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언제나 슬프다. 스포츠 선수에게 실패는 보통 패배다. 누구나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노력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라 늘 한 쪽만 이기고 다른 한 쪽은 패배한다. 불변의 진리다. 이긴 쪽은 그동안의 모든 노력을 보상받는 듯한 기분에 짜릿한 기쁨을 느끼고, 패배한 쪽은 어두운 구석자리에서 쓰라림을 경험한다.

프나틱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인 '레클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4년 전 열렸던 LoL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에서 그 누구보다 절절한 패배를 겪었다. 아쉬운 마음에 '레클레스'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은 승리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동안의 노력이 헛된 것이 되었다는 슬픔 등 복잡한 감정의 산물이었다.

지금보다 네 살이나 어렸던 소년 '레클레스'가 흘렸던 눈물은 4년 후인 지금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렸다. 2018 롤드컵에서 '레클레스'는 프나틱의 팀 동료들과 함께 뛰어난 경기력을 과시, 꿈에 그리던 결승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이제 소년의 티를 완전히 벗어버린 '레클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을 준비를 마쳤다.


눈물 흘렸던 '레클레스'
패배의 쓰라림 앞에 무너졌던 17세 소년


▲ 어린 나이의 '레클레스'

2014년은 '레클레스'에겐 참 오묘한 연도였다. 당시 프나틱은 스프링 정규 2위와 포스트 시즌 1위에 이어 섬머 정규 2위, 포스트 시즌 2위로 롤드컵 진출에 성공했다. 그보다 1년 전에는 나이 규정에 걸려 출전할 수 없었던 '레클레스'가 세계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기회를 잡았다. 팬들 역시 EU LCS 1번 시드였던 얼라이언스의 원거리 딜러 '탭즈'보다 '레클레스'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었을 정도였다.

프나틱은 LCK의 삼성 블루와 LPL의 OMG와 한 조에 편성됐다. 버거운 상대였다. 2014년만 하더라도 다른 지역 팀들은 LCK나 LPL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젠 과거의 유산이 된 'Gap is closing(격차는 줄어들고 있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전이었다. 프나틱 입장에서는 8강 진출이 힘들어보였다. 그래도 프나틱은 당시 최강으로 불리던 삼성 블루를 잡는 파란을 연출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 출처 : LeagueofLegends.pl 유투브 채널

하지만 프나틱은 2승 4패의 성적으로 조 3위를 기록,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삼성 블루를 잡는 이변에도 프나틱의 2014 롤드컵은 실패로 끝났다. 프나틱은 OMG에게 연달아 패배하며 무너졌다. 특히, 다 잡았던 승리를 놓쳤던 초장기전 패배는 '레클레스'에게 뼈아팠다. 2014년 9월 27일, 프나틱과 OMG은 총 일곱 번의 드래곤 사냥과 다섯 번의 바론 사냥을 이어갔고, 약 71분 가량 싸웠다. 그러다가 OMG가 프나틱의 연이은 '백도어'를 막아내고 마지막 한타 대승으로 승리했다.


프나틱 소속 전원이 머리를 감싸고 패배의 아픔을 맞이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레클레스'가 눈에 띄었다. 그는 패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한 채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감싸쥐고 눈물을 보이는 '레클레스'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 눈물은 패배라는 단어가 '레클레스'를 비롯한 프로게이머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삼성 블루에게 일격을 날렸던 프나틱의 파란은 허무하게 종료됐다. 그리고 17세 소년의 세계 무대를 향한 첫 도전 역시 뜨거운 눈물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4년 후
최고가 된 소년, 가장 높은 곳에 앉을 준비 마치다


2014 롤드컵 종료 후에 잠시 프나틱을 떠났던 '레클레스'는 다시 프나틱으로 돌아왔다. 프나틱은 그들의 상징과도 같은 '레클레스'와 3년 계약을 체결, 그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을 보였다. '레클레스'도 프나틱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스플릿이 끝나면 어김없이 한국을 찾았다. 팀과 함께 한 적도 있었고 홀로 방문한 적도 있었다. 그의 목표는 한국 여행이나 휴식이 아닌, 연습이었다. 오로지 좋은 환경에서의 연습을 위해 '레클레스'는 한국을 찾았다.


그런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었다. '레클레스'는 최고의 2018년을 보냈다. 2018 EU LCS 스프링 포스트 시즌에 '레클레스'는 KDA 31.5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MVP에 선정됐다. 섬머 스플릿에서도 '레클레스'는 활약을 이어갔다. 팀의 중심이 자신에서 미드 라이너 '캡스' 쪽으로 넘어갔다고는 해도 뛰어난 모습을 유지했다. 그 결과, 프나틱은 EU LCS 1번 시드 자격으로 2018 롤드컵 출전 자격을 얻었다.

프나틱은 LPL의 IG와 NA LCS의 100 씨브즈와 한 조에 속했다. 프나틱은 IG에 이어 조 2위에 오를 것이라는 예상을 받았다. 하지만 프나틱은 5승 1패라는 준수한 성적과 함께 조 1위 자리를 꿰찼다. 심지어 IG와의 대결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또 한 번의 파란을 예고했다.

조 1위를 차지했던 프나틱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8강에서 EDG를 상대로 세트 스코어 3:1 승리를 차지하더니 4강에서는 Cloud9을 상대로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는 완승을 거뒀다. 프나틱은 EU LCS 1번 시드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던 자신들의 말을 지키면서 당당히 결승에 올랐다.

단연 프나틱의 결승 진출의 힘은 정글러 '브록사'와 미드 라이너 '캡스'에게서 나왔다. 폭발적인 캐리력을 숨김없이 드러낸 두 명의 선수는 단연 롤드컵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상체 라인 캐리 메타도 이 둘의 캐리력에 힘을 보탰다.

그런 와중에도 '레클레스' 역시 빛났다. 그는 EDG와의 8강 네 번의 세트에서 1데스, Cloud9과의 4강 세 번의 세트에서 2데스만 기록했다. 예전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안정감은 여전했다.


달라진 점도 있다. 그는 예전처럼 '생존만 하고 대미지는 못넣는' 원거리 딜러가 아니었다. '레클레스'는 필요한 순간마다 팀 승리에 필요한 대미지를 기록했다. 그의 분당 대미지는 2018 롤드컵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551, 대회 평균은 526.3)를 보였다.

KDA에서도 여전히 뛰어났다. 그는 KDA 12.58을 기록 중인데, 평균 데스가 1도 채 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의 주력 챔피언인 시비르로는 무려 KDA 69.98(K 4.0 / D 0.2 / A 7.7)이며 승률도 100%다. 시비르는 물론, 자야와 이즈리얼로도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이제 '레클레스'는 더 이상 패배의 아쉬움에 눈물을 보였던 어린 소년이 아니다. 그는 팀의 오더를 책임지는 두뇌이자 프나틱의 중후반을 책임지는 뛰어난 원거리 딜러다. 4년 새 훌쩍 커버린 남자는 이제 롤드컵 우승을 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