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7-04-0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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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e스포츠 개척자 엄재경이 말하는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이시훈(Maloo@inven.co.kr)


"스타크래프트는 예술이었고, 문화였으며 우리의 학창시절이었다." 지난 1월에 펼쳐진 ASL에서 한 팬이 쓴 응원 문구이다. 화면에 잡힌 이 응원 문구를 보고 현장에서 뜨거운 환호성이 터졌다. 그만큼 스타크래프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게임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팬들의 스타크래프트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이 블리자드를 감동시킨 것일까. 지난 26일 블리자드의 CEO 마이크 모하임이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출시 계획을 발표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명작 게임 스타크래프트가 새로운 환경에 맞게 4K UHD 해상도로 다시 태어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타크래프트에 향수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반가움을 표했다.

스타리그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엄재경 해설. 그 또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만화 '까꿍'의 스토리 작가였던 엄재경 해설은 황무지와도 같던 e스포츠에 뛰어들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인물 중 하나다. e스포츠의 태동기부터 함께한 스타크래프트 전문가 엄재경을 만나 과거의 스타크래프트와 현재의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황무지를 개척하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에 대한 본격적인 얘기를 나누기 전, 만화 스토리 작가에서 스타리그 해설자로 변신한 엄재경의 '스토리'가 궁금했다. 지금은 50대가 됐지만 스타리그의 시초격으로 볼 수 있는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PKO)'을 중계할 때만 해도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30대 초반의 엄재경은 자연스럽게 스타크래프트에 빠졌고, 이어서 스타크래프트 전문가가 됐다.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접하고 너무 재밌어서 자연스럽게 푹 빠졌어요. 그러던 중 투니버스에서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스포츠처럼 대결하는 '스타크래프트 리그'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게 됐죠. 투니버스 때부터 알고 지냈던 황현준 PD가 저에게 같이 일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어요. 당시에 언변도 괜찮았고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제가 해설을 맡게 됐습니다.

그렇게 우연한 기회로 재미 삼아 스타크래프트 해설을 하게 됐어요. 성공할 거란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청률이 잘 나오기 시작했고, 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팬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뿌듯하고 재밌었습니다."


엄재경 해설은 정확한 해설뿐만 아니라 선수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만화 스토리 작가 출신 해설답게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재밌고 맛깔나는 '스토리 텔링' 해설로 시청자들을 마음을 사로잡았다. '황제', '폭풍', '몽상가', '투신' 등 닉네임만 들어도 선수의 얼굴과 스타일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엄재경의 캐릭터 설정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예전에 시나리오 공부를 했을 때 기승전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캐릭터가 가장 중요합니다. 재밌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팬들에게 강한 인식을 남기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초기에는 제가 선수들의 별명을 많이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팬들이 좋은 별명과 캐릭터를 많이 만들어 주시더라고요.

스포츠나 엔터테인먼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스타 마케팅이 필요해요. 하지만 억지로 스타를 만든다고 해서 스타가 만들어지지 않아요. 선수가 노력해서 성적을 내야만 캐릭터가 만들어질 수 있어요. 마침 초창기부터 그에 부합하는 걸출한 스타들이 대거 등장했죠. 임요환 선수는 스타성이 넘쳤고, 열심히 해서 연속으로 우승도 했어요. 스스로 스타가 된 거예요."




아쉬웠던 마지막

그렇게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크래프트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화려한 그래픽으로 무장한 새로운 게임들의 등장 그리고 승부조작 사건, 지재권 분쟁 등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도 서서히 내리막길을 타게 됐다.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스폰서링도 예전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3년의 명맥을 유지했던 스타크래프트 공식 리그는 2012 티빙 스타리그를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좋았던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마지막 기억이 가장 크게 남아요. 악재가 연속으로 터졌어요. 승부조작 사건이 가장 타격이 컸죠. 승부조작이 없는 스포츠는 사실상 없지만, e스포츠는 순수한 시절의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었는데 승부조작이 터지니까 팬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더 컸어요. 그것을 겨우 수습하면서 가고 있었는데, 지재권 분쟁까지 터지니까 팬들이 많이 등을 돌렸죠.

블리자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요. 스타크래프트2가 나왔는데, 당연히 스타크래프트2를 팔아야 하잖아요. 그래도 스타크래프트1과 스타크래프트2가 같이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스타크래프트1이 사실상 강제로 끝나버렸어요. 팬이 있는데 그렇게 끝나는 것은 일반적인 스포츠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스타크래프트2가 이상적으로 스타크래프트1을 계승했다면 다들 만족했겠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스타크래프트2가 훌륭한 게임이지만 형인 스타크래프트1을 뛰어넘을 순 없었죠. 스타크래프트1이 더 직관적이고 재밌었어요. 스타크래프트2는 변수가 워낙 많아서 쉽게 예측하기 어려웠어요."


엄재경은 여전히 스타크래프트1에 대한 미련이 남아 보였다. 스타크래프트의 흥망성쇠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아쉬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스타크래프트2는 스타크래프트1 팬들을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드디어 공개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그렇게 스타크래프트는 독자적인 노선으로 올드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입대를 앞둔 '택뱅리쌍', 신규 유저 유입이 적은 시장 관계 등을 고려했을 때,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는 풍전등화나 다름없었다. 스타크래프트가 다시 반등하기 위해서는 20년 된 낡은 그래픽을 뜯어고칠 필요가 있었다. 블리자드는 한국 팬들이 여전히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마침내, 블리자드는 CEO인 마이크 모하임의 입을 통해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공개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스타크래프트를 리마스터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뛰어나고 가치 있는 게임을 블리자드가 그냥 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게임뿐만 아니라 영화나 음악도 뛰어난 원작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저희 아버지 세대만 해도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것은 30대까지였어요. 가장이 무언가를 즐길 시간이 어딨겠어요. 하지만 시대가 변했어요. 40대나 50대의 지갑을 노리는 마케팅이 굉장히 유효하죠. 아이들과 어른 모두 즐길 수 있는 것이 먹혀요. 애들은 처음 접해서 좋고 어른은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좋잖아요. 스타크래프트가 대표적이에요. 앞으로 이런 리메이크는 다른 곳에서도 계속될 거예요. 정말 훌륭한 마케팅이라고 생각해요."


엄재경은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에 대한 소감에 이어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e스포츠에 가져올 영향을 예상했다. e스포츠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그는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무조건 낙관적인 시선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 또한 e스포츠의 대세가 RTS 장르에서 AOS 장르로 넘어간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할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과거의 스타크래프트가 가졌던 위상을 찾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모든 문화가 점점 인스턴트하고 가벼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요. 게임도 마찬가지예요. 대규모 군대를 운영하는 RTS 장르에서 LoL이나 오버워치 같은 소규모 캐릭터를 조종하는 게임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스타크래프트2도 기본적인 흐름에 따라서 다른 장르에게 왕좌를 넘겨줬잖아요. 하지만, 스타크래프트1은 스타크래프트2보다 더 직관적이고 재밌으니까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예요. 아마 스타크래프트2를 하는 선수들 중에서 많은 선수가 스타크래프트1으로 돌아설 거예요. 예전 같은 붐을 일으키진 못해도 지금보다 커지겠죠.

스타크래프트1는 30, 40대 팬만 해도 장난이 아니잖아요. 구매력이 있는 어른들이 많이 보니까 스타크래프트1 대회를 열었을 때 유료 티켓을 팔면 매우 잘 팔릴 거예요. 개인 방송을 보더라도 시청률은 다른 게임이 더 높지만, 별풍선은 스타크래프트1 게이머에게 더 많이 터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새롭게 바뀐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현장에서 직접 봤는데, 그림이 정말 멋졌어요. 스타크래프트1을 한동안 안 했던 이유가 도트 사각형이 다 보이는 낡은 그래픽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나오면 스타크래프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거예요. 캠페인 시나리오 모드도 한글화가 되잖아요. 정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불러올 미래

물론 '리마스터' 게임이 무조건적인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단순히 그래픽만 바뀌어서 등장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추억팔이 마케팅'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이를 먹은 게임들이 20년 만에 회춘해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과거의 감동을 고스란히 현재로 환기할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 그 기회만으로도 많은 올드 게이머들은 만족할 것이다. 때문에 엄재경은 부정적인 시선은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추억팔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런 비판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은 안 사면 그만이에요. 블리자드도 기업인데 당연히 상품을 팔기 위해서 만드는 거잖아요. 비판하는 사람들은 "똑같이 만들면서 돈을 받아?"라고 말하죠. 하지만 블리자드가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사겠다고 대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과거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사람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그래픽만 바꾸고 똑같이 만든 거예요. 구매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똑같이 만든다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저는 이 정책이 맞다고 봅니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욕하는 사람보다 반기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맞는 말이었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은 낯선 인터페이스가 아닌 그래픽만 개선된 아날로그적인 시스템을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꾼이 생산되면 직접 미네랄에 붙이고, 생산 건물을 일일이 클릭해서 유닛을 생산하는 행위들. 누군가에게는 답답해 보이는 이러한 행위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재미일 수 있다. 다수의 팬들이 원하는 대로 게임을 만드는 것은 게임사가 해야 하는 의무 중 하나다.



스타리그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명품 해설 엄재경, 그는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통해서 새로운 해설 인생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정말 잘 나왔으면 좋겠어요.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로 다시 한번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가 활성화되면 제가 다시 스타크래프트 해설을 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솔직히 다시 해설을 하고 싶어요. 다른 게임 해설을 한 적도 있었어요. 하스스톤 해설을 했었는데, 저는 말하면서 동시에 생각하기 어렵더라고요. 다른 젊은 해설을 따라가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스타크래프트1으로 해설한다면 정말 잘할 자신 있어요."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과거처럼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가 제2의 정성기를 맞이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의 성공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할 수 있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는 모습. 엄재경은 그러한 상상이 곧 현실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끝으로 그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마지막 메세지를 전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미래는 어두울 수도 있고 밝을 수도 있죠.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어른들처럼 죽도록 공부하면 밝은 미래가 있을 거란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공부가 하기 싫고 공부에 재능이 없으면 어른들이 만든 시스템을 그대로 따라갈 필요가 없어요. 어른들이 과거에 해왔던 것을 청소년들이 반복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에요. 죽도록 공부만 하면 소중하고 다시 오지 않을 젊은 나의 청소년기가 죽도록 공부했던 기억만 남게 되거든요. 미래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재밌게 노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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