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성리학의 탄생부터 시작해 봅니다.


유학은 춘추시대 탄생한 이래

한나라를 거치며 준종교 형태의 

중앙집권적 정치 수단으로

활용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를 정리한게 동중서란 인물입니다.





동중서의 유교사상을 간략히 정리하면


백성이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늘의 뜻인 천명에 순응하는 것이고

그로인해 천하가 태평해진다.


이게 어찌 설명되냐고요?

바로 충,효를 통해 이뤄집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익숙한

부모에게 하는 효와

국가에게 하는 충을

상호 연결 한


'충효사상'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죠.



우리가 흔히 유교를 이야기하면

공자, 맹자, 논어를 생각하기 쉬운데


유교 경전중에서 최초로 경"經"전이 된 책은

다름이 아닌 '효경'이란 책입니다.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 

그저 하나에 였던 증자는  

유학이 다시 부흥하는 과정에

증자의 제자들 세력이 급성장 하면서

공자의 다른 제자와 학파를 모두 꺽으며 

주류 정통으로 자리잡았고

스승 자"子"를 붙인 독보적인  

성인의 반열에 올르게 됩니다.


공자-증자-맹자로 이어지는

익숙한 유교의 계보가 이때 만들어졌죠.

그가 쓴 '효경'을 통해 우리가 접하는  

오늘날의 '유교'로 정립되었습니다


효경이 말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너를 낳아 준 부모에게 효도하듯

너를 돌봐 주는 군주에게 충성하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윤리입니다

삶으로 깨우치는 직관적인 가치죠


원래 공자는 효의 의미를

"부모가 너를 낳아주고 아기에서 걸을때 까지

최소 3년을 붙어서 보살펴 주었는데

부모님이 돌아 가신 후 우리도 부모 은혜를  

최소 3년은 생각해야 하지않겠냐" 라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의리라는

관점에서 가르쳤다면  


증자는 이를 절대적인 예법으로 만들어

부모님의 상은 무덤 옆에서 3년을 치뤄라

효는 가장 중요한 가치니 봉양과 제사는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다.

라고 좀 단순 무식하게 정리했습니다  


그 영향은 어마어마 했죠


진나라가 멸망한 후 들어선 한나라는

기존의 법치를 대신 할 이념으로

유학의 효경을 국교로 채택했습니다.


백성이 국가를 이해하고 복종하게 하는데

법가의 폭력과 형벌을 제외한다면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야 하는데

왜 황제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설명하는건

보통 매우 어렵죠


유학의 증자 일파가 효경을 통해

이를 해결한 것입니다.


효경은 인간의 가장 작은 사회 단위에서 시작해

궁극적으로 사회와 국가 전체에 모두 적용 가능한

가족에서 효를 통해 부모에게 복종하고

사회에서 예를 통해 어른에게 복종하고

국가에서 충을 통해 황제에게 복종하는


수직적 계급 구조를 본격적으로 정립한 경전입니다.


그건 지금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죠




충효忠孝사상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정리 한

유교의 이념이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이죠  


유교라는 종교의 신은

가족과 국가입니다.

공동체 그 자체인 것이죠.


서구인들은 쉽게 이해를 못하지만

동아시아 한,중,일 베트남 등

유교 문화권 국가들에게선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한 가치관입니다


서구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국민국가를 성립하고 만든

애국주의, 민족주의란 개념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세계로 전파되었지만

그것이 동아시아에 알려졌을 땐

그 어떤 문화권 보다 빠르고

또 매우 강력하게 흡수되었습니다


지난 2천년 간 삶으로 채득한 개념이거든요

때문에 유교문화권 국가들의 특징은

국민국가 근대화로의 전환이 가장 빠르고

자본주의 조직문화에 적응과 발전이

무섭도록 빠르단 특징이 있습니다.


일본-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중국,베트남

으로 이어지는 이들 국가의 급속한 산업화와

놀라운 경제성장을 논할 때

막스베버의 이론인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개념을 차용하여

유교 자본주의 개념을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돌아 이런 유교의 정립과 포교는

전반적인 사회 안정을 가져와

한 제국을 400년 간 이끌었지만

그런 번영도 결국 한 나라의 멸망과 함께

그 수명을 다하게 됩니다


후한 말에 이르게 되면

효-충으로 연결되는

국가 통치의 정점에 있는

그 황제라는 존재는 철저히 부패하여

한 영제와 같은 멍청한 황제가 나오고

그 권력을 휘두르는 십상시가 나오고

다시 권력을 휘두르는 권신들 (망탁조의)로

황제=천하라는 개념은 무너지죠


가장 기본이 되는 가족 공동체들은

극심한 기근과 전란으로 모두 붕괴하면서

사람들은 유랑민이란 이름으로 이탈해  

개인과 개인 단위로 흩어졌습니다


그런 난세의 시대에 접어들자

백성과 국가는 단절되면서

개인들이 각자 구원을 찾았고 

형이상학 종교가 공백을 대체를 하게 됩니다



인도에서 전래 된 불교가

이런 새로운 개념을 알렸습니다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한 종교가

동아시아에 등장한 것이죠

불교는 후한 초기 처음 전래되어

빠르게 퍼지면서

유교를 대체한 이념으로

민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유교에 그 위상을 내어 준

도가 학파 또 한 이 영향으로

빠르게 종교화 되었습니다


중국 토속민간 신앙을 흡수한

도교라는 종교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국은 도교를 사상으로 수용했고

종교로 받아 들인게 아니기에 

도교 사원인 도관이나 도사들이 없죠)


도교라는 종교가 알려진 것은


황건적의 난으로 유명한 태평도와

한중 지역에서 유행한 오두미도입니다.


태평도는 황건의 난이 평정되며 사라졌지만

 한중의 오두미도는 조조에 투항한 후  

지속적으로 전파 발전하였고

오늘날의 도교로 성장하였습니다.


모두 후한 시기에 일어난 현상으로

한나라의 멸망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사회적 종교적 영향력을

불교와 도교에 내어주게 됩니다.

 

유교는 형이상학적 철학의 부재라는

결정적 단점으로 인해

정치 예법이자 규율로 제한적 활용만 될 뿐 

사회의 백성들에게 윤리적 지침은

불교와 도교가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죠.



당나라 시기에 이르면

당나라 왕조가 국교로 우대한 도교와

민중들의 신앙으로 자리잡은 불교가 결합하여

불교사상에 도교적 깨달음의 개념을 넣은 

선불교禪佛敎가 탄생하게 됩니다.


2번에 걸친 불교경전의 수집이

완료가 되자 불교사상에 대해

완전히 이해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불교를 독자적으로

발전 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이죠

오늘날 한,중,일 현대 불교의 주류는

모두 이 시기 선불교를 이어받았습니다


이렇게 당나라 시기를 거치며

불교가 선불교로 거듭나며 그 영향력을 확대 할 때

동시대 함께 성장한 새로운 신분 계층이 있으니

사대부라는 학자,정치인들입니다


수나라 당나라는 동아시아 최초로

과거제도를 도입했고

그 목적은 위진남북조 시대 군림한

문벌귀족을 견제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할

신하들을 새로 양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충효를 중시한 유교를 학습한 이들을 뽑았고

당연히 시험 과목도 유교 경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유교 경전을 심도 있고 깊게 학습 한

새로운 신분 계층들이 대거 양성 됨에 따라

당나라 말기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이들 계층이 권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송나라 시기엔 완전한 정치 권력화 이룹니다 

시대부 계급이라 부릅니다.

 

사대부 계급은 본질은 유학자들입니다

오랜 기간 정치 예법으로 사용 된

유교를 보다 깊게 공부한 학자들이고

유교 생활을 문화적으로 수용한 계층이죠 

이 사대부라는 학자들을 통해

유교는 보다 발전하여

불교, 도교와 결합을 진행했으니

유교의 철학화 종교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이때가 송나라 시대죠

 

당시 불교는 시골의 촌부조차도 금강경의 구절을

줄줄이 암송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 초등 학생도 예수의 탄생인 성탄절을 알고

아담과 이브의 천지창조를 알듯 말이죠.)

 

사대부들은 유교의 철학화 과정을 하며

이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불교를 차용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과거 정치예법에 불과했던

유교의 이념을 불교식으로 설명을 시도한게


바로 성리학입니다.



송나라 때 발생한 유교의 형이상학화 경향운동이죠

이것을 완성한 건 남송 시기 주자 라는 인물이고

때문에 주자학이라고도 합니다.


성리학, 주자학, 신유학

모두 같은 말입니다.


전혀 감흥 없는 구호 춘추시대로 돌아가자

나와 상관 없는 정치 관료들의 예법에 불과 하던 

그런 죽은 사상이 된 유교를 되살리기 위해


유교를 종교화 시킨 것  

정확히는 선불교화를 시켰던 것이

바로 성리학인 것이죠 .


간단히 알수 있는게


불교에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라는 주장은

성리학에서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

로 그 용어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불교가 깨달음, 참선, 수행으로

부처가 되는 것을 가르친다면

성리학은 공부와 수신제가로

군자가 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은

어라? 하는 생각이 들죠

성리학을 숭배한 조선의 경우

불교를 철저히 탄압했죠.

이슬람-기독교, 카톡릭-개신교의 관계처럼

자기와 닮은 이들를 결코 용납 못하는 것이

'종교'의 일반적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제도화한 시스템이니 그 정치의 기본은


"그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

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이 춘추시대

성선설과 성악설 논쟁의 본면이고

유교는 이런 논쟁에서 성선설을 통해

정치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 학문입니다.

대표적인 맹자의 4단이 그러합니다.


그렇담 이런 성선설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며 나타난게 

즉 그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유교 이념을

보다 철학적 의미로 설명한게


의 상호작용을 논하며

장황한 썰을 풀었던 주자의 본성론이고


이=성, 기=정성리학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고담준론으로

어렵게 철학으로 말한 정치 이론이다

간단히 정리 하심 되죠

 

(고려에 성리학을 전파 한 안향)


고려시대 이런 성리학이 전파되었고

유학을 수용한 지식인 층에게 영향을 주며

고려말 사대부계급을 양성하게 됩니다.

 

정치의 철학화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 새로운 정치관을 종교적 신념의 수준으로

국가에 적용하고 구축하고자 하는

강렬한 경향을 내포합니다.


학문 또는 사상이 철학화 종교화 된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감을 잡아 보자면

현대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떠올리면 됩니다.

공산주의.나치즘, 와하비즘, 뉴라이트, 티파티 등등

실질적 효용이나 학문적 가치를 이미 넘어

일종의 신념의 영역이 되어 버린 것을 말하죠  


한반도의 성리학은 고려 말

강렬한 열망으로 국가를 개창하게 했고

이 성리학의 보급이 보편화 된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절대적 종교로

화석화 되기에 이릅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세계에선

성리학을 부정하면 사악한 학문이 되고

위정척사의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경제학, 사회학 이론이던 맑시즘이

철학화 종교화를 거치며

레닌주의 공산주의로 어찌 적용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학문은 특정한 이념화가 되는 순간

 더이상 학문의 대상이 아닌

절대적인 종교가 되어 버리죠 


고려말 성리학을 받아들인 사대부들은

이런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유교식의 본성론으로 인간을 이해했고

이것에 맞는 정치시스템을 구축하고자

국가를 개혁하려고 시도 합니다.

고려말 이런 혁명가 지식인 그룹을


신진사대부

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뉘어지는데


온건파는 정몽주로 대표되는 사림으로

고려왕조를 기본으로 개혁을 통해 적용해고

바꾸어 나가자는 입장이고

 

강경파는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관료층으로

불교국가인 고려왕조에서

이상을 펼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으니

고려를 무너뜨리고 신왕조를 개창해

뿌리부터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입장입니다.

 

유교의 이념과도 연계하는데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을 보듯 기본적으로

신왕조의 개창이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려의 군왕이 맹자의 지적처럼

무도한 혼군과 폭군이 아닌 이상

이를 거부하는 것은 또한 충효와도 연계한

신하의 도리를 넘어선 과한 행위가 됩니다.


유학 자체가 원래  국가의 개혁을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기 때문이죠

 

성리학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두고

사대부들이 갈라진 것입니다.  

 


강경파의 경우 조선을 개창하며

공신이 되어 훈구파가 되었고

 

온건파의 경우 고려를 옹호하며 은거하여

조선 정계진출을 거부하였기에 사림이 됩니다.  

때문에 조선 초기 세종 연간에도 사림에는 여전히

조선의 건국을 반역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향들도  

조선 건국 100년이 지나면서 고려의 재건이란게

사실상 이미 불가능한 시점에 이르게 되고

실제  조선의 통치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아 가며

사실상 신국가의 새로운 체제가 정립 되자

사대부 온건파 즉 사림도 100여 년의 은거를 풀고

조선정계에 진출 하고자 하는 시도를 합니다.

 


이미 연산군 조에 들어 서게 되면

소수의 공신들이 권력을 독식하는 것에 대한

왕권의 견제가 나타나게 되고

지방에서 오랜 기간 학문을 연구하며 

기본에 충실한 인재들이 다수가 양성되는 가운데

단지 정계 진출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형국에서


훈구파 - 사림파 간에

중앙 권력을 두고 갈등이 발생합니다.

이 대립 상황 속에서

훈구파들이 자신들 권력의 위협을

미연에 제거하고자 극단적으로 반응한게

바로 조선 초 사화(士禍)라는 것입니다.


이미 세조 연간부터 사림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며

연산-중종 연간에 이르러 사림의 진출이 본격화 되자

이들에 대한 극단적인 억제하고자 한것이

무오사화, 갑자사화,기묘사화로 일컬어지는

사림 숙청의 사화들입니다.


이유는 다양한 사연이 있지만

기본 골격은 조선 건국 100년을 거치며

사대부들이 본격적으로 성장해 기득권이 되었고

조선왕조라는 국가의 권력을 두고

쟁탈전을 시작했단 뜻 입니다.


중앙 권력을 양성하는 방식이

유교란 학문과 이념을 명분으로 한 이상

정치 시스템상에서 권력쟁탈의 도구는

학벌과 학문적 역량 투쟁이 됩니다.


과거제를 도입 한 국가의 특징이기도 한데

당나라의 경우에도 비슷한 패턴이 있었습니다.

위진남북조를 내려온 혈통 중심의 문벌귀족과

과거제를 통해 진출한 사대부간의 갈등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사대부가 문벌귀족을 대체했죠


유교 문명권의 중앙집권적 국가는

그 귀족과 기득권 지배층의 성격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혈통, 공적 중심의

봉건적인 귀족 권력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특이하게도 학문적 역량과 그 성과를 가진 

문인 학자 층이 정치 권력이 되는 구조입니다.

때문에  유교 문화를 가진 국가에서는

학벌이 곧 신분상승, 출세와 동급이란 개념이

거의 본능적으로 받아 들이는 익숙한 문화죠

또한 교육열이 종교적 수준으로 매우 강하고

인력 수준이 우수하단 장점이 있습니다

역사적 경험의 결과물입니다.  


조선이 유교를 국시로 건국 한 국가인 이상

심도있는 유교 학문과 이론을

철저하게 무장한 사림의 진출은

더이상 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게 되고


조선 명종 연간을 거치며

영향을 끼치던 문정왕후 섭정 기간이

끝나면서 훈구파는 숙청되고

사실상 조선 정치의 대세는 사림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15세기~16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천재가

가장 많이 등장한 시대였습니다

 


조선에서도 천재들이 등장했죠

천원 아재, 오천원 아재인

퇴계이왕, 율곡 이이입니다


이황은 에도시대

일본 성리학의 성립에 영향을 준

천재 사상가이고


이이는 9번 장원급제했다 하여

'구도장원공'이란 별칭이 있죠

23살에 쓴 '천도책' 이란

어마어마한 시험 답안지가

지금도 전해집니다

내용은 어차피 봐도 우린 몰라요.


이 같은 천재적인 유학자의 등장은

성리학을 보다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영남학파로 상징되는(영남좌도 학파) 이황의 경우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기본 골격으로

 그 역시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며

주리론으로 발전시킨 사상가입니다.


사실 성리학의 내용은 복잡한

형이상학 수사가 많아서

바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는 오늘 날 수능공부를 하며

머리가 뽀개지는 우리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때문에 이황은 성학십도라는 그림 책을

청년시절 평범한 군주인 선조를 위해

보고 좀 제발 배우라는 뜻에서 써줬고

성리학을 친절히 그림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그 성학십도 조차 

봐도 봐도 여전히 이해 못 하죠

그냥 그런게 있단 정도만 알면 됩니다


대신 좀 더 간단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실 일상에서도 쉽게 사용하는

용어와 단어이기도 하죠


"저 사람은 본성은 착한데 기질이 나빠서 문제야"

"저 사람의 기질이 저러하니 ㅉㅉ "


이런 무심코 쓰는 용어가
성리학이 일상화된 흔적입니다.

 

는 즉 성으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는 즉 정으로 본성을 감싸고 있는 기질을 의미합니다.


가 인간의 본성으로

 불변의 성질이라 한다면


는 이것을 감싸고 외부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성향이란 말이죠.


맹자의 4단

측인지심(위험한 아기를 구하고자 하는 인의 마음)
시비지심(틀린 것과 옳음을 구분하고자 하는 마음)
수오지심(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이 것들은 어떤 교육과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영역입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정상인인 이상

따로 교육하지 않아도
인간이 때문에 가지는 품성이고


맹자는 이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라 주장했습니다.

4단이 바로 의미하는게

"이"라는 즉 본성 "성"
불변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7정이라 하여 喜怒哀懼愛惡欲

기뻐하는 마음
화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욕심이 드는 마음


이런 감정은 외부로 표출되는

인간이 가진 감정 성향으로
사람을 교육하고 다스리는 정도에 따라서


기쁘나 내색하지 않을 수 있고
화가 나나 자제할수 있으며
슬프나 억제할수 있고
두려워하나 견딜수 있으며
사랑하나 감출수 있고
미워하고 참고
욕심이 드나 다스릴수 있습니다


통제가 가능한 외부에 표현되는

감정과 양태들


이것이 바로 "기" 이며

 "정"이라는 것입니다.


이황은 성학십도에서 그림으로 표현하길
본성이 그 중심에 있고
이런 기질이 외부를 감싸 안으며

나타난다고 합니다


흔히 "본성은 착한데 기질이 탁하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의 본성은 바른데 잠깐 나타난 성질 때문에
겉으로 안좋게 보여 질 뿐이라고

완곡하여 누군가를 평가하는 방식이죠.


그러니까 배우는 것도

가려진 본연의 착한 본성이 드러나도록

기질을 다스리고 맑게 하여 본성을 드러내는게

바로 유교가 말하는 수신

즉 배움의 과정이 됩니다.


이황은 본성과 기질은 서로 다른 존재이며

서로작용하여 나타난다

이기호발설

 

이것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본성은 변하는 것이 아님으로

본성이 이끌고 나가며 기질이 뒤따른다

이발기수설

 

설령 기질이 앞선듯 보이지만

이가 이를 타며 나타난다

기발이승설


이런식을 인간의 본성을 주장하였습니다.


현대 서양 철학 용어에

우린 더 익숙하죠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 "성"

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성" 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서양 철학과

서구의 철학 용어를  번역할 때 쓴 게

바로 성리학 용어입니다





완벽하게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칸트의 순수이성

기독교의 절대신. 이데아

등등이 성리학이 말하는


'이'의 영역이며


현실의 양태, 시뮬라르크와 같은 모방

자연상태의 경험과 감정이   


'기'의 영역입니다


흥미로운게 16세기를 기점으로

서구 철학도 관념론, 형이상학을 탈피해

경험과 현상의 중시 영역으로 나아갔듯

성리학은 명나라 시절 양명학이란 개념으로

'기'의 개념을 더욱 중시한 학문으로 나아갑니다


여기까지 다소 난해한데

물론 전부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이런 흐름이다

느낌 정도만 알면 됩니다.


스압 보면 알지만

앞으로 볼 내용은 더 많거든요...


그리고 이 내용은

이황과 기대승이 서신으로 논쟁을 하며

서로 나눴던 성리학의 논쟁이기도 합니다.


당시 기대승은 막 과거에 급제한 관리였고

이황은 영남학파를 이끄는 거두이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대유학자였죠


오늘날로 치면

9급 공무원 시험 합격 한 청년이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이멜을 보내서  

상호 간 철학 토론을 했던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이황은 편지에 하나 하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답변하였고

심지어 논쟁을 수년 간 지속했습니다

당시 조선 초에 학문에 임하는

진지한 선비들의 자세와 풍조를

알수 있는 대목이죠


그리고

이런 성리학의 논쟁은

더욱 발전하여


조선 중기 성리학은  

주리론 <=> 주기론으로

분화되어 논쟁하게 됩니다.



즉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리론의 입장을 요약하면


본성과 기질은 다른 것이다 라는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겉으로 표현되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성, 본질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으로 


서구식으로 따지면 현상 넘어에 있는

진리가 더욱 중요한 가치이니


철학에서 보면 연역적 사고와

관념적 추론을 중시한

대륙의 관념론적 철학 사조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대로 이이의 경우 이에 반박을 하며

이기일원론을 주장합니다.


이와 기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서 존재하는 것이며

이황이 말하는 사단과 칠정으로 구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주장했죠.


즉 이와 기의 구분이라 설명한

4단과 7정은 따지고 보면

7정의 선한 부분만 골라서 구분한게

4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모든 물체는 양면성을 가지며 존재함으로

선함과 악함 음과 양을 공유한다는 것이죠

때문에 이와 기는 구분되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 된

동일한 양상에 불과하다 주장합니다.


이기일원론 이라 합니다


어떤 존재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라는 것이고

그것이 나타나는 이유가 라는 것임으로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은 가능하나

이를 발하고 기가 뒤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명합니다.


때문에 양자가 결국 같은 존재를

다르게 구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결국 궁극적으로 한 대상의 본질을

알기 위해 탐구해야 할 부분은

본성이나, 이의 영역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기의 영역을 지칭하게 됩니다.

즉 현실의 영역을 어찌 다스리는가가

곧 인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됩니다.


바로 주기론의 입장을 말합니다.


이는 서구식의 경험론의 입장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행태와 결과를 보다 면밀히 보며

귀납적인 방식으로 기를 통해 발현된

현실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어이쿠....

쓰고 나니 상당히 복잡한데


더 간단히 말하자면 

성리학이라는 정치에 적용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부분을

조선식 언어로 관념론-경험론의 관점에서

상호 논쟁을 한 내용인것이죠


그럼에도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아예 오늘날의 언어로 바꿔서

재차 설명 드려보자면


오늘날의 언어로 사회와 국가를 통치할 때

주리론 주기론의 입장에서

어찌 되는지 용어를 바꾸면

이런식의 분류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크게 한 국가의

가치, 법률 제도의 영역을 '리'

사회현상과 산업의 영역을 '기' 라고 하면


다시 그 법률 제도 역시


주리론에서 중시하는 ""의 영역을

공적인 정의, 윤리라고 보고

주기론에서 중시하는 ""의 영역을

사적인 이익, 사익이라 봅니다


주리론의 입장에서는


한 사회의 국가는 공익에 충실하고

올바른 가치에 따라 운영을 하면

자연히 생산력 발전과 사회 안정이 따라 온다

 사익과 사회를 잘 제어해서

공적인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주기론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운영인 법률, 제도와

하부 경제인 산업은 유기적인 관계로

경제 생산양식에 변화에 따라

법률과 제도가 바뀌는 것이다

사익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며

공적인 정의는 이를 제어할 뿐이지

주체가 될 수 없다.


즉 국가를 운영하는

이념적 가치의 기준이 뭐냐?

그 논쟁인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진보와 보수

사회주의-시장주의 간의

논쟁으로 보여지죠 비슷한 논쟁입니다.  

그 용어를 지칭하는 단어가 다를 뿐이죠.


이제 알게 됩니다.


조선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철학을 바탕으로 한 학자들이

인간의 심성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인간의 성향이 이런 것이다.

각자의 이론으로 연구를 하며  

어떻게 백성을 교화를 시키고  

어떤 이론으로 국가를 다스리는게

더 나은 정치인지 공부하는   

학문적 열정과 마인드로

국가를 통치한 시대입니다.


조선 특유의 학문 기반의 정치 시대였기에

가능한 논쟁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관료들이란게 사실 따지고 보면

철학과 교수들과 비슷한 존재들로

각 대학의 경제학자, 정치학자, 철학자들이

 공무원이 되어 한자리에 모여서 

이론이 어쩌네 이념이 어쩌네 하며

서로 논쟁하고 정치하던 시대인 것이죠
 


이런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주리론을 바탕으로

학파를 만들고 제자를 양성하며

이런 인맥들과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치사상으로 정계에 나간 이들이

바로 동인이란 사림집단이고


이런 율곡 이이, 성혼의

주기론을 바탕으로

학파를 만들고 제자를 양성하며

이런 인맥들이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정치사상으로 정계에 나간 이들이

바로 서인이란 사림집단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명종 말 선조 연간을 거치며

훈구파는 정계에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논쟁을 잠깐 봐도 알지만

무려 100년간 저딴 학문을 공부하며

 철저히 이론 무장한 뒤 잔뜩 이를 갈고

조정에 나온 사림들을 이론이니


이들을 말빨로 어찌 이길까요...

그 사림 집단이 정치판에 나왔을 때

그저 묵묵히 현실 정치만 하며

국가에 공을 세웠다며 자랑하는 훈구파를

또 얼마나 무시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실록 기록을 보면 사림 인사들이 관료가 되자 

훈구파를 거의 대놓고 소인배, 무식한 놈

이런식으로 면전에서 모욕합니다. 


너무 빡쳐도 막상 맞다이 뜨려니  

워낙 갈고 닦아 배운 놈들 한테는

훈구파가 말빨로 이길 수도 없죠, ㅡㅡ;


조선 초기 각종 사화의 정체는

말로 안되니 너무 빡쳐서 폭력을 쓴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조선 선조 연간은 조선의 붕당 정치가

본격적으로 개막 된 시대입니다.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갈려진 계기는

이조전랑이라는 자리를 놓고 나온

학파 간 다툼 때문입니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어

후배 사림들이 동인이라 불리워 지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선배 사림들이

서인이라 불리워 졌다고 하나


본질은 앞서 훈구파와 사림이 피를 보며

장장 150년을 투쟁한 이유가

한정 된 조선의 관료직을 두고 경쟁한 것 때문이듯

이제 사림이 완전 장악한 조선의 정계에서

다시 사림이 양분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합니다.


관직과 언로와 연계 된 청요직인

이조전랑 관직이 빌미가 된 것 이죠


이조전랑이 왜 중요한지는

조선이란 국가의 시스템을 봐야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삼권 분립과 비교해도 그 역할이 비슷합니다)



조선은 상당히 특이하며

또 매우 정교한 관료 국가입니다.

장장 500년을 버티게 한 힘이 바로

우수한 관료 견제 시스템 덕분이기도 하죠


이조전랑은 6부에 속한 하급 관직으로

육부와 의정부 등 고관들의 견제와 지시를 받지만

이들은 삼사의 임명권을 가진 직위입니다

그 삼사는 고위관료를 탄핵 할 권력이 있으며

또 왕권을 견제할 힘이 있죠

중추 권력이 상호 간 견제와 견제를

거미줄 처럼 얽혀서 상호 물고 물리는 관계가

조선 관직 시스템의 구조입니다.


때문에 어느 일방이 권력을 독점하는게

불가능한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왕권과 신권이 경쟁하고

신권과 신권이 경쟁하며

고관과 언관이 경쟁하죠


이조전랑은 그중 삼사의 임명권을 가진 관직으로

이 자리를 차지한 붕당은 조정에서  

고관 대작을 탄핵할 수 있습나다

하급 관리이면서 권력의 최상층부를

견제할 수 있는 자리 입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직책이죠

조선왕조 기간 동안 붕당싸움의

최중심이 된 직책입니다  


동인의 경우 이황과 조식의

학풍을 배운자들이 뭉쳤고

 

서인의 경우 이이와 성혼의

학풍을 배운자들이 뭉쳤죠


선조의 경우 양 붕당을 잘 조절하며

초창기 서로 예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나름의 수완도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선에서

가장 안타까운 왕이 선조입니다. 


어려서 이황이 성학십도를 바치며

부디 성군이 되기를 희망한 군주였고


그야말로 천재적인 성리학자들이

대거 나오던 중흥기에 즉위 한 군주로

신권과 왕권이 조화를 이루던

성리학의 절정기였기에


솔까말 선조는 가만히만 있어도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후한 평가 받았을 왕이었는데

 

이 때 터진게 그 임진왜란이고

본인 자체도 컴플렉스가 쩔어서

가만히 아닥하던 왕이 아녔죠....


(수능, 공뭔 시험 준비할 때 

피를 토하며 암기하는 조선 붕당 계보도..)


일단 동인의 학풍을 이끈 두 명의 학자를 보면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입니다.

 

동인 즉 영남학파의 경우

다시 영남 좌도학파와 영남우도 학파로 나눠집니다  
(주의 : 한양에서 보았을 때 좌우 개념입니다.

영남 우도가 낙동강 서쪽이고

영남 좌도가 낙동강 동쪽입니다.)


인간의 본성성 심성론으로

정교한 이론체계를 새운 이황이 있는가 하면


기본적으로 이황과 같은 주리론을 인정하며

진리의 추구를 학풍으로 중심을 삼지만

남명 조식은 심성론만이 아닌

보다 현실적인 도덕과, 의리에 입각한

도덕론을 주장한 학자입니다.


때문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남명 조식의 휘하에서 공부한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들이 대부분

동인 남명학파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군왕에 대한 의리와 충절을 중시하며

대의를 위해 싸우자는 정파입니다 


이런 선조 연간 동인-서인으로

학문적으로 경쟁하던 때

붕당정치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니

 
이른바 정여립의 모반 사건입니다.


원래는 서인이자 이이와 성혼의 제자로

총명하기 이를데 없던 정여립은

율곡이이 조차 천재라고 칭찬한 인재입니다.


워낙 잘나서 기개도 있고 똑똑한 자라

이황이 그림 그려가며 성리학을 가르친

지극히 평범한 군왕 선조에게도 눈을 부라리며

똑바로 간언하고 심지어 학풍을 초월해

서인에서 동인으로 넘어가기도 했죠.

학풍과 스승을 중시하던 시절

서인에서 동인으로 변절한 것은 놀라운 입니다

컴플렉스 쩔었던 선조는 이런 행위를 두고

똑똑한데 스승을 배신하는 소인배라 경멸했습니다.


그런 정여립이 모반을 했다고

황해도에서 고변이 있게 됩니다.

이때 서인의 영수 정철을 중심으로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해 모반을 꾸몄다며

대대적인 역적청산

즉 동인 숙청을 진행되게 됩니다.


기축옥사입니다.



요점은 동인과 서인이 학문적으로

 티걱 태걱하며 논쟁 한 정도나

이조전랑직을 두고 성품이 어쩌네

다툼을 하던 시절을 지나


선조 연간이 서인 정철이

역모사건을 이유로

반대파인 동인을 대대적으로

살육 숙청한 사건입니다.


문학책에서 등장하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같은 예쁜 문장을 쓴

바로 그 송강 정철 아재가 서인의 영수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추국했는데


이때 정철은 역모에 연루된

동인 인사 1천명을 죽였습니다


왕조시절 반역이라 함은 당사자는 참수되지만

반대로 그 일가 친척은 역적 가문이 되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시무시한 죄명이죠


단지 학문적으로 대립하던 시절에

동인 인사들 1천명을 죽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파장인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이때 부터 조선 붕당의 투쟁이란 것은

단순이 이론이니 학문적 이견을 말로 싸우는게 아닌

상대방을 실제 죽여버리고 나아가 가문의 멸족이 달린

생사의 투쟁으로 변질된 것이죠.


시작은 예법이니 문장의 내용이니 학문 사상이니

지극히 온건하고 단순한 이유일 뿐이지만

그 종국에 숨은 목적과 결과는 역모 관련으로 엮어

일가족 모두가 멸족 당하는

무시무시한 붕당식의 정적 제거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선조의 자작극설도 있고

정여립이 실제 모반을 했다는 설도 있죠


신권이 급부상하던 시기

컴플렉스 쩌는 선조가

동인 서인 신하들의 관직 투쟁을

보다 자극적으로 지휘해서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고

정여립이란 평소 맘에 안들던 인물을 빌미로 

정쟁에 활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철의 옥사가 정철의 의도가 아닌

선조의 지시라는 것이죠
(조선 후기 숙종의 극단적인 탕평도 생각해 보심되죠.)


기축옥사로 서인의 집권이 단행 되었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작 몇년 지나지 않아

기축옥사로 많은 이들이 죽어가며 한을 품었던

동인에서 반격을 한 사건이


건저의 사건 입니다


세자책봉과 같은 문제는 왕권과 직결된 사안으로

신하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영역이지만

선조 자체가 방계 출신인데(컴플렉스의 근원이고)

세자도 없음에 대하여 동인 이산해를 비롯

동인 유성룡, 서인 정철 3정승이

선조 임금에게 세자책봉을 건의하자고

상호 간 합의를 합니다


이때 동인 측에서 작업을 하여

오히려 선조가 의중을 두고 있던

신성군을 정철이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을 낸 다음

막상 경연자리에서 세자 책봉을 건의할 때

이산해는 출석하지 않았죠


이미 뒤로 이런 내용을 들은 선조는

정철이 면전에서 세자책봉을 언급하자

대노하며 정철을 축출하게 되고


뒤통수 거하게 후드려 맞은

서인의 집권도 막을 내리게 되었었습니다



다시 동인이 정권을 잡자 기축옥사에서

정철에게 한을 품었던 이들이

정철과 서인의 처우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또 나눠게 됩니다


이 때 강경파가 특히 피해가 많아던

바로 남명 조식과 서경덕의 제자들로

이들이 바로 강경파 북인이 되고

온건파가 이황의 제자들로

이들이 바로 온건파 남인이 됩니다


이들 북인은 학파 특유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거치며 조선에서 주전론의 중심으로

전란 중에 정계에서 활동하였고

학파의 제자들 역시 전국의 의병장으로 활약을 하여

임진왜란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북인이 잡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북인이 정국을 주도한 가운데

선조의 후사 문제가 대두되자


다시 의리와 명분을 기본으로 삼는

북인이 또 갈라지며

임진왜란 기간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전란 기간 조정을 2개 만드는 것)를

이끌고 항전하며 공을 세운

광해군을 지지하자는 이들이

대북이 되었고


선조도 방계로 혈통에서 취약한데

또 서자를 후사로 세우면 문제가 된다는 논리로

명분상 적통인 영창대군을 지지한 이들이

소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선조의 레알 병맛 스러움을 알수 있는데

장성하여 성인인 세자인 광해군이

멀쩡히 살아 있고


심지어 그 광해군은 임진왜란 기간

평양성 방어를 비롯해 분조를 이끌며

각종 전공을 세운 왕자로 명성이 높았는데


선조 놈은 적통 왕자라고 낳은

아직 아기에 불과한 왕자를 책봉하며

그 작호 이름을 무려


영창"永昌"대군이라 했습니다



네 진시황의 전국옥새에 새겨진 명문


"수명어천 기수영창"

할 때 바로 그 영창입니다.


즉 영창대군이 천명을 받은

전정한 군주이자 적통이다

선언한 것이죠.


선조가 아닌 어떤 군왕도 천명을 받은 왕자라는

이름의 왕족를 옆에 두고

온전히 임금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광해군은 임금이 아니란 뜻이거든요


그리고 선조는 뒤져버립니다.


광해군이 어린 아이 영창대군을 살리고 싶어도

광해가 왕 노릇을 하고 싶으면

도무지 살릴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넌 가짜임금이고 쟨 진짜 임금이라는데

영창대군을 신하로 어케 부려요

조만간 역모나 반란도 필연적이고


솔까말 영창대군을 죽인 건 선조임금이죠


광해군이 즉위하며 영창대군을 언급 한

소북은 자연히 축출되었고

쫓겨난 이들 소북을 두고 대북이 또 나눠서 칭하길

비록 쫓겨났지만 강직한 기풍을 유지한 이들을 청북이라

나머지를 탁북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광해군 연간 집권한 대북의 경우

또 다시 분파하게 되는데

 

앞서 언급했지만 같은 동인이라 하지만

남명 조식, 서경덕의 제자들로 구성된

북인의 경우 그 학풍이

어떤 일관된 성리학 학문의 이론에

그 정치적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도덕론, 의리론, 명분론이 대표적인 것을 보듯 

뛰어난 학자의 스승에 따라 학풍이 난잡하게 갈려지는

다소 복잡한 학풍의 정치세력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대북 내부에서도

각각의 스승과 학파에 따라

또 갈려지며 육북, 골북, 중북 이란 이름으로

구분하였다고 하지만


사실 이런 구분은

광해군 집권기에 스스로 칭한게 아닙니다

그냥 통칭해 북인이라 하며

 

이후 광해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서인이

대북의 난잡한 학풍을 성토하며

붕당을 이토록 많이 작당했다고 비판 한

훗날 서인들이 새로 편찬 한 수정 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실록 이야기를 잠깐 하면


참고로 유교라는 학문은 죽음 이후

내세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각 집안 마다

제사를 지낼 때 통상 조상님을 위로

5대 조 까지만 지낸다고 하죠


이후에는 혼은 승천하고 백은 땅으로 꺼져

혼백이 모두 흩어 진다고 여깁니다.

다만 영웅, 군왕 같이 혼백이 강력한 경우만

그 혼백은 영원히 살기에 제사도 영원히 드리죠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유교에서 죽음이란 곧 끝이고

생과 사의 의미는 바로 후대의 후손이

그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는 그 순간까지

그 사람은 살아 있다 라는 뜻입니다.


5대를 넘어 가면 통상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후손이 더이상 없으니 제사를 안지내는 것이고

영웅이나 위인 군왕은 역사에 남겨져

사람들이 영원히 기억하게 되니  

영원히 기억하며 제사 지내는 것이죠

남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삶에

죽음의 가치를 둔 종교입니다


때문에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게

바로 역사입니다.


내가 후대에 후손에게 기억되는

수단은 바로 역사라는 것 뿐이고

이 역사를 어찌 쓰는가

청사에 이름을 어찌 남기는가는

가장 중요한 유교의 가치가 되죠


유교의 춘추필법은

이런 중요한 역사를 서술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1. 사건의 대의명분과 옳고 그름을 남긴다

2.서술하되 없는 것을 창작하지 않는다


절대 명제이자 원칙이죠.


때문에 아예 기록을 피하는 경우는 있을 지언정

전혀 없던 사실을 판타지로 만들어 내는

역사 왜곡은 유교의 사상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교의 존재 이유가 걸린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죠


조선 왕조실록이 바로 이런

유교식 역사서술의 끝판 왕인 책입니다


디테일하게 모두 적으며 평가까지 했죠

만약 처음 부터 하나씩 읽는다면

읽는데만  7년이 소요되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런 조선왕조 실록의 위엄을 알수 있는게

선조수정실록입니다


광해가 반정으로 쫓겨난 후

대북까지 모조리 죽인 서인들이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후

광해 시절에 만든 실록이 맘에 안들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다시 서술했는데


그 방법은 광해군 시절의 실록을

고의로 폐기하거나 훼손한 후 만든게 아닙니다

쫓겨난 광해가 만든 역사도 그대로 전하고

서인들이 새롭게 쓴 실록은 수정실록 이라

새롭게 이름을 지어서

각기 다른 버젼의 2개의 역사책을

모두 함께 후대에 전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후손들이 알아서 해라

그런 의미죠.


조선이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런 북인의 집권이 끝난게

신하들이 무력으로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입니다.


연산군 시절의 반정은

훈구파들의 작품이고


인조반정은

사림의 집권이 시작된 이래

사상 최초로 일입니다.


사림들의 손으로 왕이 아예 갈려진

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북인은 사실상 절멸하게 되었고


인조반정의 공을 세운 서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형세가 만들어 졌습니다


서인 즉 기호 학파라는 것은

율곡이이와 성혼의 사상을 계승한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서부 평야 지역에 사는 양반들 학풍을 말합니다

 

영남의 산지가 많은 분지 지방에 서원을 만들고

조용히 형이상학적 철학에 매진하며 심도 싶은

학풍을 길러 온 영남학파와 대조적으로


경기도 또는 과전법의 대상인 경기도의 한계지

바로 인근의 토지인 황해도 충청도 지방에서

지주로 경제적 기반을 만들며 정치에도 참여 한

주기론을 바탕으로 한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학풍을 기반으로 쌓아 온 

현실 정치세력이죠.


이들이 인조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서인 내부에서도

인조반정에 가담하며 공을 세운 공서

신하가 왕을 몰아 내는데 가담하지 않았다 하여 청서


또 정계를 주도한 인조반정의 공신 인물을 중심으로

원평 부원군을 원두표를 중심을 모인 서인을 원당

낙평 부원군 김자점을 중심으로 모인 당을 낙당

송시열을 중심으로 모인 당을 산당

김육 등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당으로 

한강 이북에 주로 거주한다 하여 한당

 

원당,낙당,산당,한당이 4당이 구성되며

서인들이 정국을 평정한 인조 연간

서인 천하에서 주요 정파를 결성했습니다.

 
이 중에 다시 공신들인 공서의 김류가

쫓겨난 북인의 잔당 중에 소북의 영수였던

남이공이 광해군 시절에 탄압받은 소북 인사이고

학문적으로도 업적이 많음으로

대사헌이 임명하려 하자


서인의 소장파들이 반발을 하며

이를 인정한 이들이 노서

소장파 서인을 소서라 구분하기 도 했죠


기본적으로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정국을 독식한 상황에서

나눠 먹으며 나온 형세입니다


공신들이 이합 집산하며 모인 4당의 분파는

효종 연간 송시열이 통합을 시도하며

서인으로 다시 뭉치게 됩니다.


조선 후기 송시열의 등장은

서인 계보에서 특히 중요한데

정계에서 서인의 통합을 이룬 것도 그러하거니와


조선 후기 서인의 입장에서

성리학 사상을 정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주요 논제였던 의리론이 그러하고

사회개혁의 방향과 한계를

이이의 변통론에서 찾아 선을 그은 것도 그러합니다


(만동묘: 명나라 만력제와 숭정제를 모신 사당

성리학의 상징과 같은 곳으로 어떤 왕도 

이 곳을 감히 못 건드렸습니다)


의리론은 대명 의리론을 말하는 것으로

중화로 인정하고 임진왜란의 도움을 입은

명나라가 지금은 했다 하나


조선의 입장에서 청나라는

잠시 힘에 굴복했을 뿐

사대의 예법으로 섬기는 사대의 대상이 아님으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만동묘를 만들어 명나라 2명의 황제

만력제(임진왜란 구원) 숭정제(마지막 황제)를 제사 지내며

중화의 명맥을 대신 이어가는 동시에

유일하게 남은 중화는 조선뿐이라는 논리로


조선 후기 소중화 의식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보다 수호하며 중화의 명백을

조선이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죠


정치적으로 보면 송시열과 서인의 주도로

효종연간 북벌론이 대두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는 사상적으로 보면 성리학은

더이상 단순한 학문이니 사상의 영역을 넘어  

중화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절대적인 종교로 변질함을 말합니다


감히 건드리지 못 하는 만동묘의 존재를 보아도

사실상 국가권력 이상의 절대적 이념으로

성리학이 조선 후기 자리잡는 과정입니다
(그 만동묘를 철폐한게 바로 흥선대원군이죠)


당시의 명나라는 오늘날의 미국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고작 수십만에 불과한 여진족이

명나라를 멸망 시킬거라 상상조차 못 했죠  

만약 공산주의 중국이 갑자기 성장해

미국을 멸망 시켜 버렸다면  

이런 충격과 공포의 반작용으로

한반도에 강력한 반공주의와 함께

오직 우리 대한민국만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유일한 국가다!

라는 강력한 이념이 탄생하는게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죠

 
이는 변통론과 또 연계하여 살펴보면

율곡 이이의 경우 앞서 서술하였듯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며

이와 기는 하나일 분이고 양면의 발현이라 하였죠.

주기론의 사상 하에서

기는 표현의 대상인 동시에

변화가 가능한 영역입니다.


주역의 말을 빌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 지속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지만

바꿀수 있다면 변화즉 변통을 지속하며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여기서 바꿀 수 없는 것은 본질이죠

왕도, 인정, 삼강 같은

유교의 기본 원리는 변화가 불가능하지만

이와 수반되어 나타난 현상은 개혁의 대상입니다.
(이는 두루 통하고 기는 국환된다의

이통기국론도 이와 같은 논리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중국이 아무리 개혁 개방을 해도

공산주의 정신을 포기 못한다

이런 정신과 비슷하다 보면 됩니다.

자본주의 시장 개혁은 가능하지만

정치개혁은 본질이자 불변임으로

결코 민주주의 개혁을 용납할 수 없다

이런 개념이죠.


이는 정조의 개혁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정조대왕 시절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로

사회개혁의 중요성을 논하고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수용하며 변화를 꾀하지만

정조는 도학군주로 그의 치세에 성리학은

영원 불변의 사상이라는 전제하에

서학(천주교)는 사학(邪學)이라 칭하며

이를 배격하고 철저하게

성리학을 수호한 군주입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필요로 인하여 개혁을 진행하지만

봉건 질서는 결코 건드릴 수 없다는 가치관입니다.

개혁의 방향과 그 한계를 이론화 한 것으로

성리학 체제가 왜 이토록

지속 될 수 있었는지 설명이 가능한 동시에

왜 폐쇄화 되었는지 알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후대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부작용을 주었죠 

폐단이 존재하면 보통 개혁과정에서

체제가 갈려 버리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조선은 그게 안 일어 납니다.


조선 왕조는 정말 특이하게

개혁을 하지만 본질이 변화하지 않는 독특한

개혁을 조선후기에 지속적으로 하며

그 수명을 꾸준히 연장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흥선대원군이 개혁도 당장 만동묘를 파해쳤음에도

위정척사와 연계한 보수개혁으로 다시 연결되며

개혁을 하면서 동시에 후퇴를 하죠  

이른바 조선식 개혁운동의 방향성도 가늠하게 합니다


서인의 주기론의 입장 이기일원론은

이미 명나라 시기 중국에서 기의 중요성

즉 현실의 발현 실사 구시의 중요성을 논 한

기의 총체로 사물을 본 양명학의 대두와 함께

성리학의 본고장 중국에서

이미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비슷한 주기론의 입장을 견지하며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장수의 참전과 함께

조선에도 명나라의 양명학이 전파되었지만


송시열의 대명의리론, 변통론으로

조선의 성리학 중심 소중화체제를

정비함에 따라 성리학은 조선 후기

완전히 화석화되어


양명학 역시 사학일 뿐

이미 절대화된 성리학이 자리잡은 조선에서

이단에 불과한 취급을 받게 됩니다


좋게 말하면 양 전란 이후 피폐하고 혼란해 진

조선사회를 안정화 시킨 보수운동의 성공이고


나쁘게 말하면 조선 후기 사회를

정체된 보수사회로 만들어 버린 한 원인이죠



모두 송시열이 정립한 사상체제입니다


송시열 말년에 이르러 서인이 분파되며

노론과 소론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런 송시열의 이론을 반대한

이들이 소론으로 집결 하게 되고

소론의 인사들 중에서 소수의 일부가

실사구시를 중시한 양명학을

일부 수용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에서 더이상 뿌리내릴 수 없는

학문이 되었습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주전파 북인이 정국을 주도 하며

영남의 서원에서 조용히 찌그러져 살던

남인이 재등장 하던 시기가

인조 연간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인조반정을 옹호하며

정국을 주도한 서인들 틈세에서

공신들의 전횡을 견제하고

서인 소장파를 옹호하며 정국에 참여하던

남인들은 북인의 잔당을 흡수하며

차츰 역량을 정비 하더니


효종 사후 현종 연간

이른바 상복을 몇년 입어야 예법에 맞는가? 라는

얼핏 지극히 쓸데없어 보이지만 

예법을 중시한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왕실의 정통성과도 연계한 매우 중요한 논쟁

그 유명한 예송논쟁에서

서인을 누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예송논쟁은 간단히 말하면


조선이란 나라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는 무엇이냐?

복종하는 수직적인 관계냐

상호 동급인 수평적인 관계냐?


이 것에 대한 논쟁입니다.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가

그 기준은 왕과 신하의 예법이 같으냐의

의미로 왕도 사대부의 일부인가 아닌가 

물어 본다는 뜻을 말합니다.


전통적인 왕조국가에서

군왕은 그 말이 곧 법이죠

 이런 세계관에서는 옷을 10년을 입던

20년을 입던 군왕의 심경 변화가 곧 법이고

기준이 될 뿐입니다


사실 매우 불안정한 원칙이며

혈통에 의존하여 모든 도박을 하는

전통적인 후진적 정치 체제이기도 합니다


과거 사대부들이 이런 군왕의 절대권력에

이의를 제기해 중국 송나라 시절

비슷한 논쟁을 시도 하다 박살난 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귀족들의 이런 요구가

성공하여 양피지에 명문으로 

군왕의 권력을 기록하였고

그것이 권리장전이란 이름으로

훗날 입헌주의 기초가 되죠


조선 역시 후기에 이르며

왕이 신하들에게 쫒겨나는 반정이 성공하고

신하들이 옹립한 왕이 즉위하자


조선의 왕도 이제는

사대부의 일원으로 사대부의 예법을 따르라는

매우 도발적인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정통성을

결정하는게 혈통임을 부정하고

성리학의 대원칙임에 있음을 주장한 것이죠


이 때 남인이 주장한게

군왕의 예법은 따로 있다

즉 왕권을 강력히 옹호하는 주장을 합니다

1차 전에선 강력한 서인 권력에게 막혔지만

2차 전에서 군왕과 남인이

서인을 누르는 것에 성공한 것이

예송논쟁입니다.


효종의 가계는 조선 왕조의 정통이자

침범 불가능한 절대왕권이라 인정 한 것이죠


이때의 결과물로 정립 된 효종혈맥 

조선 후기 숙종, 영조, 정조 철종까지

이어지는 조선 후기 왕조에서

왕권 정통성의 상징이 됩니다.


경종이 아우 영조를 끝까지 살린 이유도

영조가 사도세자의 아들 정도를 살린 이유도

강화도령 철종이 무지렁이에서 왕이 된 이유도

바로 조선 후기 왕실의 정통성의 상징인

효종혈맥의 보존을 위해서 입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주도 정국에서

이들 남인들이 최초로 정권 교체에 성공하자

이제 남인들은 서인과 대치하는 세력으로

조선 후기 정국의 주요 정파를 형성하게 됩니다

사실 초기 남인과 서인의 논쟁은

붕당 정치의 꽃이라 불리워 지는 시기로

상호 견제하며 정국을 이끄는

지극히 품위있는 논쟁과

긍정적인 견제의 모범이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인

예송논쟁은 오늘날을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품위있고 수준 높은

국가 정체성, 정통성 논쟁이었죠

 


하지만 이런 시기는 그리 오래 안가
풍운아 숙종이 즉위하면서

극단으로 치닷게 됩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신권과 왕권의

견제와 조화를 바탕으로 한 국가입니다.


그런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신권이 강해 질 때 마다

몇몇 군왕은 좀 극단적인 방식으로

피를 보게 하여 반사적 효과로

왕권을 강화 하려는 경향이 큰데


앞서 선조도 그러했고

숙종도 그러했던게 아닌가합니다


앞서 예송논쟁에서

결국 효종혈통의 승리로 끝났죠


그리고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태어나자 마자 원자(元子)로 봉해지고

다시 세자(世子)로 봉해 졌다가

결국 왕으로 즉위를 한


말 그대로 혈통 정통성 끝판 왕인

숙종이 즉위한 것입니다.

숙종의 위엄이 어느정도 인가 하면

3대 독자입니다...

숙종 시기는 역모라는게 일어나는게

불가능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 조선이란 나라에서

숙종이 아니면 왕이 될 사람이 없죠

 

태어나자 마자 왕으로 점지 되어

모든 군왕의 정통 예법을 전부 통과 한

이런 군왕은 조선왕조 전체에서도

최초일 정도로 완벽한 왕이었기에

누구도 정통성 끝판 왕인 완벽한 왕권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죠  


바로 이런 왕의 치세에

나름의 탕평책인지


아니면 왕권의 무서운 위엄을

신하들 뼈속 깊히 각인 시킬 생각이었는지


정녕 그 속을 모르겠지만

군왕의 주도로 한 정파를 아예 제거하는 수단

매우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남인 또는 서인에게 정국을 독식하게 하는

정치 행태가 처음 등장하게 됩니다.
 
이른바 환국의 시대입니다


주요 이유는 인현왕후 장희민의 이야기처럼

군왕의 로멘스가 명분이지만


그 결과는 환국이 한번 실시되면

반대파는 죄다 역적으로 몰려 죽어 버리는

마치 선조 연간 기축옥사처럼 수 천명이 도륙당하고

그 가문이 노비로 전락하는 비극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시대죠


남인과 서인을 사이좋게 번갈아

오고 가며 3번이나 발생합니다  

예법이니 학풍이니 이론이니 철학이니

상호간 논쟁하는 것도 대화로 풀 때 가능하지


당사자 혹은 스승, 친구, 동문, 일가 친척, 지인들

한 다리 건너면 한번씩 상대방 정파의 보복으로

죽거나 도륙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거나 하면

더이상 정상적인 상호 경쟁이란게

성립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벌어진 환국을 통해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당연한 수순으로 남인의 씨가

완전 말려졌습니다


서인을 통합한 영수 송시열은

서인 가문에서는 뛰어난 학자로 존경하며

"송자"라고 스승 자子 자를 존호로 올리며

동양의 대유학자라 불렀지만


남인의 가문에서는 집에서 키우는 개의

이름으로 붙이곤 했다죠.


숙종 연간을 지나면

수 천명씩 갈려 죽어 나간 상황에서

멀쩡 한 양반 집안이 없을 지경이 됩니다.

특히 마지막에 숙청 된 남인은

말 그대로 씨가 말려져 남은 양반을

찾기 조차 힘들 지경이 되죠


장희빈 사건으로 남인이 축출 된 후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자


절멸한 남인을 대신하여
집권 세력인 서인이 갈려지며

경종을 지지한 소론과 이를 거부한

노론으로 나뉘게 됩니다


경종을 지지한 소론

훗날의 영조인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인데


이미 서인에서 숙종 연간

남인이 정국을 잡았을 때

서인을 강경하게 다 죽여버리자는 탁남

서인을 온건하게 처리하자 청남으로 분파되었듯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국을 잡았을 때

남인을 강경하게 다 죽여버리자 노론

남인을 온건하게 처리하자 소론으로

나뉘었던 분파이기도 합니다


남인에 온건하게 대한 정파로 소론

다시 남인의 환국 또 마지막 장희빈의 사사와

남인의 축출로 서인이 집권하자

남인이 내세운 장희빈과 그 아들인 경종

어찌하였건 군왕임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노론은 그 존재 자체가 서인의 위협임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내세운 것이죠


사실상 아무리 신권이 강하다 한들

젊은 군왕이 살아 있는데 후사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 다른 왕자를 왕세제로 임명하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역모의 성향이 매우 큰 대담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노론이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이 이를 문제삼아 충역의 문제로 비화 시켰고

노론 4대신을 처형하며 신임옥사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예전에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http://www.inven.co.kr/board/webzine/2097/1201964?my=post&iskin=wot


하지만 경종이 2년만에 승하하자

노론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영조가 즉위하였고

노론이 반격을 하며 소론 4대신을 처형하며

또 다시 소론은 절멸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시절에 관직 생활은

말 그대로 목 숨 걸고 하던 시절입니다  



영조는 즉위 기간도 매우 길었지만

탕평책으로 유명하죠


아버지 숙종이 워낙 다이나믹하고

극단적으로 정치를 하는 바람에

소론,남인이 씨가 말라있는 상태에서


양자를 균등하게 기용하여

한쪽에 쏠려 주지 않는게 탕평이라는 논리로

살아 남은 남인을 찾고 찾아 기용하며

정국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였습니다

 

영조의 이런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경종이 간장 게장을 먹고

다음 날 죽은 사건을 두고

경종 독살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는데


이는 당시에도

소론과 남인은 간장게장을 먹지 않는다는 말로

영조가 경종을 시해하고 즉위했다

여기는 음모론이 공공연히 유포될 정도였죠


아니 영조가 즉위 하자 마자 일어난 사건이

바로 이인좌의 이었습니다  

영조의 경종 독살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대놓고 터진 역적 반란 사건이죠  

이때 소론과 남인들이 반란에 대거 참여했고

그 근거지인 영남에서 주로 터졌기에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평정 하자

영남에 세운 비석이 평영남비입니다

경상도는 역모의 땅임으로

앞으로 이를 경계하며 등용하지 않겠다

즉 영남을 근거지로 한

남인을 기용하지 안겠다는 뜻이죠


영조가 즉위하자 마자

노론을 견제 할 유일한 반대 정파는

활동은 커녕 관직 임용조차 하는게

금기가 되었을 정도로

극심히 대립하던 때입니다


영조가 탕평책을 선언한 건
이런 정국에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이 모든 금기와 과거의 사건을 잊고

다시금 영남지역의 남인을 기용하며

탕평을 외친 것입니다


그토록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의도가 더욱 큼을 의미합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숙종 연간에 이미 나온

붕당론에 기초한 것으로


붕당의 대립이라는 것이

결국 한정 된 괸직을 바탕으로

각 학파의 인물들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북인 남인 노론 소론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 기용하여 정국을 이끌자

즉 탕평책을 이론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것입니다


영조는 서로 잘하고 잘못한 것을 주고 받았으니

문제 삼지말고 다 기용하자 라는 논리인데


그 실질적인 실천은

노론 소론을 외척을 골고루 기용하며

이들로 하여금 이른바 탕평당을 만든 것입니다


노론, 소론, 남인이 아닌

군왕의 친위정파인 탕평당이

정국을 주도하자 이거죠


영조 연간 외척을 중심으로 이뤄진

완론(온건파)탕평 정치를 말합니다.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군왕의 측근으로 끌어들여

군왕을 위한 정치세력화를 시키는 작업이죠

명목은 탕평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고

내용은 노론, 소론 온건파를 친위세력화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탕평책을 써가며 정국을 주도한 시도는

노론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에 막혀

왕권의 한계를 직시하게 하였고

균형이 어려움을 이유로 양자의 완전한 균형이 어렵다면

절충을 통해 그리고 주요인물들을 외척화 하여

이를 안정화 시키려 했지만

그 결과는 노론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며

비대한 외척세력이 형성되는 과정에 이릅니다


더 큰 문제는 왕실에 있었습니다  

이런 각종 어려움에 직면 한

영조를 대신하여 이를 모두 극복하고  

몇 안되는 소중한 효종혈맥과

왕권을 안정 시켜할 숙명을 가진 그 세자가

미친놈이었단 것입니다.



영조는 어렵게 낳은 아들이자

막중한 일을 해야 하는 세자였기에

매섭게 교육하여 훈계하였고

그 정신적 압박 때문인지

사도세자는 결국 정신병에 걸립니다

옷을 제대로 못 입는 의대증과

폭력적인 살인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사도세자의 기록이 세초되어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지만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만 비빈을 포함해

그 인원이 100명이 넘습니다.

연쇄살인을 넘어 살인귀 수준이죠


급기야 임금이자 부친인 영조를 죽이려하자

생모인 영빈 이씨가 결국 고변을 하였고

사도세자를 처분할 것을 요청하였죠.


이는 쉽게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때 사도세자를 역적으로 처벌하거나

사도세자가 죄를 시인하고 자결을 하면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정조도

연좌제로 역적의 아들이자 역적이 됩니다.

효종혈맥이 끊어지는 것이죠


세손인 정조의 신분을 보존하려면

사도세자가 자연적으로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뒤주에 같혀서 죽은 것입니다.

처벌도 자결도 아닌 방법으로 말이죠


이는 이런 탕평당을 이끄는 군왕이

가족 문제로 당쟁에 휘말리는 과정에서  

사도세자를 지지하는 시파와

이에 반대하는 벽파의 분쟁이 발생합니다. 


시파는 시류에 따르는 파

벽파는 간사한 파라는 뜻입니다.

 

임오의리의 문제라 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을 놓고 양분하게 된 것인데


그 이름을 봐도 그냥 알수 있습니다

시파가 주류고 벽파는 탄압 받는 소수죠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 연간

이런 임오의리의 문제를 두고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극명하게 되었음은 유명하죠


각종 드라마에서는 벽파의 음모로

사도세자가 탄압을 받아 억울하게 죽고  

세손이 목숨을 위협 받는 스토리가

다이나믹하게 나오곤 하는데

드라마일 뿐 사실은 아닙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영조 연간 사도세자는

효종혈맥의 적통입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장차 왕이 될 신분이죠

사도세자가 소론을 사랑하던

남인을 사랑하던지 간에

감히 그를 건드릴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대체할 왕족이 없거든요


사도세자가 그토록 살인을 저지르는데

과연 신하들과 비빈들이 몰랐을까요

알면서 모두기 쉬쉬한 것이고 그 정도가

군왕 시해의 위협이란 역모에 이르자

더이상 용납할 수준을 넘었기에

참고 참던 비밀이 공개된 것이죠

 

그럼 세손의 경우 어떤가

영조의 강력한 보호로 

그 신분을 보호하고자 조선왕조에 전례가 드문

실록의 세초(사료 삭제)까지 해가며

세손의 지위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정조 역시 대체할 다른 왕족이 없는

굳건한 혈통을 지닌 인물이죠

역시 감히 건드릴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왕권에 충성하는

즉 시류에 순응하는 시파가

대다수인 가운데


과거 임오의리에서 군왕의 친부를 구명하는데

소홀했던 영조의 탕평당 외척과

일부 노론이 존재할 뿐이죠

조만간 죽어야 할 간사한 벽파란 뜻입니다


전부 숙청 대상이고 실제 정조가 즉위한 후

군왕의 노여움으로 전부 숙청되었습니다.

그래서 벽파입니다.


살고 싶으면 이젠 노론, 남인, 소론 구분없이

그냥 전부 시파가 되야 합니다


왕을 중심으로 모두가 시파가 되어

충성을 다하자 정조의 탕평입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치를 이어간다는 명분으로

탕평책을 선언했지만 그전에

비대해진 영조 연간의 완론탕평당

즉 사도세자를 구명하는데 소홀했던

구 외척 세력을 척결하고

 (홍봉한 같은 인물이 그러하죠)


보다 강화된 친위 세력을 키우고자

또 다른 탕평을 시도합니다

남인과 청류 노론까지 흡입하여

장용영이란 군사력까지 가미한

강력한 군주의 지원하에 탕평당을 만들죠

이른바 준론(강경파) 탕평정치의 시대입니다. 


영조, 정조의 통치시대는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군주의 주도하에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다양한 사회개혁도

함께 진행된 시기임입니다

 

이른바 실학이 등장한게 그러하죠

주로 정계에서 쫓겨나길 반복하며

지방의 농지에서 살았던

남인들 계열에서 중농학파가 많이 나왔고

 

주로 정계에서 있으며

청나라도 다녀 오고 도시에 살았던

노론들 계열에서 북학파와 같은

중상학파가 많이 나왔습니다


이탈리아가 메디치 가문의 강력한 권력과

그 안정적인 지원으로 르네상스를 꽃피웠듯

조선도 현명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영명한 군주의 안정적인 통치 하에

각종 개혁과 문물이 꽃을 피운 시기입니다


조선 후기 영조-정조의 시기를

가장 빛나는 르네상스의 시기라 부르죠


그리고 한편으로
이런 강력한 군주의 빛나는 통치는

빛과 그림자 처럼 조용히  

치명적인 부작용을 잉태하였습니다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죠.


정조의 강경한 탕평책
시파-벽파의 논쟁은 겉으로 보면

왕권과 신권의 권력투쟁 문제를 해결한

태평성세의 안정 된 시기로 보이지만

  

사실 조선을 유지해 온 견제와 균형이란

오랜 정치 시스템이 강력한 군주의 등장으로

점진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탕평책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정조 연간에는 소수의 친위 세력이 

모든 정국을 주도하는 풍조가 일반화 됩니다.

명분도 붕당을 억제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탕평을 한다는 것으로  

영조 시기 시작 된 이런 조치는

정조 연간에는 보다 급진적으로 시행되었고  

조선시대 붕당 특유의 정치 풍조인

 당파 간은 물론 붕당 내부에서도 상호간 권력 견제의

여유를 남기는 풍토 조차 점점 위축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중 결정적인 조치가


붕당정치의 핵심이자

정쟁 다툼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선조 연간 동인-서인 붕당의 단초로 유명한

이조전랑 직위를 폐지해 버린 것입니다.


그 명분은 아름답습니다 탕평을 장려하고

중앙에서 불필요 한 정쟁을 없애고자

앞으로 국왕이 공정하게 임명하겠다


하지만 그 결과 조선왕조 500년을 유지한  

중앙 정부 관료조직의

견제 시스템이 증발해 버린 것이죠

신권-신권 간 상호 경제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하급관료는 삼사를 견제 못하고

삼사는 관료조직을 탄핵 못 하며

관료 조직은 견제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권력은 오직 인사권을 모두 가진


강력한 왕권과 소수의 친위 세력에

모든 중앙 권력이집중 됩니다.


또한 정조는 개혁의 과정에서

지방 향약을 지방관이 통제하도록 함에 따라

지방 사림의 언로와 기반이 무너지죠

당장은 지방 학파가 정쟁으로 나뉘지 않아

강화된 왕권으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이 여파로 조선 후기에는 과거와 같은 

지역별로 영남이니 기호학파니 구분하는게

사실상 의미 없어집니다.


한양에 거주하며 관직을 독점하는 한양 양반과

  관직을 얻지 못하는 지방 양반으로

철저하게 양극화 됩니다

중앙관료 조직, 지방 사림 모두에서

견제를 할 기반이 증발한 것이죠


정조 대왕의 빛나는 치세는

반대로 붕당정치가 종말을 향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패턴은 중국에서도 일어난 일입니다


유교식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정치의 작용을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죠


지난 역사를 보면 신권이 강하게 되면

권신이 제위를 찬탈을 하거나

장군들이 정국을 주도하며 권력을 잡아

군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사례가 있죠


때문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이런 신권의 강화를 우려하여

막강한 황제의 권한으로 황제가 6부를 총괄하며

재상직 조차도 모두 없애는 조치를 통해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또 이런 극단적인 독재를 매우 잘 운영했기에

황제권을 강화하는 것이

영명한 군주의 의무라는 의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실제 역사를 배운 군주가 종종 지향하는

모범적인 정치체제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강화된 왕권의 정치는

현명하고 부지런한 군왕의 통치기간에는

신속하고 효율적이 정치가 될지 모르지만

반대로 평균 이하의 군왕이 즉위하는 순간

시스템의 중심이 전부 무너지는

엄청나게 위험한 약점이 있는 제도입니다


죽을 때까지 밤새 정무를 보았 던

영명한 개국군주 명태조 주원장과  

카리스마가 넘친 군주 영락제가 사라진 이후

명나라에 평범한 군주가 즉위하자

황제의 정치와 업무 방치로

국가 전체가 환관정치로 퇴보 한 것이나


똑같은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 한
청나라가 강희, 옹정, 건륭

3명의 현명한 황제가 사라지자

곧 태후가 국정의 중심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는

외척 정치로 나아간 것이 그런 사례죠


흔히 세도정치를 두고 500년 간

대립한 신권과 왕권의 다툼에서

신권 즉 노론이 승리하여

나라가 망한거라 일부에서 평하는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500년 간 조선왕조는

신권과 왕권이 투쟁한 것이 아니라


애초 조선이라는 나라는

성리학적 유교 정치를 이상으로 한 국가로

신권과 신권이 대립하고

왕권과 신권이 상호 견제를 통해

정당 정치로 국정을 운영한 나라입니다

 
이런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국에서

왕이 똑똑한 신하들 속에서

 소외됨을 느끼는 경우나

때로는 자신이 현명하다 느끼는

영명한 군주가 종종 등장하며

인위적으로 신하들의 경쟁을 극단적으로

부추기는게 강요된 형세죠


연산군이 그러하고 중종이 그러하고

선조가 그러하고 광해군이 그러하고

인조와 숙종이 그러하고

영조와 정조가 그러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대립의 과정에서 종국에는

신권-신권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붕당자체의 기반이 무너짐에 따라

 그 누구도 견제를 못하는

그런 망조가 들게 됩니다.



안동 김씨 김조순

갑자기 등장한 세도가문이 아닙니다

정조 대왕이 그토록 아낀 외척으로 

탕평당의 핵심이자 시파였죠


그리고

그 권력을 준 인물은 다름 아닌

조선왕조의 군주 중

가장 총명하다는 정조 였습니다


세도정치의 기반이 만들어진 건

자세히 따지고 보면

모두 정조의 통치 기간

완성 된 구조입니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강한 외척 세력을 양성하는데 그침으로써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이들를 제어 할 보루

강력한 왕권조차 사라진 그 시점


조선 왕조는
어린 군왕 순조가 즉위하게 되자

졸지에 외척 안동 김씨가 

어부지리 최대 수혜자로 등장하며

견제할 세력이 전혀 없는 절대권력을 얻게 되죠


견제와 균형의 이상을 지켜 온    

조선왕조에 붕당이 완전 사라진 세상


조선의 암흑기

세도 정치시대가 개막하게 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