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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일이 아닌데."

 

"너 역시 아니잖아."

 

"뭐, 그렇지."

 

뽀삐의 말에 갈리오는 머쓱하며 자신이 들고 온 꽃 한 송이를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기일이 아니어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지. 너도 그래서 온 것일 테고."

 

"그래."

 

뽀삐와 갈리오는 잠시 무덤 앞에서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공통점이 있었다.

뽀삐의 아버지 블롬그런은 데마시아 장군의 투구를 전달하던 도중.

갈리오의 아버지이자 기술자였던 듀란드는 함께 울부짖는 늪을 건너던 도중 암살을 당했다.

 

모두 녹서스 암살자의 짓이었고 그들은 슬픔을 억누르며 데마시아에 들어가 충성을 다짐했었다.

 

"이런 날엔 한잔 해야지."

 

갈리오가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가고일이 술도 마셔?"

 

"그거 종족 차별성 발언이야, 친구."

 

뽀삐는 갈리오가 건넨 술잔을 받자마자 단숨에 들이켰다.

그렇게 해야 갑갑한 심정을 풀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갈리오."

 

"응, 왜?"

 

"만약 지금의 우리였다면 아버지를 지킬 수 있었겠지?"

 

"...아마도."

 

그들이 외교관으로써 파수꾼으로써 데마시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당시 암살자들이 들이닥칠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서서. 그저 겁쟁이처럼 숨어서 난도질당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난 녹서스 놈들도 증오스럽지만 시간도 원망스러워. 나 자신도 원망스럽고."

 

"......."

 

"왜 하필 그 때 그랬어야 했던 건지."

 

"나 역시 그런 생각은 많이 해봤다."

 

갈리오가 술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야."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없다.

여전히 비석에는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고 그들이 이곳에 계속 찾아올 것도 변함이 없다.

 

"그래, 갈리오 네 말이 맞아."

 

뽀삐가 말했다.

 

"하지만 잘 모르겠어. 너와 내 아버지를 살해한 녹서스 놈들은 두 발 뻗고 살아있는데 우리는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복수에 눈이 멀었군."

 

"넌 아니라는 거야?"

 

갈리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글쎄."

 

분명 그도 그 날을 잊은 건 아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나?"

 

"......."

 

"살아있는 석상인지 모르고 네가 내 그늘 아래에 주저 앉았을 때 나는 네 눈동자를 보고 연민을 느꼈다고 말했었지."

 

갈리오는 어느덧 한 잔 정도 남은 술을 들이켰다.

 

"그것 외에 한 가지 더 느낀 게 있다."

 

"그게 뭔데?"

 

"이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

 

"......."

 

"네 아버지 블롬그런의 의지를 이어가려는 굳건함이 느껴졌지. 그것 때문에 난 너를 따라 데마시아에 온 거야."

 

"뭘 얘기하고 싶은거야?"

 

"복수에 눈이 멀어서는 안된다는 거다."

 

듀란드를 눈 앞에서 무기력하게 떠나 보낸 그 날 이후 갈리오 역시 녹서스 놈들을 증오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었다.

뽀삐는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갈리오의 지금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아버지를 죽인 원수 놈들을 가만 놔두자는 거야?"

 

"뽀삐, 복수할 기회는 언젠가 오게 될 거야."

 

갈리오가 말했다.

 

"하지만 복수가 네 삶을 지배하는 순간 너 또한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

 

"네 아버지가 과연 네 지금 모습을 보고 기뻐하실까?"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결국 진부한 설교였구만."

 

뽀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바윗돌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진부한 얘기가 곧 정답이지."

 

"네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갈리오."

 

복수가 의지를 집어 삼켜서는 안된다.

 

갈리오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뽀삐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 우리는 아버지의 의지를 이어가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그게 우리 삶의 이유이다. 복수는 그다음이야."

 

"맞아. 잠시 잊을 뻔했군."

 

뽀삐는 자신이 입고 있는, 그의 아버지 블롬그런이 만들어 준 갑주를 내려다보았다.

 

"갈리오, 네 덕분에 뭐가 중요한지 깨달았다."

 

뽀삐의 말에 갈리오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슬슬 내려가자고, 데마시아 외교관."

 

"그래."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