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e스포츠 해설자가 한 가지 종목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한다. 상대적으로 많은 종목에서 활약하는 캐스터와는 달리 해설자는 선수 수준의 높은 게임 이해도와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종목에서 활약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는 이가 있다. 수많은 e스포츠 리그에서 해설자로서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인호가 그 주인공이다.

18년째 e스포츠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인호 해설과 오랜만에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 매주 중계 일정이 꽉 차있고, 중계를 위해 늘 새로운 게임을 연구 중인 정인호 해설은 그야말로 24시간이 모자란 사람이었다. e스포츠 판에서 가장 바쁜 남자인 정인호 해설은 과연 어떻게 e스포츠에 입문하게 된 것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정인호 해설을 워크래프트3 선수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의 시작은 스타크래프트였다. e스포츠가 발돋움을 시작할 시기, 그는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PKO)'을 통해 e스포츠에 입문하게 됐다. 아쉽게도 스타크래프트 선수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다른 RTS 게임에서 재능을 발견한 그는 대회를 휩쓸며 선수로서 활약을 이어갔다.

"PKO를 통해서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가 됐지만,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그리고 구단과의 관계도 안 좋아지면서 프로게이머에 대한 정이 떨어졌어요. 게임을 포기하고 대학교에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문화부 장관 상을 받으면 대학 특례 입학이 가능한 전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때마침 문화부 장관배 아트록스 대회가 열렸고, 그 대회에 두 달을 연습하고 출전해서 우승했습니다.

상을 받고 대학에 갔었어야 했는데... 우승을 하니까 게임이 다시 재밌어지더라고요. 프로게이머를 반대했던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는 근거도 얻어서 다시 게임을 열심히 하게 됐어요. 아트록스에 이어서 쥬라기원시전, 킹덤언더파이어,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등 다양한 RTS 게임을 섭렵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목에서 아무리 많이 우승해도 스타크래프트 선수들 만큼의 인기를 얻기 어려웠어요(웃음).

그러던 중 워크래프트3 출시 소식을 들었고, 같이 게임하던 친구들과 팀을 만들고 일찍 워크래프트3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남들보다 먼저 체계적으로 준비했기 때문에 초창기 워크래프트3 대회를 저희 팀이 휩쓸었습니다. 장재호 선수가 등장하기 전까진 워크래프트3에서 저희 팀 소속 선수들을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없었어요."




워크래프트3를 일찍 시작한 정인호는 초창기에 워크래프트3 선수로 좋은 활약을 이어갔지만, 실력의 상향 평준화가 이루어지면서 번번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던 중 평소에 언변이 뛰어난 정인호를 눈여겨본 게임 방송국 PD들로부터 해설 제의를 받았다. 정인호는 고민 끝에 제의를 받아들였고, 그의 해설로서의 인생 2막이 열리게 됐다.

"워크래프트3 리그 예선 최종전에서 세 번 연속 1:2로 패하며 탈락했어요. 팀에서는 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지만, 다른 선수들이 너무 잘해서 제가 출전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어요. 여기까지 인가 싶었죠. 그러던 중 MBC 게임과 OGN에서 동시에 해설 제의가 들어왔어요. 워크래프트3 리그가 앞으로 계속될 것 같으니 함께 하자는 제의였죠. 당시에 MBC 게임 담당 PD와 해설자들이 워낙 워크래프트3에 대한 애정이 넘쳤기 때문에 MBC 게임과 손을 잡았어요."

하지만, 정인호의 해설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영원하진 않아도 오래갈 것으로 예상했던 워크래프트3 리그는 불미스러운 사건과 함께 순식간에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e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흥행 돌풍을 이어갔던 워크래프트3는 '맵 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몰락했다. 다시 한 번 좌절을 경험한 정인호는 이번에는 정말로 e스포츠와 인연을 끊을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믿어준 PD의 끈질긴 설득으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게 됐다.

"워크래프트3 리그에서 맵 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대회가 사라졌어요. 당시에 출연료도 적었고, 리그도 없다 보니 계속 적자였어요. 나이도 25살이 넘어서 미래가 걱정되기도 했죠. 그리고, 그때까지 저는 방송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돌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어요. 8개월 동안 준비했는데, 아깝게 떨어졌어요. 그래서 방송국에 말해서 해설을 포기하고 계속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담당 PD가 찾아와서 저를 설득했습니다. "나를 믿고 1년만 더 해보자"고 했어요. "너는 무조건 해설자로 잘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결국, 마음을 고쳤어요. 오랫동안 방송국에서 일한 사람이 저를 믿을 정도면 계속해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얼마 후 MBC 게임에서 철권 리그를 시작했고, 제가 그 리그의 해설로 합류하게 됐어요. 하지만, 저는 철권을 전혀 몰랐어요. 오락실에 가본 적도 없었거든요. 기술이 전부 비슷한 것 같았고, 액션의 미묘한 차이도 몰랐어요.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죠. 계속 돌려보면서 공부했어요. 나중에는 기술이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중계에 대한 감이 생겼어요.

MBC 게임에서 이번에는 FPS 게임 AVA를 같이 하자는 제의를 했어요. FPS 게임은 해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었죠. 방송국에서 저에게 세 달의 시간을 줄 테니 해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게임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세 달동안 AVA 1500판을 했어요. 구름에 수류탄을 던졌을 때 어느 위치에 떨어져서 터지는지 모두 외울 정도로 게임을 했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더니 반응이 좋았죠. 방송국에서도 '정인호는 시간을 주고 시키면 결과물을 만들어 온다'는 말이 PD들 사이에서 있었어요. 그런 좋은 평가가 쌓이다 보니 일이 계속 몰렸습니다. 안 해본 게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정인호는 게임을 좋아하고 잘했기 때문에 e스포츠에 입문하게 됐지만, 남다른 노력과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리그의 해설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AVA 이후에 해설로 합류한 도타2, 월드 오브 탱크 등 많은 리그에서 정인호는 수준 높은 해설로 호평을 받았다. 정확하게 선수의 밴픽을 예측해서 '무당 해설'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세월이 흘러 MBC 게임이 폐국하고 곰TV를 거쳐 스포TV로 주 무대를 옮긴 정인호. 해설로서 언제나 호평을 받았던 그도 완벽하게 소화해내지 못한 게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타크래프트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으며 e스포츠 주류 종목으로 떠오른 LoL이었다.

"LoL의 성공 가능성을 일찌감치 예상하고 지인들과 베타 때부터 LoL을 많이 즐기며 해설 준비를 했었어요. 하지만, 라이엇게임즈와 OGN이 독점 계약을 맺으면서 해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어요. 세월이 흘러서 스포TV에서 진행된 KeSPA Cup을 중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공백기가 길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회사에서 준비할 수 있는 시간도 많이 줬고, 처음에 욕을 먹어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심리도 있어서 고민 끝에 LoL KeSPA Cup 중계를 맡게 됐는데, 자만했는지 결과가 정말 안 좋았어요. 이미 다른 종목 중계를 하고 있었는데, 욕심을 부려서 안 좋은 결과가 나오자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다음날 평소에 친한 김동준 해설과 만나서 술을 마셨어요. "내가 그렇게 못했냐?"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죠. "못했다"고 말하더라고요. "자신감이 없다 보니 목소리 톤도 떠있었고, 중계진이 가져가야 할 호흡 배분도 안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솔직한 심정으로 회사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었고, 사적으로 친하지만 해설자로서 인정하는 동준이와 경쟁도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기엔 준비가 너무 안되어 있었죠. 그래서 동준이에게 솔직한 평가와 함께 위로를 받고 싶었어요. 다시 한 번 LoL 해설 제의가 들어온다고 해도 안 할 것 같아요(웃음)."




비록 LoL 해설로 실패를 경험했지만, 그는 현재 다양한 종목에서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스포TV 게임즈에서 진행 중인 피파 온라인3 챔피언십, 서든어택 챔피언스 리그, 던전앤파이터 액션 토너먼트, SSL 클래식, 그리고 최근에 종료된 섀도우버스 챔피언십 코리아까지 그의 손을 거쳤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e스포츠 종목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그는 다양한 종목을 중계했다. 그가 '다작'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가장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다작의 비결요? 특별한 것은 없어요. 일단 게임이 나오면 조금씩 다 해봐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계를 바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방송이 정해지면, 몇 달씩 준비를 하고 들어가요. 사실 올해 초에 리그가 없어서 시간이 많았거든요. 그때 쉬면서 중계가 결정된 게임을 열심히 했어요. 몇 달동안 집에서 게임만 하니까 게임을 잘 알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게임에 대한 '센스' 같은 것은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를 많이 먹어서 없는 것 같아요. 센스라기보다는 중계의 '요령'이 생겼죠. 게이머 때부터 워낙 다작을 하기도 했고, 18년 동안 게임을 하며 살다 보니, 어떤 것을 집중적으로 봐야 하는지 금방 알게 돼요. 도타2 해설 때는 주로 밴픽 위주로 기준을 잡고 유불리를 설명했고, 월드 오브 탱크 때는 해외 대회 위주로 챙겨봤어요. 월드 오브 탱크가 러시아에서는 국민 게임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러시아의 빌드를 따라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게임에 대한 애정도 많이 할 수 있는 비결인 것 같아요. 제가 중계하고 있는 게임들 모두 재밌어요. 피파 온라인3 중계를 맡은 뒤로 새벽에 EPL도 다 챙겨보고 있어요. 시간이 부족하지 않냐고요? 연애를 안 하면 돼요(웃음)."




올해 초에 SSL 챌린지 중계진으로 합류한 정인호 해설은 고인규, 김익근과 함께 신개념 예능 중계를 이끌고 있다. GSL과 GSTL 중계 이후 오랜만에 스타크래프트2에 복귀했지만,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한 담백한 해설로 호평을 받고 있다. SSL 챌린지의 흥행 비결을 묻자, 그는 겸손하게 조합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SSL 챌린지를 중계하면서 새롭게 생긴 자신의 딜레마에 대해서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SSL 챌린지 중계가 확정되고 두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VOD도 다 챙겨봤죠. 그런데, SSL은 중계진 조합이 워낙 좋아서 큰 걱정은 안됐어요. 익근이는 워낙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고, '드립'을 잘 던지는 친구라는 것을 알아서 잘 받을 자신이 있었어요. 인규는 워낙 잘하는 친구라서 든든했고요. 세 명이 술자리를 여러 번 가지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인규에게는 게임 내적으로 집중하라고 했고, 저와 익근이가 바닥을 깔겠다고 했어요(웃음). 편한 분위기로 하자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잘 된 것 같아요. 이가희 PD의 의도도 그랬고요.

다행히 많은 분들이 재밌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사실 너무 재밌게만 중계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해설자로 참여하고 있는데, 너무 장난을 많이 치는 것 같아서 고민이 많았어요. 웃고 떠든 것뿐인데 벌써 시즌2가 끝나버렸죠. 딜레마가 생겨서 이가희 PD에게 웃음기를 빼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이가희 PD가 '말말말'을 뽑아야 한다며 계속 이렇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냥 부담 없이 재밌게 하기로 했어요."




정인호 해설의 중계 시간이 다가오면서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정인호 해설에게 목표를 물었다. 정인호 해설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평소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작은 고민과 함께 이루고 싶은 목표를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사실 시작할 때부터 '다작'을 하려고 마음먹고 하지는 않았어요. 하다 보니 다작이 됐죠. 그래서 제가 어느 게임에서 중계를 굉장히 잘해도 그 게임을 대표하는 '스페셜리스트' 해설자가 되기는 힘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를 그냥 재밌는 해설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저는 항상 진지하거든요. 내적으로 충실한 해설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SSL 챌린지는 어쩔 수 없이 재미로 가고 있지만(웃음). 은퇴하기 전에 하나의 게임을 대표할 수 있는 '스페셜리스트' 해설자가 되어 보고 싶어요. LoL 해설하면 김동준, FPS 게임은 온상민 해설을 떠올리는 것처럼요.

어찌 됐든 작은 목표는 시기마다 다른데, 궁극적인 목표는 건강하게 오래 중계하는 거예요. 그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중계하고 싶습니다. 저는 항상 새로운 조합으로 중계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오래 방송을 하다가 좋은 이미지를 가진 상태로 은퇴하고 싶어요. 시청자와 방송 관계자 모두 '정인호는 많은 게임을 중계하면서도 만족감을 줬다'는 평가를 듣는다면 뿌듯할 것 같아요."


남다른 도전 의식으로 18년 동안 e스포츠 판에 몸담고 있는 정인호 해설은 끝으로 "성실하게 하겠습니다. 내년에 어떤 리그로 인사드릴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만족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사진 : 남기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