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챔피언십 선발전을 극적으로 통과한 LCK 4번 시드 팀이 결승전 경기에 설 거라고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라이엇 게임즈 공식 홈페이지에서 진행하는 승부 예측 이벤트 ‘승부의 신’에서 이번 결승전까지 살아남은 소환사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그만큼 DRX의 이번 월드 챔피언십 결승 진출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다.

이번 월드 챔피언십에 참가한 24개 팀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고, 각 팀과 선수들이 전달해 준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그중에서 유독 DRX는 이번 대회를 지켜본 많은 팬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고 한다. DRX가 올 한 해 동안 보여준 서사는 다른 팀들과는 결이 달랐고, 그 안에는 매력적인 선수들이 있었다.


9년 차 베테랑 원거리 딜러 ‘데프트’는 데뷔 시절부터 올해까지 늘 최정상급 선수로 평가받았고, 지난해까지 월드 챔피언십 무대만 여섯 번을 섰다. 그러나 ‘데프트’같은 정상급 선수가 2014년에 올라봤던 4강 무대에 다시 서기까지는 2,942일, 약 8년이 걸렸다. 데뷔 10년 차 올드 프로게이머에게 주마등처럼 흘러간 8년의 세월은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선수를 주저앉아 울게 했다. 자기 선수 생활 전체와 맞먹는 시간이었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와서야 다시 그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데프트’는 데뷔 이후 3,505일 만에 꿈에 그리던 월드 챔피언십 결승 무대를 밟는다. 함께 DRX의 바텀 라인을 책임지고 있는 ‘베릴’은 ‘데프트’에 대해 “어쩌면 올해가 ‘데프트’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보통 라스트 댄스라고 많이 하는데, 춤이나 노래는 마지막까지 가는 게 완성이다”라며 우승을 향한 의지를 보였다. 한 선수의 10년에 걸친 서사가 월드 챔피언십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마침내 결말을 앞두고 있다.


‘데프트’가 DRX 팬들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제카’ 김건우는 DRX 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데뷔 전부터 미드 라인의 차세대 유망주로 평가받던 이 선수는 이번 월드 챔피언십을 기점으로 자기 잠재력을 폭발하는 중이다.

월드 챔피언십 선발전부터 결승전까지 지속된 DRX의 미라클 런은 ‘제카’ 김건우의 공헌이 가장 크다는 게 중론이다. ‘제카’가 선발전부터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상대한 미드 라이너들의 이름 값은 대단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차례로 월드 챔피언십 선발전에서는 ‘빅라’와 ‘클로저’, 플레이인 스테이지에서는 ‘샤오후’, 그룹 스테이지에서는 ‘나이트’, 월드 챔피언십 8강에서는 ‘스카웃’, 4강에서는 ‘쵸비’를 상대했다. ‘제카’는 이런 재능 넘치는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늘 더 큰 존재감으로 DRX에 승리를 안겨줬다.

‘제카’ 김건우가 미드 라이너로서 이번 월드 챔피언십에서 보여준 임팩트는 역대 롤드컵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대단하지만, ‘제카’만이 유일했던 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임팩트를 남긴 선수가 단 한 명 있다. ‘제카’의 이번 월드 챔피언십 결승 마지막 상대가 바로 그 선수이다. 신이 되려는 ‘제카’의 마지막 서사는 신과 마주하는 일이 됐다.


‘제카’가 DRX 상승세의 일등 공신이라면, 숨은 공신은 ‘표식’ 홍창현이다. 월드 챔피언십 선발전 때만 해도 DRX의 최대 불안 요소는 정글이었다. 그래서 DRX는 식스맨 자리를 정글 포지션의 보완을 위해 사용했다. 그만큼 ‘표식’의 폼은 좋지 않았다.

플레이인-스테이지과 그룹 스테이지를 지나면서 점차 폼을 되찾은 ‘표식’은 토너먼트 스테이지부터 제대로 이변을 만들었다. EDG와의 8강 경기에서는 ‘지에지에’와의 강타 싸움을 압승하면서 역 스윕 드라마를 완성했다. EDG와의 경기는 장기전이 많았고, 오브젝트 획득에 따라 경기가 기울었기에 ‘표식’의 공헌이 가장 큰 판이었다.

4강 젠지 e스포츠와의 경기에서도 ‘표식’은 ‘피넛’을 상대로 설계도 적중하고, 강타 싸움도 대부분 이겨줬다. 특히, 4강전 단계에서는 자신의 시그니처 챔피언인 킨드레드를 꺼내 정글 주도권 싸움에 밀리지 않았고, 덕분에 밴픽에서의 이점도 가져갈 수 있었다.

'표식'은 좋지 않은 폼 때문에 그동안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표식'도 그러한 비판을 잘 알고 있었다. 월드 챔피언십 8강 승리 직후 인터뷰에서 '표식'은 "평가에 대한 부분에 내가 객관적으로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이 많이 후회스럽고 아쉽다"라며 그동안 자신의 부진을 인정했다.

그러나 '표식'은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겨낼 방법도 알고 있었다. '표식'은 "내가 잘하지 못하고 힘들어 할 때, 혁규형(데프트)이 나에게 결국 (경기에서)이기면 그만이라고 말해줬다. 오늘은 승리했으니 기분이 좋다"라며 비판을 뛰어넘을 최고의 답은 승리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