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은 결국 향료제도에서 무너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네덜란드가 향료제도를 모두 '꿀꺽' 하는 양상이 퍼다하게 된다....

 

 

"드디어 네덜란드의 독주!"

 

 

네덜란드-동인도 회사(약칭 V.O.C)의 간부들과 네덜란드의 정부 쪽 인사들은 네덜란드가 향료제도에서

패권을 완전히 쥐어가는 것에 대해 매우 크게 만족을 하게 됩니다.

 

이유는, 네덜란드는 '소국'이였던지라 이제껏 크게 뭔가 '승리'라는 것을 취해본 적이 적었기 때문이지요.

 

실제 네덜란드 역사 또한 자국의 '자주'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던 전쟁과 스페인에게서 해방되어 '독립'

하자는, 독립 전쟁 외엔 그닥 없습니다.

 

(그 외엔 그냥 나폴레옹한테 넘어가서 괴뢰국이 되었거나 혹은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 제국에합병..)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앞에 떡하니 있는 '라이벌'이라 불러도 좋을 상대가 있었으니,

 

당연 '영국' 이였습니다.

 

 

영국은 네덜란드-동인도 회사보단 못 하지만 꾸준히 함대를 보내 이윤을 보고 있었던데다가 영국의 왕이 동인도 회사에

'특권'까지 내려주며(이 때 즈음부터 영국도 본격적으로 동인도 회사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개입하게 됨),

 

영국또한 동남아 제도의 원주민들과 산재된 왕국들이 가지고있던 '반(反) 포르투갈' 의 영향 덕에 네덜란드만큼은 아니

지만 영향력을 조금은 더 넓히기도 합니다.

 

 

게다가 어부지리로, 이번엔 포르투갈이 떠나고 네덜란드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악행'(군사력 과시, 향료무역

독점 요구등)을 행하니 이젠 대다수 원주민들과 왕국들은 아예 '친(親) 영국'으로 서서히 갈피를 잡게 되고,

 

 

 

거기에, 사실 전(前) 향료제도의 지배자인 포르투갈과 꼭 인연이 안 좋게 시작하고 이어나간 원주민 부족들이 있던 건 아닙

니다.

 

 

극소수지만 포르투갈과 잘 어울린 부족들이 있긴 있었습니다.

 

 

근데, 네덜란드가 와서 그 관계를 모두 백지화 시키려하고, 말로 해서 안되면 '군사력'을 통해서라도 강제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리는 짓을 서슴치 않게 하며(대표적인 것이 바로 '학살' ...) 기어코 향료제도 곳곳을 자국의 '영토'라도 되는냥

넓혀가게 됩니다.

 

 

 

이는 사실 네덜란드 자체에 꽤나 큰 부담이라 해도 좋은데..

 

 

왜냐하면, 네덜란드는 엄밀히 말하고, 정확히 말하면 그저 '소국'에 불과합니다. 상업력 하나는 타 국가들에게도 인정

받는다지만, 이들은 엄연히 소국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이끌 수 있는 역량의 이상을 향료제도에 쏟아붙습니다.

 

 

향료제도 곳곳에 마련한 거점들을 지키기 위해, 포르투갈이 그러한 것처럼 네덜란드도 '요충지'가 될만한 곳에 요새를

쌓아올리거나 포르투갈이 지어놓은 요새들을 점거, 보수하여 자기들이 사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향료제도 이곳 저곳에 배치된 '네덜란드 군대' 는 서서히 그 비율이 올라가 '수천'에 달하게 되는데, 이는 네덜란드의

재정에 계속해서 무리를 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수천명의 군대에게 보내는 '보급'비용과(사실 보급자체는 거의 스스로 해결하는 수 밖에 없었다합니다)

'임금' 때문입니다 

 

 

결국 V.O.C 에서도 초창기(포르투갈 세력을 축출해 나갈 때)엔 수천에 달하던 군대를 향료제도 곳곳의 거점에 배치했다가

서서히 그 비중이 크게 줄어가게 되고, 이는 결국 원주민들이 네덜란드가 벌이고 있는 '압제'(壓制) 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곳곳에서 분란이 터지는 원흉이 됩니다.(처음엔 네덜란드 군대가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지만 요새에 주둔하는 네덜란드군의

숫자가 급감하면서 이들의 생각도 변하게 됩니다.)

 

 

 

어쩌다보니, 네덜란드도 포르투갈처럼 원주민들이랑 실랑이를 벌이는 판국을 벌이게 되고..

 

 

영국-동인도 회사에게 타이틀(향료제도의 지배자)을 지키기위한, '전쟁'을 벌일려는 태세라 해도 좋을 정도로 호전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영국과 네덜란드...이 두 국가의 동인도 회사는 계속해서 향료제도에서 충돌과 마찰이 일어납니다.

 

 

 

네덜란드가 썼던, 수를 말하자면

 

우선 닥치는대로 향료들을 모조리 매점매석함으로써 영국이 향료를 싣고 갈 수 없게해서 '적자'를 보게 하려하고, 자신들의

'권한이 미치는' 원주민들에게 총구로 위협하면서 절대로 저들(영국)에게 한 톨의 향료도 거래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이전 반 포르투갈 때와 같은 양상을 보이게 되는 데,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네덜란드 군의 숫자가

줄어들고 영국에게 '위협받는' 모습이 연출되자 동남아의 향료상들이 영국과 계속해서 접촉하여 거래를 활발히 시도하게

됩니다.

 

 

즉, 네덜란드 측에 있어서는 원활하게 일이 처리되지 않고 있었단거죠(영국-동인도회사에게의 거래방해가).

 

 

 

--------------------------------------------

 

 

 

몇 차례의 충돌과 이런 저런 작은 다툼이 두 나라의 회사들과 오가는 가운데..

 

 

마침내,어느 한 지역이 이젠 아예 두 나라간의 격전지로서 비춰지게 됩니다.

 

 

그곳은 바로, 향료제도에서 가장 값어치가 비싼 '육두구'가 나오는 「반다 제도」였습니다.

 

 

 

----------------------------------------------------

 

 

 

 

 

 

 

 

-스페인 제국이 쓴 전술이자, '라인배틀'의 기초가 되는 테르시오 전술-

 

 

 

'테르시오 전술' 이란, 스페인 군을 16~17세기 최강으로 만들게 되는 전술 형식이며, 제목 그대로 후에

유럽 만국 공통의 전투 방식이 된 '라인 배틀'로 발전하게 됩니다.

 

사실 스페인은 오래전부터 '군사강국' 이였습니다.

 

스페인은 가까이 있는 이슬람 왕국 '무어'와 중세시대 때부터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고, 스페인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이 수백년동안 전시체제로 진행됨으로서 스페인 군은

신성로마제국과 견줄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이들의 이런 군사력은 후에 막강한 '영향력' 으로 발전하는 데, 이 때문에 이런 저런 전쟁을 많이 벌이게 되었고

그 속에서 마침내 '테르시오 전술' 이라 불리는 전술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 군대에게 패하고, 당시 스페인 지휘관이였던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란 자는

스페인 군에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게 됨을 느끼고, 이런 저런 구상끝에 테르시오란 전술이 생겨나게 됩니다.

 

 

테르시오 전술 자체가 어떠하였는지는 사실 네이버에만 쳐도 상세히 나올 정도이기에 자세하기 파고들어가진

않겠습니다만,

 

 

이 테르시오 전술과 연관깊은 총포가 유럽 전술사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지 말하겠습니다.

 

 

 

"과거 중세시대 때는 두꺼운 판금갑옷과 장검, 그리고 기사들의 시대였습니다. 동방(중국)에서 개발된 화약을

 통해 만들어지게 된 '총포'가 개발되기 전 까지는 말이죠. 이 총포의 무시무시한 점은 그 '위력'이였습니다.

 

그 어떤 판금갑옷도 총의 위력앞에 맥없이 관통됐으며, 이후 강력한 '대포'까지 등장하자 마침내 중세 기사들의

시대는 끝나게 되고,

 

총포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 총포는 당시 사용하기 참 까다로웠는데요..첫번째로 위력 하나는

강력할 진 몰라도 명중률이 너무나도 빈약했으며, 발사할 때 생기는 그 소음으로 인해 주변 적군에게 주목을

받기 때문에 적군의 '제 1 섬멸대상'이 될 때가 번번했고,(물론 역으로 그 소음이 적군에게 '사기저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재장전'시간이 다른 발사무기(활이나 석궁, 투창등에 비해) 초기 총포는 장전에서

부터 사용에 이르기까지 이런 저런 잡다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기도 했기에 '총포는 강력한 무기지만, 그리

대단한 무기까진 아니다' 라로 유럽 각국의 전술가들에게 인식됐습니다. (그 때문에 두꺼운 판금갑옷은 사라져

갔을진 몰라도 '활'과 '석궁'이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나가며 창병이나 검병들 역시 명맥을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이런 총포가 가진 문제점은 시간이 차차 흘러 '개량'이 되면서 여러 잡다한 문제가 해결됩니다. 물론,

총포 자체가 지녔던 '낮은 명중률과 오래 걸리는 장전 시간' 등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어느정도

문제점을 착실하게 줄여나가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머스킷 총'이라는 어깨에 차고 쓰는 대형총(이전에는 유럽인들의 신체에 비해 스몰사이즈라

할 수 있는, 대략 권총만 하거나 그거보다 좀 길다란 총포 뿐 이였습니다.)또한 등장하고, 위에서 자주 언급한

테르시오 전술이 '뛰어난 효과와 위력, 명성'을 얻자 유럽 국가들은 서서히 총포 무기를 완전한 주력 무기로

사용하게 되어 갑니다.

 

 

 

하지만, 테르시오 전술이 '후반기'에 들어서는 좀 달라지는 모습이 생겨나고 이것이 '라인배틀'로 발전하는데요.

그것이 '일제사격' 이였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총포류 같은 경우 진짜 한참 후에야 명중률을 높이는 기술이나 방법이 고안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진짜 아무리 뛰어난 숙련된 사람이 쏴도 총포류의 명중률은 항상 한마디로 '후달달' 거렸습니다.

 

한 사람이 만약 머스킷 총을 '7~80M' 거리를 두고 떨어진 타겟(상대)을 향해 100발을 쏜다고 가정할 때, 평균적으로

명중하는 회수는 기껏해야 2~30회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날씨랄 지 그런 것도 명중률에 크게 영향을 주었죠.)

 

 

그래서, 총포간의 전투가 벌어질 때는 그냥 듬성 듬성 10명 정도가 1 분동안 부상을 입거나 사망해갔는데,

이는 진짜로 과거엔 1분이면 수십 수백명이 죽어나가던 옛날에 비하면 그 수치가 엄청나게 하락한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일제사격' 같은 경우 단 한번 사격했을 때 '1분 동안 10명이 차차 죽는 것'과 달리 한 번에 다수를 제압해버렸기

때문에 상대군에게 입히는 사기저하가 훨씬 더 높았습니다.

 

(이 일제사격이 표준화되는 때가 테르시오 전술 후반기이며, 그것이 아예 모든 유럽 국가의 군대에 정착됨으로서

'라인 배틀'이 파생됩니다.)

 

이전의 테르시오 전술에선 총포를 사용할 때는 한 마디로 '자유사격' 그니깐, 옆에서 같이 총포류를 쓰는 사람이 재장전을

끝마쳤던 아니건 자기가 장전이 완료되면 무조건 먼저 쏘고 했지만, 이 일제사격이 도입된 후부터는 안그래도 낮은

명중률을 다수가 한 번에 쏘아붙여서 해결하자는 시스템이 그 효과를 톡톡히 봄으로서

 

후에 라인 배틀을 무려 19세기까지 그 명성을 이어나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