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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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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와 마녀와 눈물 4
시간이 흐르자 거세게 몰아치던 눈보라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적당히 이동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메리엘과 하셀은 곧바로 길을 나섰다.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는 듯 아무런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순조롭게 걸음을 옮겼다.
눈 덮인 설원을 가로지르며, 커다란 얼음 언덕을 넘어 사다리를 타고 밧줄을 올랐다. 벨은 하늘 높은 곳에서 유유히 날며 두 사람을 따라갔다.
메리엘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눈앞에는 거의 자기만 한 크기의 석궁을 메고 걸어가는 하셀이 있었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긴 메리엘은 질문했다.
“하셀, 근데 다른 사람들은 같이 안 왔어? 왜 혼자야?”
“그야, 몰래 왔거든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히 말하는 하셀을 보며 메리엘은 말문이 막혔다. ‘그냥 돌려보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메리엘이 말했다.
“왜 그랬어? 다들 걱정하지 않을까?”
“그게 문제죠. 말해봤자 안 보내 주니까요. 한시가 급한데 지금은 안 된다는 말만 하고.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무작정 뛰쳐나오다니, 이제 보니 완전 사고뭉치였네. 나 없었으면 혼자 끝까지 갈 생각이었어?”
“혼자라니요. 벨이 있는데. 그리고 저도 제 한 몸 지킬 힘은 있어요.”
하셀은 등에 짊어진 석궁을 가리키며 말했다. 메리엘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저거, 제대로 쏠 수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인데요.”
“으, 응? 아, 아니? 난 그냥...”
“이래 봬도 저 나름 괜찮은 사수예요. 전직 단계로만 따지면 메리엘 랑 저랑 같아요.”
메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엥, 진짜? 지금 너 몇 살이야?”
“열세 살이에요.”
“그런데 벌써 2차 전직을? 대단하네.”
“뭘요. 형에 비하면 전 아직 멀었어요. 아, 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형 수색은 메리엘 시험이 끝난 뒤에 시작하는 걸로 해요.”
“그래도 괜찮겠어?”
하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아무리 그래도 그것까지 양보해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리고 전직 시험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는 걸로 알고 있어요.”
“오오! 시험에 대해 뭔가 아는 거야?”
“잘은 몰라요. 형이 3차 전직 시험을 치기도 했고, 모험가분들이 몇 번 이야기해 주기는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비밀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구나. 하긴, 시험 내용을 미리 알면 부정행위니까.”
“그런가 봐요. 그런데... 원래 마법사들은 그렇게 이동하나요?”
하셀은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이동할 때 걷는다. 빠르게 가려면 달린다.
하셀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가고 싶기는 했지만, 먼 길을 가야 하기에 하셀은 걷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조금 다르다. 마법사는 평범하게 걷지 않는다. 육체 단련이 동반되는 다른 직업과 달리, 엘리니아의 마법사들은 몸을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가냘프고 연약한 육체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지극히 마법사다운 방식을 사용한다.
―슉! 슉! 슉!
메리엘은 텔레포트를 하며 이동했다.
가만히 선 채로 기다리다가, 하셀이 앞서가서 뒤처지게 되면 하셀의 조금 앞으로 텔레포트한다. 그 상태로 또 가만히 기다렸다가, 하셀이 지나가면 또다시 하셀의 앞으로 텔레포트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하셀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짧은 거리로, 더 많은 횟수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그래서 하셀은 자신의 옆에서 자꾸만 왔다 갔다 하며 깜박거리는 메리엘을 봐야만 했다. 몹시 정신 사나운 광경이었다.
“어지러워질 것 같아요.”
“이런, 이런.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먼 거리를 그냥 걸어서 갔다면 나는 이미 지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됐을 거야.”
“그 정도라면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것까지 마법으로 때우는 게 진정한 마법사의 자세지.”
하셀은 미묘한 눈빛으로 메리엘을 바라보았으나, 메리엘은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당당한 표정이었다.
“그보다, 저기 좀 봐. 새가 눈 위를 미끄러지고 있어! 엄청 귀엽다!”
“페페라는 몬스터에요. 귀엽긴 하지만 받히면 위험하니까 조심해야 해요. 그냥 지나가는 것 같으니 무시하죠.”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설원을 꾸준히 나아갔다. 평탄하던 지형은 점점 경사가 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누구도 지친 것 같은 기색은 없었다.
어느덧 광활하게 펼쳐져 있던 설원의 끝을 넘어, 폐광이라 불리는 산맥의 입구에 다다랐다. 그리고 산에 도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아득한 낭떠러지. 낡은 흔들다리 하나가 건너편과 연결된 유일한 길이였다.
메리엘은 조심조심 걸어가 절벽의 끝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메리엘은 감탄하며 말했다.
“엄청 높네.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리겠는걸. 여길 건너야 하는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메리엘은 의아해하며 뒤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몹시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셀이 있었다.
“하셀? 왜 그래? 어디 아파?”
“후우... 저기, 그.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좀 무서워서...”
“고소공포증이 있나 보네. 다른 길로 갈까?”
“다른 길은 없어요. 계속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후아...”
메리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셀이 진정하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잠깐 뒤 하셀은 굳게 결심한 듯 일어섰다.
“준비됐어요. 가죠.”
그리 말한 하셀은 성큼성큼 다리 위로 올라갔다. 거침없는 기세였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 다리가 출렁이자마자 하셀은 천둥소리를 들은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 되돌아와서는 주저앉아 버렸다.
“으에에...”
“어쩌지. 내가 업어 줄까?”
“메리엘 는 왠지 떨어뜨릴 것 같아서 더 무서울 것 같아요.”
“그럼 어쩔 수 없네. 자자, 이런 건 그냥 홧김에 저질러 버리는 편이 덜 무서워. 이리 와.”
“자, 잠깐만요... 흐억!”
메리엘은 하셀의 등을 떠밀어 다리 위로 올려놓았다. 하셀은 나지막한 비명을 질렀다.
하셀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여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스로 나아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발을 딛을 때마다 흔들리는 다리 때문에 영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하셀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깍! 깍! 깍!”
벨은 근처를 날아다니면서 그런 하셀을 비웃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하셀은 벨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기에 눈치도 채지 못했다.
“괜찮아? 손잡아줄까?”
“사양할게요... 근데 메리엘 씨는 괜찮아요?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요?”
“엘리니아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누구나 이렇게 돼. 나도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점점 익숙해졌어.”
“네? 대체 어떤 곳이길래...”
“하늘에 닿을 것처럼 엄청 높고 커다란 나무들 중간에 만들어진 마을이야. 나무줄기에 건물을 설치하고, 줄기 사이사이에 다리를 연결해서 지나다니는 거지. 나중에 한번 놀러 올래? 그때는 내가 안내해 줄게.”
“으으... 듣기만 해도 무서운데요... 왜 그런 데에서 사는 거예요?”
“그걸 설명하려면 역사 이야기를 좀 해야겠는걸. 먼 옛날에 말이야...”
그 뒤로는 메리엘의 지루하고 현학적인 역사 강의가 이어졌다. 하셀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모든 집중력을 다리를 움직이는 데 쓰고 있었기에, 복잡한 들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는 메리엘은 계속해서 설명을 쏟아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하셀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메리엘의 설명은 자꾸만 발밑으로 향하는 주의를 분산시키는 데 확실한 도움이 되었다.
그때부터 하셀은 다른 언어로 만들어진 노래를 감상하듯 메리엘이 내는 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옮겼다. 의미는 당연히 관심 밖이었다.
하셀에게는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건너편에 도착했다.
“하아. 하아...”
“고생했어. 좀 쉬었다 갈까?”
하셀은 근처 바위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메리엘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의외네. 길을 잘 알길래 많이 와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나 봐?”
“네. 사실 저도 산맥까지 들어온 적은 거의 없어요.”
“그랬구나. 어린애가 올만 한 장소는 아닌 것 같긴 하네.”
“어린애 아니라니까요.”
하셀이 쉬는 동안, 메리엘은 지도를 펼쳐 현재 위치를 가늠했다. 제대로 봤다면 이곳은 날카로운 절벽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지도에는 바로 이 근처에 성지로 향하는 길이 있다고 나와 있었다. 메리엘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 길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때 은은한 검은빛이 감도는 자그마한 수정이 메리엘의 눈에 띄었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수정이었다. 메리엘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혹시 저게...’
메리엘의 시선을 따라 수정을 발견한 하셀이 말했다.
“제대로 찾은 것 같네요.”
“역시!”
메리엘은 화색이 도는 표정으로 수정을 향해 달려갔다. 수정은 성지로 향하는 길을 나타내는 이정표. 이것을 기준으로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면 설원의 성지가 나타나고, 그곳에 성스러운 돌이 있다.
수정에 다가간 메리엘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수정에서 정교한 마법이 작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와...”
수정 너머의 땅이 일렁이며 점점 흐려졌다. 성지로 향하는 길을 감추고 있던 마법이 해제된 것이다.
단단한 땅처럼 보이던 곳이 사라진 자리에서, 깊고 거대한 골짜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메리엘과 하셀은 조심스럽게 골짜기를 내려갔다. 맨 밑바닥에 도달하자, 복잡한 형상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흑색 수정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주변이 조용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모습에, 메리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게 바로... 성스러운 돌.”
감탄하는 와중, 내심 조금 더 멋있는 이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스러운 돌이라니.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지나치게 직관적인 작명이 아닌가. 아무래도 좀.
그것과는 별개로, 메리엘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두근거렸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제 정말로 시험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메리엘은 하셀을 돌아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떡하지? 나 너무 떨려!”
“진정하세요. 긴장하면 될 것도 안 된다구요. 심호흡 한 번 하죠.”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열심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메리엘을 향해 하셀이 말했다.
“분명 잘될 거예요. 응원할게요. 이 근처는 몬스터는 들어오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메리엘은 고개를 끄덕인 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다녀올게!”
메리엘은 성스러운 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과 함께 메리엘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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