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스코어 1:2. 한 번의 실수로 패배하면 1년 동안 해왔던 노력의 결실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앞서가고 있는 상대는 마음에 여유가 남았을지 몰라도 당장 탈락을 눈앞에 둔 팀에게 여유란 사치일 뿐이다. 연이은 패배로 승리할 방법마저 떠오르지 않는 암담한 상황. 누군가 흔들리는 팀 분위기를 잡아줘야 한다.

그리고 2016 롤드컵 4강과 선발전에서 '벵기' 배성웅과 '앰비션' 강찬용이 그 역할을 해냈다. 팀의 맏형으로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팀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팀을 살려 극적인 역전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코치진이 개입할 수 없는 게임 속에서 하나 되어야 할 다섯 명의 중심을 잡아준 것이다.

두 맏형의 역할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화려한 플레이는 대부분 뛰어난 피지컬과 멋진 킬을 만들어내는 동생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승자 인터뷰에 나와도 그들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뿐더러 묵묵히 다음 경기를 잘하겠다는 심심한 답변으로 마무리했다.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에게 기대하는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인터뷰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했던 말처럼 잘했다고 자만하지 않고, 못했다고 흔들리지 않으며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왔기에 지금 가장 높은 무대까지 올라왔다.



■ 위기에 강한 진정한 강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 '앰비션-벵기'


'벵기-앰비션'이 위기에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 최고의 LoL 무대인 롤드컵에서 뛰지 못한다는 중압감마저 그들을 막지 못했다. '벵기'는 롤드컵 4강에서 패배할시 '이제 한물갔다'는 평가를 피해갈 수 없었고, 오랫동안 활동한 '앰비션'은 단 한 번도 롤드컵에 가지 못한 선수로 남을 뻔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왔기에 롤드컵 속 위기에서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롤드컵 2회 우승에 빛나는 '벵기' 배성웅은 매 시즌 슬럼프 기간도 길었다. 2013년 롤드컵 우승 이후 SKT T1과 '벵기'에 대한 기대는 최고조에 다다랐지만, 성적과 평판은 이에 못 미쳤다. 2015년 초까지 메타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되살아난 '벵기'는 자신의 상징과 같았던 시야석과 함께 커버형 정글러로서 장점을 살리기 시작했다. 2015 롤챔스 스프링 포스트 시즌에서 CJ 엔투스에게 0:2로 밀리는 상황에서 '톰' 임재현을 대신해 등장해 '톰톰벵벵벵'이라는 극적인 역전승의 그림을 완성해낸 것이다.

다음 해에도 '벵기'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킨드레드-그레이브즈-니달리와 같은 캐리형 정글러가 판치면서 2016 시즌 '벵기'의 경기를 보기 힘들었다. '블랭크' 강선구가 IEM 월드 챔피언십과 롤챔스 스프링 시즌 결승전에 출전해 직접 경기하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벵기'는 SKT T1 위기의 순간 다시 돌아왔다. 롤드컵만 진출하면 잠자던 '흑염룡'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작년 MSI에서 주춤한 바 있지만, 2016 롤드컵에서 다시 살아났던 것처럼.

위기의 롤드컵 4강전 4세트, '벵기'가 등장해 자신의 약점으로 지목받던 니달리를 꺼냈다. 누구도 '벵기'가 니달리를 할 거라고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세트 패배를 안겨준 락스 타이거즈의 미스포츈을 밴해야 했기에 밴 카드가 모자른 상황이었다. SKT T1은 의도치 않게 꼬인 밴픽까지 더 해져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벵기'와 함께 승리할 수 있었다.

만약, '벵기'가 계획에 없던 픽으로 낙담한 상황이라면, 팀 분위기 역시 이전 세트처럼 안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페이커'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벵기'는 특유의 활기찬 모습으로 안 좋을 법한 팀의 분위기를 바꿔놓는 데 기여했다. 세계 최강의 개인 실력을 보유한 SKT T1에게 당시 가장 필요한 것은 상대에게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분위기였다. 맏형인 '벵기'가 니달리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팀원들도 탈락이라는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지 않았을까. 그렇게 '벵기'와 SKT T1의 기세는 완벽히 달라져 어느새 결승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찬용 역시 포지션과 팀을 바꾸며 여기까지왔다. 한 때 미드 라이너로 이름을 날렸지만, '페이커' 이상혁 같은 대형 신인들에게 무너지며 슬럼프를 겪었다. 포지션을 변경해도 원하는 성적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경험 많은 팀원들로 구성된 CJ 엔투스에서 나와 팀원 대부분 신인이었던 삼성 갤럭시의 동생들을 홀로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롤드컵에 한 번도 못 가본 선수'라는 꼬리표 역시 떨어지지 않았기에 롤드컵 시즌마다 우승하는 다른 팀을 보며 부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2016 롤드컵 진출 역시 힘겨워 보였다. 넘어야 할 상대가 삼성 갤럭시의 천적과 같았던 kt 롤스터였고, 당대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정글러 '스코어' 고동빈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앰비션'은 롤드컵 선발전을 하면서 '스코어' 고동빈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기량에 더욱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위기에 강한 '앰비션'은 더 독하게 마음먹고 스카너 카드를 꺼냈다. 당시 유행하던 주류 픽을 포기하고 스카너를 뽑은 이유는 패배할 때 하더라도 준비한 것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패배를 각오하고 꺼낸 카드는 팀원들에게 '우리가 준비한 것만 보여주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4세트 승리의 기운은 마지막 세트까지 이어져 잊지 못할 그들만의 드라마를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스카너는 자신감의 상징이 됐다. 중국의 RNG와 롤드컵 무대에서 맞붙었고, 상대 정글러 'Mlxg'가 잘 다룬다는 니달리를 열어줬다. 하지만 초반 갱킹부터 한타 때 활약까지 니달리를 확실히 압도하며 '앰비션 표 전기톱'의 존재감을 세계 LoL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이번 롤드컵에서 올라프(5승)와 렉사이(3승)로 주로 경기했지만, 또 하나의 확실한 카드인 스카너(2승)가 있기에 상대 입장에서 '앰비션'을 제어하기 더욱 힘들어졌다.



■ '우리 형'의 형? SKT-삼성 그들의 맏형


세계적인 스타가 된 '페이커' 이상혁은 많은 이들에게 '우리 형'으로 불린다. 슈퍼플레이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실력만큼은 한국을 대표할 만한 '형'이었으니까. 그런데 '우리 형'이 인터뷰에서 불렀던 '벵기 형'이라는 말 역시 어색하지 않았다. 단순히 나이 뿐만 아니라 실력적으로도. '페이커'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벵기'가 힘겨웠던 SKT T1의 분위기와 팀플레이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페이커'의 멋진 킬 역시 '벵기'와 칼 같은 호흡을 통해 만들어낸 장면이엇다.

'마린' 장경환이 없는 2016 롤챔스 시즌. 오더의 부재로 팀이 부진하냐는 말이 돌았고, 남아있는 맏형인 '벵기' 역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일부 화살은 부진했던 '벵기'에게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당당히 자신이 2016 주전 중 한 명이라는 점을 보여줬고 SKT T1의 롤드컵 3회 우승이라는 영예에 도전하는 상황이다. '벵기'가 최강 SKT T1이 제 기량을 발휘하도록 맏형으로서 역할을 해낼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앰비션' 역시 마찬가지다. 삼성 갤럭시는 '앰비션' 영입 전후로 나뉠 만큼 예전과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열심히 하는 신예들에 운영이나 정신적으로 중심을 잡아줄 만한 맏형이 합류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너지를 냈다. 부족하다고 지적받은 운영 능력을 보완하면서 위기 상황에 더욱 노련하게 대처했다. 특히, 패배하면 뒤가 없는 낭떠러지 같은 무대에서 승리를 이어가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됐다. 삼성 갤럭시는 '상성과 천적'이라는 말을 신예의 패기로 누르고, '앰비션' 역시 겁 없던 신예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2016년을 대표하는 '롤드컵 우승'이라는 타이틀뿐이다. 자신의 플레이 하나에 우승 여부가 좌우될 수 있는 긴장감 넘치는 무대. 이런 상황에서 팀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정신적 지주이자 위기에 강한 두 맏형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올 한해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이기에 떨릴 수 밖에 없는 결승전. '앰비션-벵기'라는 두 노련한 정글러가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으로 치열한 맏형 간 대결을 펼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