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살좀 빼라’, ‘공부 좀 해라’, ‘조금 더 열심히 해봐라’… 하지만 말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옳은 소리(라고 말하고 듣는 가족들은 잔소리라고 말했다.) 했는데 가족들은 점점 더 얼굴을 피했습니다.



중세에 성자(聖子)로 일컬어졌던 아시시의 프랜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몇 주일 동안 금식 수련을 하고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팠던 한 제자가 길을 가다가 맛있는 죽을 파는 것을 보고, 거의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그 죽을 먹어버렸다.


순간, 다른 모든 제자들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이 그 제자에게 쏟아졌고, 그는 자신이 파문당할 것을 직감한 듯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토록 존경하던 프랜시스가 주저 없이 자기도 죽 한 그릇을 들어 맛있게 먹고 난 뒤, 놀라 입을 못 다물고 있는 제자들을 보며 말했다.


“실은 나도 배가 너무 고팠단다. 우리 금식 기도는 오늘로써 끝내자꾸나.”


이 일로 그 제자는 감명을 받고 더욱 더 겸손히 수양하여 훗날 프랜시스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약점과 실수가 있는데 그것을 비상한 관찰력으로 꼭 드러내서 지적하고 보여주는 그런 무례를 범치 말아야 한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의 약점을 함부로 지적하기 쉬운데 그런 무례를 범치 말아야 한다.





미국 대학 후배의 경험담이다. 형제자매들 중에 미국인과 결혼한 사람이 있어서 가족들이 다 모일 때는 한국인, 미국인이 다 섞여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 특히 십대 청소년들은 미국 친척들을 더 좋아했다. 반면에 한국 친척들은 덜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했다.


왜냐하면 한국 친척들은 만나면 “야, 너 살 좀 빼라”, “너 쌍꺼풀 수술 해야겠다”라거나 “학교 공부는 몇 등쯤 하니? 대학은 어디 갈 건데?”

하는 식으로 사춘기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예민한 말들을 무례하게 막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친척들은 꼭 한두 가지씩 칭찬을 해주고, 요즘 즐거웠던 일, 힘들었던 일들에 관해 아주 소탈하게 대화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미국 친척들을 더 좋아할 수밖에.


우리 청년들 중에도 명절에 집에 내려가기 싫어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가족과 친척들이 친하다면서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들이 너무 무례하기 때문이다.


“너 시집은 언제 갈래?” “너 유학 갔다 와서 아직도 놀고 있니?” “너도 이제 제대로 된 회사 좀 다녀야지.” 이런 무례한 말들을 턱턱 한다.

그래서 가족 친척들이 오랜만에 모이면 서로 감정 상해서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


교회 안에서도 조금만 친해지면 서로에게 너무 무례하게 서로의 약점을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말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집사님, 가발 쓰신 거죠?” “아유, 권사님, 못 보던 사이에 살이 너무 찌셨네.” “요즘 사업이 너무 안 되신다면서요?”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전혀 할 필요가 없는 무례한 말들이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면 듣는 사람은 깊은 상처를 받을 수 있는데, 다들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약점들이 많이 있는데,남들이 참아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눈에 들보를 먼저 뽑고야 남의 눈의 가시를 뽑으라 하셨다. 무엇을 말하느냐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어떻게 말하느냐이다.


지혜롭고 부드럽게, 상대방을 배려하며 말해야 한다.

진실을 말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상처를 줄 수 있고, 교회와 가정을 분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잠언15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