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스타일이 정석으로 자리 잡은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LoL)에는 탑, 정글, 미드, 원거리 딜러(이하 원딜), 서폿 등 총 다섯 개의 포지션이 존재한다. 각 포지션마다 챔피언 폭, 플레이 방법, 게임 내에서 해야 하는 역할 등이 천차만별이라 유저들은 자신의 주 포지션을 정하고 해당 포지션 위주로 플레이하며 실력을 쌓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숙달되지 않은 포지션으로 플레이를 하다 보면 상대가 나보다 티어가 낮다고 하더라도 그 격차를 잘 느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게임에 대한 더 높은 이해도와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 프로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하나의 포지션에 집중해 최고의 실력을 쌓아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신의 주 포지션으로 프로 생활을 지속해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상황이나 개인적인 변화에 발맞춰 포지션을 바꾸는 선택을 한 선수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선수마다 판이했다. 과연 무엇이 그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들게 했고, 어떤 차이가 다른 결과를 낳게 됐는지 조명해보려 한다.


벼랑 끝에서 선택한 '포지션 변경', 결과는 글쎄?

▲왼쪽부터 '피글렛' 채광진, '레이즈' 오지환, '이지훈' 이지훈

최근 가장 이슈가 됐던 포지션 변경은 바로 '피글렛' 채광진의 미드 전향이다. 북미 팀 리퀴드 소속 채광진은 2017 스프링 시즌 중반 원딜에서 미드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팀 성적이 리그 최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부진을 거듭하자 분위기 환기와 경기력 상승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캐리력이 장점인 채광진은 미드 라이너의 역할도 준수히 해내긴 했지만, 걸출한 미드 라이너와의 경기에서는 그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힘들었고 결국 팀의 승강전행을 막지는 못했다.

비슷한 사례는 LCK와 LPL에서도 나왔다. 1라운드에서 최하위권을 기록하며 승강전 위기에 놓인 진에어 그린윙스(이하 진에어)는 2라운드에 서브 서포터였던 '레이즈' 오지환을 정글로 전환하고 상황에 따라 '엄티' 엄성현 대신 경기에 투입하는 강수를 뒀다. 오지환의 출전은 팀의 안정감을 다소 높여주긴 했지만, 경험이 적은 탓에 스스로 무언갈 만들어 내거나 경기의 흐름을 주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LPL 최하위권 비시게이밍은 스네이크 e스포츠와의 경기 도중에서 이지훈을 서폿으로 돌리는 충격적인 포지션 변경 전략을 선보였다. 포지션을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지만, 국내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엔 충분한 시도였다. 비시게이밍은 해당 경기에서 이렇다 할 전략적 판단의 근거를 보여주지 못하며 퍼팩트 패배를 당했다.


'최고'를 만들어낸 그들의 포지션 변화 - 경험, 시간, 노력의 삼박자(feat.명장)

반대로 성공적인 포지션 변경 사례들을 살펴보면 그 바탕에는 이전에 쌓았던 경험과 선수 개인의 의지, 코칭스태프의 지원 등 여러 조건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이러한 포지션 변경은 신의 한수로 작용해 선수 본인과 팀 모두에게 최고의 선택이 됐다. 대표적으로 현재 LCK에서 뛰고 있는 '스코어' 고동빈, '앰비션' 강찬용, '코어장전' 조용인을 꼽을 수 있다.


고동빈은 가장 많은 포지션을 거친 프로게이머 중 하나다. 그가 약 5년 반 동안 프로로 활동하며 경험한 포지션은 무려 세 가지. 탑 라이너로 스타테일에 입단한 고동빈은 LCK가 본격적으로 막을 연 2012년도에 원딜로 전향했다. 서머 시즌에는 팀에 '로코도코' 최윤섭이 합류하면서 탑으로 돌아갔지만, kt 롤스터에 입단하면서 다시 원딜로 복귀했다. 생존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고동빈은 2015 시즌 들어 돌연 정글러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그를 세계 최고 선수 반열에 올려놓았다.

고동빈의 이러한 행보가 더욱 놀라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세 포지션 모두 요구되는 역량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메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라이너와 정글러의 게임 스타일은 크게 다르다. 정글러에게 전체적인 맵 컨트롤 능력과 게임의 흐름을 읽고 아군 라이너에게 힘을 실어주는 플레이가 요구된다면, 라이너들은 우선 자신이 서는 라인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필요로 한다. 라인전 단계 이후 한타 페이지에서는 대체로 탑 라이너는 탱킹과 이니시에이팅, 원딜은 생존과 대미지 딜링을 담당하게 된다.

고동빈이 이렇게 다양한 포지션을 잘 소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타고난 게임 센스와 오랜 경력으로 쌓은 노하우가 기본이 됐겠지만, 그 재능을 더욱 극대화시킨 피나는 노력이 분명 존재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탑과 원딜, 두 번의 변화를 거쳐 정글러로 자리 잡은 고동빈은 지원형, 캐리형, 갱킹형, 성장형 등 어떤 메타에서도 빛날 수 있는 정글러가 됐고, LCK는 물론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최상위권 정글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걸출한 미드 라이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찬용이 포지션을 변경하게 된 계기는 정글러의 부재였다. 포지션을 바꾼 뒤 진행된 2015년도 인터뷰에 따르면, 단일팀 체제에 들어서면서 CJ 엔투스(이하 CJ)의 정글 자리가 공석이 됐는데 마땅한 대체 인원을 찾기 힘들었다고. 당시 CJ의 수장이었던 강현종 감독이 먼저 강찬용에게 포지션 변경을 제안했고, 마침 미드라이너로서 약간의 부담감을 느끼고 있던 강찬용은 이를 받아들였다. 물론 충분히 자신있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정글러로 전향한 강찬용의 무기는 노련함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오브젝트 컨트롤과 운영 능력이었다. 그의 강점은 개인 기량은 뛰어나나 운영 능력이 크게 부족했던 당시의 삼성 갤럭시(이하 삼성)와 만나자 시너지가 대폭발했다. 2016 시즌, 약 4년간 몸담았던 친정팀 CJ를 떠나 삼성으로 이적한 강찬용은 리그 하위권에 머물던 팀을 1년 만에 롤드컵 결승 무대에 올려놓는 업적을 이뤄냈다.

물론 모두가 잘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값진 준우승 타이틀이지만, 그 중심에 팀적인 성장을 이끌어낸 강찬용이 있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강찬용이 경기의 흐름을 주도하고 팀 운영을 이끌 수 있는 포지션인 정글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16 LCK 서머 시즌, 삼성이 제출한 팀 엔트리에 팬들의 의문을 자아낸 변화가 있었다. 바로 조용인의 포지션 변경이었다. 2014년 프로 세계에 입문한 조용인은 데뷔 전 '임프' 구승빈, '피글렛' 채광진과 함께 아마추어 원딜 삼대장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개인 기량을 보유한 선수였다. 2016 시즌 삼성에 합류해 안정적인 색깔을 가진 원딜로 자리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서폿으로 포지션을 바꾼 그의 선택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변화였다. 게다가 팀에는 이미 LCK 상위권 서폿으로 평가받는 '레이스' 권지민이 있었다.

조용인이 이런 변화를 꾀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성향에 있었다. 게임에 대한 의욕이 강하고 말이 많은 스타일이었던 그는 그런 성향으로 인해 게임 내에서 욕심을 부리다 급해지고 자멸하는 경우가 잦아진다는 자기 평가를 내렸다. 다소 수동적이고 팀원들이 깔아주는 판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원딜보다는 생각한 대로 경기를 풀어갈 수 있는 서폿이 더 잘 맞을 수밖에 없는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서폿으로 플레이한 솔로 랭크의 고승률이 이를 뒷받침했다. 조용인은 최우범 감독의 지지와 함께 과감히 포지션 변경을 택했다.

포지션을 바꾸고 임한 첫 정규 시즌은 녹록지 않았다. 챔피언 풀도 아직 좁았고, 솔로 랭크와 실제 프로 경기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했다. 출전하는 경기마다 씁쓸한 패배를 맛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최우범 감독의 신뢰도 여전했다. 그리고 드디어, 어쩌면 정규 시즌보다 더욱 중요한 무대일 수 있는 롤드컵 선발전에서 숨겨져 있던 잠재력이 폭발했다. 서포터 조용인은 판을 짜는 능력이 뛰어난 선수였고, 플레이 메이커였다. 숙적 kt 롤스터를 꺾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조용인은 순식간에 최상위권 서포터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상황은 No

이처럼 성공적인 포지션 변경의 사례들과 올 시즌 몇몇 선수가 보여준 아쉬운 결과를 대조해보면, 가장 큰 차이는 그 선수가 처한 주변 상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팀 성적이 최하위에 머물며 승강전이라는 위기에 내몰린 상황에서 선수들은 굳이 준수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제 포지션에서 물러나 팀에 최선이 되리라 판단한 선택을 했다. 개인의 상황이나 성향을 우선시해서 내린 선택은 아니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금은 중국에서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전 롱주 게이밍(이하 롱주) 소속 탑 라이너 '라일락' 전호진을 예로 들 수 있다. 전호진은 아마추어 시절 국내는 물론 북미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던 초창기 LoL 유저다. 플레이 경력이 긴 만큼 준수한 기량과 상당한 챔피언 풀을 자랑했다. 시즌2에는 한국 서버 솔로 랭크 1위를 찍기도. 때문에 팀에서는 이런 그를 탑, 서포터, 정글 등 그때그때 팀에 부족한 다양한 라인에 기용했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팀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데뷔 당시 팀 OP의 탑 라이너였던 그는 LG-IM(현 롱주)에 입단하면서 갑작스레 서포터로 전향하게 됐다. 함께 팀에 합류한 '콘샐러드' 이상정이 탑 라이너였고, 마침 팀에 공석이 서폿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진행된 포지션 변경은 악수였다. 전호진의 경기력은 물론 팀의 성적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서포터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전호진은 이상정이 팀을 나가면서 탑으로 복귀했지만 이전만 못 한 라인 이해도와 개인 기량으로 비판을 면치 못했다. 전호진의 다음 행보는 정글이었다. 이 역시 팀의 정글러 '링' 정윤성이 팀을 나가며 이뤄진 포지션 변경이었고, 결과는 이전과 같았다.

전호진은 2014 LCK 서머 시즌에 탑 라이너로 복귀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한 포지션에 머무르며 실력을 쌓았던 다른 동료들과 견주기에는 이미 많이 무뎌진 상황. 결국 전호진은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뛰어난 게임 실력과 오더 능력으로 팀 OP의 중추 역할을 맡으며 전도유망했던 전호진은 롤러코스터 포지션 변경으로 인해 제 기량을 터트리지 못한 안타까운 역사로 남게 됐다.

포지션 변경은 선수 생활에 있어 자신이 지금껏 사용해왔던 무기를 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는 아주 중대한 선택이다. 때문에 이미 가지고 있는 칼이 녹슬었는지, 새로운 칼은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전적으로 선수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팀의 분위기, 팀의 성적, 팀의 엔트리를 우선으로 하는 포지션 변경은 선수와 팀 모두에게 독이 될 수밖에 없다. 팀의 상황과 더불어 선수 본인의 의지가 매우 강해서 포지션을 바꾸게 됐다면, 안타까운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팀과 선수 모두의 크나큰 노력이 꼭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