 아니라 많은 게임단이 하는 정석적인 플레이다.

3세트에도 삼성은 아프리카 프릭스 봇 듀오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타워를 강하게 압박했다. 타워 파괴를 목전에 두고 삼성이 다이브를 시도한다. 삼성의 정석대로라면, 삼성은 상대 봇 듀오를 먼저 잡아내고 뒤늦게 합류하는 이들을 각개격파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때에 따라 2차 타워까지 가져갈 수 있다.

문제는 삼성이 지나치게 정직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상대의 다이브 시기를 알고 있었다. 경기 시간 15분경 아프리카 프릭스 봇 1차 타워의 파괴를 앞두고 양 팀의 핑이 연달아 울린다. 다이브를 시도하는 삼성과 이를 알고 있는 아프리카 프릭스가 동시에 봇 1차 타워로 향한다.

승패를 가른 또 하나의 변수는 장경환의 럼블이었다. 정석대로라면 장경환은 탑에 있어야만 했다. 상대 탑 라이너와 눈치를 보면서 최대한 라인을 밀어놓고 합류해야 조금이라도 이득을 더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경환은 순간이동을 사용하지 않고 봇으로 직접 달려가 상대의 다이브를 기다렸다. 삼성은 이를 예측하지 못했고, 절묘하게 깔리는 럼블의 궁극기. 장경환의 럼블은 아프리카 프릭스가 3세트 주도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착수한 돌이 묘수인지, 꼼수인지는 돌을 내려놓은 이의 역량에 달렸다. 단 한 수 만으로 승부가 결정되진 않는다. 자신의 내려놓은 돌을 묘수로 만드는 후수가 따라와야 한다. 상대가 생각하지 못한 AD 케넨을 준비했다고 해서 승리가 당연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전략을 실현하고 승리까지 이어지게 할 때 비로소 자신의 능력이 된다.

'마린' 장경환은 특별했다. 그가 한 플레이도 대단했고, 예측을 뛰어넘는 챔피언 기용과 상대의 수를 예측하고 먼저 대응하는 기민함까지 보여줬다. 떨리는 마음으로 팬들 앞에 서 있다던 그의 경기력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 보였다.

아프리카 프릭스 좀 더 지켜봐야 하는 팀이다. 이제 겨우 한 경기에서 이겼을 뿐이고, 더 많은 경기에서 자신들을 증명해야 한다. 아프리카 프릭스에 대한 평가를 하긴 이르다. 하지만 아프리카 프릭스를 지켜봐야 할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들은 데뷔 첫 경기부터 특별한 수를 사용할 만큼 배포도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능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