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방법원 정욱도 부장판사님께

- 이선옥
- 2020.05.22

  판사님의 법정에 선 어느 남성은 강간 문화에 젖은 본래적 범죄자가 아닙니다. 헌법에 의해 동등한 법률적 지위를 보장받고, 법리에 따라 공정한 판결을 구하는 동료시민입니다. 판사님의 이 글이 위험할 뿐 아니라 헌법기관으로서 부적절한 이유는 성별을 이유로 남성이라는 공동체 구성원의 법률적 지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N번방을 포함한 많은 성범죄 사건에는 여성 남성 모두가 피해자와 가해자로 존재합니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 아닙니다.


정욱도 판사님께.

  “‘강간 문화’를 간과하는 나의 법관 동료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시사인>에 쓰신 편지를 보았습니다. 법관이 아닌 제가 굳이 반론을 쓰는 이유는 그 글이 판사님 개인이 아니라 사법기관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며, 동료에 대한 예의는 차치하고 법관에 대한 모욕과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는 위험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판사님이 지금 성찰하실 지점은 강압적 성관계에 대한 판타지가 있고 ‘강간문화’에 젖어 살아온 판사님 자신이 그럼에도 지금 왜 강간범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당연히, 실제로 강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남성뿐 아니라 문명화된 법치국가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범죄행위와 판타지를 구분합니다. 강간이 판타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체가 문명화의 증거이며, 판사님이 가지고 계신 ‘강압적 성행위에 대한 판타지’를 판타지라 명명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문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변태적 욕망과 판결은 관련이 없습니다

 판사님의 글에서 우려스러운 또 한 가지는 남성성에 대한 자의적인 규정과 왜곡입니다. 판사님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포함한 남성의 성적 욕망을 강간 문화와 결부시킨 후 악하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전제합니다. 강간 문화를 떠받치는 근본적인 논리입니다. 이 논리가 위험한 것은 결국 남성 자체의 속성을 반사회적으로 규정하는 인종주의적 발상과 같은 구조라는 것입니다.

 판사님은 남성의 악한 본성을 교정하는 답은 ‘진정한 남성성’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성을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인지력, 자신의 행동이 어디까지 용인될지를 가리는 분별력, 옳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자제력, 본성의 판타지가 문명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힘, 지성과 자제와 통제의 능력’, 판사님은 이를 진정한 남성성으로 정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은 남성만이 이행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근대화된 법치국가를 살아가는 선량한 시민이 가져야 하는 당연한 미덕에 해당합니다.

(중략)

욕망해도 괜찮습니다

 강간은 흉악한 강력범죄이며 입에 올리기조차 부담스러운 용어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공유한 강간이라는 범죄에 대한 인식은 그래왔습니다. 그러나 강간 문화를 언급하면서 저는 이 단어를 무시로 써야 했습니다. 여성으로서 이 용어를 입에 올리기 싫지만 강간 문화가 이 단어를 아무것 아닌 듯이 쓰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용어의 오남용이 가져온 또 하나의 부작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쁜 짓 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규범을 준수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판사님이 지금 강간범으로 살고 있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욕망을 죄악시하는 판사님의 인식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저 또한 다양하고 강도 높은 성적 판타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구현할 때면 다른 어떤 행위보다 강렬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판사님이 부끄러워하는 집요하고 강렬한 성적 욕망, 강압적 성관계의 실행이나 관찰을 원하는 그 본성은 악한 게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 중 하나일 뿐입니다. 판타지라는 개념이나 상상 속의 욕구는 현실에서 범죄로 행하지 않는 처벌의 대상인 반사회적 행동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판사님의 욕망은 참회의 제단에 고해성사로 바칠 부끄러운 악이 아니라, 같은 욕망을 가진 파트너를 만나 즐겁게 실행한다면 삶을 풍요롭게 할 행복의 요소입니다. 존중받아 마땅한 개인적 취향이니 부디 부끄러워 하거나 죄악시 하지 마세요. 욕망해도 괜찮습니다.

이선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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