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뭐라고 붙어야 할 지 모르겠네요.
혹시 좋은 제목 있으면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글은 처음인지라 뭔가 개선할 점 있으면 말씀주세요.
예를 들자면 내용이 한 번에 너무 많다거나 적다거나 글자가 작다거나 그림이 있으면 좋겠다거나... 



도입

 

 대부분이 이 게임을 과거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접한 분들이 향수를 느끼면서 접하게 되고 저도 그런 입장에서 오픈 베타 시절에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이면 다들 아는 포루투의 개인상점이나, 향료상인이 되기까지의 고난, 생산스킬 하나로 먹고 사는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부분은 더 말하기에 적합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또한, 제가 하는 건 전적으로 상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모험가나 군인 이야기의 입장은 완전히 배제한 상황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은 먼저 고지해 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오픈 베타 때 약간 한 뒤로 한동안 쉬고 향신료로 대표되는 암보이나의 시대에는 지금의 국적과 다른 포루투갈의 상인이었습니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보편적인 폴투-에습의 투클 유저였습니다. 제가 부캐를 만들 때에는 캐릭터란 에습, 폴투, 잉글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는 향신료가 전부인 시대였고, 잉글랜드는 보석상인 이외에는 매력이 없는 곳이었지요. 지금 있는 베네치아는 사실 제가 원해서 단 것도 아니고, 에습부캐가 있으니 본캐로 망명투어를 해서 교역품을 다 열어놓자는 일념에 하나씩 돌다가 마지막에 도착한 국가입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대항해시대에 감을 잡은 것은 동아시아가 열린 뒤입니다. 저에게는 남만에서 두 가지의 큰 교역품이 도움이 되었지요. 하나는 참다시마, 또 하나는 백년초입니다. 글로 이렇게 적으면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남만 매각가 시세는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었고(물론 초창기 일부 유저만 알 때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누구든 생각할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상품이었습니다. 실제로 초기에 참다시마는 어느 정도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만, 백년초는 정말 한다는 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남만이 패치되면서 이 두 가지 모두 시기가 지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아이템을 발견하기 전에 저는 결혼을 하고 아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도 예전에도 그다지 서버에 이름을 떨칠 만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연치 않게 대항해시대 두부에 제 이름이 언급되면서, 행동거지에 조금은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결혼과 출산 등으로 예전처럼 게임을 하기 어렵고, 제가 들어올 가능성은 더 적어질 것입니다. 사실 지금 할 수 있는 것도 대부분 정해져 있지요. 그러므로 여태까지의 경험과 감회를 적어 남겨보려고 합니다. 더 많은 경험을 하신 분들께는 향수를, 아직 접해보지 못한 분에게는 지식을 느낄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 이상의 뭔가를 전해드리고 싶고, 그것이 잘 전해졌다면 다행입니다.


 

출신배경

 

 도입에서 말씀드렸듯이, 제 캐릭은 포루투갈의 평범한 상인캐릭터였습니다. 조금 다르다면 시작이 약품상이었다는 점입니다. 이건 어떤 계획에 의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제 직업과 연관된 아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베 시절에 의약품 거래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돈이나 발주서가 많아 한 10억에 스킬 캐쉬템, 그리고 만랭캐릭이나 여러 스킬부스터를 붙이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아니 첫 육메시대에서도 사실 올려야 할 의미도 없는 의미 없는 스킬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 포루투갈에 의약품 거래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없었지요.

 그 당시는 어쩔 수 없이 향신료 거래밖에 없었고, 그 과정 상에서는 행동력 회복 음식(행음)을 만들어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관례였지요. 어떻겐가 대충 공예와 조리를 익혀 행음과 투자신청서(투신)로 자금을 모으고 야금야금 모아서 인도를 가고 향료상인이 되고 후추를 사 오고, 모은 돈으로 향신료거래 랭작을 해서 대충 8레벨 정도 만들고 이후는 부스터와 에르다를 붙여서 암보에서 육메를 나르는 평범한 상인이었습니다. 가끔 시간이 맞으면 벨벳과 깃을 하고 향료거래는 돈이 많이 들어서 자스민은 엄두도 내지 못했지요.

 포루투갈에서 향료방이라는 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 때는 아직 그런 고정재화에 눈을 뜬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전문 상인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저 바다를 가르는 소리가 좋았고, 멀리 가서 향신료를 사 오면 많은 이득을 얻는 역사 놀이에 빠졌던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사실 그 당시에도 5클 유저도 있었고, 길드도 있었고. 저는 우연찮은 계기로 리스본에 있는 모 길드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가입하게 된 것인지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대항해시대에서 제가 뭔가 자신의 생각을 갖고 뭔가 임하게 된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 당시 저는 길드에서 꽤 지원을 받았다고 봅니다. 당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만, 지금 돌이키면 큰 지원이었습니다. 길드에 가입할 당시 저는 상업용 대형 카락(상렙 28짜리)을 타고 있었습니다. 물론 상점표였지요. 물론 제가 28렙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드는 어쨌든 창고가 넓은 상업용 대형 카락에서부터 상업용 클리퍼까지 그냥 줬으니까요. 이후에도 배는 받았습니다만, 그 때는 길드에서 자력으로 담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다음이었으니까요.

 베네치아 국적이 된 것도 사실은 교역품을 열기 위해 망명투어를 다니던 중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포루투갈-잉글랜드 이후 신3국의 국력이 엎치락뒤치락 할 때, 베네 국적의 길드원이 저를 베네치아로 놓으려고 캐릭터를 마지막에 베네치아로 가게 조정한 것이었습니다. 베네치아 국적이 나왔을 때 역풍에 한숨을 쉬는 일이 많았지요. 하지만 이건 또 배를 타기 위한 베네지도복사와 나중에 이야기 할 먹기리 만들기에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익힌 건 나폴리의 보석세공과 카라카스의 오팔, 에메랄드 교역이었지요. 이 무역을 하면서 교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익혔고, 베네치아 대화방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러면서 툼바가를 접하게 되었고, 고추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에서 남만이 열릴 당시, 상업용 대형 클리퍼와 대 스쿠너(당시는 급가배가 얼마 없었습니다) 두 척을 보유한 베네치아 본캐와 예전에 타던 상업용 클리퍼를 물려준 에스파니아 부캐. 이렇게 2클 캐릭으로 남만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남만무역 조선

 

 초창기에는 남만 무역에 대해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국가별로 해당하는 구역이 먼저 열렸지요. 한국에서는 조선이 나왔는데, 사실 일본에서는 일본이 나왔기 때문에 일본 위키의 정보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베네치아 국가채팅방(베네방)과 길드의 정보를 토대로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남만무역의 정보는 거의 없었습니다. 거의 무주공산에서 사람들이 시작한 것이죠. 사실 그 당시 저는 투클 육메무역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두 번 다녀올 때 5클 캐릭은 한 번만 다녀와도 저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아니 제가 있던 길드에도 5클은 기본으로 돌리는 분이 여럿 있으셨지요. 그런 관계로 이런 식의 방식으로는 한계를 느낀 와중에서 남만은 새로운 빛이 있을까그리고 이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태평양무역이 가능하면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남만 무역이라는 곳에 집중했습니다. 초창기 대부분의 유저는 유럽의 여러 물품으로 승부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샤프란, 유리세공과 같은 유럽의 특산품을 갖고 말이죠. 하지만, 동선은 생각보다 길고, 양방향 무역을 하기에는 한국의 대항해시대는 3:1의 교환비율이 존재했지요. 교환비가 낮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했습니다. 하나는 교환을 한 뒤 암보이나에 들러 남은 향신료를 채워 가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상점에서 물품을 팔거나 그걸 사서 채워가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의 상황은 포항은 그냥 첫 항구의 의미만 있고, 두 번째 항구인 한양을 뚫고 거기서 나오는 호피와 명주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왜냐하면 호피는 북유럽에서 시세가 괜찮았고, 명주는 수량이 많이 나왔습니다. 부산도 있었습니다만, 초창기에 열리는 항구는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은 입항 5천에 열리는 한양을 기점으로 했습니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막상 부산을 뚫어도 한우와 인삼이 매각가가 높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습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열심히 해서 부산을 뚫을 이유도 별로 없었고, 그냥 열심히 호피를 실어나르던 시기였습니다. 그것이 현재의 잉글랜드를 만든 결정적 요인이기도 합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호피의 매각가가 높은 북유럽 지방을 동맹항으로 대부분 삼고 있었고, 한양과 런던을 잇는 발주서 퀘스트가 존재했습니다. 당시 한양에 있던 장거리 퀘스트는 런던, 리우, 산토, 리스본 정도였을 것입니다. 향신료 무역에서 상대적으로 재미를 보지 못했던 잉글랜드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조선무역에 주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철재의 교환비가 높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잉글랜드에는 유럽 물품을 들고 가서 호피로 바꾸고 테르나테 철재로 다시 한 번 호피무역이 호황을 이루게 되지요.

 그 당시 이전 무역 트렌드였던 육/메가 시세가 15000 정도 받을 수 있었나 싶고, 툼바가가 2만대 초반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호피가 50000이 넘는 것은 확실히 사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네치아는 매각 거리도 멀고 받을 것도 잉글랜드에 비해서 별로 없는 무역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는 게임이라는 것을 몰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하루에 기껏해야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유럽까지 간다는 것은 하루에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틈새 시장을 공략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