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 펀앤런 정희권 대표

"보드게임이라는 말이 붙어있어서 들으러 오실 분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강연장이 꽉 들어찰 정도로 오실 줄이야... 감사하네요."

우보 펀앤런(UBO Fun&Learn) 정희권 대표. 우보(牛步)는 단어 그대로 '소걸음'이라는 의미다. '소가 걷는 것처럼 우직하게 재미를 추구하겠다'는 의미라고.

그의 이력은 꽤 특이하다. 모바일 게임사로 업계에 들어왔으며, 보드게임 개발과 해외마케팅을 거쳐 온라인 게임 퍼블리싱까지 경험했다. 이후 아케이드 게임 개발과 해외마케팅도 했으며, 다시 보드게임 및 앱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교육심리 석사와 교육공학 박사 수료증까지 가지고 있다.

"넥슨 모바일의 전신이 된 회사가 처음 시작할 때 제가 그 멤버 중 하나였습니다. 잘 안 되서 이쪽으로 오지는 못했지만요. 지금의 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스탯을 쓸데없이 산만하게 찍은 잡캐 고렙인 셈입니다."

보드게임 및 앱 개발이 정희권 대표의 주된 영역.
마음의소리 보드게임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라고.


■ '플래피버드'가 왜 재미있을까요?

보드게임을 활용한 프로토타이핑. 그 설명을 위해 정희권 대표는 한때 전세계적 열풍을 일으켰던 '플래피버드'를 거론했다. 손가락 탭, 혹은 마우스 클릭만으로 진행되는 게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간단한 게임은 어째서 그토록 '재미있다'는 찬사를 받았던 걸까.

수많은 사람이 즐겼던만큼 이유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정희권 대표는 '웃음에 해답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잇몸이 살짝 드러날 만큼만 입을 벌리고 미소를 지어보세요. 눈꼬리는 살짝 내려가도록 하고요. 좀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되겠지만 괜찮아요. 여러분이 짓고 있는 표정을 볼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으니까. 그 상태로 아주, 무척이나 슬픈 생각을 한 번 해보는 겁니다. 굉장히 슬픈 생각. 어때요? 잘 되나요?"

잘 안 됐다. 슬픈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슬그머니 사라져버린다. 마치 뇌라는 지역을 점령하려 몰려오던 슬픔이 기습을 받고 전멸해버리는 느낌이랄까. 즉, 신체적 표현이 감정을 통제해버리는 상황이다.

'자기지각 이론'(Self Percepti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의 신념과 태도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관찰함으로써 영향을 받게 된다. 즉,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상태라면 그에 맞춰 사고방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파이프 사이를 통과하기 위해 이때다 싶을 때 탭(클릭)하는 게임. 그것이 실패하면 새는 비참한 모습(?)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탄성과 실소를 흘린다. 즉, 웃음이 나오기 때문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정희권 대표가 말하는 '플래피버드를 재미있어 하는 이유'다.


'재미 → 웃음'이 아닌, 웃음 → 재미'의 순서일 수도 있다는 것.
물론 입증된 내용이 아닌 하나의 가설이다.


■ 프로토타이핑이 중요한 이유

사실상 '플래피버드'는 개발자 본인이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뒀다. 개발자가 돌연 판매 중단을 선언한 심리의 한구석 어딘가에는 '너무 큰 성공'에 대한 부담감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개발자 본인이 아닌 이상 정확한 심정을 알 수는 없겠지만.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차기작을 개발할 때 '플래피버드'의 명성에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다음 작품에 붙을 '플래피버드 개발자의 차기작'이라는 이름표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겁니다."

게임이 잘 만들어졌는지, 재미있는지 여부를 떠나 플래피버드의 '초대박'은 의도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을 기대하고 팀이나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그리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정희권 대표는 "게임이란 곧 규칙"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있어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특정한 감정(주로 재미)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고안된 물리적 장치와 규칙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프로토타이핑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팀원들을 이해시키고, 프로젝트 관리 효율성을 높이며, 투자자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도 프로토타이핑은 필요하다. 무엇보다, "내가 만든 게임은 무조건 재미있어"라는 식의 자기 최면에 빠지지 않기 위한 필수 단계다.




■ 보드게임을 활용한 프로토타입, 왜 유용한가?

프로토타이핑은 종이, 디지털,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 보드게임을 통해 이루어지는 프로토타이핑은 '실제 독립적인 게임'으로서 플레이 해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효율적인 교육과정 설계 및 운영 원칙 중 Hands-On이라는 것이 있다. 참여자(플레이어)로 하여금 구체적 사물을 통해 감각과 흥미를 줌으로써 참여 동기를 지속해나가는 개념이다. 또한, '문제해결을 위한 전략'에서 높은 빈도로 사용되는 것 중 하나가 '그림 그리기'다. 문제가 되는 상황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함으로써 해결을 돕는 것이다.

보드게임의 요소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킨다. 실존하는 구성물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손으로 만져보고 가지고 놀 수' 있으니까.



"약 20년 전으로 돌아가보죠. 'MMORPG 장르에서 특정 지역을 두고 벌이는 집단 전투를 구현하고 싶다'고 생각해봅시다. 해결해야할 문제들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통상적인 RPG 장르의 개인적 요소를 구현해야겠죠. 몬스터와의 전투, 캐릭터 성장 등 말입니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 안에서의 집단적 요소도 필요합니다. 공성전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이 두 가지를 하나의 게임 안에서 조화시켜야 합니다."


디지털로 구현된 게임 안에서 몬스터와의 전투는 결국 끊임없는 수치 계산의 연속이다. 이것을 좀 단순화시키면 인쇄된 이미지들과 주사위를 이용해 구현할 수 있다.

공성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먼저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를 표현한다.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의 HP 총합과 공격력의 총합 값을 놓고 몇 가지 함수를 적용해 싸움이 진행되도록 하면 오프라인 구현이 가능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프로토타입은 게임의 재미를 미리 확인해보는 본연의 기능 외에 또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 약간의 번외 요소를 추가하면 새로운 재미를 창출할 수도 있고, 또다른 형태의 독립된 게임이 될 가능성도 가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몬스터 전투'와 '공성전'을 합치지 않고 각각 별도의 게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주사위에 꼭 숫자만 쓰라는 법은 없지

어릴 적에 도미노 블럭 같은 것들로 이런 걸 많이 했던 기억이 있는데..


■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 부서지고 변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프로토타이핑은 게임 디자이너에게 있어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창구다. 하지만 디자인 과정에서 플레이어의 입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희권 대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이야기한다. 어쨌거나 게임은 플레이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게 마련이니까.

프로토타이핑을 할 때는 창의력을 가능한 한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 옳다. 게임을 각 요소별로 나눠서 개별 테스트를 해보고, 몇 가지씩을 묶어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보는 방법도 좋다. 본래 기존 시스템을 변형해 또다른 재미를 넣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재미요소를 먼저 정의하고 그에 맞는 시스템을 구성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아낌없이 파괴하고 변형하고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말 그대로 '프로토타입'인 만큼 하나하나 너무 공들이려 하기 보다는 유사한 느낌의 기성 제품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들을 활용해 변형시킬 수 있는 다양한 물리적 방법을 총동원하고, 그 과정에서 장르가 변형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존의 구조가 부서지거나 바뀌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엄청난 재미요소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도 있을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정희권 대표는 매든 풋볼과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NFL 시리즈 등을 디자인했던 그래이엄 베일러스의 말을 PT 화면으로 보여주며 강연을 마무리지었다.

디지털 구현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종이로 디자인을 먼저 해야 한다고 믿는다. 프로토타입을 최대한 활용하면, 프로젝트 후반에 시간과 자금 때문에 프로젝트를 축소해야 할때 무엇을 뺄지 판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