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트'를 만나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눈이었다. TV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다르게 눈매가 굉장히 착했다. 외꺼풀의 눈을 생각했던 건 '앰비션' 때문이었을까? 호리호리하고 뽀얀 피부에 예상과 달랐던 마른 체형, 그리고 옅은 쌍꺼풀의 눈은 화면으로 보던 '페이트'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페이트'는 자신에게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2000년에 태어나 올해 스물하나가 된 이 친구는 자신이 확신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려고 노력했다. 설령 그게 자신이 가진 꿈이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일지라도 절대 쉽게 말을 하지 않았다. 비슷한 나이의 많은 프로게이머들을 인터뷰했지만, '페이트'는 그중에서도 조심스럽고 신중한 편이었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이 친구 만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게 느껴진 인터뷰였다. 가슴에 남는 말을 남긴 것도 아니고, 큰 울림을 주는 언변도 아니었지만, 잔잔하게 흐르는 호수를 바라보듯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자리였다.


하루 만 걸음을 걷는 소년

▲ 사진 출처: 리브 샌드박스

혼자 동네를 걷는 걸 좋아해요. 숙소에서 생활하다 보면 시간이 애매하게 남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숙소 주변 거리를 자주 걸어요. 평소 다니지 않던 길도 걸어보고 뭐가 있는지 둘러도 보는 편이에요. 5분, 10분만 다른 길을 걸어도 전혀 새로운 곳에 있는 기분이 들어요.

걸을 때 생각을 많이 하진 않아요. 추상적인 생각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노래를 들으면서 걷거나 주변을 보면서 바람 쐬는 걸 즐겨요. 요즘은 휴가를 나와서 걷는 게 많이 줄었어요. 숙소에 있을 때는 하루에 만 걸음 정도 걸었는데, 휴가 때는 오백 걸음도 안 찍혔더라고요.

프로게이머를 한 지는 3년이 조금 넘었어요. 생각해보면 다른 선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프로게이머 생활을 한 것 같아요. LCK도 많이 익숙해지고. 챌린저스 때 함께 리그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이제는 LCK에 많이 있어서 예전처럼 '상상으로 그리던 LCK'라는 느낌은 아니에요. 그래도 여전히 잘하는 선수들은 다른 세상의 존재처럼 느껴지지만요.

스프링 시즌은 메이지 메타였고, 메타와 다른 챔피언을 보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신기했던 건 많은 선수들이 다 비슷한 챔피언을 하는 와중에도 선수들의 장점이나 단점, 특징이 각자 다르게 느껴진 부분이에요. 특히, 상위권 선수들은 각자가 가진 특징이 게임에 잘 묻어나요.

이번 메이지 메타에서는 ‘비디디’ 선수가 제일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제가 추구하는 승리 패턴과 가장 다른 스타일로 플레이한 건 ‘쵸비’였어요. 그래서 더 눈이 가고,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어요. 피지컬 같은 건 현실적으로 쉽게 흡수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쵸비’ 선수의 습관이나 장점은 자주 따라 하려고 해요.

다른 선수들이 메이지 메타에서 좋은 챔피언을 위주로 했잖아요. 하지만 ‘쵸비’ 선수는 주류가 아니어도 활용 가치가 있는 챔피언을 잘 찾아서 썼어요. 특히, 라인전에서 라인 관리를 굉장히 까다롭게 하는 게 정말 대단했어요. ‘쵸비’ 선수는 자신이 어떻게 플레이해야 상대가 힘든 지를 잘 아는 선수에요.


감독님의 믿음은 감사하지만...


감독님이 저를 든든하다고 생각하신 지는 잘 몰랐어요. 경기 때 우리 팀이 주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럴 때 제가 좀 침착하게 오더를 내리는 걸 감독님이 좋게 평가해주신 것 같아요.

저도 항상 차분하게 한결같은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냉정하지 못할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많아요. 특히, 제가 실수를 했을 때 느끼는 허탈한 감정이 더 큰 것 같아요. 다른 라인에서 실수가 나오면 내가 어떻게 도와줄 부분이 없었나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실수를 하고 그 실수가 생각보다 크게 굴러갈 때는 견디기 힘들어요. 그런 면에서 상호(에포트)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느껴요. 상호는 자신이 실수하더라도 멘탈이 흔들리는 선수가 아니거든요.

사람마다 가진 장점이 다르잖아요. 각 능력치를 육각형으로 잡았을 때, 저는 감각적이기보다는 지능적인 스타일이에요. 게임을 할 때는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하는 걸 선호해요. 경기에서도 '이걸 해야만 희망이 있겠다' 싶을 때에만 리스크를 지고 플레이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하는 편이에요.

저를 주목하는 분들이 많아진 건 감사하지만, 저 스스로 만족하고 있진 않아요. 제가 생각하기엔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제가 해주지 못한 게 더 많았다고 생각해요. 라인전을 잘 풀었을 때든, 못 풀었을 때든 제가 플레이하는 방식이 크게 틀려지지 않고 팀에 맞춰주려는 경향이 강했거든요. ‘좀 더 이기적으로 했다면, 좀 더 주도적으로 했다면 한 판이라도 더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서머 시즌의 '페이트'는 달라지겠다


스프링 시즌에는 무난한 메이지 챔피언을 자주 했지만, 서머 시즌에는 메이지를 카운터치는 챔피언을 좀 더 해보고 싶어요. 준비는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스크림에서 매번 메이지 챔피언을 하다 보니, 랭크 게임에서는 AD 챔피언을 자주 했거든요. 챔피언 숙련도도 낮지 않다고 생각해요.

원래 성격은 무난한 걸 좋아하지만, 이제는 좀 더 과감하게 하고 차이를 만들 수 있는 플레이를 하려고 해요.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게임을 끌고 가는 걸 좋아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챔피언마다 다른 느낌으로 플레이를 하고, 그런 부분에서 만족을 느끼고 싶어요.

현실적인 목표는 플레이오프지만, 조금씩 더 큰 목표를 생각하고 있어요. 채환이(프린스)가 담원 기아에서 롤드컵을 경험했던 이야기를 자주 해요. 저번 생일에도 생일 선물 대신 롤드컵 자켓을 받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야망도 있고, 열정적인 친구가 옆에 있다 보니 저도 자연스레 롤드컵에 가서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됐어요.

허황된 꿈을 싫어하고 근거 없는 생각을 말하는 걸 싫어하지만, 우리 팀도 조금씩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팀이 그렇듯 롤드컵 진출해서 잘하는 모습 보여드리는 게 목표에요. 롤드컵 전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팀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