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게든 나쁘게든, 제대로 해석한 클래식 JRPG


지난 2019년 E3를 통해 '크리스 테일즈'라는 타이틀의 눈에 띄는 신작이 하나 공개됐습니다.

'클래식 JRPG에 바치는 러브레터'라는 수식어와 함께 등장한 이 게임은 크로노 트리거, 파이널판타지6, 발키리 프로파일, 브레이블리 디폴트, 페르소나5와 같은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콜롬비아 인디 개발사의 신작이었습니다.

티저 트레일러가 처음 공개됐을 당시 손으로 하나하나 그린듯한 아름다운 2D 애니메이션 연출에 좋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개발 단계에서 게임에 영감을 주었다고 언급된 작품들도 모두 명작이라는 수식어가 아쉽지 않은 게임들이었기에, 남미의 개발자들이 재해석한 JRPG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기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죠.

앞서 공개되었던 예정일보다는 다소 늦어졌지만, 드디어 지난 7월 20일, 크리스 테일즈가 '정식 한국어화'와 함께 출시됐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게임이기에 출시 소식이 들리자마자 바로 게임을 플레이해보았는데요. 비주얼 만큼은 티저 트레일러를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이 그대로 이어졌습니다만,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게임이었습니다. 물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개발자들이 클래식 JRPG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충분히 전해졌죠.

게임명 : Cris Tales
장르명 : RPG
출시일 : 2021.07.20.
개발사 : Dreams Uncorporated
서비스 : Modus Games
플랫폼 : PC, PS, Xbox, Switch

관련 링크: 'Cris Tales' 오픈크리틱 페이지


독특한 비주얼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만나 완성된 세계


보통 JRPG를 플레이할 때 미리 살펴보는 몇 가지 중요 요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게임의 비주얼, 전투 콘텐츠를 포함한 게임 플레이, 그리고 스토리죠. 과거 클래식 JRPG의 도트 그래픽에 무슨 비주얼을 따졌느냐 하실 수도 있지만, 당시에도 주인공과 적들의 캐릭터 디자인, 그리고 게임 속 세상을 여행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필드 비주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신작 크리스 테일즈 역시 가장 큰 특징은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비주얼에 있습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화려한 색감의 비주얼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계속되는 것이 이 게임을 정의하는 첫 번째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만큼, 형형색색의 색감과 이를 통해 전해지는 게임의 화사하고 명랑한 분위기가 자신의 취향과 반대된다면 일찌감치 크리스 테일즈에 대한 관심을 접는 것이 좋습니다. 다소 냉혹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어서 살펴볼 게임 플레이 디자인과 스토리는 이 게임에서만큼은 비주얼보다 아래로 들어가는 요소들이거든요.



▲ 물론, 비주얼 만큼은 취향을 타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아름답습니다

게임의 비주얼이 '취향저격'에 성공했다면, 다음은 시간을 넘나드는 독특한 컨셉의 게임 플레이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플레이어는 하나의 화면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삼 분할된 화면을 통해 각각 다른 시간의 모습이 비춰지고, 특수한 조작을 통해 다른 시간에 직접 간섭할 수 있게 되죠. 해당 시스템을 활용한 전투와 퍼즐 연출이 이 게임의 두 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 테일즈의 전투는 속성과 상성을 바탕으로 하는 턴제 전투가 기본이지만, 여기에 '시간을 조작하는 힘'이 더해지며 더욱 다채로워집니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모든 적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고, 플레이어는 특수한 힘을 사용하여 적들이 나이를 먹게 하거나, 혹은 젊어지게 할 수 있죠.

해당 특성을 활용하여 독 디버프를 걸고 시간을 흐르게 하여 독 중첩 도트 대미지를 한 번에 준다거나, 적의 강철 갑옷에 물을 뿌린 뒤 시간을 가속해 녹슬게 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활용한 기술 조합은 전체적으로 막대한 위력을 보여주므로, 매번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외에도 아군이나 적 캐릭터의 모션을 보고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는 것에 추가타, 방어, 회피 기능을 추가하여 단조로운 턴제 전투를 탈피하려고 노력한 흔적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주인공 파티를 중심으로 왼쪽의 적은 과거로, 오른쪽의 적은 미래로 보낼 수 있는 구조

▲ 속성 개념과 시간을 동시에 활용해야만 공략할 수 있는 적들도 등장합니다


크리스 테일즈라는 게임을 정의하는 세 번째 특징은 앞서 소개한 '시간' 요소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매력적인 판타지 스토리입니다. 시간 마법사의 힘을 깨우친 주인공 '크리스벨'이 멋진 동료들과 힘을 합쳐 강력한 적 '시간의 여제'와 맞선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왕도물의 성격을 띠고 있죠.

어떻게 보면 정말 단순하고 뻔해보이는 이야기지만, 처음엔 약하기만 했던 주인공을 점차 성장시켜나가는 RPG 장르에서 이보다 더 적합한 방식은 없어 보입니다. 모험 중에 다양한 역경을 마주하게 되는 주인공 크리스벨이 시간의 힘을 활용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모습은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스토리 속에서도 통쾌한 '사이다'맛을 선사해줍니다.

시간을 활용하는 이야기 전개 방식은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 활용법은 간단한 편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원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게 되어버린 단서의 과거를 엿보고, 현재의 문제에 개입해 곧 다가올 미래를 개혁하는 식이죠. 이 과정에서 가끔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볼 수 있는 것도 이 게임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뻔한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 '동료들과 힘을 합쳐 거대한 악에 맞선다' 클리셰가 가득하지만,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게임의 매력도, 아쉬운 점도 모두 '클래식 JRPG' 답다


크리스 테일즈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수많은 매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만큼, 아쉬운 점도 다수 찾아볼 수 있는 게임입니다. 따져보면 '클래식 JRPG'의 특징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로 보이는데, 굳이 이런 것까지 영감을 받고 따올 필요가 있었나 싶어지는 것들도 많았죠.

첫 번째는 너무 잦은 로딩입니다. 플레이어는 크리스 테일즈를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을 불러올 때, 맵과 맵의 구분을 넘어갈 때, 전투를 시작할 때, 전투를 마칠 때 등등 모든 순간에 하얀 로딩 화면을 보게 됩니다. 2~3초 길이의 짧은 로딩이지만, 구조상 계속해서 반복되다보니 쉽게 지치고 몰입이 끊기게 되죠.

이 게임의 마스코트 캐릭터이자 조력자인 개구리 마티아스의 힌트를 들을 수 있는 메인 스토리와 달리 서브 퀘스트의 경우 주어지는 힌트가 한정적인 편인데, 단서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맵을 이동하며 로딩에 시달리다 보면, 그냥 서브 퀘스트를 무시하고 넘어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 깔끔한 한국어화와 든든한 힌트 기능 덕에 메인 스토리는 막힘 없이 진행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플레이어를 지치게 하는 랜덤 인카운터 전투입니다. 필드에서 스토리 진행을 위해 이동하다 보면 예의 '하얀색 로딩 화면'과 함께 아무런 전조 없이 전투가 시작되는데요. 이 빈도가 너무 잦다 보니 누구나 금방 지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혹자는 '랜덤 인카운터' 자체를 클래식 JRPG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전투의 취사선택이 가능한 '페르소나5'와 같은 우수한 교보재들을 참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피로도가 높은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계속되는 전투에 금방 지쳐서 당장이라도 게임을 끄고 싶어질 뿐이지, 이렇게 억지로라도 전투를 치르고 나면 파티 구성원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고, 자금도 넉넉히 모을 수 있어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 한걸음 내딛기가 두렵고, 필드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행위가 조심스러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 번째 아쉬운 점은 자동 저장 기능을 일절 지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게임은 2021년에 출시된 최신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고전 감성을 살려보려 했는지 자동 저장 기능을 아예 지원하지 않습니다.

자동 저장이 없는 것이 뭐 그렇게 큰 문제인가 싶을 수 있지만, 이는 '랜덤 인카운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게임의 전투 시스템과 맞물리며 종종 최악의 상황을 빚어냅니다.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장비 강화와 파티원 회복 타이밍을 놓쳐 장장 10분에 걸쳐 어렵게 클리어한 보스전 뒤, 랜덤 인카운터로 맞이한 일반 전투에서 파티원 전원이 급사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게임을 이어할 수 있는 조그마한 여지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존 세이브 파일이 30분 전이었다면, 꼼짝 없이 30분 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죠.

물론 RPG를 플레이할 때 세이브가 가능한 각 포인트에서 자주 저장을 하는 것은 게이머로서의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크리스 테일즈를 플레이할 때는 이점에 특히 더 유념하고 매 5분마다 세이브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 방어 조작을 확실히 하더라도 추가 대미지가 들어오다보니, 긴장을 놓으면 금방 전멸할 수 있다

크리스 테일즈는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을 찾다 보면 꽤 여러 부분에 허점이 보이는 게임입니다. 다만 이러한 요소들을 '고전 JRPG 특유의 감성을 최대한 반영한 요소다'라고 설명한다면 또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하죠. 이게 참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요소를 고전 게임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콘텐츠'로 받아들일 것인지, 그 여부는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판단할 문제로 남습니다. 다만 게임 가격이 약 4만 원에 달하는 만큼, 지금보다 편의성 부분에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일정 수준의 할인이 반영될 때까지 구매를 보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분명한 점은 이 게임이 클래식 JRPG에 추억을 가지고 그때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은 게이머라면, 분명히 만족할 수 있는 수작이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불필요할지도 모르는 게임의 설명을 추가로 더하자면, '크리스 테일즈'는 콜롬비아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가의 작품 속 이야기를 JRPG 장르 특유의 정통 왕도 판타지로 재해석한 게임입니다. 일반 게임 유저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국가인 콜롬비아의 문학을 알리고, 나라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홍보 요소가 담긴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죠. 우리나라로 치자면 고전 소설인 '홍길동전'을 RPG 형태로 풀어낸 셈이랄까요.

실제로 게임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비주얼의 배경과 건물들은 실제 콜롬비아에 있는 역사적인 건물들을 모티브 삼아 만들어졌습니다. 간단한 역사적 배경과 기본 배경 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플레이하면, 마치 외국여행을 떠나는 느낌으로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이 게임의 숨겨진 매력이죠.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기 싫은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면, 조작 스트레스 없이 느긋하게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는 RPG로 잠시 더위를 잊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클래식 게임 특유의 템포마저 사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크리스 테일즈'를 통해 지구 반대편의 남미 국가인 콜롬비아를 여행하는 재미와 JRPG 특유의 감성을 동시에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