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유명 연쇄 살인마라면 5명의 기녀와 부총리 유희서를 살해한 선조의 아들인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수십명의 상인과 부녀자를 죽인 해적 김수은, 4명의 여인을 성고문해 죽인 권채(權採, 1399~1438)가 유명 합니다.



이중 임해군이나 김수은은 일종의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채는 당시 최고 문장가로 뽑힐 정도로 학문도 깊고 매사에 반듯한 사람었죠.



즉 정신은 멀쩡하나 감정이 저하된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다고 보입니다.







조선조 세종 9년 5월 22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해 장안에 떠들썩 했습니다.



여인이 죽은 채로 물에 내려왔는데 시체는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었고 성기에서 항문까지의 부위가 칼로 도려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얼굴 마저 도려내져 신원을 알수도 없었습니다..



이후 몇 주를 간격으로 실종된 여인들의 시신이 발견 됐는데 온몸이 불로 지져 있다던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돼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분노한 세종은 범인을 잡으라고 명했고 수많은 의금부사와 어사들이 사건을 조사하고 거리를 순찰 했습니다..





그리고 '무원록(無寃錄-중국 원나라 왕여(王與)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법의학서로



세종 22년에 이를 바탕으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함, 시체를 검시 하는법등이 상당히 자세 하게 나옵니다)'



을 바탕으로 시신을 과학적으로 조사합니다





그리고 그나마 얼굴이 손상되지 않은 한 여인의 골격 등을 살펴 얼굴을 그려냈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원을 조회한 결과 덕금이라는 여인으로 당시 최고 문장가이자 집현적 학자인 권채의 몸종이란걸 알게 됩니다..



당시 사건을 맡은 의금부 신상은 권채가 세종의 글 스승이기도 했고 당시 문장가라 함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자 아예 잠복을 했는데



잠복 한 지 4일 정도 되자 한 여인이 갑자기 대문을 열고 도망나오고 몇몇의 남자들이 그녀를 쫓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상이 수하들과 함께 여자를 구출 했는데 온몸이 상처 투성이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앙상 했습니다.





그녀의 진술로 인해 끔찍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 졌는데



권채가 수하들을 시켜 여자들을 납치해서 일주일간 잔인하게 성고문해 죽인 거였죠.





권채는 3년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할 정도로 의학에도 상당히 지식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잡힌 여인들은 거의 일주일을 고통을 당하다 죽었는데 몸의 힘줄과 핏줄을 도려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여자의 입을 솜으로 막은 다음 불에 달군 쇠로 음부를 지지고 개의 변을 먹게 하는등 성고문 방법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권채는 의금부에 소환됬지만 자신은 잘못한게 없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는 단지 학문 연구를 했을 뿐이라고 일축 했죠.



게다가 수많은 집현적 학자들과 세종이 권채의 편을 들어 결국 무혐의로 풀려 나고 좌천 되지만 곧 복귀 합니다.



대신 애꿎은 권채의 처 정씨가 질투로 노비를 살해 했다는 누명을 받아 곤장 아흔 대를 맞다가 죽었죠.





권채는 이후에도 <작성도(作聖圖)>,<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 하는등 왕성한 학자활동을 하다가



40살이 되자 갑자기 급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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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자료] 조선시대 기묘한 이야기 (이륙이야기)







1498년 사망한 이륙(李陸)은 광주(廣州)에 사는 80세가 넘은 한 노인이



평생을 살면서 본 가장 이상한 것 두 가지를 듣고 기록에 남겨 놓았다.





그 첫번째 이야기는, 남해에서 본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노인은 젊은 시절 어떤 사람이 남해 해변에서 죽는 모습을 보았다.



이 사람은 이상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시체를 치워줄 사람이 없어서 바닷가에 쓰러진 모습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이튿날이 되어 낮이 되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죽은 사람의 살이 점차 썩기 시작했는데,



썩은 살이 점차로 웅크러들더니 점점 모양이 미끌거리는 이상한 작은 덩어리들로 변해 갔다.



곧 이 죽은 사람은 온몸이 수없이 많은 개구리로 변하게 되었다.



이 수많은 개구리들은 죽은 사람의 옷에서 부터 튀어나와서 팔딱팔딱 뛰더니 점차 바다를 향해 갔다.





개구리들은 모두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물속에 들어가자 다리를 몸속에 집어 넣고 꽁무니에서 꼬리가 돋아나는듯하더니,



모두 평범한 물고기 모양으로 변했다.



잠깐 사이에 이 물고기들은 모두 헤엄쳐서 바다 어디론가 사라져 갔고, 해변에는 죽은 사람의 텅빈 옷가지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 원본출전 청파극담





1498년에 사망한 이륙이 남긴 가장 이상한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가면놀이에 흠뻑 빠져서 이런저런 가면을 구하며 다녔다.



그런데 나무로 되어 있는 어느 이상한 가면을 발견한 뒤로, 가면을 덮어 쓰고 춤추고 노는 일에 더욱 빠지게 되었고,



그와 함께 이상한 병이 전염된 것 처럼 시름시름 병을 얻어 앓게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병을 얻자 이 집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 굿을 했는데, 무당은 "나무 가면이 병을 일으킨다"고 했다.



결국 이 사람은 그 이상한 가면을 들판에 버렸다.



그랬더니 곧 병이 나았다.



아마도 가면이 얼굴에 붙어서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빨아 먹은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몇 달 쯤 뒤에 우연히 가면을 버린 들판에서 다른 사람이 그 가면을 보게 되었다.



가면은 반쯤 썩어 있었고, 그 부분은 버섯으로 변해서 살고 있었다.



버섯이 향기롭고 먹음직스러워서 이 사람은 버섯을 뜯어 먹어 보았는데, 그러자 갑자기 비실비실 웃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은 히죽거리면서 웃다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가면을 덮어 쓰고 미친듯이 춤을 추는 몰골과 같았다.



다른 사람 하나가 또 버섯을 조금 떼어 먹어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웃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한참 후에 버섯을 먹은 사람들의 발작이 그친 뒤에 물어보니,



"처음에는 웃음이 나면서 기분이 좋고, 나중에는 날뛰고 춤추는 것을 뜻대로 멈출 수 없이 계속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아마도 단순히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이 우연히 생겨나 벌어진 일이겠지만,



가면의 모습과 버섯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면서 사람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이상한 생물이라는 느낌도 드는 이야기이다.





- 원본출전 청파극담







[공포자료] 조선시대 기묘한 이야기







1528년. 성운(成雲)은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아 먼 경상도 땅으로 온 상황이었다.



항상 중앙의 조정과 한성부를 다스리는 직위 정도만을 떠돌던 그로서는 피곤한 여정이었다.



성운은 기묘사화에서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는 데 한 몫한 사람으로 악명이 높았고,



때문에 성운 때문에 자신의 친지가 죽었다고 그를 원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렇게 원한을 많이 샀던 성운의 죽음은 정신병 발작으로 인한 죽음 기록 중에 유명한 것이다.





성운은 어느날 대낮에 잠깐 낮잠이 들었다가 가위에 눌리게 된다.



성운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가위에 눌린 상태라서 움직일 수도 없는데 이상한 귀신이 가득 보이기 시작했다.



성운은 자신의 좌우에 기괴한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눈, 코, 입이 없는 살로 되어 있는 얼굴에, 팔 다리도 없이 몸뚱이만 이리 자리 뒹굴고 있었고,



머리카락과 이마 부분도 없는 상태였다.



성운을 그 모습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서 괴로워 했는데, 도저히 겁이 나서 그 모습들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눈을 애써 감으려고 하였다.





성운은 이후로 발광하여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중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괴로워하고,



눈을 뜨면 그 모습이 보일까 두려워서 질끈 눈을 감은채로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10여일을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성운은 사망하였다.



- 원본출전 기묘록 속집









1590년에서 1592년 초에 이르기 까지,



당시 서울에서는 "등등곡(登登曲)"이라는 이상한 춤을 추며 정신 없이 노는 놀이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것은 일부러 정신나간 행동을 따라하면서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면서 날뛰고 노는 행동이었는데,



주로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모여서 일부러 바보짓을 하고 미치광이처럼 설치는 것이었다.



히죽히죽 웃는 표정으로 짐승 같은 동작으로 아무렇게나 마구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가 하면,



밤새 깔깔 거리고 웃으면서 뒹굴고 그러다 갑자기 엉엉 울기도 하면서



"사람이 사람 같지 않다네" 따위의 말을 서로 소리지르며 주고 받았다.





이 놀이를 할 때에는 기괴한 귀신, 괴물, 도깨비의 모습을 만들어서 가면을 쓰고 괴상한 옷을 입고 뛰어다니기도 했고,



정상적인 것이 아닌 겉모습, 사람이 보통 떠올리기 힘든 모습을 일부러 찾아서 몸에 걸치기도 했다.



이들은 무당의 모습이나 기괴한 행색 따위를 일부러 따라해서 서로서로 미친 모습을 자랑했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정신나간 듯한 동작만을 계속하며 밤새 놀았다.



이러한 퇴폐적인 기행은 삽시간에 퍼져서 수백명, 수천명이 한 데 엉켜서 이런 놀음을 하기에 이르렀고,



"한 번 죽으면 아무 소용 없으니, 지금 취하고 배부른 것이 제일이다"



따위의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이 놀이에 심각하게 빠져드는 사람들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무작정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놀기만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걸인이 되는 사람들까지 나타날 지경에 이르렀고,



유명한 선비와 명문가의 자제들 중에서도 정효성(鄭孝誠), 백진민(白震民), 유극신(柳克新), 김두남(金斗南),



이경전(李慶全), 정협(鄭協), 김성립(金誠立)등이 이 등등곡을 즐긴 것으로 알려 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당쟁의 상황에서 허망함을 느낀 양반 가문에서



은밀히 어떤 일탈적인 취미가 유행했던 것이 갑자기 크게 퍼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후기의 여러 서적에서는 이것이 임진왜란 직전의 망조를 상징한다는 식의 해석도 통용되었다.





- 원본출전 연려실기술









청구야담(靑丘野談-조선 헌종때 출판된 걸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야담집)에 기록된 이야기로



조선조 연산군때 영월읍 흥월리에 잣나무백이라는 마을에 신영언이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살림이 부유하여 여느 양반들 처럼 첩까지 두고 지냈다.



그러던중 첩이 경읍이라는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들은 준수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쎈 장사였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조선시대는 서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했다.





경읍 역시 차별을 당했고 그는 점차 자신에 대한 사람드르이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불만은 점점 집안 사람들에 대한 원망으로 치닫았다.



그는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까지 차별을 당하자 그 한이 더욱 커져서 말썽을 부렸다.



워낙 기운에 쎄 하인 한두 명으로 말리기는 어려웠고, 점차 그 집안과 마을에서도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집안의 가장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온 집안이 장사 준비로 골몰했다.



경읍은 유일하게 의지하던 부친이 작고하였으니 허탈한 마을을 가눌수가 없었고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갔으나 가족들에게 의해 쫒겨 났다.



부친의 제사 때에도 서자는 제청에 들지 못하고 뜰 아래에서 절을 해야만 했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의 분노는 점점 가중되었고, 아침부터 대취하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오일후 신씨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지관이 명당이라고 점지한 땅에 봉분을 짓기 위하여 땅을 파고 있었다.





이때 만취한 경읍이 나타나 관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시체가 땅속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나니 심사가 더욱 격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본 문중 사람들은 참다 못하여 술취한 그를 흙구덩이에 밀어 넣고,



술이 담긴 큰독을 들어 그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흙이며 돌을 마구 던졌다.



본래 미움을 받던 그인지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군중심리가 작용하여 모두 돌을 던지고 흙 메우는데 참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경읍은 생매장을 당했다.





신씨가는 경읍의 처자식을 마을에서 쫒겨내고 그의 죽음은 문제삼지 않고 쉬쉬 하면서 지나갔다.



그리고 다른 명당 자리를 알아 봐서 그곳에 아버지의 시신을 매장 했다.



그런데 얼마후 그 마을에서는 가축과 사람들이 질환에 걸리는등 이상한 재앙이 발생하였다.



밤마다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길을 가다가 죽은 경읍이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고 혼절해 죽는 사람들도 생겨 났다.



가족들이 용하다는 점장이를 찾아가 물어보니



무당은 생매장 당한 원귀의 작희(作戱-난동을 부린다는 뜻으로 주로 귀신이 일으키는 현상을 일컫는데 쓰인 말)라고 하였다.



신씨 가족들은 경읍의 가족을 찾아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경읍의 한을 풀어 달라고 했다.





경읍의 아들이 푸닥거리를 하자 신씨 집안의 변괴는 사라 졌다.



그런데 10년도 안되서 신 씨의 본집은 망해버렸고, 후대에 와서 경읍의 자손이 번창 했는데,



서자 경읍이 생매장당한 그 흙구덩이가 원래 신씨의 묘자리 였던 명당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조선 정조 때 강원도 영월의 수곡리 라는 마을에서 해괴한 일이 벌어 졌다고 한다.



정약용이 쓴 흠흠신서(欽欽新書)중 <의율차례>에 기록을 보면 한 여인의 원한이 가져온 이상한 현상이 언급된다.



그 마을에서 살던 처녀가 무슨 이유인지 이웃 마을의 총각과 결혼을 앞두고 목을 매달고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혼인 하기가 싫어 자살 했다 생각하고 몹쓸 년이라고 하며 마을의 뒷산 중턱에 대충 묻었다.



그런데 그후로 이제까지 별로 탈이 없던 마을에 재앙들이 생겨 났다.



그녀의 무덤가가 있는 중턱을 지난 행인들이 몇몇이 시름 시름 앓더니 두명이 죽는 일이 발생 했고, 가축들이 밤새 울다가 죽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마을 곳곳의 담벼락에 피칠이 되있기도 했고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있기도 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중 여인의 곡소리를 들었다며 공포에 떨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자꾸 생기자 마을굿을 했는데 굿을 하던 무당이 피를 토하며 죽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이 얘기를 들은 영월의 군수는 고심 끝에 상소문을 올렸다고 한다.



이일은 정조에게도 들어 갔고, 정조는 정약용에게 부탁해 마을 일을 조사하게 했다.



정약용은 마을의 사람들에게 그 처녀에 대해 알아 보고 시체가 묻힌 곳을 파냈는데 처녀의 시신은 썩지 않았다고 한다.



정약용이 시신을 조사해 본 결과 자살이 아닌 타살로 들어 났고



시신에 남은 상처와 처녀와 혼인 하기로 한 이웃 남자의 집을 조사한 결과



그녀의 정혼자가 그녀와 결혼이 하기 싫어 사람을 시켜 그녀를 죽인 거라고 밝혀 졌다.



사건 전말이 드러나자 마을에서의 변괘는 없어졌고 정조는 그녀을 위한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전 세계적으로 16~17세기는 기상 이변이 잘 일어나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나는 때였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라 조선조 광해군 1년(1609년)에 충청도 연산 땅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흙비가 심하 게 내렸으며,



그해 봄은 아주 극심한 가뭄이 있었다.



무려 3년간이나 가물었다고 하니 당시 농업에만 집중되 있던 우리나라의 환경상 날 살림은 점점 어려워 졌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굶어죽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무렵 그 때 가평군 북면 백둔리어느 마을에 어린 딸아이를 하나 둔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세식구 모두 굶기 일수 였지만 불을 때서 끓여 먹을 알곡은 하나도 없었다.



남편이 산에 가서 풀뿌리며 칡뿌리 그리고 산열매 같은 것을 따오고 캐오는 것을 먹었지만



그것마저 사람들이 따가기 때문에 입에 넣을 수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부인은 아이를 가져 이제 출산할 달이 되었지만 워낙 먹지를 못해 아이를 밴건지 안밴 건지도 모를 정도로 배는 조금 불룩했다.



남편은 출산할 때가 되었으나 여기는 시어머니도 안 계시고 하니



친정에 가서 아기틀 낳는 것이 좋겠다고 부인에게 제안을 했고 부인은 그러기로 마음먹고 친정에 갈 채비를 차렸다.



어린 딸이 따라 가겠다고 나섰지만 부인은 기운이 없으니 딸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친정 집에 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여야만 했기 때문이였다.



부인은 맥없는 발걸음을 한 발자욱씩 옮겨서 겨우 고개 마루에 올랐다.



며칠간 풀뿌리로 겨우 연명 했으니 힘도 없는데다 아이를 가졌으니 고개까지 오르는 것이 너무 힘들어 나무 그늘에 앉아 쉬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 했다.



부인은 친정 집까지는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일어 서려 했지만 배가 점점 더 아파와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프고 힘겨웠 지만 온 힘을 다해 아이를 낳았지만 정신을 잃었다.



잠시후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서 옆을 보니 싱싱하고 큼직한 고깃 덩어리가 있는 것였다.



허기가 진 부인은 정신없이 고기를 뜯어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고 아기를 낳은 것이 생각나



사내아인지 계집아인지 보려고 옆을 보니 아기는 온데 간데 없고 핏자국만 있었다.



부인은 자신이 먹고 있던 고기를 봤는데 그것은 아기의 뜯겨진 시체 였던 것이다.



그때서야 자기가 낳은 아기를 잡아먹은 줄 안 부인은 오열하며 쓰러졌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인과 반쯤 뜯긴 아이의 시신을 보고 기겁을 했으며



이 얘기를 들은 남편은 딸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이후 부인이 죽은 고개를 애잡이 고개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경상북도 문경에는 월방산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 중턱에는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그 계곡 앞엔 산신을 모시고 있는 산신당이 있다.



이 사당 주위에는 돌로 담장을 쌓았으며 그 둘레에는 노송으로 둘러 쌓았고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데



이 산신당은 마을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으로 오래도록 전해 오고 있다.





조선이 막 세워질 때의 일로 마을에 살던 처녀가 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그만 계곡에서 미끄려져서 온 몸에 많은 상처를 입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처녀를 정신 차리게 한 뒤



계곡의 바위 틈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있을 터이니 그 물을 먹고 상처에 바르면 곧 나을 것이다 라고 일러 주고는 사라졌다.



그 여인은 꿈속의 노인이 시키는데로 그 물을 마시고 몸에 발랐더니 상처는 씻은 듯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에 돌아온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산신령이 처녀를 도와준 거라고 생각하고



계곡에 산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고 정월 대보름이면 산신을 모시는 제사를 했다.



그리고 이 병자들이 계곡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 하는등 마을에선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곳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너무 마시면 물의 효력이 없어질까봐 정해진 때에만 환자들 위주로 마시게 하고는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했다.





그런데 일제 시대 때 이 마을에 들어온 일본인이 미신을 믿는다고 비웃으며



사당을 불태우고 또 물이 나오는 바위 틈을 마구 파헤쳐 버렸다.



그런데 그날부터 일본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3일만에 그 사내는 죽고 말았다.



그후부터 마을의 우물들은 전부 흙탕물로 변해버렸고 밤이면 가축이 이유 없이 죽는 일이 발생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의논해서 정월 대보름날 쌀을 모아 제사를 드려 산신령의 분노를 달랬다고 한다.



다행히 산신의 저주는 금세 풀린듯 이상한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약수는 다시는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에도 일본인이 들어오면 비명 횡사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조선 전기의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인 <용재총화-(?齋叢話) >에는 여러 기록이 나오는데



그중엔 귀신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선현의 외숙 안부윤은 젊었을 때 날이 어둑해질 무렵 말을 타고 어린 종 한 명을 데리고는 서원 별장으로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별장까지 10리쯤 남았을 때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은 질흑같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만 방향을 읽고 말았다.



둘은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동쪽을 바라보니 횃불이 보였다.



떠들썩하게 사람들 소리도 들리는걸 봐서는 사냥하는 듯했는데 횟불은 점점 가까워졌고 좌우를 삥 두른 횃불의 길이가 5리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웬걸,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발자국과 웃음 소리만 들려 왔다.



그 횃불은 다름아닌 도깨비불귀화(鬼火) 였던 것이다.



놀란 안부윤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정신없이 말에 채찍질만 해댔다.



둘은 그렇게 7리나 8리쯤 앞으로 달려갔다.



도깨비불은 잠시 그들을 쫓아오는듯 싶더니 서서히 흩어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잠시 도망을 치다보니 방향도 잃었고 하늘이 흐린지 조금씩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길은 갈수록 험해졌지만 그래도 도깨비가 쫓아오지 않는것 같아 마음은 진정되었다.



그런데 다시 한 고개를 넘어 산기슭을 돌아 내려가는데



조금 전에 보았던 도깨비불이 이제는 겹겹이 나타나 안부윤의 앞길을 막아버리는 것였다.



혼이 나간듯 안부윤은 칼을 뽑아 들고는 소리치며 앞으로 돌진했다.





그 순간 불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면서 우거진 풀숲으로 사라졌는데, 돌진하던 안부윤은 나무에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순간 안부윤의 귀에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는 도깨비불을 귀화(鬼火)로 쓰고 있다.



이는 도깨비라는 존재를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중국의 귀를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조선의 기록서에도 공통으로 표기 된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전라북도 임실 고을의 오원천이 흐르는 어귀에 있는 오원이란 마을에는 귀신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는 둑이 있다.



이 둑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은 애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조 임실 고을의 좌수(마을 일을 다스리는 직위)를 하던 마씨성을 가진 부원군이 있었는데,



그가 아직도 신분이 그리 높지 못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가 저녁에 들에 나가서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다섯 알의 둥근 돌을 주웠다.



마좌수는 돌이 예뻐서 집으로 가져 왔는데 밤이 되자 돌이 영롱하게 빛을 내는 것이었다.



그는 보통 물건이 아니라 생각하고는 이 구술을 궤짝안에 넣어 잘 보관해 놓았다.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지난후 잠을 자고 있던 마좌수는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 소리는 마당에서 나고 있었는데 임좌수는 소리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임좌수가 나가자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산사람이 아닌 귀신들였다.



마좌수는 순간 겁이 났으나 사대부의 쳬면을 지키기 위해 헛 기침을 하면서 '웬놈들이냐'며 소리 쳤다.



그러자 귀신중 한 위(位-귀신을 하나씩 세는 단위로 보통 귀신은 위,악귀는 지위로 셉니다)가 나서더니 애걸복걸 하며 말했다.





"저희가 귀왕부(鬼王符)를 잃었는데 어른께서 그것을 갖고 계시니 원컨대 빨리 이를 돌려 주소서."





말이 끝나자 여러 귀신들이 저마다 빌며 사정을 하는 것이 였다.



영문을 모르는 마좌수는, "아니 귀왕부라니? 그게 도대체 뭔고." 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께서 며칠전에 얻으신 기이한 돌이 바로 귀왕부이옵니다."





도깨비들이 이같이 말하면서 내어주기를 간청했으나 마좌수는 그 구술이 아까워서 선뜻 내어주기가 싫어서 거절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귀신들이 흥정을 붙였다.





"어른께서 만일 원하시는 게 있으면 뭣이나 받들 것이니 제발 귀왕부만은 되돌려 주십시오."





순간 마좌수는 매번 장마가 오면 마을의 오원천이 범람하여 마을 사람들이 고생하는걸 알고 이런 제안을 했다.





"너희가 만일 하룻밤 새에 오원천에 돌로 만든 둑을 쌓으면 내가 귀왕분지 뭔지를 돌려주마."





고 귀신들의 제의에 응했다.



귀신들이 응락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고 내일 까지 둑을 만들기로한 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하고 그들은 물러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정말로 오원천에 돌들을 쌓은 기나긴 둑이 번듯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마을에선 갑자기 세워진 둑에 의해 소란이 일어났고 마좌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간밤의 일을 얘기했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이 고마워서 마좌수에게 구술을 돌려주면서 원하는게 없는지 물어 보라고 하였다.



밤이 되자 귀신들은 다시 마좌수에게로 몰려들었고 마좌수는 그들에게 귀왕부를 약속대로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뭐 원하는게 없는지 물었으나 귀신들은 이제 저승으로 가야하니



마지막으로 이승 음식이나 먹게 콩 한 말만 삶아 달라고 하는 것이 였다.



마좌수는 곧 하인을 시켜 오랑콩 한 말을 삶아서 잔치를 베풀어 그들의 노고에 보답코자 하였다.



귀신들은 한 위에 콩을 한 알씩만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맨 끝에 앉은 한 마리의 귀신만이 콩을 얻어 먹질 못했다.



귀신의 수에 비해 한 알이 꼭 모자랐던 것이었다.



그 귀신은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렸다.



그 귀신은 심술을 부려 자기들이 놓은 둑 가운데서 두석자 가량이나 되게 돌들을 뽑아서 둑에 구멍이 나게 망가뜨려버렸다.



마좌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을 주어다가 빈 틈을 막았다.



이 둑은 해마다 장마를 겪었지만 사백년을 넘게 언제나 새로 쌓은 듯이 멀쩡하였다고 한다.



다만 콩을 못 먹은 귀신이 헐었던 부분만은 마좌수가 메웠는데도 해마다 장마 때면 무너지곤 하였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공포자료] 조선시대 기묘한 이야기.





선조 9년 6월 26일, 선조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조를 시켜서 공사로 삼아라."





결국 현상금을 걸어 신고하고 체포하도록 특명이 내려졌다.



당시 사람의 고기와 간담이 창질(瘡疾)을 치료하는 특효약이라고 해서 비싼 값으로 팔리는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힘없는 아이들이 유괴되어 살해당하는 것은 물론,



어른이라고 해도 혼자서 길을 걷노라면 잡혀서 배가 갈리 고 쓸개가 빼내어졌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니, 인적이 드문 산의 골짜기에는



나무에 묶인 채 배가 갈려 죽은 사람들이 줄줄이 널려 있어,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섰는데 나무마다 배가 갈린 시체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면, 어느 나무꾼이 그걸 보고 싶어 산에 들어갔을까.



행여나 그런 무도한 일당들과 마주친다면 이번에 배가 갈리는 것은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라에서 직접 나서서 사람 배를 갈라 간과 쓸개를 빼어가는 이들에게 현상금을 내걸었던 것이다.



아직 임진왜란이 시작되지도 않은, 굳이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평화로운 조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사서에는 창질(瘡疾), 나질(癩疾) 등으로 기록된 질병은 문둥병,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도 한다.



나병은 피부가 썩어 들어가고 신체 일부가 없어지는 끔찍한 증세 때문에 인간의 역사상 혐오의 대상으로 다뤄졌다.



이스라엘의 성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진시황 시대의 법률문서에서도 나환자들을 격리시키는 규정이 나와 있을 정도로 오래된 질병이다.



한국에서도 소록도가 생기기 전까지, 나환자들은 이리저리 떠돌면서 걸식하고, 온갖 악평을 들으면서 감금되었고,



돌팔매질도 당했으며 때로 죽임까지 당하는 가혹한 대우를 받아왔다.



현대의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나병은 전염이 되지 않는 병이고 도중에 치유되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는 물론 아직까지도 이런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 대신 오래전 속설에서는, 어린아이의 간이 나병의 특효약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있었다.



당연히 나환자들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고,



그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는 소문은 심심치 않게 전하고 있다.





명종 19년에는 상주(尙州)에서 정은춘(鄭銀春)이라는 사람이



같은 동네의 일고여덟 살 먹은 아이를 꾀어 산에 들어가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 살을 구워먹은 일이 벌어졌다.



기록에는 병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정은춘은 아마 나병이나 기타 난치병 환자였을 것이다.



명종은 이 사건에 크게 놀라 자세히 취조하도록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런데 사람을 약으로 쓰는 방법이 완전히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유행했다.





명종 21년에는 좀 더 참혹한 현실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서울에는 사람을 죽여서 쓸개를 빼내어 가는 일이 많이 있었고, 이로써 처벌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방종한 생활 덕에 창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떤 의관이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면 병이 낫는다고 말하자 사람을 죽여 배 가르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도성 내의 동활인서(東活人署), 보제원(普濟院), 종루(鍾樓) 근처에는 걸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종루는 지금의 종로이고, 나머지 장소들은 모두 걸인이나 부랑자, 병자들에게 먹을 것과 약을 나눠주는 구제기관이었다.



하지만 약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이들 걸인들을 하나 둘 잡아가 쓸개를 빼내 죽였고,



불과 4~5년 만에 길거리에는 걸인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걸인들은 아무 기댈 곳 없어 이런 곳에 찾아온 이들이었으니 하나나 둘쯤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걸인이 모두 사라지자, 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손을 뻗치게 되어



당시 사람들 중에서 아이를 잃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간을 빼내어 갔을까?



이는 장기 중에서도 간, 그리고 정확히는 쓸개가 가장 약효가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웅담을 보면 알 수 있듯, 동물의 쓸개는 가장 귀중한 약재 중 하나였다.



조선팔도 곳곳의 특산물을 기재한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곰은 물론이요, 소, 돼지, 잉어, 담비, 고슴도치의 쓸개들이 주요 특산물로 많이 기재되어 있다.



동물의 쓸개도 좋은 약일진대, 사람은 어떠할까. 그런 믿음에서 나온 게 아닐까.





세조 시대 때는 신숙주가 함길도에서 올린 장계에는 사람 쓸개를 약으로 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변경의 여진족 올적합(兀狄哈)을 피해 도망쳐온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여진족 중 화살 맞은 사람이 많자 중국인들의 쓸개를 빼내 독을 치료하려고 하여 도망쳤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장기가 꼭 나병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약재로도 쓰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사람 쓸개를 빼내어 중국에 팔아 돈을 챙긴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꽤나 오래된 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선조 시대 때에는 이런 소문이 너무도 크게 번졌다.



평소라면 그냥 말썽을 피우고 지나치게 노는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했을 법한 이야기가,



이제는 도성 안을 떨게 만들고 민심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왕이 직접 사람 간을 빼어가는 범인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정도가 더 심각했던 것은 선조 40년 5월이었다.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간담을 빼어간다는 소문이 번졌고,



당시 서울에서는 사람이 혼자서 다니지 못하고 무리를 지으며 다녀야 했다.



게다가 이런 소문은 전국적으로 번져서 아녀자들은 물론 선비들까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숨어 다녔다.



사람들은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농부들은 농사를 그만두었다.



한마디로 온 백성들이 온통 두려움에 떨었다.



과연 사람의 간담이 약효가 있었는지, 그것을 빼가는 조직이 있었는지 분명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는 살인자들을 잡으면 큰 상을 주겠다는 방을 걸었다.



심지어 사간원에서는 사람을 죽여 간을 빼내어 가는 범인들을 열심히 잡지 않는다는 이유로 좌, 우 포도대장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기도 했다.



포도대장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 하겠지만,



사안은 위중한데 쉽게 해결되지 않으니 사람들의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선조 시대 때에 이 같은 식인의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겁에 질려 사회가 불안해지기까지 했을까.



사람을 죽여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나 어려울 때나 심심찮게 존재했다.



그런데 이것이 나라를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평범한 사실은 아니다.



여기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사람의 쓸개를 빼어가는 소문은 반드시 가뭄, 그것도 전국이 타 들어갈 만큼 심각한 가뭄과 맞물려서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소문이 돌았던 선조 10년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등 법석을 벌였고,



같은 소문이 돌았던 선조 40년에는 훨씬 더 정도가 심해서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4월부터 날씨가 가물었지만, 나라는 느직느직 준비를 해서 5월 초에야 겨우 기우제를 치렀다.



기우제를 벌인다고 해서 반드시 비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기우제라도 벌이는 것과,



그저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어차피 하늘이란 현대 과학의 힘으로도 정확한 일기예보를 할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이다.



하지만 불행한 일이 거듭되고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는데, 아무 희망조차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불안해지게된다.





- 원본출전 조선기담(이한)







[공포자료] 조선시대 기묘한 이야기 (왕이야기..?)









옛날 왕들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사연이 있는 나무에 벼슬을 주는 풍습이 있었다.



중국 진시황부터 시작된 이 풍습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으로



관직이 붙여진 나무는 실제로 관직에도 호칭이 붙여지고 낮은 직급의 사람들은 나무를 보고 인사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중엔 임금과 나무의 운이 함께 하는 기묘한 사연도 있다.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은 유년 시절은 강희맹(1424-1493)에서 지냈다.



강희맹의 집에는 늙은 소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는데 어린 연산군은 나무 밑에서 놀거나 나무 위로 올라가 놀고는 하였다.



어느날 나무 위로 올라간 연산군이 밑으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나뭇 가지에 걸려 무사할 수 있었다.



후에 임금이 된 연산군은 이 소나무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연산군이 폭정 끝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가 강화도로 귀향가 죽었는데



연산군이 죽은 날부터 강희맹의 집에 있던 정 3품 소나무는 점점 말라가더니 3년내에 말라 죽었다.





남한산성 동문 밖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주필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살피다 잠시 쉬어 가면서 이름 붙인 바위 옆에는 언덕 위에는 정조에게 벼슬을 받은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원래 귀목이라 불렸는데 남자에게 버림 받은 한 기생이 목을 매달아 죽은뒤 노래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렸다.



이에 인근의 사람들이 공포에 떨자 남한산성을 살피던 정조가 이 얘기를 들고는



친히 나무를 찾아가 위로하며 벼슬을 상징하는 옥관자(玉貫子)를 걸어주고 떠나자 더이상 통곡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조가 죽은 후 이 나무는 3일간 통곡소리를 내며 몸서리를 치듯 떨다가 스스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 고종이 어릴 때 올라가서 놀았다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임금이 된 후 고종은 어릴 때를 생각하여 이 소나무에 종2품 벼슬을 상징하는 금관자(金貫子)를 달아주었다.



이 소나무 역시 고종이 죽자 갑자기 벼락을 맞아 뿌리째 날라가 버렸다고 한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경기도 광주 일장산 중턱의 남한산성에는 숭열전이라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과 충정공(忠正公)월봉 이서를(月峰 李曙.1580~1637)를 제사 지내는 제전이 있다.



이 제전이 세워진데는 사연이 있는데 조선 16대 인조왕이 병자호란이 일어 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청나라에 항전을 했다.



그러던 중 인조가 잠이 들었을 때 간신 김자점이 보낸 측근에게 암살을 당할뻔 했는데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인조를 깨워 그는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그후 인조는 자신을 구해준 보답으로 인조 14년(1636년) 온조왕을 모시는 온조왕사(溫祖王祠)를 건립하기 시작 했다.



(1638년에 완공 되고 정조 19년(1795) 숭렬전으로 이름 바뀜)





그러던 인조왕은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온조왕이 찾아 와서 말하기를 이미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나의 묘를 세워 주신 것은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오.



하지만 이 제전에 자기 한 사람이 있는 것은 좀 적적하니



청컨대, 당신의 신하중 호조판서 [이서]를 나에게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서는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을 구축하고 청나라 군대를 맞서 싸운 공신였지만 몸이 안 좋아 칩거 하고 있었다.



인조는 이서에게 대답을 구하겠다고 묻자 온조왕은 3일뒤에 오겠다면 조용히 사라졌다.



인조는 다음날 이서를 불러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이서는 "어차피 언제가는 죽을 몸, 전하의 명에 따르겠사옵나이다"라고 했다.



3일뒤 온조왕이 꿈에 나타나자 인조는 허락을 했고, 그 이튿날 잠에서 깬 인조는 이서가 어젯밤 서거하였다는 부고를 접하였다.



인조는 이서를 온조왕이 데리고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이서의 시호를 충정공(忠正公) 이라 짓고 온조왕의 제전에 이서를 함께 묻게 했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조선 제19대 왕 숙종 때의 (재위 1674∼1720)의 일로



평소 건강하던 숙종은 갑자기 신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높은 열에 시달렸고 점차 위중한 상태에 놓였다.



신하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약을 바쳤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다.



이름 높은 의원들이 진맥을 해보니 역질로 판명이 났지만 그들이 아무리 약을 써봐도 효력은커녕 병세가 점점 더해 갔다.



수많은 명의가 병을 고치려고 했지만 숙종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숙종의 몸엔 고름이 나오며 악취가 풍겼다.



그리고 눈앞에 귀신이 있다고 헛소리를 하는등 병세는 더욱더 심해져 갔다.





숙종의 눈엔 역질신명을 비롯한 여러 잡귀들이 몰려와 그의 목을 조르고 칼로 몸을 찌르는등 괴롭혔기 때문에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며칠을 두고 고통 속에 지내던 어느 날, 숙종은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전날까지도 날뛰던 잡귀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문 앞에 어떤 장수의 영이 철모와 갑옷을 입은 채 칼을 빼어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숙종이 비몽사몽간에 장군의 이름을 부르자 장군의 모습을 한 영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너는 누구냐?"





"요동백 김응하(金應河, 1580~1619)입니다.



소신은 민 왕후님(인현황후)이 전하를 차도를 빌며 기도를 하자 그 정성에 전하를 보호하기 위해 왔나이다.



그리하여 잡귀들이 들끓는 것을 보고 놈들이 못 들어오게끔 막고 있습니다."





요동백 김응하는 조선 선조 때 출생하여 광해군 때까지 나라의 일을 하던 장수였다.



그는 강직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당시 만주 땅에서 일어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하자,



명에서는 1618년 건주위(建州衛)를 치려고 명(明)나라에서 조선에 구원을 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참전하였다.



싸움은 점차 불리해졌고 명나라 유정(劉綎)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차령(富車嶺)에서 패하여 자결하자,



김응하 장군은 3천 명의 휘하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김응하 장군의 활약과 용맹함을 명나라의 황제도 인정하여 그에게 요동백(遼東伯-요동의 주인)이라는호칭을 내릴 정도 였다.







그가 생전에 역병에 걸려 위중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그의 벗이 약을 가지고 김 장군의 병상에 이르니, 장군은 열에 이끌려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벗은 훌륭한 장군이 병으로 헛되이 죽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대가 일찍이 나라 일을 하다가 싸움터에서 죽지 못하고 병으로 죽게 되니 누가 그대를 알아주겠는가!"





이 말을 들은 장군은 별안간 눈을 번쩍 부릅뜨고 소리질렀다.





"싸움터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로다. 어서 약을 가져오라!"





김 장군은 그 자리에서 약을 세 사발이나 벌컥벌컥 마시고는 이내 쾌차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합다.



생전에 역병을 물리친 바 있는 김 장군이 였기에 죽어서도 역귀를 물리치는 수호령이 되었나 보다.



그 후부터 숙종이 잠들면 어느 때나 김응하 장군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떤 잡귀도 침범하지를 못하였고,숙종은 침식이 편해졌고 병세도 차츰 차도가 있었다.



숙종은 오래지 않아 쾌차하였고



숙종은 그 보답으로 김응하 장군을 모신 충렬사에 사람을 보내어 정성껏 제사를 드리도록 하며 충별비를 세워 줬다고 한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공포자료] 조선시대 기묘한 이야기







1500년대 중반 무렵, 두 선비가 다툰 일 하나가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다.



성균관을 드나들며 공부하던 김윤량(金允良)과 김복창(金福昌)이 싸운 일인데,



김윤량이 볼품 없이 먹을 것만 주섬주섬 챙기는 사람이라고 비웃은 김복창이



김윤량을 심하게 조롱하기 위해 찬(贊)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지어서 김윤량을 놀린 것이 발단이었다.





김복창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본 김윤량은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기 시작했고,



마침내 김윤량은 자신이 아는 점술에 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김복창은 일찍 죽을 것이다"라고 악담을 하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김복창은 판단력을 잃고 격노하여, 불붙은 숯덩이를 찍어 들고 김윤량의 입 속에 짓이겨 넣어 버린다.



타오르는 뜨거운 숯덩이가 입안에 들어온 김윤량은 괴로워 날뛰었다.





좀 더 높은 명망을 떨친 선비들의 또다른 싸움 이야기로는 이런 것도 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은 자신의 적인 김자점(金自點)과 서로 정치판에서 세력 다툼을 치열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자점은 심기원의 헛점을 놓치지 않았고, 마침내 심기원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형벌을 받게 되었다.



심기원은 형벌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붙들려서 나무로 만든 형틀 위에 묶이게 되었다.



심기원은 나무로 만든 매로 두들겨 맞은 뒤에 귀양을 가거나, 아니면 참수형이나 교수형을 당할 것을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관리들은 형틀 위에 심기원을 단단히 묶어 놓더니 한쪽 다리를 커다란 칼로 내려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심기원은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게 무슨 형벌이냐?"고 물었고,



그러자 형벌을 집행하려는 사람은 "김자점 상공께서 분부한 형벌이다."고 대답했다.



곧 심기원은 다리 한 쪽이 잘려나갔고, 차례대로 나머지 다리와 두 팔도 잘려 나갔다.





심기원은 사지가 모두 잘려 나간 상태에서 피를 뿌리면서 나뒹굴게 되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몸뚱이만 남아 신음하도록 한 뒤에, 정신을 잃을 때 즈음하여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 그 형벌의 끝이었다.



심기원은 형벌을 받으면서, 형을 집행하는 칼을 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대신해서 김자점에게 전해 주시오. 당신도 나와 같이 될 거라고."





심기원이 잔혹한 형벌의 희생양으로 이렇게 죽은지 7년후.



정말로 공교롭게도 김자점 역시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같은 방식으로 처형되게 되었다.



이후, 이 형벌은 폐지 되었다.



- 원본출전 청성잡기







[공포자료] 조선시대 손가락 절단 사건





조선시대 아동을 대상으로 발생한 범죄 중 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종류가 바로 '손가락 절단 사건'입니다.



납치된 아이가 손가락이 잘린 채 발견되는 일이 간혹 발생했는데,



범인들은 주로 걸인이나 관아에서 시체 처리를 담당하는 오작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이의 손가락을 '약'으로 비싸게 팔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는군요.





중종 27년 3월 8일에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반송방(盤松坊)에 있는 고(故) 관찰사 유세침(柳世琛) 집의 10여 세된 아이종을 어떤 사람이 산속으로 유인하여 두 손가락을 끊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온몸을 찔러 상처를 입혀 거의 죽게 되었다가 요행히 살아났습니다." (17집 364 면)





실록에 따르면,



당시 주민들 사이에는 중한 병을 앓는 이에게 살아있는 사람의 간담(肝膽)이나 손가락을 먹이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걸인이나 오작인이 뇌물을 받고, 주로 천민이나 종 신분의 아이들을 납치해 손가락을 자르거나



극단적인 경우 살해해 쓸개를 빼어가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지요.



중종은 이같은 소식에 놀라 형조 당상관과 포도대장에게 비밀리에 범인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립니다.







하지만,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산 사람의 손가락을 명약으로 여기는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피해자인 아이들이 대부분 천한 신분이었던지라 범죄는 암암리에 계속 이어진 듯 합니다.



4년 뒤인 명종 1년 11월 25일, 비슷한 사건이 다시 한번 실록에 등장합니다.



한성부(漢城府)가 아뢰기를,



“전 영춘 현감(永春縣監) 이성(李誠)의 계집종이 3살된 아이를 이달 9일 진시(辰時)에 잃어버렸다가



미시(未時)에 남학동(南學洞) 소나무 밑에서 찾았는데, 오른손 손가락 두 개가 칼에 잘려졌다 합니다."(19 집 468 면)





이번에도 여종의 어린 아이가 납치되어 손가락을 잘린 사건이었습니다.



한성부는 "뇌물을 받고 아이들을 유인해 쓸개를 빼가고 손가락을 자르는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마땅히 참수형에 처하고



신고하는 자는 상을 주어야 한다"고 왕에게 요청합니다.



명종은 "매우 경악할 일이다. 형조에서 승전을 받들어 기필코 체포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두 사건 모두, 결과적으로 범인이 잡혔는지, 이후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추적이 어려워 범인을 잡기 무척 힘든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조선시대 효자,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내려졌던 정려문





아무리 왕이 엄벌을 명하고 형조에서 체포 의지를 다진다해도, 손가락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뿌리뽑을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청해서 자르기만 하면 손가락 절단이 큰 칭찬이 되는 당시 분위기에 있었습니다.



세종 21년 4월3일, 예조에서 왕에게 다음과 같이 청합니다.





"평안도 가산군(嘉山君) 사람 금음도(今音都)가 악질(惡疾)에 걸려 앓았는데,



그 아들 원진(元進)이 나이 아홉 살로서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서 치료하였삽고,



또 같은 고을 사람 김을송(金乙松)도 급질을 앓았는데,



그 아들 귀시(貴時)가 역시 아홉살 된 어린아이로서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치료하였사오니,



청하건대, 모두 정문을 세우고 복호(復戶)하여 주게 하옵소서." (4 집 199 면)





당시 효자로 인정받아 정려문과 복호를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손가락 잘라 부모에게 먹이기'였습니다.



실록에는 위의 원진이나 귀사와 같이 10살도 채 안된 어린아이가 아픈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병을 낫게 하였다는



'효담'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을 잘라 뼈와 살을 태워 가루를 낸 다음 병든 부모나 형제에게 먹였다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였다는 등이며 이같은 효담이 널리 퍼지면 나라에서 상을 내렸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사극을 통해 많이 본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10살도 안 된 아이가 스스로 손가락을 자를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죽을 듯이 앓던 부모가 제 자식의 살을 먹었다고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당시 효자로 인정받으면 정려문이 세워지고 복호를 받을 뿐 아니라,



나라에서 그 일가에게 세금과 요역 부담을 줄여주고 재물을 내렸다고 합니다.



수많은 '손가락 절단' 효자,효녀들 중 일부는 가난한 집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수 밖에 없었을 수도 있겠지요.









[공포자료] 조선시대 기묘한 이야기 (사디스트..)







<이야기 하나>





어느 문관 하나가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었다. (......중략......)



감사는 또 6월 보름에 가까운 이웃의 수령과 옆 고을의 기생들을 불러서 크게 유두회(流頭會)를 열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온백원(溫白元)을 소주에 타서 기생 중에 살찌고 튼튼한 자 10여 명을 골라



모두 여러 그릇을 먹이는데 먹지 않는 자는 억지로 먹였다.



그리고 한 방 속에 몰아 넣고 그 문을 굳게 잠갔다.



이때는 한창 몹시 무더운 때로서 더운 기운이 찌는 듯 답답하고 땀이 비오듯 흘렀다.



조금 있더니 모든 기생들의 뱃속에서는 천둥 소리가 나면서 오장이 뒤집히는 듯하더니 일시에 설사가 났다.



기생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급히 옷을 벗어서 혹은 개켜서 등에 지기도 하고 혹은 말아서 머리에 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 벽을 의지하여 쪼그리고 앉아서 설사가 나오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피차에 급히 쏟느라고 좌우에서 설사 줄기가 서로 쏘아 더러운 물이 이리저리 흘러서 허리 밑까지 빠지게 되었다.



또 종일토록 빈 창자에서 쉬지 않고 설사를 하고 보니 기운이 점점 다해져서



서로 베고 똥 속에 누워서 원망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 나오고, 고약한 냄새는 방에 가득하여 사람이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때 감사는 수령과 함께 이것을 엿보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날이 저물어 비로소 내놓으니, 모두 똥이 몸에 묻고 발에 묻어서 모양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울 뿐이었다.



이것은 다만 그 감사의 희학(戱謔)에 있어 여사일 뿐이니, 그 밖의 것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正)이 일어나자 그 감사는 죄를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 둘>



1700년대 중반 홍인한(洪麟漢)은 전라도에 감사로 부임했다.



이무렵 홍인한은 해괴한 취미를 개발했는데, 그것은 기생들의 음악을 듣고 변태적인 방법으로 평을 하는 것이었다.



우선 홍인한은 모습이 아름답고 음악에 재주가 많은 기생을 찾아 다녔다.



마음에 드는 기생을 찾으면, 홍인한은 그 기생을 데려와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홍인한은 기생이 죄인에게 형벌을 가할 때 쓰는 형구들을 뜰 한쪽에 늘어 놓은 채로 노래하거나 악기를 다루게 했다.



홍인한은 유심히 음악을 듣고 기생의 모습을 보면서 음악이 끝날 때 까지 그 흥취를 즐겼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고 나면, 홍인한은 기생을 붙잡아 놓고, 음악에서 부족한 점과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지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잘못된 것 하나하나 마다 죄값을 매겨서 여러가지 매를 때리는 도구로 기생을 때린다.



기생은 몸을 다치게 되므로 괴로워하는데, 홍인한은 그것을 즐거워 한다.



그렇게 해서 음악의 여러가지 내용에 대해 다 이야기 하게 되면 기생은 피투성이가 되어 괴로워하게 되고,



홍인한은 자신이 좋아하는 기생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나면



그제서야 통쾌하다는 느낌을 느끼면서 껄껄거리며 웃고는 시원하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