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딘의 말을 무시한채 어디론가 가버린 엘리스가 잠시 후에 무슨 일에 휘말리거나 일으킬줄알았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었기에, 이날 그녀의 하루는 별일없이 마무리되었다. 여기서말하는 별일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남은 오후와 밤을 경제 특구에서 돌아다니면서 지냈다'였다. 제아무리 아이오니아에서 가장 문명적으로 발달된 경제특구라해도, 엘리스의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것은 별 수 없는 일이지만, 날이 갈수록 경제 특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건 미묘한 차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리그력 25년 10월 9일.

 이제 엘리스의 체력은 도시국가의 보통여자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메뉴얼에 충실한 팔굽혀펴기 100회의 난이도가 점점 쉬워졌고, 자신의 주변 혹은 몸속에 존재하는 마력의 흐름을 체감하고 평상시에도 이를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하면서도 점점 날카로워져갔다. 마치 칼갈이를 통해 날이 살아나는 검처럼.

 물론 지금의 수련이 절대로 쉽다고말할수는 없다. 팔굽혀펴기 30회달성에 허덕이던 때도있었고, 수련을 시작한 날 이후로 아침과 점심 직후의 오후가 그렇게 짜증나고 귀찮았다. '이것도 설마 '화'라는 감정을 확실히 느끼게 일부러 빡세게 진행하는건가'라고 생각하기에는 청문회 직후에 느낀 첫 감정이 '분노'였으니 한낱 자기위안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가을에 접어들면서 비오는 날이 유독 적어졌고, 칭란 마을에서의 중상을 자력으로 회복한 직후에 받은 수련은 아직까지 감정이 무딘 엘리스마저 '지옥같다'라는 말을 연상케할 정도의 고난이었다. 정말 리신이나 마오카이의 앞에서 '너무 힘들다, 조금만 수련의 강도를 낮춰달라'고 말하려 마음먹을때마다 그들의 옆엔 카사딘이 서있었다. 칭란 마을이후의 수련에서부터 그는 엘리스의 입을 막을 타이밍에 꼭 서있었다.

'저녀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다.'

 ...는 마음때문이었을까, 그때마다 참고참으면서 했던 수련은 그녀의 신체적 성장과 강함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엘리스에게 얻은게 있는 반면 잃은것도 생겼으니...


 

"우... 피부에 생기가 점점 빠져가네."
 그녀에게 있어서 그림자 군도의 기운이 사라진 그날로부터 3개월이 지났다는것은, 거미교의 신도들을 잡아먹는 거대거미로부터 나오는 액체를 먹지못하고 3개월이 지났다는것과 같은 소리다. 아이오니아에 온 이후부터 서서히 느꼈지만 이제는 느끼는 수준이 아니라 눈에 확연히 들어올만큼 피부의 노화가 진행중이었다. 탱탱하고 하얀 피부를 잃어갈수록 그녀의 살도 쳐져만갔다.

'더욱더 화장을 진하게해야하는데 이거...'

 그녀도 화장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되는만큼 점점 아줌마화장을 하고있었다.

 

 여담으로 그녀의 색기를 돋우는 가슴조차도 쳐져...


그래서 오늘의 수련이 끝나자마자 엘리스는 그동안의 일상과 비슷했지만, 평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경제 특구로 달려가서 마트에서 무언가를 사려는 욕심이 강했다.

 그런데,

"엘리스, 잠깐 멈추시오."

 평소같았으면 그녀를 곱게 보내줄 리신의 말이 그녀의 몸을 잡았다.

"오늘은 좀 얘기해볼것이 있소. 마오카이, 카사딘, 그대도 같이 오시오."
 그렇게 세 챔피언과 거미 여왕은 리신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오늘 소인이 얘기할것은 그대의 수련중 일부에 속하는것이며, 이는 마오카이와 카사딘도 모두 이를 알고있소. 그러니 엘리스, 그대는 소인의 대답에 많은 생각을 한다음에 답해주시기 바라오."
"알겠어."
'굳이 녀석까지...'

 엘리스또한 카사딘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따라해서 그를 '녀석'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지금 이 시간은 그대가 잃어버린 감정을 얼마나 되찾았는지 묻는 자리가 아니오. 그대는 소인에게 '과거를 발판삼아서 자신의 삶을 정하고싶다',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자신이 되고싶다'고 말했소."
"그랬지."
"과거나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거나 단서를 잡은것 같소?"
"...아니, 어쩌다가 짤막한 사건들이 떠오르긴했지만 그것은 녹서스와 그림자 군도에 있을 때 일어난일이고, 필트오버나 아이오니아에서는 이런 경우가 일어나지 않았어. 아니, 몇 번은 있었나...? 그래도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내 과거엔 필트오버와 아이오니아가 연관되어있지않았다는건 알 수 있어."
"좋소. 그럼 묻겠소. 그대에게 주어진 3개월이 지나면 무엇을 하면서 살거요?"
 엘리스에겐 최근들어서 단한번도 들어본적없는 질문이었다. 그녀의 반응은 당연히 말을 더듬거나 우물쭈물하면서 '어, 그게말이지... 아무래도...'라며 말끝을 흐리는게 전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한다 엘리스. 그동안 이런생각을 할 틈도 없었지. 하지만 이제는 정해야한다. 썩은 아귀에게 휘둘려서 3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살았을 당시에는 몰라도 지금와서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가고싶은건 아니겠지?"
"물론. 그건 아니야."

 끼어들듯이 물어본 마오카이의 질문엔 빠르게 대답한 엘리스.

"처음에 협력의 조건으로 걸었던 '그림자 군도의 소속을 탈퇴할 것'이 아직도 유효한건 아니지만, 그동안 지내오면서 그럴 필요는 느꼈을거다. 그림자 군도의 소속에서 벗어나면 넌 전혀 다른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지지."

"..."
"다른 나라나 지역에 소속되어 새로운 직업을 가지는것도 불가능하지않다. 아니, 어쩌면 챔피언을 그만두는것도 가능하지."
 갈수록 피부에 힘이없어지는 엘리스의 전신을 팽팽히 긴장시키는 말이었다.

 

"챔피언을... 그만둔다고?"
"그렇다. 넌 그동안의 리그역사상 최초로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한 존재다. 소환사들이 너에게 6개월이라는 제한적인 박탈처리를했지만 이는 네가 일으킨 사건의 중죄여부를 확실히 판단하기위함. 즉, 너의 마음가짐을 반영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렇소. 생각해보면 그림자 군도의 기운을 쓰지않는 지금의 그대또한 스킬을 구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직업화시킬 수단은 충분히 있소."

"그래..."
 그 말을 들은 엘리스는 줄곧 알고있었지만 까먹었던 정보나 사실을 떠올린듯 사소한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흔히 말하는 거미의 특성중 하나인 거미줄... 먹잇감을 잡기위해 교묘히 설치한 것임을 감안하면 일종의 함정과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 그리고 이것을 방어적인 측면으로 활용하면 방어체계로도 쓸 수 있지! 어우 이런, 내가 이런 사실을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자신이 생각해보지않은 새로운 관점에서의 자신을 생각하자, 엘리스는 자기도 모르는사이에 조금씩 흥분해가고있었다. 그녀의 고조된 말소리를 듣는 리신도 진지한 표정을 한층 풀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대는 장래에 보안업체를 하나 꾸릴거요? 그럼 사업가로 활동할 수 있겠구려."

"흠, 그 말은 내가 하려던 말이었는데 리신."
"사업가라... 종교의 우두머리와는 다른 묘미가 있겠는데?"

 고작 몇마디에 화목해진 분위기를 부수는건 어렵지 않았다.

 ...카사딘에겐.

"다들 너무 낙관적인거 아닌가?"
"?"
"?"
"뭐?!"
 ...엘리스를 누구보다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그에겐.

"네가 만약 거미줄을 이용한 고전적인 보안업체를 꾸린다고 가정을해봐라. 보안업체는 방어의 역할을 하고있지. 그말은 전쟁이나 잦은 싸움이 없는 국가에서나 흥할법한 사업이지. 그런의미에서 하루가멀다하고 육상전, 해상전이 이루어지는 빌지워터에선 안통할 사업이다."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그에겐.

"남은곳은 항상 전쟁의 위협이 남아있는 데마시아와 녹서스. 녹서스는 이미 네 평판이 최악인상태이니 사업은커녕 또다시 생존게임을 해야겠지."

'생존게임...'

 카사딘은 잘도 남의 삶을 낮추어부르고있었다.

"데마시아는 어떻소 카사딘? 대륙의 정반대쪽이므로 엘리스에 대한 정보가 덜 퍼졌을테고, 평판도 나쁘지 않을것이오."
"그건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네가 뭔데 허락을 하나마나니?"
"...전직 데마시아 병사로서 네녀석이 나의 조국에 발을 디디는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

"뭐라고?! 네가 데마시아인이라고?"

 순간 모두가 놀랄법한 정체가 카사딘의 자기소개로인해 밝혀졌음에도 그의 언변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은 북쪽 끝의 프렐요드. 거기선 네 거미줄이 얼어붙을거다. 일단 추운 곳에서 거미가 활동할 수 없으니까 넘어가자. 남은 곳은 도시문명국가인 자운과 필트오버, 그리고 그림가 군도와 타곤산, 이곳 아이오니아다. 자운은 이미 네 이미지가 실추되어서 재기는 꿈도 못꾸는 상황, 아이오니아역시 네녀석의 바닥을 기고있는 평판과 더불어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가치관때문에 실패할 것이다. 타곤산, 거기에는 너같은 여자가 아니어도 충분히 무투로 단련된 전사들이 있을것이다. 그림자 군도는 말안해도 알테고..."
"필트오버는? 거기는 나와 별 상관이 없는 곳이잖아!"
 그녀가 생각하는 최후의 보루마저 카사딘의 논리에 격파되었다.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네가 필트오버에 있었던 기간동안에 매체에서 네가 단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국가단위로 언론에대한 압박이 가능하거나, 혹은 뒷세계의 활동에 따른 결과일수도 있지. 모범적인 도시국가라는 평에 혹해서 가다가는, 조용히 사회적 매장을 당할게 뻔하다." 

 

 와장창하고 엘리스의 정신이 무너지는 소리가 그녀의 가슴속에서 울려퍼졌다. 그리고 이는 마오카이와 리신 모두가 그런 상태에 빠져있을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씨발! 너는 나보고 뭘 하란건데!"

 어느때보다도 격분한 그녀는 처음으로 카사딘을 향해 비속어까지 사용했다. 필트오버에서 마오카이에게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소리를 버럭낸적은 있었지만 감정의 치우침이나 말투의 과격함은 지금이 훨씬 더했다.

 

 카사딘의 답변은 이러했다.

"다시 그림자 군도로 돌아가라."

 

 '쿵-' 하고 엘리스의 마음이 가라앉았을법한 소리였다.

"이게 뭐하는짓이오!"

"나는 너희들의 곁에 있었지만 너희들의 행동을 긍정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냉정히 생각해봐라. 전쟁 학회에서 열린 청문회정도의 규모면 세계의 모든 국가에 퍼질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있다. 상식적인 도덕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모두 너를 손가락질하는게 당연하지. 그 손가락질을 하지않은 유일한 무리는, 서로에게 무심했어도 같은 소속의 챔피언인 것 그 하나때문에 그러지 않았던 그림자 군도 소속의 챔피언들이다. 네 나름의 재주와 운을 모두 쏟아부어서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이해했는지는 가상하다만, 그래서 달라지는것은 없다. 동료라고 할 수도없는 동료들을 저버리고 나왔어도, 네가 처해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그게 가장 합리적이지."

 

 가만히 앉아있던 엘리스의 두 손에 주먹이 쥐어졌고, 이윽고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두 주먹으로 바닥을 사정없이 내리치면서 소리지르면서.

 엘리스를 돕겠다고 결성된 한 팀원을 시원하게 배신한 카사딘의 행동에 리신은 짧고 굵게 그를 나무랐지만 그보다 더욱 긴밀한 무언가가 있을법한 관계를 지닌 마오카이는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네가 싫어... 네가 죽을만큼 싫어!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물론 다른 방법이 없는것도 아니지만..."

"엘리스! 어디가는것이오!"
 온갖 거친말들로 현실을 직시시킨, 아니 현실과 강제로 박치기를 시켜서 사실상 패닉상태에 빠뜨린 장본인이지만 카사딘답지않게 그는 또다른 해결법을 제시하려했다.

 

하지만 그 해결법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가 뒤집혀졌기때문에, 혹은 엘리스가 수도원을 뛰쳐나갔기때문에.

<계속>

 

<작품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원작vs팬픽 비교>

이 항목 정말 오랫만에 써보네요

카사딘에대한 설정

카사딘의 스킨중 '인간시절의 카사딘'이라는 스킨이 있습니다.

 

​상단 이미지에서 좌측의 촉수를 보고

 

카사딘과 같은 공허출신의 챔피언 '벨코즈'의 외양을 보면 뭔가 연관점이 있는것같기도 합니다. 그쵸? 아님 말고

위에 있는 카사딘 스킨에서 촉수가 벨코즈의 촉수같다는 이야기는 롤 유저중에서 꾸준히 언급되었고, 벨코즈의 영상에서 희생된 인물이 카사딘이라는 추측이 나오자, 해당 게임 개발사의 관계자(= 라이엇 관계자)가 레딧에서 '영상에서 희생된 인물이 데마시아 병사'라고 밝혔습니다.

사실상 두 썰 사이에 카사딘이 겹쳐있다고보기엔 어렵지만 카사딘과 관계가 있을법한것처럼 묘사된 첫번째 자료와 영상에서 데마시아에서 희생된 병사의 소속이 데마시아라는 두번째 자료를 감안, 저는 카사딘이 전직 데마시아 병사라는 오리지널 설정을 추가했습니다. 즉 카사딘이 공허 이전의 소속이 데마시아라는 것이죠.

물론 상당한 원작파괴와 저의 메리 수라는 비판을 받을 설정이긴하지만, 저는 이 설정을 독자 여러분게 자세히 밝힘으로써 앞으로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려 합니다.

 

<글쓴이의 말>

하... 8월에 3주치의 분량이 밀렸는데 도무지 따라잡을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추석연휴도 어영부영하면서 보내버린탓에 앞으로의 정기적인 연재가 더욱 열악할듯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날잡지않고서는 밀린연재를 모두 업로드하는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갑작스레 만든티가 확나는 나머지 문체의 단조로움과 중복이 너무 심하네요ㅠㅠ

 

그나저나 카사딘 정말 팩트폭력 잘하는거 같습니다. 엘리스의 희망을 꺾어버리기위해 별의별 자료를 다 수집하고 조사하다니... 쓸데없이 자세하거나 집착하는걸수도 있지만 정말 정성껏 비난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