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전장이었던 곳은 수풀만 무성했다. 인간들은 기계와의 끔찍한 전투가 있고 나서 최소한의 잔해만을 정리한 뒤 이곳을 방치했다. 온갖 로봇이 인간들에게 맞선 대가를 상징하듯 처참하게 부서지고 찌그러진 채 널려 있었다. 풀이 기계들을 덮어 그들을 자연의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호기심 많은 동물은 기계에 고인 물을 받아마시거나 주변에 터를 잡기도 했다. 그런 장소 중에 바스티온이 있었다.

 바스티온은 이곳의 다른 로봇과 마찬가지로 십 년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몸은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듯이 녹이 슬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새들은 그의 몸을 쉼터로 삼았다. 계절에 맞춰 바스티온의 팔과 다리에 새들이 앉았고 머리에 둥지가 지어지기도 했다. 바스티온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눈앞에서 자연은 놀라운 회복력으로 황폐해진 대지를 정화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바스티온이 작동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끝도 없이 출력되는 오류 메시지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새들은 바스티온의 눈에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스티온의 몸에 난 구멍에서 시커먼 연기가 새어나왔다. 그는 용접기가 달린 팔을 꺼내보았다. 다행히도 그건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바스티온은 망가진 관절을 용접하고 시스템을 안정화했다. 다시 멈추는 건 겨우 모면했지만 언제 다시 부서질지 모를 몸이었다.

 바스티온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마지막 기억 속에서 옴닉은 인간의 공세에 패배해가고 있었다. 바스티온은 최전선에서 인간들의 전차를 향해 공격을 퍼붓다가 시스템이 정지됐었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신세로 널브러진 로봇들을 보고 옴닉이 졌다는 걸 깨달았다. 바스티온은 용접기를 들고 한때 동료였던 잔해에 다가갔다. 그는 잔해에서 필요한 부품을 빼내 손상된 부분을 메우고 녹을 벗겨냈다. 온몸에 기름칠을 하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지만 당장은 빗물밖에 없었다.

 바스티온은 온종일 자기 몸을 수리하고 나서 나무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그는 자기 몸에 자라난 풀과 꽃들을 보고 그를 지켜보는 새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투 때 느끼던 살의와 철저함은 사라지고 주변 환경에 대한 호기심만이 바스티온의 머릿속에 남았다. 바스티온은 고인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맑고 깨끗한 물 너머로 차갑고 딱딱한 기계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그의 어깨 위로 노란 핀치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바스티온은 고개를 돌려 핀치와 마주 보았다. 핀치가 작은 목소리로 지저귀었다. 바스티온에겐 그 소리마저 신비롭게 느껴졌다.

 바스티온은 핀치를 어깨 위에 얹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다양한 꽃과 풀들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고 지친 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타고 부는 소리들이 그에게 감미롭게 들렸다. 바스티온은 풀밭에 주저앉아 꽃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하고 새들의 노래에 맞춰 기계음을 내기도 했다. 그는 며칠이나 자연에 파묻혀 자신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아갔다.

 바스티온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지만, 더 많은 자연을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필요한 걸 전부 갖추고 나서 숲을 떠났다. 바스티온은 태양 아래에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동료 삼아 광활한 대지를 걷고 또 걸었다. 그는 꽃이 만발한 평야를 지나칠 때마다 꽃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때때로 바스티온이 우직하게 서서 몇 시간씩 자연을 감상할 때면 새들이 그에게 날아와 앉았다. 바스티온은 새들에게 나무처럼 자신의 몸을 기꺼이 빌려주었다.

 바스티온은 태양에 깊은 경외감을 느꼈다. 태양이 빛을 발산하는 정도에 따라 자연은 여러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침 햇살을 받는 꽃과 석양 노을을 받는 꽃이 서로 다르게 보였다. 그는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지켜보다가 팔을 물속에 넣어보기도 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바스티온은 자기도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구름이 잔뜩 끼거나 비가 내려서 태양이 보이지 않을 때면 그의 기분도 덩달아 침울해졌다. 빛이 없을 때면 꽃들은 하나같이 축 처진 것처럼 보였고 새들도 그의 곁에 오지 않았다. 바스티온은 비가 그치고 나면 자연이 더욱 생기 있게 보인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었다.

 바스티온은 밤에도 쉬지 않고 자연을 관찰했다. 반딧불들이 빛을 내는 수풀 사이를 걷고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귀뚜라미 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두더지가 파고 들어간 구멍을 한참 조사하기도 했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볼 때면 우주에도 이런 아름다운 자연이 있을지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을 찾아다니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지 고민했다.

 바스티온은 자연의 모든 걸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때로는 그 잔인함에 놀라기도 했다. 사막을 지나칠 때면 태양의 가혹함이 원망스러웠다. 오아시스는커녕 선인장 하나 없이 모래만 펼쳐진 땅은 기계에도 곤혹스러운 환경이었다. 한 번은 메마른 황야에서 개미떼가 싸우는 걸 보기도 했다. 개미들은 서로에게 산을 뱉고 물어뜯으면서 난폭하게 맞붙었다. 수백 마리가 넘는 개미가 몸이 찢어진 채로 개미굴 주변에 널브러졌다. 바스티온에겐 개미들의 싸움이 자신과 인간들이 벌였던 전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동물이 동물을, 벌레가 벌레를, 새가 새를 잡아먹는 걸 보면서 바스티온은 자기도 언젠가 동포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스티온은 가끔 인간들과 마주쳤다. 인간들은 주로 차를 타고 이동하곤 했다. 그들은 대부분 바스티온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방향을 꺾어 달아나버렸다. 그는 도시 외곽에 버려진 오래된 신문이나 잡지에서 정보를 얻었다. 그의 예상대로 전쟁은 옴닉의 패배로 끝난 지 오래였다. 한때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엔 옴닉의 편에서 싸웠던 그로선 이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자연을 집으로 삼았으니 그런 곳은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가 돌아다니는 걸 원하지 않았다.

 바스티온은 여느 때처럼 숲 속을 걷고 있었다.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의 잎사귀 사이로 따스한 햇볕이 스며들고 있었다. 숲 한가운데에 있는 연못엔 송사리들이 헤엄치고 그 주변으로 딱따구리들이 나무에 구멍을 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스티온은 연못 앞에 주저앉아 새들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센서에 인간들의 반응이 잡혔다. 바스티온은 그들도 알아서 물러날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 그의 기대를 배신하듯 뒤통수로 총알이 날아들었다. 바스티온은 곧장 일어서서 나무 사이를 노려보았다. 센서에 포착되는 인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놈이 저기에 있다. 모두 쏴!"

 한 인간이 외쳤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스티온에게 총알이 빗발쳤다. 바스티온은 재빨리 전투 시스템을 켰다. 그는 팔에 부착된 기관총으로 응사하면서 상황을 파악했다. 인간들은 적어도 스무 명은 넘어 보였다. 모두 방탄조끼와 총기로 중무장했지만, 복장은 가지각색이었다. 그들의 리더가 손짓으로 분주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양쪽에서 포위해서 재빨리 덮쳐버려. 놈이 대비할 틈을 줘선 안 돼!"

 리더는 바스티온 기종이 악명을 떨치던 시절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바스티온 한 대가 오지를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일거리를 덥석 받아들이긴 했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마주칠 줄은 몰랐었다. 그래도 사냥 도구를 전부 챙겨와서 다행이었다. 그는 로켓포를 꺼내 들었다. 총알들이 나무에 박히면서 새들이 하늘 위로 달아났다. 바스티온은 나무 사이에서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의 몸이 접히면서 등 뒤에 있던 미니건이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인간들의 화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탄환이 수십 발씩 허공을 가로질렀다. 리더가 나무 뒤에 숨으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놈의 등 뒤로 돌아가. 핵을 노려!"

 바스티온은 나무에 구멍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경계 모드를 풀고 숲에서 뛰쳐나갔다. 리더의 로켓포가 바스티온의 머리를 가로질러 커다란 나무를 일격에 쓰러뜨렸다. 바스티온의 곁에서 다람쥐들이 허둥지둥거렸다. 바스티온은 뒤처진 다람쥐 한 마리를 자신의 팔 위에 올려주고 계속 달렸다. 인간들이 좌우로 나뉘어 맹수를 사냥하듯이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스티온은 다람쥐를 양팔로 끌어안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총알들을 꿋꿋이 견뎌냈다. 숲의 끝이 보일 무렵 그의 등 뒤로 리더의 로켓포가 꽂혔다. 그것을 신호로 삼아 양옆에서 유탄과 철갑탄이 쏟아졌다. 바스티온은 필사적으로 벌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시스템에서 경고등이 켜졌지만, 그는 품 안에 있던 다람쥐부터 확인했다. 다람쥐는 피곤죽이 되어 있었다. 바스티온은 조심스럽게 다람쥐를 내려놓았다.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인간들이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서서히 다가왔다.

 "대장, 저 녀석 움직이지 않는데요."

 한 인간이 리더에게 말했다.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빨리 가루로 만들어버려."

 리더가 로켓포를 장전하면서 말했다. 바스티온은 몸을 납작하게 접고 대포를 꺼냈다. 다리에 무한궤도가 깔리면서 위협적인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삐-삑-삐-익!"

 리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이런 씨발, 전부 튀어!"

 바스티온은 인간들에게 달아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포구가 불을 뿜을 때마다 인간들은 다람쥐처럼 피떡이 되었다. 몇몇 인간이 정면에서 그를 향해 로켓포를 갈겼지만 바스티온은 모든 공격을 받아내면서 인간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리더는 로켓포를 팽개치고 숲 속으로 달아나려 했다. 바스티온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와 리더의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전차 모드를 풀고 리더를 내려다보았다. 리더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권총을 꺼냈다.

 "빌어먹을 옴닉 새끼!"

 바스티온은 리더의 머리를 한쪽 팔로 붙잡고 그대로 힘을 줘서 터뜨려버렸다. 그의 손에 피와 뇌수가 흥건했다. 센서에 잡히는 인간은 남아있지 않았다. 바스티온은 숲의 연못에서 팔을 씻어내려다가 물속의 송사리들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는 나무 밑에 주저앉아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조용히 자기 몸을 수리했다. 바스티온은 자기가 한 일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예전 같은 살인 로봇으로 돌아가는 건 원치 않았다. 다시 싸운다면 적어도 그 이유는 찾아야 했다. 바스티온은 자연에서 해답을 찾고 싶었다. 그 결과물이 개미들의 전쟁과 같은 잔혹함이 되더라도 일단은 계속 자연을 떠돌고 싶었다.

 바스티온은 인간들의 시선을 피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언젠가 자연에서 얻게 될 해답을 불안과 기대감 속에서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