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북은 에픽 퀘스트를 진행하며 알지 못했던 NPC들의 뒷이야기, 설정 등을 알 수 있는 아이템이다. 비록 골드나 보상 아이템을 얻을 수는 없지만 스토리에 관심이 많은 유저라면 한 번쯤 경매장에서 구입해볼까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스토리북은 레어, 유니크 등급까지는 계정 귀속에 거래 불가이므로 경매장에서 구할 수 없으며 오로지 레전더리 등급의 스토리북만 구입이 가능해 모든 스토리북의 내용을 알기가 쉽지가 않은 상황.

과연 레어와 유니크 등급의 스토리 북의 내용은 무엇일까? 내용은 알고 싶지만, 스토리북을 얻기 힘든 유저들을 위해 레어부터 레전더리까지, 스토리북의 내용을 정리해봤다.


▲ 스토리북을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스토리 북 목록 (각 항목을 선택하시면 해당 정보로 빠르게 이동합니다.)
청색의 수호자 - 챕터 1

날개 없는 천사 - 챕터 1 / 챕터 2

프리스트의 길 - 챕터 1

대모험가 카라카스 - 챕터 1 / 챕터 2 / 챕터 3

품위있는 아라드인을 위한 넓고 얉은 지식 - 챕터 1 / 챕터 2 / 챕터 3 / 챕터 4 / 챕터 5

연금술사의 친구 - 챕터 1

하급기사 교육일지 - 챕터 1 / 챕터 2 / 챕터 3

천계에 부는 바람 - 챕터 1 / 챕터 2 / 챕터 3 / 챕터 4

숨어있는 폭탄, 사이퍼 - 챕터 1

체인피스의 아이들 - 챕터 1 / 챕터 2 / 챕터 3 / 챕터 4 / 챕터 5

즐거운 마법교실 - 챕터 1




■ 청색의 수호자

- THE GUARDIAN OF BLUE -

녹색의 수호자 가웬 : 비탈라. 고집은 그만 부리세요.

수련자 비탈라 : ……

가웬 : 용족이 바깥에 나가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알잖아요?
제국군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당신도 수용소로 잡혀갈 거예요.

비탈라 :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전이가 일어난 이후 요정들의 마법진의 소멸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겁니다.


가웬 : 용족이 할 수 있는 일? 분명 많죠.
하지만 우리가 왜 자신을 희생하며 가시밭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죠?

용족의 수호자 아드리나 : …긴 세월을 아라드에 살면서 남은 건 상처뿐이오.
어린 것들은 잡혀서 애완동물 취급이나 받고,
실험 재료라며 뿔을 뜯겨 죽어버린 자도 한둘이 아니라오.

아드리나 : 제국이 주도했다지만 돌이켜 보시오. 제국만 우리를 핍박한 것이 아니오.
그들에게 협력한 자들이 숱하게 넘쳐나오. 바깥은 우리에게 사지나 다름없소.

비탈라 : 물론 무섭고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국의 천박한 실험에 도움이 되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를 위해 요정의 마법진을 지켜내고자 합니다.


비탈라 : 저는 한 때 이 아라드를 미워했습니다.
수가 적은 종족이기에 받아야했던 차별과 경멸…
그 무자비한 시선 앞에서 제 개인의 인격과 생각은 먼지일 뿐이었지요.


비탈라 : 하지만 요정들이 목숨을 걸고 마법진을 만들어
아라드를 지켜내고자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말로는 쉬운 일입니다만
이 얼마나 용기 있고 고결한 행동입니까.


비탈라 : 저는 그들 앞에서 비겁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가웬 : 더 이상 말려봤자 소용없겠군요.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당신이 나가면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겠어요.

아드리나 : …비탈라. 그대가 수호자의 위치에 매달린 것은 마법진을 지키기 위해서였소?

비탈라 :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만… 제 생각도 많이 바뀐 것이겠지요.

아드리나 : 그대는 어릴 때부터 고집이 셌었지.
걱정도 되었지만 착한 심성과 현명함이 뒷받침되었기에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소.

비탈라 : 모자란 저를 가르쳐 주신 스승님 덕분이지요.

아드리나 : 하하. 그대 앞에서는 스승이라고 잘난 체 할 수도 없겠소만…
고맙게 받아들이겠소.

아드리나 : 비탈라. 아라드를 위해 요정이 남긴 마법진을 관리해야 한다는 그대의 판단은 옳다고 보오.
아마 이 아라드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용족의 수호자밖에 없을 거요.

아드리나 : 다만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 그대와 함께 하지 못하오.
지독히도 괴로운 나날을 보내 왔으니까…

아드리나 : 이 비겁한 스승은 이곳에서 그저 그대의 안전을 기원하겠소,
그대를 나의 유일한 자랑으로 삼으면서.

비탈라 : 고맙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언제나 되새기며 수호자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드리나 : 짐까지 다 챙긴 걸 보니 바로 떠날 모양이군.
하지만 가기 전에 아직 수호자의 칭호를 받지 못하지 않았소?

비탈라 : 네… 아무래도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제 결정 때문에 받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아드리나 : 그럴 순 없지. 우리 용족의 수호자가 아라드를 지키겠다는데 이름도 받지 못하고 가게 할 수는 없지.

아드리나 : 제대로 된 수여식은 못해주지만 이 로브를 가지고 가시오.
언제고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서 미리 준비해 두었소.

아드리나 : 그대에게 내리는 색은 '청색'. 이름은 '청색의 수호자 비탈라'.
앞으로는 이렇게 불릴 것이오.

아드리나 : 푸른 하늘처럼 모두에게 희망이 되고, 푸른 바다처럼 모두를 포용하는 수호자가 되어주시오.

비탈라 : 네.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드리나 : 비탈라. 그대의 앞길에 용왕의 용기와 네메르의 지혜가 언제고 함께 하기를



▲ 굳은 결의를 하고 아라드로 내려온 비탈라.




■ 날개 없는 천사

- An wingless angel -

◈ 날개 없는 천사 - 챕터 1

카곤 : 으음... 어떻게 해야 좋을까... 으으으음...

카곤 : 아아! 엄청 짜증나네! 왜 탁, 하고 좋은 생각이 안 떠오르는 거야?!
젠장. 요새 너무 피곤했어..


아벨로 : 왜 거리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어? 무슨 일이야?

카곤 : 누구야? 사람 머리를 대뜸 치는 녀석이...
아벨로 님? 머리 치지 마세요. 스타일 망가지잖아요.


아벨로 : 별로 세게 친 것도 아니구만...
근데 왜 그렇게 짜증을 내고 잇어? 또 새똥이라도 맞은거야?

카곤 : 새가 아니라 천사를 만났어요, 천사!
하아.. 그 가녀린 어깨와 나긋나긋한 목소리..
사랑스러운 얼굴..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상냥한 미소.. !


아벨로 : 아.. 또 짝사랑이구만.. 힘내! 잘 가! 나중에 결과 얘기해줘! 술 사줄게!

카곤 : 으익, 사람이 고민하고 잇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에 하모니카도 고쳐줬잖아요!


아벨로 : 도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그치만 너의 짝사랑 소동에 또 말려들기는 싫단 말이야..

카곤 : 원래 사랑은 고난과 역경이 많을 수록 빛나는 법이죠.

카곤 :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날 테니까 좀 도와줘요.
노래의 소재로 써도 봐드릴게요. 10만 골드 정도에.


아벨로 : 점점 내가 손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뭐 좋아.
왕궁에 인사하러 가는 것도 귀찮으니 친구를 도와주느라 못 갔다고 핑계나 대야겠다.

카곤 : ...그러다가 여왕님이 화나시면 나까지 혼나는 건가요. 갑자기 후회가 되는데...

아벨로 : 괜찮아, 괜찮아. 사랑은 고난과 역경이 많을 수록 빛나는 법이라며? 동감이야.
자아, 대로 한복판에 있지 말고 우선 자리를 피하자구.

아벨로 : ..여기라면 조용하겠네. 이제 말해봐. 누구야? 사랑 따위 이제 질렸다며 30년 동안 떠들고 다니더니.

카곤 : 원래 사랑이라는 단비는 매마른 대지에 내리는 법이죠.
이름은 세리아라고 하는데 정말 청초한 소녀에요. 인간이고 나이는 십대 후반 정도?


아벨로 : 우와.. 아저씨, 도둑이네.

카곤 : 아니 음유시인이라는 사람이 로맨틱하다고 좋아해야 할 판에
왜 아까부터 그렇게 찬물이나 끼얹는 겁니까?


아벨로 : 응. 난 상대로는 현실주의자야. 어릴 때의 그 사건 이후로.

카곤 : ... 할말 없군요. 젠장.

아벨로 : 지금 둘이 어떤 사이야?

카곤 : 아마 제 얼굴이나 이름은 알걸요. 그리고 나는 심장을 관통당한 그런 사이?

아벨로 : ...와... 40년 전의 그 차가운 봄날하고 상황이 똑같은 거 같아서 점점 싫어지는데..

카곤 :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바람둥이 같잖아요. 이래봬도 한번 정착하면 일편 단심이라고요!

아벨로 : 정착한 걸 한번도 못 봐서 잘 모르겠어. 아무튼, 그 애는 지금 어딨는데?

카곤 : 언더풋 광장 근처에 지내는 모양이에요. 어떤 무례한 모험가를 따라 잠깐 온 모양이지만.

아벨로 : 그럼 간단하게 언더풋을 안내해준다고 하면 되지 않아?
여자애니깐 맛있는 케이크나 과자를 사주면서...

카곤 : 아벨로 님.

카곤 : 그러니깐 당신은 여자친구가 안 생기는 겁니다!!

아벨로 : 뭐?

카곤 : 그런 시시한 데이트라니! 그래선 내 인상이 제대로 남질 않잖아요!
아주 강렬하면서도 달콤한 충격을 줘야 한다구요!


아벨로 : 으음.. 그럼 노래라도 불러주면서 곷을 안겨쥐라도 하려는 거야?
제목은 '날개 없는 천사' 정도가 되는 건가.

카곤 : 오, 이제야 아벨로 님한테 이야기한 보람이 생기기 시작하는군요. 곡 좀 써봐요. 지금 당장.

아벨로 : 창작의 고통 같은 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카곤 : 하하. 그런 거 없죠. 내가 사랑의 고통으로 죽게 생겼는데.

아벨로 : ...왜 아버지는 그때 카곤을 소개시켜 주신걸까..

카곤 : 오오, 아, 아름다운 소녀요..!

세리아 : 네..? 아, 저, 저요?!

카곤 : 여기에 당신보다 아름다운 소녀가 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이 당신을 위한 노, 노래를 준비해 왔으니 부디 이 노래를 듣고...


세리아 : 아... 죄송해요. 저는 님의 노래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네요.

카곤 : 그,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야말로 날개 없는 천사...!
하지만 내게는 보입니다, 당신의 새하냔 날개가!!


세리아 : 나, 날개요? 죄송해요. 저어, 갑자기 너무 부담스러워서...
호감을 가져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다시는 이런 말씀 안해주셨으면 하네요.

세리아 : 그리곤 전 카곤님의 관심을 받을 수 없답니다.
모험가님의 곁에서 그분을 돕는 것이 제 사명이거든요.

카곤 : 그, 그런... 그럼 이 꽃이라도...

세리아 : 죄송해요. 받을 수 없어요. 제게 호의를 주신 마음만은 기쁘게 받을게요.
고마워요, 안녕히 가세요.

카곤 : 세리...세리아아아아 니이이이이임!!

아벨로 : (만돌린의 현을 뜯으며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렇게 한 사내의 사랑은 어이없이 끝났다...

아벨로 : 그의 슬픈 절규는 언더풋에 울렷으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천사의 날개 아래 쓰러진 그는 돌이 되어 영영 움직이지 못했으나...

아벨로 : 사람들아, 기억하라.
언더풋 역사상 최고속으로 차인 남자가 여기에 무릎 꿇고 있었음을...

카곤 : 아벨로오오오옷!!!


▲ 당신을 처음 본 순간 한 눈에 반했습니다.

▲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는 아벨로.


◈ 날개 없는 천사 - 챕터 2

아벨로 : 카곤. 여기 있었네.

카곤 : 웬일인가요. 또 놀리려고 찾아온 겁니까?

아벨로 : 딱히 놀릴 생각은 없는데...
전에 카곤 덕분에 영감을 받아 지은 노래가 인기가 많아서 말이야.
술이라도 한턱 내야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찾아왔지.

카곤 : 그거 아아아주 잘 됐군요! 그렇잖아도 술이 마시고 싶던 참입니다!

아벨로 : 왜 그렇게 열을 내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카곤 : 아뇨!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어서 열을 내는 거죠!

아벨로 : 으음... 그 세리아라는 아가씨하고는 여전히 잘 안되고 있는 모양이로군...
워낙 강렬하게 인상을 남겨놨으니까 여자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겠지.

아벨로 : 그냥 포기해
내가 봤을 때 그 여자애는 카곤 곁을 피하는 게 행복할 거 같더라고.

카곤 : 친구라는 사람이 왜 맨날 그런 밉살맞은 소리나 해대는 겁니까?!
두고 보라고요. 세리아 님에게 내 마음을 꼭 전하고 말 테니까!


아벨로 : 아니, 전달이 안 돼서 일이 안 풀리는 게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카곤 : 내 생각엔 그 노래가 잘못된 거 같아요.

아벨로 : 분노에 이어 현실 도피인가...
내가 써준 가사는 너무 약하다면서 자기가 그렇게 바꿔놓고선...

카곤 : 그래서 이번엔 선물을 준비하려고요.

아벨로 : 뭐냐고 물어보지 않는 게 재밌을 거 같네...
어차피 조언해봤자 듣지도 않을 테고.

카곤 : 혼자서 뭘 중얼거리고 있는 겁니까? 포장지 있어요?
가장 화려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걸로!


아벨로 : 비단거미 가죽이 화려하고 반들거리긴 한데... 정말 그걸로 포장하려고?

세리아 : 아... 안녕하세요.

카곤 : 세, 세리아 님. 잘 계셨나요? 조, 좋은 날이로군요. 햇살이 세리아 님의 마음처럼 따, 따사롭고...

세리아 : 네에. 정말 좋은 날이네요...

세리아 : ... 저어, 카곤 님?

카곤 : 네, 네넵?!

세리아 : 제가 넘겨짚은 걸 수도 있겠지만
혹시... 전에 절 찾아오셨던 때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려는 거면...

카곤 : 아, 그거, 그거요?! 그건 제가 너무 성급했죠! 저도 압니다.

세리아 : 그럼...

카곤 : 그, 그래서 사과의 의미로 선물을 드리려고요!
오, 오, 오해하지 마세요! 딱히 어떻게 해보려는 게 아니라 사과를 하고... 치, 친구로...


세리아 : 아... 선물 같은 건 괜찮은데...
그래도 카곤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히 받을게요.

카곤 : 오오...!!

세리아 : 어머나. 상당히 특이한 포장지...네요. 아무래도 가죽 같은데...

카곤 : 그거는 비단거미라고, 이~만한 거미의 가죽을 무투질한 겁니다.

세리아 : 거, 거미요...?! 그렇게나 커요? 가죽이 있는 거미도 있다니 신기하지만... 좀...

카곤 : 아 모르시나보군요.
비단거미는 껍질 위에 비단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비단거미라고 불립니다.
표류동굴 근처에서 사는데 제가 보여드릴게요.


세리아 : 아, 아뇨. 괜찮아요...

카곤 : 겁먹을 필요 없어요! 제가 이렇게 쉭! 하고 잡을 수 있으니까! 하하하!

세리아 :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요... 아, 이건 뭔가요? 하얀색 깃털... 날개?

카곤 : 세리아 님은 날개만 없다뿐이지 천사나 다름 없죠. 저는 첫눈에 알아봤어요!

세리아 : 네?

카곤 : 그러니까 그 날개를 하고 있으면 정말 잘 어울릴 겁니다. 한번 해보세요!

세리아 : 전 이런 건 별로... 당황스럽네요.

카곤 : 당황할 필요 전혀 없어요!
제가 세리아 님의 몸매에 딱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준비했으니까.
간단하게 고정할 수 있도록 개량도 해놨어요.


세리아 : 음...

카곤 : 아 혹시 부담스러우신가요? 며칠만 하고 있다보면 아주 익숙해질 겁니다.
뭣하면 제가 날개와 어울리는 하얀색 원피스도...


세리아 : 카곤 님. 저를 아껴주시는 그 마음은 감사하지만 역시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이거 돌려드릴 테니까 더 멋진 여성분께 드리세요.

카곤 : 그런 여자는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천사보다 더 아름답고 찬란한 여성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세리아 : 아 그럼 환불하시면 되겠네요...
음... 저는 이만 모험가님이 돌아오실 때가 되어서 가볼게요.

카곤 : 그, 그 전에 잠깐 차라도 하시죠! 친구가 된 기념으로...

세리아 : 친구...보다는 친절하신 분으로 기억하고 싶네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카곤 : 아... 네? 제가 물론 친절한 남자긴 합니다만 사실은 냉철한 면도 있습...

세리아 : 그럼 카곤 님. 안녕히 가세요.
저는 모험가 님과 여행을 떠날 거라 한동안은 못 뵙겠네요. 몸 건강하시길.

카곤 : 네? 아? 세, 세리아 니이임?!

아벨로 : 와아. 선물이 날개였구나. 우와아아.

카곤 : 세리아 님은 왜 저렇게 달려가시는 거지... 넘어지면 어쩌려고...

아벨로 : 그야 여기 있고 싶지 않겠지.
그렇게 눈을 시뻘겋게 부릅 뜨고 거대 거미를 보러가자느니,
천사 날개를 하고 있으라느니 하는데 나라도 도망가고 싶겠다.

카곤 : 뭐? 잠깐. 그럼...

카곤 : 세리아 니이이이이임...!!!

아벨로 : (만돌린의 현을 뜯으면서)
아아, 가련하고 가련하구나! 이런 남자에게 걸리고 만 죄 없는 소녀의 운명이여.

아벨로 : 그리고 사람들아, 기억하라.
만일 카곤이 다른 여성에 접근을 하려 한다면 신속히 경비대에 연락을!
경비대는 바로 이런 때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샤란 : 좋은 이야기군요. 제자들에게도 조심하라고 해야겠어요.

미네트 : 음... 제 친구들에게도 이야기를 해두는 편이 좋겠군요.
그리고 저 소녀를 보호할 인원을 배치하는 게 좋겠어요.

그란디스 : 카곤 님. 마음이 괴롭다면 언제든 오셔서 기도를 통해 회개하십시오.

풍진 : 역시 사람의 일 또한 순리대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카곤 : 잠깐. 왜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서 구경하고 있는 거야?

아벨로 : 카곤이 만에 하나 난동을 피워서 세리아라는 여자애를 협박하면 나 혼자서 말리는 건 무리니까 도움을 요청했달까.

칸나 : 구경 왔어요! 이 순둥이한테도 미리 조심하라고 알려주려고~!

아니스 : 저어, 힘내세요! 으음, 방법은 좀 바꿔보시는 게 좋을 거 같지만...

카곤 : 으아아악, 제기라아아알!!


▲ 카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세리아가 마음을 받아주는 그날까지!



■ 프리스트의 길

- The road of PRIEST -

대전이가 일어난후 프리스트 교단의 총본산은 헨돈마이어의 레미디아 바실리카에서 언더풋의 레미디아 카테드라로 이전하였다.

지반이 상승하면서 지상으로 나온 언더풋이 아라드가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며, 흑요정의 개방 정책에 힘입은 덕택이기도 하다.

흑요정의 여왕은 대전이를 계기로 닫힌 문을 열어 타 종족과 그 문화를 받아들였고, 레미디아 카테드라는 커다란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카테드라가 안정이 되었음에도 젊은 프리스트인 그란디스 그라시아의 얼굴에는 한 가닥 근심이 서려있었다. 단 하나 남은 혈육인 닐바스 그라시아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나이 차이가많이 나는 오빠인 닐바스는 모범적인 팰러딘으로, 어린 그란디스의 영웅이었다. 부모님이 그리워 우는 동생을 달래주고, 공부도 도와주곤했다.

프리스트들을 어떻게 잘 이끌 수 있는지, 어떻게 위장자를 구분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준것도그였다. 닐바스는 그야말로 훌륭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전 이야기다. 닐바스는 대전이가 일어나기 전, 위장자를 처치하기 위해 그란디스를 교단에남기고 떠난후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사람들은 아마 죽었을 거라며, 포기하라고 했지만 그란디스는 오빠가 살아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행방불명된 오빠를 둔여동생이 막연히 품는 기대와는 달랐다.

같은 신을 모시는성직자 특유의 어떤 예감과 비슷했다.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기도를 올릴 때마다 포기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수행을 이유로 한적한 시골 마을로 소속을 옮기는 다른 프리스트들과는 달리, 각지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번화한 언더풋에 남은 것은 닐바스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롯 : 그란디스님, 오랜만입니다.

그런 그란디스 앞에 거구의 프리스트가 다가왔다.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감싼 그는 닐바스와 동기지간인 그롯이라는 남자였다. 닐바스와는 다른 시기에 수행을 떠났다가 대전이가 일어나자, 가끔 교단에 돌아와 도움을 준 후 떠나곤 했다.

그란디스 : 그롯 님, 오랜만입니다. 언제 오셨습니까?

그롯은 그란디스와 잠시 한담을 나누었다. 언더풋 바깥의 이야기는 다른 프리스트들에게도 듣고 있지만, 대부분은 여행중에 겪은 아라드의 슬픈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그롯은 주로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했다.

아름다운 실버크라운, 서로 힘을 합쳐 대전이의 상처를 이겨내며 사는 사람들, 체념의 빙벽에서 몬스터들을 봉인하는 웨펀마스터들. 폐허에서 피어오르는 파릇한 새싹같은 이야기였다.

그롯 : 제 이야기는 이 정도고… 그란디스 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낯선 곳에서 힘드시지요? 닐바스 녀석은 도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란디스 : 괜찮습니다. 오빠는 어딘가에서 신의 뜻을 행하고 계시겠지요. 프리스트의 길을 걷고 계시는 오빠의 수고에 비하면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란디스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밝은 모습 너머에 긴장과 초조가 있음을 모를 그롯이 아니었다.

그롯 : 신의 뜻이라. 불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에 그만큼 알아듣기 힘든 건 없을 겁니다.

그란디스 : 네…?

그롯 : 물론 우리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지혜를 갗고 계시니 짐작하지 못하는것은 당연하겠습니다만. 그분도 우리가 답답할 겁니다. '떠먹여줘도 못먹는다'고 하던가요.

그롯 : 그런 점에서 대주교님의 가르침도 비슷하지요. 하루 종일 힘든 심부름을 시키시는 바람에 지쳐서 방에 돌아가면, 잠에 빠지기 전에 '이야,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뒤늦게야 깨닫는 것입니다.

그롯 : 가끔은 직접 말씀해주시지 왜 그러시나 원망도 했습니다만… 많은 경험을 통해 그런 식으로 가르쳐야 효과가 더 좋다고 생각하셨기에 그리하시는거겠지요..

그롯 : 하지만 그분도 아침에 눈을 뜨면 배울 걸모두 잊어버리는 저 때문에 '아아, 이것이 내 시험인가.' 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이 역시 신의 뜻이겠지요.

그롯이 근엄한 표정 그대로 말하는 바람에 그란디스는 괜히 더 웃음이 나왔다. 마주 웃을 법도하건만, 그롯은 눈 한번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롯 : 예시가 조금 이상했습니다만, 하여튼 신의 뜻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란디스 님,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 규정하지는 마십시오.

그롯 : 그건 먹으면 안 되는 사탕 같은 것입니다. 힘들거나 즐겁거나, 혹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신의 뜻'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신만이 가능합니다.

그롯 :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 프리스트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이 보여주시는길을 끝까지 따르는 것은 사람이고, 거꾸로 달리는 것도 사람입니다. 신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롯 : 당신의 외로움과 걱정을 인정하십시오. 닐바스 녀석이 밉다면 밉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 녀석이 프리스트의 길을 걷기 위해 정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돌아오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롯 : 원망하고 슬퍼하는 것 역시 프리스트가 걸어야하는 길입니다. 그래야 원망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잘 이끌 수 있습니다.

그롯 : 감정을 모두 표현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하지는 마십시오. 신은 우리를 감정이 있는 생물로 만들었습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

처음엔 당황하던 그란디스였지만 그롯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살며시 웃었다.

요컨대 이 요령 없는 프리스트는 친구의 동생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꾹꾹 누르기만 했다간 언젠가 터져버릴 테니, 그 전에 조금씩 풀어줘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언더풋으로 오고서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낯선 환경에서 힘든 것은 프리스트라고 해서 예외인 것이 아니다. 타인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하는 프리스트이기에, 더욱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란디스 : 고맙습니다. 저도 때로는 쉬면서 프리스트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 찬찬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빠와는 다른 저만의 길을 찾아서 타인을 구원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롯 : 훌룡하십니다. 뭐, 닐바스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스토 안 나타나면 제가 머리끄덩이를 잡고서라도 끌고 오도록 할 테니까요.

그란디스 : 그럼 저는 오빠에게 그동안 걱정 끼친 것에 대한 원망의 뜻으로 한 방 때려줘야겠군요. 그 정도로 풀릴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지요.

배시시 웃는 그란디스를 보고 그롯은 이 당차고 인내심 많은 소녀가 자신의 뜻을 알아들었음을 알고 마주 웃었다.

하지만 제 몸만한 무거운 십자가를 휙휙 돌리는 이 소녀의 주먹맛을 보게 될 친구의 걱정에 마냥 밝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 그란디스와 닐바스는 과연 만날 수 있을까?

▲ 닐바스도 언제나 그란디스를 생각하고 있다.



■ 대모험가 카라카스

- CARACAS The great adveturer -

◈ 대모험가 카라카스 - 챕터 1

대전이가 일어나기 전, 평화롭던 시절에, 어느 조용한 마을에 카라카스라는 작은 남자아이가 태어났어요. 너무 작아서 어머니의 치마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였어요.

하루는 어머니가 카라카스를 치마 주머니에 넣어놓고 밭을 나갔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밭에 두더지가 많지 뭐에요? 어머니와 형 누나들은 열심히 두더지를 잡았어요. 카라카스가 구멍으로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말이에요.

구멍으로 떨어진 카라카스는 바깥으로 나오려고 허우적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더 깊은 곳으로 빠져버렸어요.

땅속에 들어간 카라카스의 눈앞에 있는 것은 늙고 커다란 두더지였어요. 두더지가 말했어요.

"아기야, 왜 여기에 있니?"

"어머니가 날 떨어뜨렸어. 올라가고 싶은데 올라갈 수가 없어."

"내가 너를 올려줄 수 있어, 너는 살겠지만 나는 잡혀서 죽을 거야."

"널 잡지 말아 달라고 할게."

"좋아. 그럼 내 등에 타렴."

카라카스를 태운 두더지는 약속과는 달리 더 깊은 땅속으로 들어갔어요.

"멈춰! 왜 아래로 내려가는 거야? 더 깊이 들어가면 난 숨을 쉴 수 없어."

"너희 가족 때문에 내가 밭에서 쫓겨났으니까 너를 잡아먹고 힘을 차려서 살기 좋은 곳으로 갈 거야."

카라카스는 두더지의 등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금방 커다란 발톱에 잡힐 게 뻔했어요.

"알았어. 하지만 나는 고블린 고기를 먹고 자라서 냄새가 심하고 맛이 없어. 날 그대로 먹었다간 네 몸에서 냄새가 나서 깊은 땅속에 숨어도 금방 잡히고 말 거야."

"그럼 어떻게 하지?"

"우유를 마시면 냄새가 사라지니까 그때 먹으면 돼."

"좋아. 그럼 우유는 어딨어?"

"고개 넘어 들판으로 가면 젖소가 풀을 뜯고 있을거야. 거기로 데려다주면 우유를 마실 수 있어."

늙은 두더지는 카라카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어요. 하지만 인간의 아이가 우유를 마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고민하던 두더지는 마침내 카라카스를 젖소에게 데려가기로 마음먹었어요.

들판으로 가는 길은 멀었어요. 땅 위로 달려가면 빨랐겠지만, 햇빛을 싫어하는 두더지는 지하로 가야 했지요, 카라카스를 등 위에 태우고서 말이에요.

두더지가 지쳐서 헉헉거렸지만, 카라카스는 도망가지 않았어요. 땅속에서는 두더지가 더 빠르니 금방 잡혀버릴 테니까요.

카라카스는 오히려 두더지의 수염을 단단히 붙잡고는, 빨리 가자고 재촉했어요. 오래 걸린다며 졸기까지 했어요. 두더지는 꾀를 부린다고 의심할 수 없었지요.

마침내 들판에 도착했을 땐 늙은 두더지는 숨이 차서 말조차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아기의 부드러운 살을 먹을 일념에 힘겹게 젖소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어요.

두더지가 판 구멍에서 폴짝 뛰어나온 카라카스는 젖소의 커다란 엉덩이에 달려 있는 긴 꼬리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어요. 젖소는 깜짝 놀라 날뛰기 시작했어요. 두더지는 젖소를 피할 힘이 없었어요.

두더지는 젖소의 딱딱한 발굽에 채여 날아갔어요. 그리고 벌통 위에 떨어졌어요. 집이 망가져 화가 난 벌들이 두더지를 향해 날아갔어요.

못된 두더지는 벌에 쏘여 죽고, 아기 카라카스는 걱정하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어요.


▲ 카라카스는 커서 모험가들을 이끄는 길드를 창설한다.


◈ 대모험가 카라카스 - 챕터 2

무럭무럭 자란 카라카스는 장난꾸러기 소년이 되었어요. 눈은 언제나 재미있는 것을 찾아 반짝이고 있었고 주머니에는 자신이 만든 장난감이 가득했어요.

어느 날, 카라카스의 형이 부탁을 했어요. "카라카스. 내 연이 서쪽으로 날아가버렸어. 찾아와 주겠니?"

카라카스의 발이 무척 빨랐기 때문에 부탁을 한 것이였죠. 카라카스는 형의 연을 찾아주기로 마음 먹었어요.

카라카스의 집 서쪽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어요. 날이 더워서 물을 마시는데 빨간색 그림자가 호수에 비치는 것이 아니겠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형의 연이 나풀거리며 날아가고 있었어요.

하늘에서 춤을 추던 연은 그대로 숲을 향해 날아갔어요. 카라카스는 덜컥 겁이 났어요. 숲에 살고 있는 마법사가 어린아이를 재료로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용기를 내며 숲으로 들어갔어요.

마법사의 숲은 아주 오래된 나무로 가득했어요. 얼마나 걸었을까? 카라카스의 눈앞에 마법사의 집이 나타났어요. 회색 지붕의 작은 오두막이었어요.

문을 두드리려고 했지만 문도 창문도 보이지 않았어요. 단단한 벽뿐이었지요. 안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어요. 그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커다한 소리가 났어요. 마치 천둥소리처럼 컸어요.

"꼬마야, 넌 왜 이곳까지 온 거냐?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라."

"제 형의 연을 찾으러 왔어요. 이쪽으로 날아왔는데 혹시 못 보셨나요?"

"그건 내가 주운 연이다. 그러니 이미 내 것이다. 돌아가라."

카라카스는 화가 났어요. 마법사의 태도는 도둑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래서 무서운 것도 잊고 마법사의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마법사의 집 앞에 작은 버섯이 있었어요. 집을 둘러보던 카라카스가 실수로 그 버섯을 밟자, 스르륵하고 아무 것도 없는 벽에 문이 생겼어요. 카라카스는 깜짝 놀랐지만 용기를 내어 집안으로 들어갔어요.

문의 안쪽은 길고 긴 터널이었어요. 벽에는 마법횃불이 활활 불타고 있었어요. 게다가 몹시 퀴퀴한 냄새가 나서 숨을 쉬기도 힘들었어요.

얼마나 걸었을까? 커다란 방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방 안 탁자에는 형의 연이 놓여 있었지요. 그리고 화가 난 마법사가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내 집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널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겠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 연은 제 형의 것이에요. 돌려주시면 돌아가겠어요."

하지만 마법사는 연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어요. 게다가 카라카스에게 마법을 걸어 평생 하인으로 부려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카라카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어요.

"좋아요. 연을 포기하겠어요. 당신의 하인이 되어줄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아주 맛있는 케이크를 저에게 주세요."

"그야 어렵지 않지." 마법사는 지팡이를 휘둘러 아주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만들었어요. 카라카스의 키만큼이나 크고, 온갖 과일과 과자로 장식된 휘황찬란한 케이크였죠. 살짝 맛을 본 카라카스가 고개를 저었어요.

"이건 맛있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케이크는 아주 맛있는 케이크에요. 당신은 그런 케이크를 만들 수 없나요?"

마법사는 화가 났어요. 자신의 마법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 케이크를 만들어 내었죠. 좁은 방은 금방 케이크로 꽉 찼어요. 카라카스는 몰래 형의 연을 등 뒤로 숨겼어요. 케이크를 만들기 바빠 마법사는 눈치채지 못했지요.

마법사는 케이크를 잔뜩 만들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었어요. "어떠냐, 꼬마야? 이 정도면 네가 맛이 없다는 예기를 하지 못하겠지?"

카라카스는 케이크의 맛을 보았어요. 혀가 녹아버릴 만큼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 달콤씁쓸한 와인이 들어간 케이크, 딸기로 장식한 케이크, 구운 바나나를 올린 케이크는 굉장히 맛있었어요. 게다가 곰처럼 커다랐죠.

"이 케이크는 귀족의 파티에서 먹을 만한 케이크로군요."

마법사는 또 화가 났어요. 자신이 만든 케이크가 왕들이 먹을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또 자꾸자꾸 케이크를 만들었어요. 방은 케이크로 꽉 차버렸기에 복도로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어떠냐? 이 정도면 네가 불만을 말하지도 못하겠지?"

"아까보다 훨씬 맛이 있군요. 하지만 왕이 먹을 정도밖에 되지 못해요. 황제라면 먹다가 밷어버릴 거에요."

잔뜩 화가 난 마법사의 얼굴이 씨뻘껗게 변해버렸어요. 그래서 지팡이를 계속 휘둘렀죠. 지팔이 끝에서 나오는 케이크는 정말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영웅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 같은 케이크도 있었고, 녹은 초콜렛으로 흘러가는 강의 풍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케이크도 있었지요. 카라카스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열심히 마법사를 부추기면서 더욱 커다란 케이크를 만들도록 했어요.

마법사와 카라카스는 점점 출구 쪽으로 뒷걸음질 했어요. 케이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지요. 케이크를 만들 것이 마법사 자신이기 때문에 마법사는 카라카스가 도망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너무 많은 케이크를 만들어서 지친 마법사가 헉헉거리면서 카라카스에게 말했어요.

"어떠냐? 이 정도면 황제도 감탄할 만큼 멋있고 맛있는 케이크지? 이제 불만을 말하지 못할 거다."

카라카스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정말 그렇군요. 황제가 먹을 만큼 맛있는 케이크에요. 그러니까 당신도 먹어보는 게 어때요?"

카라카스는 마법사를 케이크가 있는 곳으로 세게 밀었어요. 늙고 힘이 빠진 마법사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케이크로 가득찬 복도에서 넘어지고 말았어요. 마법 지팡이도 놓치고 말았지요.

재빠른 카라카스는 그 지팡이를 주워 옆에 있는 케이크를 무너뜨렸어요. 복도를 가득 채운 케이크는 마법사의 위로 쓰러졌지요. 마법사는 버둥거렸지만. 크림 때문에 미끄러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살려줘! 살려줘! 숨을 쉴 수가 없어! 케이크가 다 무너지면 난 죽고 말 거야!" 마법사가 비명을 지르자 문 바깥으로 나온 카라카스가 말했어요.

"거기서 나올 방법을 알려줄 테니 다시는 날 괴롭히지 말아요."

"알았어.. 널 괴롭히지 않을게. 어떻게 하면 이 케이크의 산에서 내가 빠져나올 수 있지?"

카라카스는 문 바깥에 있는 버섯을 밟았어요.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죠. 문이 완전히 닫혀 복도에 어둠이 찾아오기 전, 카라카스가 큰 소리로 말했어요.

"케이크를 다 먹으면 되잖아요. 그럼 살 수 있어요."

마법사는 고맙다며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문이 닫혔지요. 무사히 빠져 나온 카라카스의 손에는 마법 지팡이와 형의 연이 있었어요.

카라카스는 다시는 마법사가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지팡이를 부러뜨렸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형에게 연을 돌려주었어요. 이 일이 있은 후에 마을 아이들의 연이 난데없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요.


▲ 카라카스와 뜻을 함께 하고 싶다면 모험가 길드로!


◈ 대모험가 카라카스 - 챕터 3

추가 예정.




■ 품위있는 아라드인을 위한 넓고 얉은 지식

- Adventures' Guide to the ARAD -

◈ 품위있는 아라드인을 위한 넓고 얉은 지식 - 챕터 1

추가 예정.



◈ 품위있는 아라드인을 위한 넓고 얉은 지식 - 챕터 2

대전이

그란플로리스 숲 대화재로 마이어의 대마법진이 소실된 이후, 요정들의 희생으로 마법진이 복구되었으나 한번 망가진 마법진은 예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점점 약화되었다.

결국 약해진 마법진에 거대한 차원의 균열이 발생해, 커다란 전이의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전이에너지는 아라드에 있던 몬스터들과 인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아라드의 여러 지역에 중력역전을 일으켰다.

흑요정들의 지하도시 언더풋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지하수가 솟구쳐 미들오션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도 다 대전이로 인한 중력역전 때문이다.

그리고 대전이 때 터져 나온 전이에너지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아라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이

언젠가부터 시작된 차원이동 현상으로 생물을 비롯하여 건축물, 지역 등 온갖 것들이 아라드의 세계로 넘어온 것을 말한다.

모든 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으나 아직 많은 부분이 불명인 상태이다.


비명굴 사건

대전이가 일어나기 전, 비명굴이라 불리는 불길한 동굴에서 거대 누골들이 바깥으로 몰려나와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조사한 결과 비명굴 안에 누골보다 더 엄청난 괴물이 자리 잡았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제국은 군대를 보내어 퇴치하려고 하였으나 그 괴물의 이름이 '사도 시로코'라는 것만 알아냈을 뿐, 안쪽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괴멸되고 말았다.

이에 제국은 엄청난 포상금을 내걸었고, 아라드 대륙의 이름난 마법사와 전사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시로코를 처치한 사람은 단 네 명의 웨펀마스터뿐이었다.

시란, 브왕가, 아간조, 반이 그들이다. 사람들은 이들은 아라드를 구한 영웅이라 칭송하게 되었다.


귀신의 전투

데 로스국이 아직 제국임을 선포하기 전, 펠 로스 제국의 마지막 왕권을 강탈해 정통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 전투. 칸티온이라는 도시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그 치열함 때문에 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있다.

30만이 넘는 데 로스국의 군사를 맞아 단 2만의 펠 로스 제국군이 목숨을 건 방어전을 펼친 전투로, 이 때 펠 로스 제국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신관 지그는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귀신의 힘을 사용하였다.

그로 인해 데 로스군은 압도적인 군세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지그가 귀신의 힘에 먹히게 되면서 칸티온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카잔 증후군

소멸의 신 카잔에서 비롯되었다는 정신붕괴 상태. 증세가 악화되면 눈동자의 색깔이 변하고 신체능력이 대단히 상승하지만 이성을 잃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게 된다.

불치병이며 지나친 감정의 폭발을 피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생명을 연장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끔 한쪽 손이 기괴하게 변하기도 하는데 모든 환자에게서 발생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피하도록 하자.


위장자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는 악마. 사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혼돈의 신이 된 오즈마는 '피의 저주'를 내리는데 이 저주에 걸리면 위장자가 된다.

위장자에게 습격 당한 사람 또한 위장자로 변하게 된다. 겉모습으로는 위장자와 정상인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고, 억울하게 마녀사냥을 당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

오로지 프리스트만이 위장자를 알아볼 수 있다. 검은 성전 이후 위장자는 대부분 숙청하였으나 아직도 안심해서는 안된다


◈ 품위있는 아라드인을 위한 넓고 얉은 지식 - 챕터 3

데 로스 제국

펠 로스 제국의 멸망 이후 후계자들이 펠 로스의 부활을 외치며 건국한 나라. 수도는 제 1령에 있는 황금의 도시 비탈론이며, 절대권력의 황제가 다스리는 중앙집권국가이다.

데 로스 제국은 팔로만을 중심으로 남부의 제 1령, 북부의 제 2령으로 구분된다. 엄격한 군사문화의 남부와 밝고 개방적인 북부는 서로 분위기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결속력이 강하여 아라드의 남부지역은 제 1령이, 북부지역은 제 2령이 주도하여 야심차게 대륙 통일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데 로스 제국의 국민들은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평화와 질서를 사랑한다.


펜네스 왕국

흑요정들의 오래된 왕국. 수도 언더풋을 중심으로 지하 세계에서 성장한 국가다. 처음 흑요정 왕국을 세운 것은 펜네스의 위대한 왕 군트람으로, 원로원이 창시되고 나서야 흑요정들은 세계적인 왕국의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언더풋이 지상으로 부상한 현재는 군트람의 직계 후속이자 왕족인 메이아 여왕이 펜네스를 지배하고 있으며, 장로 샤프론을 비롯한 원로원들이 그녀를 보좌하며 펜네스를 통치하고 있다.


벨 마이어 공국

수도는 헨돈 마이어. 벨 마이어는 요정어로 '선한 사람들의 국가'라는 뜻이다. 스카디 발로아 마이어 여왕을 모시는 3명의 의원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제국과 수쥬로 통하는 붉은 숲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비옥한 대평야지대가 있어서 식량은 넉넉한 편이었다.

회화, 음악, 시, 문학, 출판 들 다양한 분야의 문화가 골고루 발달하였고 사람들은 낙천적이었다.

그러나 그란플로리스를 중심으로 발생한 대전이로 인해 벨 마이어의 지역 대부분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경으로 변하고, 공국은 500년 역사를 끝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쥬국

수도는 쇼난. 현재 통치자는 쇼난 아스카. 펠 로스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으나 자국의 기록으로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아라드 대륙의 서북쪽에 위치한 소국으로 복식과 언어, 문화가 다른 나라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키가 작고 마른 반면에 재빠르고 넨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 많다. 좁은 토지에 만족하고 살고 있을 정도로 성향이 온순하지만 전시에는 산과 계곡과 동굴로부터 나온 많은 넨마스터들이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친다.

쇼난의 외곽지역에는 젊은 넨마스터들이 운영하는 도장이 있으며 시장에 가면 좋은 도를 싼 값에 흥정해 볼 수 있다. 휘청거리는 취객이라고 무시했다간 엄청난 검술을 쓰는 무사로 돌변하므로 이곳에서 나쁜 짓은 금물이다.


펠 로스 제국

'소멸의 카잔'과 '혼돈의 오즈마'가 인간이었을 때 살고 있었던 나라. 현재의 데 로스 제국의 전신이기도 하다. 지금의 데 로스 제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처럼 당시의 펠 로스 제국도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특히나 전설로 남은 카잔과 오즈마 생존 당시의 위용은 대단했는데 실질적으로 아라드 대륙 전체를 통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즈마가 혼돈의 신이 되면서 생겨난 위장자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서서히 멸마하였다.


◈ 품위있는 아라드인을 위한 넓고 얉은 지식 - 챕터 4

추가 예정.



◈ 품위있는 아라드인을 위한 넓고 얉은 지식 - 챕터 5

추가 예정.




■ 연금술사의 친구

- A Friend of alchemist -

모건: 오랜만이로군 클론터. 잘 있었나?

클론터: 모건! 오랜만이로군. 언더풋엔 언제 온 건가?

모건: 막 도착한 참일세. 여왕님께 보고를 드리러 가기 전에 자네 얼굴이나 볼까 싶어서 말이야. 라미도 건강해 보이는군.

클론터: 그런데 그 꾸러미는 뭔가?

모건: 자네가 난쟁이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갖고 온 걸세.

클론터: 그거 고마운 말이로군. 선물은 뭔가? 피로회복제인가?

모건: 아니. 강력한 끈끈이 풀일세. 이걸 황금에 발라 이곳저곳에 놔두면 난쟁이들이 손이 철썩 달라붙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네. 그럼 그들을 모아서 자네의 특기인 설득을 시도해볼 수 있을 거야.

클론터: 음...난쟁이들이 화만 나지 않을까? 설득하러 갔다가 도끼를 던져오면 큰일인데.

모건: 처음에 놀라서 손을 떼려고 양손을 붙일 테니 도끼를 던질 손도 없을 걸세.

클론터: 마치 여름날에 벌레를 잡는 것 같군.

모건: 바로 그걸세. 그리고 이건 아마도 성장촉진제인데...

클론터: '아마도'?

모건: 동물 실험을 해봤더니 성장 속도가 빨라지더군. 통상 두 배 정도? 문제는 성향도 좀 난폭해져서 제어가 힘들더라고. 아... 그리고 특이하게 머리에서 뿔이 나던데... 난쟁이들은 좋아하지 않을까?

클론터: 절대로 자네가 난쟁이들에게 다가가게 내버려 둬선 안되겠군.

클론터: 손의 상처는 뭔가? 실험하다가 다친 건가?

모건: 오는 길에 새끼 쥐를 한 마리 잡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물어뜯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잤네. 지나가던 모험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해골이 되어 여기 도착했을 거야.

모건: 아무튼 너무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지 말게. 난쟁이들에게 키 크는 약으로 꾀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전에 보니 키와 덩치가 클 수록 난쟁이들 사이에서 떠받들어지는 것 같던데 말이야.

클론터: 모건... 나는 그들과 대화를 하려는 것이지 먹이로 낚으려는 것이 아닐세.

모건: 하지만 자네가 대화를 하려고 해도 자네 앞에 나타나질 않지 않나? 그래서 이런 게 있으면 그들도 돌 뒤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게 더 쉬워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모건: 그럼 이건 어떻나? 여기까지 오다가 발견한 특이한 열매의 씨를 빻아서 술에 섞어봤는데 잠이 확 깨더군. 그리고 이건...

클론터: 아니 잠깐만. 도대체 이 꾸러미 안에 뭐가 있는 건가? 말을 들어보니 제대로 만든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모건: 아. 눈치 챘나? 사실은 논문의 주제가 영 생각나질 않아서 말이야. 여왕님께 실버크라운의 생태에 대해 보고를 드린 후에 학술원에 들러야 하는데 요새 실버크라운 쪽에 꽤나 일이 많았거든.

모건: 나도 좀 바빠져서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제출일을 깜빡 넘겼지 뭔가... 답답해서 오는 길에 보이는 재료로 무작정 만들어 봤지.

클론터: 하아... 그럼 이 많은 짐이 실버크라운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심심풀이로 만든 약이란 말인가? 세상에, 언더풋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겠군!

모건: ...음? 오호...

클론터: ...안 되네. 언더풋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만은...

모건: 심심풀이라. 그거 괜찮은데? '심심풀이 삼아서 생활의 재료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약'을 대충 정리해서 내면 어떨까? 학술적이진 않지만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입문서 정도로 썼다고 하면 할아범들도 까다롭게 굴지 않을 텐데 말이야.

모건: 좋아. 클론터. 펜하고 종이를 좀 빌려주지 않겠나? 그리고 라미도 잠깐 빌려주게.

클론터: 라미나비엔토는 왜?

모건: 조용한 곳에 가서 쓰려고.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언더풋의 소음에 지워지기 전에 빨리 종이에 담아야겠네!

클론터: 빌려주는 것은 좋지만 그 이상한 약 중 하나라도 라미나비엔토에게 닿게 하지 말게.

모건: ...오?

클론터: 절대로 안 돼.

모건: 알겠네... 그럼 다녀오겠네! 여왕님께는 일이 생겼다면서 대신 보고해주게나.
자, 여기 보고서. 그럼 부탁하네!


클론터: 뭐? 아차, 모건!

클론터: 모건!

샤란: 안녕하세요. 모건 님이 언더풋에 오신 것 같아서 함께 입궐할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만... 제 예상에서 한 치의 벗어남 없는 일이 벌어진 모양이로군요. 이번엔 또 어떤 기발한 방법으로 당하신 건가요?

클론터: 하아...하하하... 워낙 자유로운 성향이기도 하고, 왕궁 안의 사람들을 대하기 어려워 해서 저렇습니다. 왜 모험가가 되지 않았나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샤란: 그렇군요. 하지만 여왕님께 보고는 하셔야 할 텐데요.

클론터: 보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대리 보고자로서 제가 가는 수밖에요. 모건 때문에 연금술 지식이 늘어나는게... 나쁘지는 않지만 이게 과연 정상인가 싶습니다.

샤란: ...특이한 분이시지요. 저분은.

클론터: ...휴우우...


▲ 에픽 퀘스트에서 별 비중이 없던 모건이 이런 성격일 줄이야...

▲ 그래도 클론터는 모건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하급기사 교육일지

- lennys educational journal -

◈ 하급기사 교육일지 - 챕터 1

9월 4일.

오늘은 훈련소가 끝나고 드디어 합격 발표를 하는 날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합격 발표장으로 들어가는데 엄마가 입구까지 따라오며 시시콜콜 잔소리를 했다.

내가 잘해야 집안이 산다는 둥, 기사님들 말씀 잘 들으라는 둥... 엄마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다.

발표장에 가니 이미 많은 하급기사들이 모여있었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발표가 나올 때마다 시끄러워지는 바람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마리 그 계집애가 합격 소리 듣자마자 난리칠 때는 정말 때려주고 싶었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어 소란스러웠지만 내 결과는? 당연하지, 합격이다! 그것도 공동 2위! 1위를 못하다니 아쉽긴 하지만 반 발슈테트 님이 계시는 아이언울프에 배속되었다! 만세!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랑 공동 2위를 받은 그 남자애는 어디로 갔을까?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은데.

형식은 까다롭게 굴지 않겠다곤 했지만 너무 어린애처럼 쓰지 마라. 헤몬 데리케는 시론스 백작 휘하의 수호 기사단에 배정된 걸로 알고 있다.


9월 5일.

제2 연병장 집합에서 장시간 훈련, 저녁 7시 환영회, 맛은 별로. 단장님은 불참.

제일 많이 먹은 놈이 맛없다고 하는 건가. 단장은 왔었다. 네가 고기완자를 던져댔던 그 남자인데... 기억이 없는 거냐? 술 좀 줄여.

그리고 이것보다는 자세하게 적어라. 너무 간략하다. 이래서는 도움이 안 돼.



9월 6일.

오전 5시 32분 23초에 제2 연병장에서 검술 훈련을 시작, 약 3시간 42분 동안 계속. 14분을 걸어 식당에 도착하여 12분 동안 기다려서 배식을 받음.

메뉴는 절인 고기와 삶은 콩과 감자, 피클, 치즈와 브로콜리 수프, 절인 고기의 질김 정도는 적당했지만 너무 구웠음. 삶은 콩은 약간 비릿한 맛이 났고 이에 불만을 가진 인원은 23명 정도.

삶은 감자는 식어가고 있었기에 평이 좋지 않았으나 크기는 적당하고 익기는 다 익었기에 먹을 만은 했음. 수프는 고소해서 좋았지만 브로콜리라는 재료 선정에서 다소 호오가 있었던 것 같음. 피클은... 죄송합니다. 지면이 부족합니다.

그렇게 적고 싶으면 오전 5시 30분부터 약 4시간 검술 훈련 후 오전 식사. 이런 식으로 적어라. 근데 왜 훈련보다 식사가 더 자세한 거냐?


9월 7일.

검술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펜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팔이 떨려서 잉크가 자꾸 튑니다. 검술 훈련은 열심히 하자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살다살다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이거 보자마자 당장 나한테 튀어와.


9월 8일.

휴일, 집밥도 먹고, 단검도 사고, 머리끈도 사고, 구두도 사고, 과자도 사고, 행복행복!

추신) 부단장님, 아까 맘대로 적어도 된다고 하셨죠? 이렇게 써도 되죠?

그래 맘대로 적어. 무슨 말을 해도 이해를 못하니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래도 좀 영양가 있는 내용으로 쓰도록 노력해봐라.


9월 9일.

오늘은 정말 충격적인 날로 기억될 것 같다. 단장님이... 반 발슈테트 님이 유부남이었다니...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내용은 좀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나? 뭐가 힘들고 어려운지를 써야 내가 조언을 하든, 개선을 하든 할 거 아니냐? 혼자 보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보여주기까지 하면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내용만 자꾸 써대지 마.


9월 10일.

그저께 주워온 개가 밤에 자꾸 짖습니다. 피오나가 계속 짜증을 내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놈이었냐. 당장 끌고 와.


▲ 모험가에게 당당히 결투를 신청하며 첫 등장했지만.

▲ 부단장한테도 치이고.

▲ 모험가한테도 패배하고.

▲ 또 사과까지 한다. 이렇게 불쌍한 첫 등장이 있을까?


◈ 하급기사 교육일지 - 챕터 2

10월 4일.

기사단에 들어온 지 딱 1개월이 되는 날이다. 훈련이 끝나고 부단장님이 하급기사들만 따로 모아놓고 고생했다고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동안 힘들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시험 결과를 발표하셨다. 지나, 베시, 돈, 게일은 떨어지고 나와 피오나, 덴이 남게 되었다. 예상은 했는데 결과 발표를 들은 후에야 안심이 되었다.

떨어진 애들은 다시 훈련소에 들어갈 것 같은데 지나는 기사를 그만두겠단다. 재능이 없는 걸 이제야 인정했나보다. 집에 돈이 많다고 잘난 척만 하더니 꼬시다.

그리고 돌로레스 선배는 오늘 정식으로 기사가 되셨다! 귀족이었으면 벌써 기사로 활약하고 계셨을 텐데… 하지만 정말 대단하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가? 되고 말테다!

아참 그리고 오늘부터 일지 검사는 안한다고 하셨다. 솔직히 어린애도 아니고 일기 검사 받는 거 같아서 좀 그랬는데 다행이다. 그래도 부단장님하고 글로나마 대화 할 기회가 있어서 좋았다.

대부분 혼나기만 했지만… 아직은 괜찮겠지? 아, 이제 여기에 아무 거나 써도 되는거지? 내일 훈련 단장님이 봐주러 오시면 좋을 텐데… 바쁘셔서 어쩔 수 없나. 아쉬워라.

뒹굴뒹굴하고 싶다. 검 새로 사고 싶다. 오늘 술집에서 만난 모험가 짜증나. 사과 먹고 싶다. 빨리 정식 기사되고 싶다… 아아 졸려! 아침 훈련 빼먹고 싶다아!

바보인 줄은 알았는데 정말 바보군. 오늘 아침에는 왜 내 책상에 놓고 갔냐? 내가 어제 말 안 했나 했다. 내일부터 1시간 일찍 일어나서 잠 깰 때까지 연병장 돌아.


10월 5일… 죽을 뻔한 날.

아침에 연병장 돌면서 졸다가 담장에 부딫히고 부단장님께 크게 혼났다… 하급기사 전원이 연병장을 오전 내내 돌고, 오후에는 땡볕 아래서 기사단 전체가 프록실 산 정상까지 뛰었다… 그리고 기초 훈련이 밤까지…

피오나가 날 죽이려고 했다. 내가 실수해도 웃으며 봐주시던 그레이 선배 마저도… 정말… 우리 단 전체가 날 죽이겠다고 했다… 내일 모두에게 한턱을 쏴야겠다. 내 월급… 난 왜 이렇게 잠이 많을까…


10월 8일.

단장님이 오랜만에 오셔서는 모두에게 저녁을 사주셨다. 그리고 식당에서 옛 공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뜬금없는 발표를 하셨다. 특무라고 하시는데 뭘 하게 될지는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들 먹다 말고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얼 하게 되는 걸까? 덴은 그래도 북부로 가지 않게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는데… 솔직히 옛 공국이면 폐허뿐일 텐데 그런 곳으로 보내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10월 11일.

이동 날짜가 구체적으로 정해졌다. 정말 갑작스럽게 먼 곳으로 가게 되어서 다들 당황하는 눈치다. 혹시 전쟁이 벌어지는 건가?

가증스러운 흑요정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기쁜 마음으로 싸우러 가겠지만 도통 목적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단장님과 부단장님은 하루 종일 회의하러 궁에 가시고서는 훈련장에 나와보지도 않으신다. 큰일이 벌어지는 걸까?


10월 15일.

다들 수군수군한다. 기왕이면 진짜 엄청난 일이 벌어지면 좋을 텐데. 단장님은 내 또래일 때 검술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셨는데… 나도 기회만 오면 제국의 기사로서 이름을 드높이고 싶다. 단장님이랑 대등한 위치에 서서 나도 기사단을 이끌고 싶다.

그치만 힘들겠지 이름난 가문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면 이번 장기 임무에서 공을 많이 세울 수 밖에. 힘내자!


▲ 언더풋에서의 재회.

▲ 전에 만날 때랑 어째 달라진게 없는것 같다.


◈ 하급기사 교육일지 - 챕터 3

7월 2일. 와아 벌써 다섯 권째네.

흑요정의 마가타를 타고 베히모스 위로 올라왔다.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지만 피오나가 비웃을까 꾹 참았다. 기집애. 단장님 앞에서 날 까지 못해 안달이라니까.

전에 부단장님한테 혼날 때도 어찌나 깔깔거리며 웃던지… 요즘은 모험가보다 얘가 더 짜증 난다. 내일부터는 굉장히 바빠질 거 같으니까 이만 자야지.


7월 15일.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적자면 끝도 없겠지만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웨펀마스터들을 만난 일이다. 달인답게 한 걸음 걷는 동작에서도 군더더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경지에 달하는게 저런 거로구나.

부단장님이 평소에 말씀하시던 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단장님도 달인의 면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앞에서는 굉장히 유쾌하게 행동하시니까 잘 알지 못했는데…

아무튼 그 두분을 보고 새삼 보이는 것도 있다. 이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보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미들오션! 숨을 쉴 수 있는 바다에 내가 정말 들어가게 될 줄이야. 정말 엄청나다. 듣기만 한 거랑 실제로 가보는 거랑 정말 차이가 크구나.

이런 경험 때문에 모험가들이 모험을 계속 하는 걸까? 아무 데나 몰려가서 분탕 치는 녀석들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이해가 되기도 한다.


7월 28일.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단장님은 상당히 짜증이 나신 것 같고, 부단장님도 우리 앞에서는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조사는 계속하고 있는데 무엇을 찾는 것인지 자세하게 전달받지 못했다.

명령이니까 따르고는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GBL교의 사람들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7월 30일.

얼마 전부터 몸이 좀 무거운 게 상태가 영 좋지 않다. 긴장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사도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사도라면 단장님이 비명굴에서 쓰러뜨렸던 그 괴물일 텐데… 설마 그런 녀석하고 싸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8월 3일.

피오나가 겁 먹은 거냐고 비웃길래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솔직히 여기에 있는 사람중에서 겁이 안 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저렇게 말하는 피오나도 지가 겁나니까 괜히 저러는 거다.

단장님이 사도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모두 긴장했지만, 영웅이 될 기회라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단장님은 별거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평소보다 까다롭게 장비를 점검하셨다. 어차피 단장님과 다른 웨펀마스터가 있으니까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긴장된다.


8월 9일.
떨린다. 내 첫 무대는 전쟁터일 거라 생각했는데 사도라니… 잠이 안 온다. 지금이라도 본국에 지원 요청하면 안될까?


8월 11일.

덴이랑 부단장님을 찾아갔다. 피곤하신 것 같았다. 하급기사는 이번 작전에서 빼고 싶은데 인원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도 우리는 단장님이 데리고 가실 거라고 하셨다.

기사가 이러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무섭다. 하지만 제국의 기사니까 모험가나 GBL교 앞에서 약해 보이면 안되겠지. 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제국 전체의 위신이 걸린 문제니까…


8월 12일.
내일 출발할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보고싶다.


8월 13일.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조금 후에 출발할 것 같다. 사도고 뭐고 싫다. 가기 싫은데… 나중에 돌아와서 이거 보고 괜히 야단 떨었다며 부끄러울지도 모르니까 여기까지만 적어야지… 진짜 가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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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잘 쉬어라.


▲ 사도 로터스와의 전투에서 낙오한 레니.

▲ 레니를 끝까지 챙기는 하츠.

▲ 그러나 구하러 갔을때는 이미 늦은 상태...

▲ 로터스의 손에 당하고 만다.

▲ 죄책감 때문인지 사건 이후에 한동안 하츠가 등장하지 않는다.



■ 천계에 부는 바람

- New Generation Of The Highland -

◈ 천계에 부는 바람 - 챕터 1

천계군을 지휘하여 카르텔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던 최고 사제 벨드런이 세상을 떴다. 천계 백성들은 카르텔이 입힌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큰 슬픔을 맞이해야만 했다.

자진해서 상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어버이가 죽은 듯 곡을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천계 지도부는 슬픔에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안정을 위해서도 빨리 벨드런의 빈 자리를 채워야했다.

천계의 최고 사제위는 선대의 유언을 통해 계승된다. 화려한 계승식은 축제이기도 하므로, 다른 때 같으면 빠르게 진행되었을터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벨드런 님이 서거하신 지 벌써 열흘. 슬슬 에르제 님의 계승식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전쟁의 피해를 빨리 복구하기 위해서라도 최고 사제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오만... 좀 더 기다려봅시다."

"웨인 공. 여기까지 와서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벨드런 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의 후계자로 그분을 지목하셨습니다.
그 뜻을 무시할 생각입니까?"


다소 성급히 몰아붙이는 페트라 노이만의 말에 대귀족 안제 웨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누가 무시한다고 했습니까? 다만 전쟁의 뒷처리가 급한 이 때에 너무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는 어렵지 않냐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총명하시긴 하나 아직은 더 배우셔야 할 시기입니다."

좁지 않은 회의실이 한숨으로 채워졌다. 너무나 막중한 자리, 한시라도 비울 수 없는 자리. 하지만 여염집에서 나고 자란 어린애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하지만,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최고 사제가 과연... 이런 시기에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오?"

"... 별말 아닙니다. 그저 저 패악한 카르텔이 방자하게 황도에 쳐들어온 것을 생각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전쟁에 필요한 것은 사제의 능력이 아니었지요."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워야할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테레사 슐츠의 말에 넓은 회의실이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찼다.

"분명 벨드런 님께서는 카르텔을 염려하시지 않았소?
게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직접 선봉을 이끄시어 혁혁한 공을 세우고 놈들을 무법지대로 쫒아내셨잖소."

"그렇습니다. 훌륭한 '지휘관'이었지요."

"......"

"자자, 모두 진정들 하십시오. 각자 생각하시는 바가 있을 테고 논의할 가치도 충분하지만 지금은 먼저 상을 제대로 치르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날카로워지려는 분위기가 유르겐 가의 수장, 네빌로 유르겐의 말에 수그러들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 회의장에 모인 모두가 각자의 가문을 대표하는 자였으나,
그만큼 묵직한 발언권을 가진 자는 없었다.

하지만 유르겐은 자신의 뜻을 설파하기는 커녕, 격앙된 회의장의 분위기를 가라앉힐 뿐이었다.

"에르제 님의 나이가 어리신데 우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더욱 불안한 마음을 가지시게 하는 것은 아니될 일입니다. 이 일은 추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시지요."

"유르겐 공의 말씀이 맞겠구려. 그럼 저는 이만..."

"저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휴우. 말들이 많군요. 그럴 거라곤 생각했습니다만 왠지 지치는군요."

"이런, 제가 장군 앞에서 피곤하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지요. 괜찮으십니까, 장군? 전쟁의 피로가 아직 채 풀리지 않으셨을텐데요."

"괜찮소."

귀족들이 회의장을 나간 후 남아있는 자는 유르겐과 대장군인 잭터 에를록스뿐이었다.
벨드런 사후 천계의 최고 사령관의 자리에 올라섰으나,
잭터의 낯빛에는 한점의 교만과 기쁨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무법지대 출신으로 이 정도의 지위에 올라선 자는 없었다.
벨드런이 그를 황도로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시골 촌놈이 곧 나가떨어지리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글아이라고도 불리는 이 남자는 그런 험담쯤 가볍게 무시하듯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군인의 정점을 찍었다. 이 남자를 어떻게 다루어야하는가...
말 한마디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치열한 정치판을 제 손금 보듯하는 유르겐이지만
잭터의 생각만큼은 읽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유감입니다. 벨드런 님께서 장군의 취임식을 보고 싶어하셨을텐데."

"시끄럽고 화려하기만 한 취임식 따위로 눈을 어지럽히지 않으셨으니 오히려 다행이오. 그럼 나도 이만 돌아가겠소."

군인답게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일어서는 잭터를 유르겐은 붙임성 좋게 따라붙었다.

"아, 사령부로 돌아가십니까? 저도 방향이 같으니 같이 가시지요.... 날이 참 좋군요. 이렇게 좋은 날에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다 벨드런 님과 장군의 덕택입니다."

"나보다는 장병들이 애썼소."

"하하. 너무 겸손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병사들도 용감히 맞섰지만 훌륭한 지휘가 있었기에 그들이..."

큼직한 걸음을 옮기던 잭터가 자리에 우뚝섰다.

"유르겐 공.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하시오. 나는 무식한 사람이라 귀족들의 기품있는 회화에는 익숙하지가 않소."

"대단찮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구름이 걷히니 햇볕이 들어 날이 참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구름은 저절로 물러가는 법이오. 조바심 낼 것도, 억지로 바람을 일으킬 필요도 없소."

날씨 이야기였지만 결코 날씨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자라면, 이 수라장 같은 다툼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라면
유르겐의 숨은 뜻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낸 잭터의 얼굴에는
감정을 읽을 만한 아주 작은 변화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하지만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유르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럼 장군, 저는 이쪽으로 가야하니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중에 장기나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그럽시다."

귀찮은 사람에게서 드디어 풀려난 잭터의 목소리에는 옅은 해방감이 묻어있었다.
그래서 유르겐은 더 아리송해질 수 밖에 없었다.


▲ 유르겐 가의 수장, 네빌로 유르겐.

▲ 천계의 최고 사령관, 잭터.


◈ 천계에 부는 바람 - 챕터 2

벨드런 사후 열닷새째가 되는 날.
잭터는 수행원도 모두 물리친 채 한 소녀의 방을 찾아 정중히 노크를 했다.

"에르제 님. 잭터 에를록스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잠깐만요, 열어드릴게요."

깊은 고동색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키가 큰 장군의 허리에 겨우 닿을까 싶은 작은 소녀가 '긴장된 표정'이라는 훌륭한 견본을 보여주는 얼굴로 목이 꺾어져라 올려보았다.

"안녕하세요, 장군님. 오늘은 총 연습 안 하시나요?"

"하도 많이 쏴댔더니 손가락에 쥐가 내려서 말입니다. 가끔은 쉬어 줘야겠더군요."

에르제는 진심으로 놀랐다.

"네? 손가락에 쥐가 와요? 쥐는 총을 좋아해요?"

"하하. 그 쥐가 아니라 근육이 갑자기 당겨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아플 때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에이 재미없어."

"벨드런 님이 돌아가신 후 힘들지 않으실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신지요?"

"......집에 가고 싶어요."

어린아이가 슬픔을 감출 때 으레 그러듯 하얗게 굳어버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슴에 맺힌 것이 풀리지 않았는지 에르제는 주저하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긴 무서워요."

"그렇지요. 저도 집에 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아저씨... 아니, 장군님 집은 어디에 있어요?"

"제 집은 웨스피스에 있습니다. 못 간 지 한참 됐군요."

"왜요?"

잭터는 어린아이에게 말해도 될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성격대로 툭 터놓고 얘기하기로 했다.

"황도로 올 때 같이 가자고 했는데 고향을 떠나기 싫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내와 딸을 두고 왔지요. 많이 후회됩니다."

"음... 장군님은 제일 높은 장군님이니까 병사들한테 데리고 와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럼 좋겠군요. 하지만 전쟁이 막 끝났는데 제 가족 때문에 병사를 무리하게 움직일 수야 없지요. 병사들도 지쳤으니 집에 가서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겠다. 저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에르제 님이 이곳에 오신 지 얼마나 되었지요? 반년 좀 됐나요? 가족이 많이 보고 싶으시겠습니다."

"네... 근데 안 보내줄 거죠? 저는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그렇습니다."

잭터는 딱히 무겁게 말하지 않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어린 소녀는 충분히 무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이곳에 오게 될 거라는 거... 왠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알고는 있었어요. 혼자 큰 방에 앉아 있게 될 거라는 거..."

"혼자는 아닙니다. 모두가 곁에 있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네에..."

에르제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미 그런 겉치레 위로는 지겹도록 들은 터였다. 그러나 잭터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든 것이 힘들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슬픔과 외로움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웃어도 괜찮습니다."

"아직은?"

"나중에는 기쁠 때 울고, 슬플 때 웃어야 하는 일도 생길 겁니다. 지도자의 자리는 언제나 고독해서 가면을 쓰지 않으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지요."

"그런 거 싫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현실을 바꿀 힘이 제게는 없습니다."

잭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 말을 어린아이에게 해도 되는 것인가... 제정신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잭터는 에르제의 총명함과, 이 소녀를 후계자로 선정한 벨드런을 믿기로 했다.

"최고 사제라는 자리는 무척 불안합니다. 이 황국의 중심으로 떠받들어지면서도 황제는 아니며 실질적인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의심받고, 남이 필요할 때만 책임자의 책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당신이 짊어질 짐입니다."

"......"

"당신을 두고 허수아비, 혹은 꼭두각시라고 부르는 자가 얼마든지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에르제 님. 그들의 말을 모두 무시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부려먹기 쉬운 최고 사제가 아니라 황제가 되도록 하십시오."

"황제요?"

천계에서는 듣기 어려운 단어였기에 영민한 에르제도 그저 눈을 깜빡이는 수밖에 없었다. 잭터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는 모래로 쌓은 성처럼 쉽사리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귀족의 세력은 지나치게 크며. 권력의 중심은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래서야 바칼처럼 강력한 적이 나타나면 금방 흩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은 모두 죽어버리겠지요. 그 전에 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하여 단단하게 뭉쳐주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가 하시면 되지 않나요?"

겁먹은 에르제의 애원 같은 물음이었으나, 잭터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안 됩니다. 저의 사고는 전투로 굳어진 지 오래고, 타인을 적과 아군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게다가 저는 군인입니다. 제가 지배자의 자리에 오르면... 뭐, 갈아엎기는 쉽겠습니다만 좋지 않은 선례가 생기고 맙니다. 누구나 힘으로 이 나라를 뒤엎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겠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뭔데요?"

"저는 귀찮은 게 딱 질색이라서요. 업무 마치면 바다도 보고, 술도 좀 마시고, 친구와 이야기도 해야하거든요. 황제는 그걸 못 해요."

앞서 열거한 다른 이유보다 노는 게 더 중요하다는 듯한 잭터의 말투에 에르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에에... 저도 노는 게 좋은데."

"물론 에르제 님도 적당한 사람 잡아다가 자리에 앉히고 도망가 버려도 되겠지요. 그렇게 하고 싶으십니까?"

에르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열심히 생각하더니 혀를 삐죽 내밀며 웃었다.

"제가 떠나버리면 다른 사람이 이 넓은 방에서 떨고 있어야 하죠? 그건 싫어요. 그리고 또... 아저씨가, 아차, 장군님이 이 나라에서 제일 세죠?"

"어쩌다보니, 네."

"장군님이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해볼게요. 이 나라가 위험해지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칠 테니까...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요. 근데 황제가 뭐에요? 최고 사제 친구에요?"

"옛날에 그런 게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과 사람을 잇는 자가 최고 사제라면, 사람들을 하나로 뭉쳐 강력하게 이끄는 사람이 황제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이름에 '황국'이 붙는 것도 옛날에는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고요."

"그건 좀 무서운데... 황제 말고는 없나요? 그 아래 거."

에르제의 진심 섞인 투정에 잭터의 말문이 막혔다. '황제의 아랫자리? 그게 뭐지?' 그 역시 황제라는 개념이 낮선 천계인이었다.

"음... 황제의 아래면 황녀 정도인가요."

"그럼 저 황녀할래요."

"하지만 황녀는 황제의 딸일 텐데요... 뭐, 황제의 자리는 성장하신 후에 오르셔도 되겠군요. 어차피 이 나라는 이름은 황국인 주제에 황제는 없었으니까 성인이 되기 전 과정이라고 말해두면 되겠습니다."

" 벨드런이 살아있다면 그게 뭐냐며 웃어넘어갔겠지.' 잭터는 갑작스레 사무치는 그리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떨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락하신 걸로 알고 가보곘습니다."

"또 땡땡이 치러 가시나요?"

"그러고 싶습니다만 제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어서요. 나중에 소개 좀 시켜주십시오."

물러가기 전에 경례를 하는 잭터를 어설프게 따라하던 에르제는 그가 방문을 열기 전에 퍼뜩 생각났다는 듯 쪼르르 달려가 그의 군복을 잡아당겼다. 그러곤 무릎을 꿇은 잭터의 귀에 소곤거렸다.

"있잔아요. 제가 황녀가 되면 장군님의 딸도 찾아줄 수 있겠죠? 그럼 저랑 친구 해달라고 하면 안돼요?"

"제 딸은 에르제 님보다 나이가 많은데요. 어린애끼리 노는 건 상관없지만 언니 노릇을 하려고 들 겁니다."

"와아, 저 언니 갖고 싶었어요. 제 언니 해주면 안 돼요?"

천진난만한 에르제의 말에 잭터가 콧방귀를 뀌었다.

"제 딸이 황녀의 언니면 저는 뭐가 됩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함정 파지 마시죠.안 그래도 밖에 나가면 죽을 맛입니다."

"에... 치사해."

"어른은 원래 그렇죠. 그리고 어린애는 심심하다고 자꾸 찬 바람 쐬지 말고 얌전히 계십시오. 황제든 황녀든, 즉위식에서 코 찔찔거리는 주군을 모시고 싶지 않으니까."


▲ 황녀님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다. 아니 지금도 어린데?


◈ 천계에 부는 바람 - 챕터 3

"...그러므로 나는 에르제 님을 황녀로 추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적극 지지하는 바요. 이상이오."

에르제의 최고 사제 계승식을 결정하는 자리였다. 어차피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그저 귀족원이 형식상의 승인을 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아주 조용하고 엄숙한 자리가 될 터였다. 그러나 천계의 최고 사령관인 잭터의 엉뚱하다 못해 기발한 선언은 평화로워야 할 회의실을 다시 한번 수라장에 밀어넣었다.

"황녀? 황녀라니..."

너무 당황한 탓에 제대로 말도 못 꺼내는 귀족들을 눈앞에 두고도 잭터는 태연스러웠다. 아니, 뻔뻔스럽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귀족들은 울화통을 터뜨렸고, 테레사 슐츠는 용감하게도 "제정신입니까?"로 시작하는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얻은 것 하나 없이 잭터가 왜 이글아이라고 불리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잘못을 저지른 신병처럼 얼굴을 붉혔다.

"...흠흠, 당연히 매우 깊은 생각이 있으셨겠지만... 하여튼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전례라면 카르텔의 대규모 공격이 전례에 없던 일이오. 그렇지 않소? 적어도, 바칼의 압세 속에 수많은 역사책이 불살라진 이후에는 처음 기록되는 일이라고 들었소만."

"하지만 황녀라 함은 황제를 고려에 두고 있다는 말인데, 에를록스 장군은 이 나라가 어째서 황제를 버리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십니까?"

"바칼이 스스로 왕 노릇한 것에 질려서라고 알고 있소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괴물의 독재체제에 긴 시간 고통 받았으며, 따라서 각자의 의견이 존중받는 체제를 유지 및 발전시키자고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황제를 내세우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어린 에르제 님이 그런 중책을 맡을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어리지만 착하고 총명하시니 적절히 보좌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안 될 거라고 보오. 그리고, 중책을 맡을 수 있겠냐는건 무슨 뜻이오? 그분은 황제가 아니더라도 최고 사제의 자리에 오를 분이오. 이미 이 황국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고 계시오. 그대의 말은 듣기에 따라 꽤나 불경스럽게 들리오만."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고 사제와 황제는 명확히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악습이라 판단하여 버린 것을 왜 다시 취해야 한단 말입니까?"

당황하긴 헀으나 이 회의장에 모인 귀족의 수장들은 허투루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몹시 날카롭고 촘촘하게 잭터의 주장을 파고들었다. 실로 교묘하기 이를 데 없이 잭터의 의도를 왜곡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제아무리 준비를 갖춰왔다고는 해도 하루아침에 달변가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잭터가 준비한 재료가 모두 떨어지기 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유르겐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에를록스 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바꿀 의향이 없다는 것도. 하지만 이 사안은 저희 귀족원에서도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시간을 좀 주셔야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오늘 조회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시지요. 귀족원 소집은 제가 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귀족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 유르겐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후우. 제 예상보다 훨씬 저돌적이시군요. 좀 더 돌려서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요령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소만, 일부러 에둘러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소."

"장군께서는 자신의 발언이 귀족원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줄지 고려하지 않으십니까?"

"실상 이름만 바뀌는 거잖소. 어차피 나라의 일은 최고 사제가 결정하는데, 그 이름이 황제로 바뀐다 한들 달라질 게 뭐가 있겠소?"

"다릅니다. 정치인은 조그만 것에 매달리는 족속입니다. 그런데 장군이 던진 것은 이곳의 판세를 뒤집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이름만 바뀌는 게 아닐 테지요. 그런 식으로 절 시험하지 마십시오."

잭터는 조용히 유르겐을 바라보았다. 네빌로 유르겐. 젊은 나이에 귀족원의 실세를 거머쥔 남자. 이름뿐인 최고 지도자를 제외한다면 그가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잭터는 유르겐의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잭터의 의도는 명확했고 큰 충돌이 일어날 것은 각오한 바였다.

그러나 가장 반대하고 나서야 할 유르겐이 알듯말듯한 입장을 견지하며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대귀족의 수장이 황제 중심의 권력구조를 원한다고? 정말로?

잭터로서는 이런 정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됐다. 비단 벨드런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잭터는 그토록 무시하던 무법지대의 쓴맛을 본 지금이 아니면 이 나라가 바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시작한 싸움. 유르겐은 도대체 어떻게 나올 것인가.


"아무튼 그럴 뜻이 있으셨다면 제게 먼저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일이 복잡해지겠군요."

"나에게 찬성하는 거요?"

"장군의 말씀은 벨드런 님의 뜻이었지요?"

"...유언이었소만 어찌 아는 거요?"

"벨드런 님이 에르제 님의 이름에 '베가'를 붙여주셨을 때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베가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황권 또한 가장 강력했던 황제의 이름이지요. 요즘 와서는 아는 사람이 적습니다만."

"하여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장군이 나서실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압적인 방법으로 일을 추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유르겐의 말에는 명백히 탓하는 뉘앙스가 배여있었고 잭터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이 일은 저에게 맡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벨드런 님의 뜻은 제가 반드시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하겠습니다."

(네빌로 유르겐... 무슨 꿍꿍이인가. 귀족원의 뜻대로 흘러가는 천계를 황제의 강력한 통치 하에 두겠다는 벨드런의 뜻을 알아챌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 남자를 적으로 두기에는 에르제 님도 너무 어리고, 뒷받침해 줄 세력 또한 없다... 이거야 원.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이 훨씬 마음이 편하겠군.)

"유르겐 공이 도와주신다고 하니 더할나위 없이 강력한 우군을 맞은 것 같소. 하지만 이 일은 신중을 기해 진행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요즘은 한가하십니까? 전에 말씀을 드렸던 술자리에 꼭 장군님을 부르고 싶은데... 괜찮으시다면 준비를 해두고 기다리겠으니 편하신 때에 부디 누옥에 왕림해 주십시오."

잭터는 정말로 대귀족의 집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나 불러주시니 더는 핑계를 댈 수가 없겠군. 마침 좋은 술이 있으니 들고 가도록 하지요."


◈ 천계에 부는 바람 - 챕터 4

"황녀 전하 만세!"

"황녀 전하 만세! 부디 태평성대를!"


"아..."

"그냥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십시오. 연설은 다른 곳에서 하게 될 겁니다."

"네... 아, 아니 알겠소..."

즉위식이 결정을 항해 달려갈수록 어린 에르제의 얼굴은 보기 딱할 정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미리 연습한 대로 의연하게 행동했고, 최고 사제 겸 황녀의 즉위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음에도 큰 탈 없이 식이 진행되었다.

"꽤나 분위기가 좋군. 하필 벨드런의 뒤를 잇는 게 꼬마 여자애라 다들 말이 많았을 텐데 바람잡이라도 심어 놨나"

"그런 건 없습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유르겐은 심어놨을 거야. 이런 건 분위기가 중요한 거라고, 최고 사제에, 황녀라니. 누가 불안과 불만을 안 갖겠나? 하지만 구체화되기 전에 여론을 조성해 놓으면 사람들은 거기에 휩쓸리게 되지."

"남이 뭐라 하든 결국엔 자기가 판단해서 행동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저 군중이 모두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즉위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고? 집어쳐. 그런 발언은 지나친 낙관주의자나 바보가 하는 말이야. 그리고 자네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지. 삥다구 같으니라고. 귀족에게 휘둘리다보니 머리도 개머리판처럼 굳어버렸나?"

세븐 샤즈의 메릴 파이오니어는 잭터가 웨스피스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다짜고짜 연구를 도우라며 쳐들어왔던 메릴은 잭터가 최고 사령관이 된 지금도 거침없었다. 긴 악연 탓에 이미 익숙해진 잭터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꼬박꼬박 받아쳤다.

"모험을 하겠다며 여기저기서 사고나 치는 당신에게 듣고 싶진 않군요. 그렇게나 참견하고 싶으면 아예 본격적으로 해보면 어떻습니까? 난 사람이 필요합니다."

"미쳤나? 과학자는 군대에 들어가는 순간 끝난 거야. 군인이란 놈들은 성급하고 결과주의적이고 잔소리가 심해.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 착오가 있는지 이해하질 못한다고."

"제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나엔? 알아서 잘 할 거야. 그만큼 키워줬으면 됐지, 내가 언제까지 뒷바라지를 해야겠어?"

메릴은 곰방대에 쌈지 담배를 비벼 넣었다. 궁녀장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임을 들어 기어이 담배 한 모금을 빨아마셨다.

"아참. 그러고보니 해안수비대 쪽에 헤르만의 제자가 활개를 치고 다닌다던데. 완전히 복수에 미친 놈이더만, 언제까지 군복을 입혀둘겐가? 겉으로는 서글서글해 보이면서 피를 좋아하는 놈이 가장 골치가 아픈 법이야."

"공이 많습니다. 대체할 인재도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유심히 지켜보기는 하지요."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헤르만은 왜 싹수를 못 알아봤는지... 쯧쯧쯧. 뭐어 골치 썩일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게 참 다행이야."

"훈장이 더덕더덕 붙은 놈하고 얘기하는 건 여기까지 해두지. 시간도 됐고 슬슬 가보겠네."


"즉위식은 지금 한창입니다만."

"흥미 없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은 답답해서 짜증도 나고. 젖냄새 나는 어린애한테 무거운 옷을 입힌 꼴도 보기 싫고. 이번엔 몇 년 정도 돌아다닐 셈이야.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나 없는 새 꼴까닥 가지나 말어."

"당신이 먼저겠죠. 할멈."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잭터에 메릴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껄껄껄! 이 세상이 나이 순대로 가는 세상이던가? 젊은이들 목숨 덕에 서 있는 주제에 착각은 하지 말자고."

메릴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날리며 휘적휘적 사라졌다. 괴짜이긴 하지만 인맥도 넓고 지혜도 깊은 메릴이 에르제 옆에 있으면 일이 수월해질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수없이 말을 꺼내어봤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던 잭터는 가는 길에 무좀이나 걸리라는 상큼한 축복을 빌어주었다.

메릴이 가자 자리를 바꾸듯 다가온 것은 네빌로 유르겐이었다.


"생가보다 호응이 좋군요. 이대로라면 아무 문제 없이 황녀님이 자리에 오르실 겁니다."

"공의 노고가 크셨소."

"별말씀을. 장군이 황녀님을 적극 지지한다고 표명한 것만으로도 일이 이렇게까지나 쉬워질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백성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계시더군요."

"낯간지럽구려. 도대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만둬 주시오."

적당히 겸양을 붙여 유르겐의 말을 자른 잭터였지만 속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자신을 흘끗 돌아보고 있는 에르제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조용히 자신 속으로 침잠했다.

( 벨드런의 말대로 고여버린 귀족원의 물을 갈아버려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하지. 이번 카르텔의 침입도 결국은 오랜 차별과 권력의 집중으로 인한 것. 그걸 불러일으킨 것은 귀족... )

( 답답하게 막고 있는 천장을 뚫어버려야 한다. 황녀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세상을 보내야해. 정말로 귀찮을 일을 맡겼군. 벨드런.. )


( 백성들은 귀족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최고 사제 중심의 권력 집중은 거스를 수 없을 바에야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 )

( 카르텔도 모두 소탕된 것은 아니고 앞으로도 크고 작은 충돌은 일어날 것이다. 당분간은 군을 내 편으로 하되 모든 책임은 오롯이 황녀가 지게 해야 한다. '최고 사제' 겸 '황녀'인 만큼 책임을 묻기도 쉽겠지. )

( 말도 안 되는 신관 정치의 쓰레기는 황녀와 함께 치워버리고, 강력하고 정통성에 의심이 없는 새로운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길이다... )

"오늘도 날이 참 좋군요. 새로운 왕이 일어나기에 더없이 좋은 날입니다."

"그렇군. 좋은 날이오."

유르겐과 잭터는 같은 하늘을 올려보며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


▲ 이제 제법 황제답게 말투를 바꿨다.

▲ 유르겐과 잭터의 의견 대립은 안톤과의 전투에서도 나타난다.



■ 숨어있는 폭탄, 사이퍼

- CYPHER The hidden bomb -

이 10년 간 많은 이변이 있었다. 산이 무너지고 지하도시가 솟아올랐으며, 아라드의 중심이었던 헨돈마이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셀 수 없는 사상자가 생겼고, 난폭해진 몬스터로 인한 피해는 늘고 있다. 종말이 왔다고 떠드는 점쟁이의 말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는 시대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을 사는 우리가 생존의 의지를 꺾지 않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후손 앞에서 떳떳하게 열심히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사이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들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법사와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토록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의 사이퍼가 지역사회에서 은폐되기 때문이기도하고, 그들이 놀랍도록 영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그렇다면 사이퍼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다다를것이다. 이 다음부터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니 부디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읽어주길 바란다.

사이퍼는 간단히 말하여 일종의 마법사다. 그들은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는 힘을 다루며, 그 때문에 실제로 마법사로 오인을 받곤 한다.

그러나 신분과 인격이 증명 받은 소수의 재능 있는 지원자가 고된 과정을 거친 후에야 마법사로 성장하는 것과 달리, 사이퍼의 강력한 힘은 태어나면서부터 발현된다.

이것이 가장 큰 특이점이자 위험한 이유이다. 관리는 커녕 연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않은 상황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나는 사이퍼는, 강력한 힘을 가졌으나 힘을 제어 할 말한 올바른 가치관이 성립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마법사는 긴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마법의 위험 또한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 정해져 온 규율을 익히도록 교육받으며 이를 어기고 선량한 시민에 피해를 끼쳤을 경우 마법길드에 보고되어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한마디로, 가지기 어려울 뿐더러 나름의 안전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힘이다.

그러나 사이퍼는 그렇지 않다. 태어나면서 부터 갖는 능력의 범위와 한계는 본인밖에 모른다. 더구나 사이퍼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재능을 악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이를 판단할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말은 갖가지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작금의 아라드에서 그들에 의한 피해가 일어나도 추궁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 사이퍼가 자신들의 '익명성'을 악용한 사례는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다. 나는 과거 기록 중에서 사이퍼의 돌발행동이라 추정되는 사례를 몇 가지 찾아내었으며, 이들에 의한 피해는 내가 찾은 것의 배 이상으로 많을 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소름끼치는 사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이퍼들은 대체로 숨어살기 때문에 그들의 수와 행동이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더구나 마법으로 감지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작정하고 숨은 그들을 찾기란 굉장히 힘들다.

나의 옆집에 사는 이웃이 사이퍼일지도 모른다니,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더구나 그들이 하늘의 저주를 받아 가지게된 힘은 소유자의 인성을 파괴한다. 이는 여러사례를 통해 입증된 결론으로, 그들이 일으킨 사고는 여지없이 대규모 희생을 불러들였다.

혹시 주변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눈을 희번득거리며 희생양이 될 무고한 시민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

혹시 그의 주변에 불행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반인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무고한 희생이 계속되지는 않은가?

의심하고 의심하라. 정황 증거가 확인된다면 즉시 관청으로 달려가라. 지역사회는 사이퍼가 숨어있지는 않은지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경계하라.

이들의 발생 원인을 찾아서 제거할 때까지 우리 모두는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사회적인 무시를 받고 있는 사이퍼들.



■ 체인피스의 아이들

- children of chainpeace -

◈ 체인피스의 아이들 - 챕터 1

추가 예정.



◈ 체인피스의 아이들 - 챕터 2

레베카는 어린 딸이었다. 나이가 많은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아이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아마 딸이 성인이 되면 좋은 조언자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베카는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항상 집을 비우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능력을 인정받아 황도로 부임을 받았다.

함께 가자고 했지만 사막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는 끝끝내 거부했다. 카르텔의 위협도 뿌리 깊은 차별 앞에서는 작은 고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홀로 가버렸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했다. 고향 사람들은 아버지를 비웃었다.

졸지에 아버지가 없어졌지만 레베카는 기 죽는 법이 없었다.

골목대장 자리를 두고 나이가 많은 제이와 싸우면서 물러선 적이 없었다. 자기보다 어린 애가 바득바득 덤벼드는 꼴에 화가 난 제이에게 많이도 쥐어박혔지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기어코 항복 소리를 받아내었다.

멀리 간 아버지는 계속 연락을 취해왔다. 어려운 책도 많이 보냈다. 어머니는 그걸 시장에 내다팔아 먹을거리나 무기를 사오곤 했다.

무기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레베카는 늘 어머니 편이었지만 몰래 아버지의 책을 빼돌려 숨어서 읽기도 했다. 어머니는 모른 척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낌새가 수상하던 카르텔이 바다 건너 황도를 습격했다. 마을사람들은 카르텔을 미워했지만 그렇다고 황도 편은 아니었다. 어른 몇몇은 카르텔이 자랑스러운 혁명군이라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골이 깊었다. 마을에는 레베카 말고도 군인의 자식이 한명 더 있었다.

운이라는 꼬마였다.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밖에서는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받는 운은 언제나 멍투성이였다. 레베카는 놀리는 아이들을 모조리 혼내주었고, 운은 작은 강아지처럼 레베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이 차이가 나는 오누이 같았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카르텔의 횡포는 더 심해졌다.

레베카의 어머니는 마을 자경대를 이끌었지만 카르텔의 습격에 맞서다 크게 다쳤다. 울먹이는 딸의 눈동자 속에서 남편을 보며 숨을 거둔 어머니의 마지막은 무척 애처로웠다.

이렇게 레베카의 소년기는 끝났다. 연락이 귾긴 지 오래된 아버지를 찾으러 갈 수도, 갈 마을도 없었다. 대신 어머니가 숨겨둔 무기를 꺼내고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체인피스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이때였다. 작은 평화(peace)가 엮이면 끝내 평화가 오지 않겠냐는 말에 제이가 유치하다며 웃었다.

"조각(piece)이 나지 않게 열심히 해보자고."

초기 멤버는 레베카와 제이, 운 세 명이었다. 키가 어른만큼 큰 제이가 리더가 되었다. 레베카가 운과 함께 숨어들어 정보를 캐내면 제이가 작전을 짰다.

처음에는 장난 수준이었지만 무법지대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활약을 펼쳤다.

군은 체인피스를 마음에 들어했다. 이름이 알려지자 갈 곳이 없는 또래들이 몰려들었다. 메이윈도 이때 체인피스에 가입하였다. 카르텔에 질린 어른들이 무기와 먹을 것을 보태주었다.

웨스피스군 역시 지원을 늘려주었다. 인원이 많아지자 군이 맡기는 일도 점점 더 다양하고 위험해졌다. 다치는 일은 잦아졌지만 그만큼 성과가 쌓였다.

이대로라면 카르텔을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린애 착각이었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전기를 먹는 괴물이 나타났고, 카르텔은 다시 바다를 건넜다. 황도군의 전선이 점점 밀려난다는 소식에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이즈음 제이가 이상했다. 가까이 지내던 몇 명끼리 숙덕거리며 돌아다니더니 급기야는 군기를 세운다며 친구를 때리기까지 했다. 외부 활동이 잦았던 레베카는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알았다.

둘은 크게 싸웠고, 제이는 체인피스를 탈퇴했다. 리더는 레베카가 맡게 되었다. 아이들은 온건하고 진지한 레베카를 무척 좋아했다.

제이가 나간 후로 카르텔의 추격이 더욱 교묘하고 정확해졌다. 몇 번이나 사로잡힐 뻔했다.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추궁 끝에 내통자를 색출해 내었다.

목숨의 위협을 받은 아이들은 배신자는 죽여야 한다고 했고, 레베카는 고민 끝에 본거지를 먼 곳으로 옮겼다. 이 와중에 로이라고 하는 이상한 아저씨를 만났다.

로이는 이상한 남자였지만 잔해를 가지고 뭔가를 둑딱뚝딱 잘도 만들어내었다. 몇 번의 위기를 그의 발명품 덕으로 넘겼다. 너댓 달을 머물며 도화주던 로이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황도에서 황녀가 납치되었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함께 카르텔에 항거하던 많은 어른들이 총을 버리고 항복했다. 투지는 급격히 꺾이고,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라는 말이 너무나 식상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황녀를 납치하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황도를 아주 끝장내려는 카르텔은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잡아들여 병사로 썼다. 살아남으려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긴장을 풀고 쉴 틈이 없었다. 아이들은 지쳐갔고,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는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레베카는 친구들 앞에서는 여전히 당찼다. 그러나 남몰래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살아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황도로 가길 거부했던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은 각자의 길을 걸어간 것뿐이야. 나도 마지막까지 내 길을 걸어가면 돼."

그게 레베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레베카의 걱정은 오로지 친구들의 안위에 쏠려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점점 표정을 잃어가는 운이었다.

진짜 동생처럼 따르고 도와주던 운이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몇 시간이고 멍하니 있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전쟁터로 나온 운은 아직도 어린애였다.

외딴 마을에 보내주려고 해도 자기 살기도 힘든 세상에 아이를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는게 미안하여 운의 생일에 어머니의 유품인 목걸이를 주었다.

위로할 마음도 있었지만 어떤 예감이 들었던 탓이기도 했다. 끈적거리고 피할 수 없는 그런 기분 나쁜 예감은 열병처럼 레베카를 괴롭히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잘도 들어맞는다. 화염과 비명이 가득 찬 동굴을 빠져나오다 오랜만에 제이와 마주친 레베카는 입매를 끌어올리며 픽하고 웃었다.

아버지와 꼭 닮은 웃음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자각하지 못했다. 이날을 마지막으로 체인피스의 아이들은 레베카를 만날 수 없었다.


▲ 운은 아직도 레베카를 잊지 않고 있다.

▲ 천계 지역에서 잠깐 만날 수 있는 레베카, 캡틴 루터의 레지스탕스에 들어갔다.

▲ 그러나 레베카는 현재 기억을 잃은 듯 하다.


◈ 체인피스의 아이들 - 챕터 3

제이는 천애 고아였다. 가족은 없지만 노래를 잘하고 사람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해, 어렴풋이 가수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가수보다는 총잡이가 더 멋진 꿈이었지만 총성이 귀를 따갑게 했기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유명한 가수가 옆 마을에 왔다는 소식에 구경을 갔던 제이는 하마터면 카르텔에 잡혀갈 뻔했다. 또래보다 키가 컷던 탓에 다 큰 애로 보였던 것이다. 생존의 문제는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고, 결국은 악보를 불태웠다. 12살 때의 일이다.

이 무렵 제이는 곧잘 골목대장 노릇을 하곤 했다. 제이보다 더 큰 아이들은 시시한 놀이에서 벗어나 사격을 익히기 바빴기에, 대장 자리는 언제나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라는 여자애가 덤벼들기 시작하고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악으로 똘똘 뭉친 여자애 하나 때문에 골목 싸움의 양상이 바뀌어버렸다. 단순한 힘겨루기에서 벗어나 패를 나누어 제법 그럴싸하게 전쟁을 치르며 치열하게 다투었다.

마을의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찼으나 아주 진지하고 숭고한 싸움이었다. 마지막에는 꼭 진흙탕 싸움으로 흘러가는 게 문제였지만.

이렇게 마을의 사고뭉치로 명성을 떨치던 제이였지만 나름대로 기준은 있었다. '낭만에 부합할 것.' 유명한 총잡이 모래바람의 베릭트가 세운 규칙이었다. 좋은 노래 소재라고 여기던 것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은 것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기에 골목대장에 집착했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기에 6살짜리를 발로 차는 술주정꾼에게 덤벼들었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체인피스를 만들어 카르텔에 대항하겠다는 레베카에게 찬성했다.

그러나 '낭만'이 낡은 유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낭만은 결국 본심을 숨기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골목대장에 집착한 것은 오기였지만 레베카의 계획에 동참한 것은 살길이기 때문이었다.

카르텔은 일할 나이가 된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갔다. 아직은 마을 사람들이 카르텔을 쫒아내고 있지만 길게 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뻔했다.

체인피스를 창설하여 마을을 나온 세 명은 갈 곳이 없었다. 말이 좋아 총잡이지, 보호자 없는 가출 소년이었다. 함부로 의용군에 들어갔다가는 총알받이로 써먹힐 게 뻔했고 언제까지나 사막을 배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제이는 황도까지 밀려났다가 겨우 돌아온 웨스피스군에 접촉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외톨이였다. 무법지대 사람들은 카르텔을 두려워 했지만 군 역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제이는 '무해한' 여자애와 꼬마에게 정보를 모아오도록 시킨 후 잘 골라내어 군에 팔았다.

지역 정보원이 절실했던 군은 마뜩잖아하면서도 제이의 거래에 응했다. 어른들과의 협상은 어려웠지만 제이는 그래도 나름 잘 해냈다. 보수로 받은 돈을 모아 이 사막의 섬에서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웨스피스군은 기껏 들어온 정보원이 도망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레베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이 잔뜩 쌓여갔다.

군의 간부가 펼치는 달콤한 회유가 무서운 협박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레바카의 아버지를 이용할까 싶기도 했지만 자칫했다가 레베카만 뺏기게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 정도면 다행이었다. 카르텔의 물자 부족을 잘 알고 있었던 천계 지도부는 버린 땅인 무법지대의 평화 유지에 큰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했다.

모자란 군비 지원을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웨스피스군이 레베카를 알아본다면? 순순히 레베카를 아버지에게로 보내줄 리 없었다. 보나마나 더러운 방식으로 레베카를 희생하여 지도부를 자극할 것이 뻔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체인피스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필요 이상으로 유명해졌다. 웨스피스군은 카르텔에 대항하는 아이들을 하나의 상징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웨스피스군은 선전용 모델을 요구했다. 어떻게든 레베카의 이름과 얼굴을 숨겨야 했기에 운을 대신 보여주었다. 제 몸만한 총을 메고 다니는 어린아이의 사진은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기사로 뽑혀나갔다.

바다 건너 사람들은 제 편할 대로 굴었지만 아이에게는 약했다. 지원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신이 난 웨스피스군은 체인피스를 이곳저곳에 잘도 써먹었다.

천성인지 자란 환경이 좋아서인지 레베카는 이런 사정에 영 둔감했다. 모범생 타입이었다. 작전을 성공시키고 사람들을 구하면 그게 다인 줄 알았다. 제이는 레베카의 전술이나 총 솜씨는 칭찬했지만 너무 우직하다며 한탄했다.

웨스피스군의 선전 때문에 체인피스의 멤버는 늘어났다. 셋만으로도 버거웠는데, 어른들은 어서 덩치를 키워서 멋진 영웅담을 펼쳐보이라고 강요했다.

그래도 그만큼 지원이 늘었기에 틈만 잘 노리면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며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실로 어처구니 없기까지 하다. 천계의 괴물이 나타나 전기를 빨아먹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웃어 넘겼지만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았다. 조금씩 들어오던 지원은 끊기고, 웨스피스군은 꽁꽁 틀어박혔다. 분위기는 더욱 흉흉해졌다.

카르텔은 혼란을 놓치지 않았다. 산골 마을의 우물 물까지 쪽쪽 빨아먹은 그들은 다시 황도를 습격했다. 정규군의 승전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날아오는 소식은 족족 패했다는 이야기뿐이었고, 나중에 이마저도 듣지 못했다. 제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살기위해서 제이는 다시 움직였다. 뜻이 맞는 몇 명과 함께 도둑질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붙잡혔다. 자신을 붙잡은 카르텔 병사는 다름아닌 고향 마을의 어른이었다. 간신히 도망쳤지만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레베카에게 꼬투리를 잡혀 크게 다투었다. 골목대장 싸움을 하던 때처럼 끈질기게 파고드는 레베카가 너무 밉고, 화가 나고, 미안했다. 하지만 사과하지는 않았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기던 것도 자신을 보자마자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하는 운을 보고 무너져버렸다. 고향에서는,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아형아'거리며 잘 따르던 동생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베카와 운만은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 남으려고, 지키려고 싸웠다.

카르텔이 싫었고 비겁한 어른이 미웠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이 그런 어른이 되어 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참담하고 낯뜨거워서 더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체인피스를 떠났다. 도둑질에 가담했던 몇몇이 말없이 따라왔다.

친구들을 두고 떠나던 밤, 제이는 새카만 하늘을 보며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체인피스를 만들자는 레베카를 말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수의 꿈을 접지 않았더라면? 무법지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몰려드는 상념은 신기루보다 허망했고 사정없이 불어대는 모래바람에 코끝이 찡해졌다.

이제 레베카와 운을 만날 일은 없겠지, 생각해보면 그 둘이 자신의 가족이었다. 부디 평화로운 날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주기를 바라며 제이는 걸음을 옮겼다.


◈ 체인피스의 아이들 - 챕터 4

운의 아버지는 사냥꾼이었다. 몸을 숨기고 사냥감에게 접근하여 정확하게 머리를 노리는 법을 배운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철들기 전부터 총을 들었던 것과, 아버지의 실력이 좋았던 것은 기억난다.

좀도둑도 쓰지 않는 조잡한 총알은 술보다 쌌다. 운은 작은 동물을 잡으며 아버지의 술값을 벌었다. 군인인 어머니는 집에 잘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언제부터 군인이었는지 모른다. 아마 아버지가 왼다리를 잃은 후부터였던 것 같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곧잘 운을 때렸고, 그런 날은 집에서 쫓겨나 별을 보며 잤다.

여린 피부는 늘 푸르죽죽 멍이 들어있었고 짐승의 발톱에 긁힌 상처 때문에 따가웠다. 마을 어른들은 매정하지는 않았지만 힘이 센 아버지를 말릴 정도로 바지런하지도 않았다.

동네의 큰 형이었던 제이가 아버지에게 맞는 운을 구해주었고, 대찬 성정이었던 레베카의 어머니가 집으로 운을 데려와 씻기고 밥을 먹여 주었다. 레베카는 운을 귀찮아하면서도 제법 챙겨주며 누나 노릇을 했다.

그 나이엔 언제나 동생이 갖고 싶은 법이라, 어머니를 뻿기는 것도 참아주었다. 운은 싹싹하고 애교도 잘 부려 귀여움을 받았다. 둘은 금세 친해졌다.

하지만 꼬마 운의 모범적이고 밝은 성격은 난폭한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 아래서 자란 탓이었다.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무리하는 운을 보며 레베카의 어머니는 무척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이런 시간도 레베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끝나버렸다. 레베카와 제이는 카르텔에 맞서겠다고 했고, 운은 바득바득 우겨 끼어들어갔다.

어른과 싸운다는게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두 명과 멀어진다는게 너무 무서웠다. 마을을 떠나던 날, 레베카는 같은 성(姓)을 쓰자는 제안을 했다.

제이는 비웃으면서도 갖가지 성씨를 늘어놓으며 물러섬이 없었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둘은 라이오닐이라고 하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운은 '운 라이오닐'이 되었다.

둘의 진짜 동생이 된 것 같아 그것만이 기뻤다. 나중에야 이 십 대 소녀가 정말로 원한 것은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을 가명이었다고 깨달았다.

체인피스는, 비록 그 의기는 좋았지만 금방 무너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여론 조성에 유리하겠다고 판단한 웨스피스군은 그들이 죽지 않을 정도로 지원하며 활약할 기회를 주었다.

운은 뛰어난 저격수였다. 모든 게 무섭고 두려웠지만 가까스로 해나갔다. 훨씬 연상인 두 명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바다 건너에서 '카르텔과 싸우는 어린 영웅들'의 뉴스는 동정과 분노를 일으키는 재밋거리였다.

'꼬맹이 라이오닐'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이때였다. 상처가 클수록 반응은 격렬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불쌍하면 도와주러 오면 될 텐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바다 건너 사람들은 멀리서 지켜보며 우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제이는 웨스피스군과 접촉할 때마다 운을 데리고 다녔다. 종군기자라도 만나는 날이면 꼭 양 무릎이 깨지곤 했기에 운은 군인이 무서웠다. 그래도 지기 싫어서 큰 소리를 치고 다녔다.

어쩌면 군인인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찾아보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운은 어머니의 생사를 모른다.

체인피스에서 운은 늘 막내였다. 어릴수록 나이는 서열을 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기에 제이와 레베카는 운에게 '누나'나 '형'이란 호칭을 빼고 부르게 했고, 작전 회의에도 꼭 데리고 다녔다.

반발하는 아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항상 최상위권인 사격 실력 덕분에 운을 무시하는 아이들은 줄어들었다.

체인피스를 이끌던 제이가 탈퇴한 후 레베카가 리더가 되었다. 안톤이라는 괴물의 등장과 황녀 납치라는 초유의 사태가 겹쳐지가 아이들을 압박하는 현실은 더 가혹해졌다.

좋은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이 힘들었다. 카르텔의 횡포는 점점 심해졌고, 도망친 친구들은 적이 되어 나타나거나 시체로 발견 되었다. 왜 살아야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은 리더인 레베카 덕분이었다.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고 궂은 일을 도맡아하고, 밤새워 작전을 짜 먹을 것을 구하거나 때로는 카르텔의 공격에 맞선 레베카는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영웅적이었다.

운은 그날의 일만 없었다면, 혹은 그날 자신이 레베카를 구했더라면 전쟁이 좀 더 쉽게 끝났을 거라고 수만 번도 생각했다. 하지만 구조된 것은 레베카가 아니라 자신이고, 레베카는 지금까지도 실종 상태다.

기억을 헤집어 레베카의 단서를 찾고 싶어도 그 중요한 날에 남은 기억은 별로 없다. 단편적인 조각뿐이다.

붉은 하늘. 외침과 폭발. 죽어가는 친구들의 얼굴.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업는 레베카. 그것밖에 남아있지 않다. 누가 배신을 했고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 이제와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그날 모두 잃어버렸다. 운은 그날을 자신의 기일이라 여기고 있다.

이미 죽었는데 몸뚱이가 살아있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져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눈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것은 오직 레베카의 한마디 때문이다.

자기 어머니의 유품을 생일 선물로 주던 날의 일이었다. 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베카는 우는 듯 웃으며 말했다.

"좀 늦은 말이지만 아빠가 보고싶어."

레베카의 작은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체인피스에서의 일은 누가 땅속에 파묻기라도 했는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데, 레베카의 목소리는 생생히 남아있다.

살아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죽었다는 확증도 없다. 그렇기에 운은 가느다란 희망 한 가닥을 품은 채 쉼없이 싸웠다.

기억 속에서 언제까지고 십 대 소녀인 레베카가 평화로운 하늘 아래 자신의 아버지와 만나 웃을 수 있게. 그 눈부신 광경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운은 계속 싸우고 있다.


◈ 체인피스의 아이들 - 챕터 5

안톤을 쓰러뜨리고 겐트에 돌아온 후에도 군인들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치안이 회복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천계 군인의 주 임무는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치안 유지다.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인구가 적어 세세한 조직을 만들어 관리할 필요가 없기에 지금까지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평화로워야 할 겐트에서는 잦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라드에서 올라온 모험가가 일으키는 작은 다툼에서 전쟁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는 도둑떼 발생까지, 모두 지친 군인들이 담당해야 할 문제였다.

그랬기에 잭터는 큰맘 먹고 내준 휴가를 이틀도 못쓰고 돌아온 부관을 보고 난감해졌다. 윽박질러서라도 쉬고 오라고 해야겠지만, 체계를 새로 만들려는 겐트 사령부에서 그가 빠진 이틀이 워낙 아수라장이었던 탓이다.

사령관의 고민도 모르고 복귀 절차를 마친 운은 언제나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감탄을 샀다. 상관이 쉼으로써 사령부 내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그의 부하 몇몇만 작게 투덜거렸을 뿐이다.

식사와 시간을 빼고 사흘 내내 일을 처리한 끝에 간신히 일단락을 마친 운은 비틀거리며 집무실 옆 자료실로 가, 긴 의자 위에 쪼그려 누웠다. 부하들이 출근하기 전에 잠깐 쉬어둘 생각이었다.

오후에는 장성들을 모시고 병원에 위문을 가야 했다. 귀족들에게 모자란 병원을 더 지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목적이 무엇이든, 엉망인 치안을 고려하면 호위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긴장되는 일정이 아닐 수 없다.

무리한 탓인지 채 낫지 않은 상처에서 열이 올랐다. 그건 상관없지만 10여 년 전부터 때때로 들리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슬그머니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지키지 못한 부하에서 쓰러뜨린 적까지 다양했다.

긴 전쟁을 겪은 이 나라의 많은 군인들은 운과 비슷한 증상을 겪곤 했다. 부하들의 호소를 들어주면서도 운은 자신의 상태를 토로한 적이 없다. 타인에게 정상으로 보이는 것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사령관의 위신에 누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기도 했고, 유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군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운은 많은 면에서 '정상'을 연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뒤에 있는 것이 아군이라면 자꾸 경계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고, 체인피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숨이 막히는 것을 참았다.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견뎌냈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체인피스의 생존자들이 하나 둘 도태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억지로라도 요령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해도 나아지지 않는 한 가지를 뺀다면 꽤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왓?!"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일어난 운은 아직 악몽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 서있는 인영은 덩치 큰 카르텔 병사로 보이기도 했고, 타르탄 같은 괴물로 보이기도 했다.

"저... 운 대령님? 루카스 소위입니다. 깨워서 죄송합니다. 편지가 쌓여있기래 드리려고... 주무시길래 나가려고 했습니다만..."

"...신입인가."

반사적으로 쥔 총에서 손을 떼며 운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기 전에 빼놓은 탄창이 의자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미안하군. 조금 뒤에 나갈 테니 먼저 가있게. 그리고 앞으로는 이름이 아니라 성으로 불러주겠나? 만에 하나 섞여 들리면 곤란해서...... 어쨌든, 부탁하지."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편지는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부하가 허둥지둥 문을 닫고 나가서야 운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시계를 보니 세 시간 정도 지나있었다. 쉰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있었다.

메이윈을 보러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계속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체인피스의 생존자가 다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며, 운은 자신의 상태를 남의 일처럼 진단했다. 창 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루카스 소위가 두고 간 편지를 뜯어보던 운은 메이윈에게서 온 편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락하지 말자고 말한 것은 그쪽이었을 텐데. 급하게 썼는지 글씨가 날림인데다 내용도 짧았다. 메이윈은 와줘서 고마웠고 화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중에 놀러 오라며 주소까지 적어 놓았다.

'이럴 땐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미안해해야 하는 건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다음 편지를 뜯었다. 치안 유지 등을 이유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13세에서 16세의 소년병 자원 입대 모집안을 통과시켜달라는 내용이었다. 웨스피스 사령부에서 보낸 편지였다.

사령관에게 전해야 할 내용이었다. 몇번이고 같은 내용을 읽던 운은 천천히 편지를 구겼다. 잠잠해졌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쟁쟁히 울렸다.

살려줘! 운!

운..., 운! 나 다리가 없어졌어... 아파...!

운, 제발... 도와줘! 너무 아파... 죽기 싫어!

운 라이오닐은 한참이나 머리를 감싼 채 자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 이름을 들을 때마다 체인피스 시절 동료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 즐거운 마법교실

- A happy magic lesson -

키리 : 야호~ 좋은 아침! 오랜만이네요, 샤란 씨!

샤란 : 아, 네… 좋은 아침이로군요…

키리 : 많이 바빴나봐요. 요새 통 안보이던데.

샤란 : 학교가 좀 바빠서 말이죠. 음…
인사는 이 정도면 됐죠? 저는 그럼 보고서 준비 때문에…


키리 : 보고서? 요즘도 많이 바쁜가보죠? 뭐 간단한 일 없어요? 도와드릴게요!
일이 빨리 끝나면 오늘은 마법 기초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면 좋겠어요.
전에 알려주신다고 했죠?

샤란 : 그건 하도 밀어붙이셔서 어쩔 수 없이… 흠… 알겠습니다.
흑요정이 아닌 자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렇게나 열성을 보이시니 마법학교 원장으로서 무시하고 있을 수는 없군요.


키리 : 정말요? 와아! 이제 저도 불기둥을 슈욱하고 불러낼 수 있나요?

샤란 : 목표가 높으시군요. 의욕이 있는 건 좋지요.
그럼 거기에 앉으세요. 네. 이 약을 마시세요.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키리 : ……

샤란 : ……

키리 : 음… 좀더 알기 쉬우면 좋을 텐데…

샤란 : 집중하세요. 누구나 마나를 다룰 수 있어요.
재능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 내부의 힘을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쉬울 거예요.


키리 : 저는 총을 써서 내부의 힘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데요…

샤란 : 천계에서 유명한 전사였다면서요?
검에 의존하는 검사도 몸 속에 흐르는 기를 운용하는 것은 기본일 텐데요.


키리 : 아하하하… 천계는 몸 속의 힘보다는 몸 밖의 힘에 치중하거든요.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몸 속에 내재된 힘 같은 건 잘 모르니까
어떻게 하면 그걸 잡아낼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샤란 : 흑요정은 태어날 때부터 마법과 친숙해서
타종족에게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렵군요.
그럼 눈을 감고 뭔가 강렬한 기억을 떠올려보겠어요?
그 기억에서 당신은 무엇을 느끼죠?


키리 : 강렬한 기억이라… 역시 분노이려나…
카르텔 녀석들… 난장판을 부리고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무법자들…
그 녀석들보다 더 용서 못하는 건 배신자들이야!

샤란 : 진정해요! 부의 감정에 너무 빠지면 마나가 폭주해서 제어하기 어려워져요!

키리 : 하지만 그 녀석들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걸요.
천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해줄 텐데!

샤란 : 흐음.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로군요.
천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뭔가 복잡한 일이 있었을 줄이야…
지금 당장 천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건 어렵겠지만 좋은 소식이 있어요.
키리 씨, 당신에게는 마법의 재능이 있어요.


키리 : 와… 정말요?

샤란 : 네. 몸 속의 힘이란 개념에 낯선 당신이 순간적으로 보여준 마나의 흐름은 나쁘지 않았어요. 너무 격앙되어서 마법으로 맺히기 전에 꺼지고 말았지만.

키리 : 와아, 그럼 저도 이제 마법사가 돼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을까요?

샤란 :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재능이 필요해요.
그리고 노력도. 이론은 알려드릴 테니 천천히 해보도록 해요.
다행이네요. 솔직히 당신에게 가르칠까 말까 고민이 많았는데
가능성이 있는 학생을 발견해서 기뻐요. 술이라도 마시며 축하를 할까요?


키리 : 그거 좋네요! 천계에서도 기쁜 일이 생기면 술을 마시면서 축포를 쏘거든요.
어딜 가나 똑같네요.

샤란 : 하긴 예전엔 소통이 있었으니까 닮은 풍습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그런데 축포라는 건 뭐죠?

키리 : 궁금해요? 한 손에는 술,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이렇게 하늘을 향해 쏘는 거죠!

(신이 난 키리가 천계의 술집에서 하던 버릇대로 총을 쏘아댔다. 시약이 들어있던 병은 깨지고, 자고 있던 고양이가 화들짝 놀라 도망가다가 끓고 있는 솥단지를 엎어버렸다.)

(샤란의 연구실은 금새 난장판이 되었고, 위험한 약품이 흘러 불까지 나기 시작했다.)

키리 : ……꺄아아…

샤란 : ……아주 머엇진 축포, 고맙군요.
그럼 키리 씨, 이제 제 제자가 되셨으니 자기가 벌인 일의 뒷정리는 시키지 않아도 잘 하시겠죠? 그 정도로 체력이 넘친다면 이곳을 원래대로 치우는 것도 10분이면 가능하시겠군요.


키리 : 10분이요오?

샤란 : 그래요. 아주 충분할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여왕님께 다녀올 테니 청소 후에 이 책을 읽고 있도록 하세요.
아참, 당신이 깨뜨려서 뒤섞인 시약 중에선 닿기만 해도 모습이 바뀌어 버리는 약도 있으니 알아서 조심하도록 하세요.


키리 : 우와, 변신약도 있어요?

샤란 : 네에. 피부에 닿기만 해도 까맣고 반들반들하고 아주 날쌘 벌레가 되어버리는 약도 있죠. 잘못하면 제가 원래 모습으로 돌려주기도 전에 고양이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조심하셔야 해요?

키리 : 꺄아아아…


▲ 샤란 선생님! 저도 마법좀 가르쳐 주세요!

▲ 그렇게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배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