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다녀올게요."

 알렉산드로 자리야노바가 집을 나서면서 말했다. 한파가 지나갔는데도 거리는 제법 쌀쌀했다. 민병대가 가로등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목도리를 두르면서 손에 쥔 보온병을 흔들어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녀가 부탁한 대로 보온병을 가득 채워놨었다. 알렉산드로는 소풍을 가는 것마냥 휘파람을 불면서 골목길로 들어갔다. 눈에 젖은 신문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골목길의 끝에서 원하던 것을 찾았다.

 "샤샤 할아버지."
 알렉산드로가 말했다. 턱밑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을 가진 노인이 담벼락에 기대어 알렉산드로를 쳐다보았다. 그는 곰 털을 덧댄 갈색 코트 차림에 붉은 별이 그려진 털모자를 쓰고 등에는 사냥용 엽총을 메고 있었다. 샤샤는 파이프 담배를 꺼내다 말고 알렉산드로에게 걸어갔다.

 "알렉산드로, 오늘은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나온 거겠지?"
 "네, 이번엔 정말로 허락 맡고 왔어요. 이게 그 증거예요."

 알렉산드로가 샤샤에게 보온병을 내밀었다. 샤샤는 담뱃대를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보온병을 열어보았다. 보온병엔 햄이 들어간 완두콩 수프가 가득 들어 있었다. 샤샤는 미소를 지으면서 알렉산드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어머니가 말은 늘 나쁘게 하셔도 마음씨는 참 좋으시다니까."

 "지금 하신 말 그대로 전해드리면 두 번 다시 안 챙겨주실 걸요."
 "난 널 믿는단다. 그래,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니?"
 "지난번에 하셨던 거 계속 듣고 싶어요."

 샤샤는 허름한 주택의 계단 위에 걸터앉아 수프를 몇 숟가락 떠먹었다. 주택의 문 앞에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우유와 일주일 치 신문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는 신문을 몇 장 넘겨보고 나서 전부 한구석에 치워두었다.

 "전쟁 이야기 말이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애는 아마 너밖에 없을 게다."
 "그래서 안 들려주실 거예요?"

 "그럴 리가. 우선 한 대만 태우고 하자꾸나."

 샤샤가 담뱃대에 타바코를 꾹꾹 눌러 담으면서 말했다. 그는 빛바랜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나서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우유 주변을 맴돌던 참새들이 그에게 시위하듯 짹짹거리면서 날아올랐다. 샤샤는 담뱃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우,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군. 어디 보자…이건 내 할아버지가 레닌그라드에 계셨을 때 있었던 일이란다."

 샤샤는 이따금 담배를 피워가면서 말을 이어갔다. 알렉산드로는 꼼짝 않고 앉아서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옴닉 사태가 벌어진 뒤에 시베리아 인근의 마을들은 전쟁에 고스란히 노출됐었다. 그 와중에도 알렉산드로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인형에 옷입히기나 소꿉놀이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알렉산드로만은 샤샤의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그땐 먹을 게 없어서 삭힌 빨래 냄새가 나는 양배추로 수프를 끓이고 밀가루보다 톱밥이 더 많이 들어간 빵을 배급받았단다. 요즘 시대가 혼란스럽다곤 하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축복받은 거나 다름없지."

 "그런 것도 없는 사람은 뭘 먹었나요?"

 알렉산드로의 질문에 샤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건 나중에 네가 나이를 더 먹고 나서 직접 찾아보는 게 좋겠구나."
 "왜요?"
 "네 어머니한테서 너무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거든."

 "그런 게 어딨어요. 이르지 않을 테니 말해주세요."

 "안 돼. 자꾸 떼쓰면 오늘은 여기서 끝낼 거다."

 그의 경고에 알렉산드로가 다시 얌전해졌다. 샤샤는 보온병을 마저 비우고 나서 자신의 할아버지가 어떻게 도시를 방어했고 어떤 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그 이후로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야기해주었다. 군대의 진격 방향을 설명할 때면 돌멩이를 분필 삼아 화살표를 그려가면서 러시아군의 용맹함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샤샤는 이야기가 절정에 이를수록 목소리를 높여가면서 자기가 그 전쟁에 참여했던 것처럼 흥분했다.

 "…그렇게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의 떨거지들을 몰아내고 우리가 마침내 놈들을 포위했단다. 우리 조국을 침범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지. 할아버지가 그곳에 안 계셨던 게 아쉽긴 하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전황이 우리에게 유리해졌단다."

 "정말 대단해요! 그 안에 갇힌 적들은 어떻게 됐나요?"
 "그 이야기는 내일로 미뤄야 할 것 같구나."

 샤샤가 담뱃대를 털면서 말했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볼이 뾰로통해진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또 가장 재밌는 부분에서 끊는 거예요?"
 "원래 이야기란 게 그래야 재밌는 법이란다.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 테니까 오늘은 얌전히 들어가렴."

 샤샤는 알렉산드로의 손을 잡고 그녀가 들어왔던 골목으로 걸어갔다. 골목길의 담벼락엔 샤샤가 이야기를 해주는 동안에 새로운 낙서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스프레이로 엉성하게 그려진 쌍갈고리 십자 아래로 저속한 욕설과 음담패설이 적혀 있었다. 샤샤가 눈을 부릅뜨고 담벼락에 침을 뱉었다.

 "정신 나간 패륜아들 같으니."

 "저 그림이랑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지옥의 상징과도 같은 문양이지.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너보다 몸뚱어리만 크고 덜떨어진 머저리들이 그리고 다닌단다. 그리고 내 말은…이건 나중에 알아서 깨닫게 될 거다."

 샤샤는 알렉산드라를 그녀의 집이 보이는 곳까지만 데려다주었다. 알렉산드라는 집을 향해 뛰어가면서 샤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샤샤는 전봇대 뒤에 기대어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등을 돌렸다. 그게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던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인생의 낙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어머니가 타준 코코아를 들고 창가에 앉아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샤샤가 해주는 이야기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에 얼마나 많은 고난과 희생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러시아는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지만, 그녀의 마을은 비교적 고요한 편이었다. 몇몇 주민이 말없이 떠난 뒤부터 무질서한 행동이 잇따라서 민병대가 조직되고 생필품이 배급식으로 지급되는 것 말고는 알렉산드로에게 옴닉 사태는 일상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매일 신문에서 접하는 세계 각지의 전쟁 소식보다 샤샤의 조상들이 남긴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

 

 알렉산드로는 여느 때처럼 샤샤의 곁에 앉아 있었다. 샤샤의 발밑에는 돌멩이로 그려놓은 전차와 전술 지도가 가득했다. 건물 위로 새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지나갔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을 때도 알렉산드로는 샤샤의 돌멩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샤샤만은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평소에도 민방위 훈련이랍시고 간간이 들려오던 소리였지만 이번만은 그의 본능이 무시할 수 없는 경고를 보내왔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잠깐만 앉아 있거라."

 샤샤는 담뱃대를 내려놓고 건물 뒤편으로 달려갔다. 먼 곳에서 뭔가가 깨지고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샤는 표정이 굳어진 채로 샤샤에게 돌아왔다.

 "알렉산드로, 오늘은 빨리 집에 들어가야겠구나."
 "아직 점심때도 아닌데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구나. 어쩌면…."

 샤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탄 한 발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쳐 담벼락에 명중했다. 샤샤는 알렉산드로를 끌어안고 바닥에 엎드렸다. 포탄이 더 날아오면서 그들이 앉아 있던 주택을 박살 내버렸다. 샤샤는 알렉산드로의 손을 꽉 쥐고 돌덩이 사이를 뛰어다녔다.

 "이게 대체 무슨 일…."

 "질문은 하지 말고 우선 뛰거라. 내 후배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한 모양이구나."

 거리에서도 사람들은 그들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니기 바빴다. 지평선 너머에서 번개처럼 섬광이 번쩍거리고 연기가 치솟는 게 보였다. 가로등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잡음이 섞여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을 입구에 퍼진 연막 너머에서 사람의 형체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샤샤는 어깨로 사람들을 밀쳐가면서 지름길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로는 민병대가 총을 쏘는 걸 보고 잔뜩 겁을 먹었다.

 "할아버지, 옴닉이 나타난 거예요?"
 "그래, 아마 그럴 거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군. 알렉산드로, 잘 들어라. 일단 집에 가면 당장 필요한 것만 챙겨서 가족들이랑 같이 마을 밖으로 달아나야 한다. 그리고…."

 샤샤가 말을 멈추고 앞을 내다보았다. 인간형 옴닉 한 대가 양손에 칼을 들고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옴닉의 주변에 이미 도륙당한 민병대 몇몇이 나뒹굴고 있었다. 샤샤는 한숨을 내쉬면서 등 뒤를 흘깃거렸다. 예상대로 똑같은 옴닉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드로를 담벼락에 내려놓고 말했다.

 "알렉산드로, 눈을 꼭 감고 있거라. 내 목소리가 들리거든 그때 눈을 뜨고 집을 향해 달리렴.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알렉산드로는 샤샤를 마주 보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샤샤는 그녀가 눈을 감고 나서 엽총을 빼 들었다. 알렉산드로는 어둠 속에서 칼날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총성만을 들었다. 이윽고 샤샤의 신음이 들렸을 때 그녀는 약속대로 눈을 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담벼락에 쓰러진 샤샤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샤샤의 양옆에는 머리가 박살 난 옴닉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샤샤는 개머리판으로 옴닉의 등을 후려치고 나서 엽총을 멀리 던져버렸다.

 "할아버지, 괜찮은 거예요?"

 알렉산드로가 샤샤에게 달라붙으면서 물었다. 샤샤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알렉산드로를 밀쳐냈다.

 "알렉산드로, 나랑 했던 약속을 잊은 거냐? 어서 집으로 가거라."

 "그치만…."

 "어서 가!"

 샤샤가 자세를 바로잡고 소리쳤다. 알렉산드로는 울먹이는 얼굴로 샤샤와 길을 번갈아 보다가 집을 향해 달려갔다. 샤샤는 옅은 미소를 짓고 나서 피를 토해냈다.

 "결국엔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는구먼."

 샤샤는 주택에 두고 온 담뱃대를 아쉬워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알렉산드로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을 떠나면서도 샤샤가 있던 곳을 계속 돌아보았다. 마을은 무시무시한 포화 속에 잠겨 점차 형체를 잃어갔다.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알렉산드로는 금세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집을 비롯해 마을에 남아 있던 건물들은 모조리 돌덩이로 변해버린 뒤였다. 그녀는 어디서도 익숙했던 길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샤샤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들의 집이 있던 자리의 돌가루를 뿌리며 탄식했다. 알렉산드로는 폐허를 거닐면서 샤샤를 도와주지 못한 걸 후회했다.

 알렉산드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마을의 재건 작업을 도우면서 조금씩 힘을 키워나갔다. 남자들보다 강해진 뒤에도 힘을 향한 그녀의 열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옴닉 사태가 잠잠해진 뒤에 러시아는 그녀를 체육 인재 양성 프로그램에 편입시켰다. 알렉산드로는 묵묵히 역도 훈련에 매진하면서 자신의 강인함을 선보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알렉산드로는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내일 시합이 펼쳐질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하루 뒤면 이곳에서 그녀가 역기를 드는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될 예정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동료 선수들과의 경쟁에서도 그녀는 일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훈련 때의 성과는 세계 최고나 다름없었다. 최초의 옴닉 사태가 벌어진 뒤에 운동권의 침체로 세계 신기록은 오랫동안 바뀌지 않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의 코치와 동료들은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그 오래된 기록을 깨주리라 믿고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관중석 벽에 주저앉아 옛날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그녀도 레닌그라드 사람들이 무엇을 먹었고 샤샤가 불량배들에게 퍼부었던 말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명한 운동선수로서의 삶이 나쁘지 않았지만, 샤샤와 같은 이들을 지키는 데 힘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옴닉은 시베리아의 혹한 속으로 물러났고 마을은 평온했다. 알렉산드로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로가 가볍게 몸을 풀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동료들은 심각한 얼굴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코치들은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다급히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내일까진 안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한 코치가 엄지손톱을 깨물면서 말했다.

 "무슨 소식이 있길래 저한테 숨기시려는 거예요?"

 알렉산드라가 텔레비전을 켜면서 말했다. 뉴스에선 긴급 속보라는 자막과 함께 시베리아 곳곳에서 몰려나오는 옴닉의 영상을 비춰주고 있었다. 옴닉이 활동을 재개했다는 아나운서의 설명에 이어 옴닉의 예상 공격 방향이 표시된 시베리아 지도가 화면에 나타났다. 화살표의 경로 중엔 알렉산드라의 마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곧장 목에 걸어둔 수건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짐가방을 집어 들었다. 코치들이 그녀에게 매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알렉산드라, 딱 하루면 돼. 내일 시합이 끝나자마자 가장 빠른 속도로 보내준다고 약속할게. 모두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알아?"

 "죄송해요, 코치님. 전 제 동포들이 하루라도 고통받는 걸 원치 않아요."

 알렉산드라는 그 오랜 노력의 결실을 눈앞에 두고 코치들을 뿌리치면서 경기장을 나섰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소중한 것들을 모두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알렉산드라가 마을에 돌아온 걸 두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평가했다. 알렉산드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면 사람들은 그녀가 가엾거나 돌았거나 어리석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험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내심 그녀처럼 용맹한 사람이 위기의 순간에 와줘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은 옴닉의 첫 번째 공세를 견뎌낸 뒤였다. 알렉산드라가 어렸을 때처럼 총을 든 민병대가 거리를 돌아다니고 마을 외곽에선 연기가 치솟았다. 알렉산드라는 장교와 함께 걸으면서 부서진 건물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좋습니다, 알렉산드라. 당신이 여기서 싸울 수 있게끔 제가 조치를 취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경기 결과는 보셨나요?"

 장교가 안경을 올리면서 물었다. 그녀의 동료들이 당당히 메달을 따긴 했지만 세계 신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알렉산드라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일반 병사들하고는 다릅니다. 아마 정부에서는 당신을 군대의 선전 대상으로 써먹을 겁니다. 당연히 무기도 평범한 걸 써서는 안 되겠죠. 혹시 원하시는 거라도 있나요?"

 "글쎄요…."

 알렉산드라는 마을의 방어선에서 옴닉과 전차, 대포들의 잔해가 뒤섞여 있는 걸 보았다. 그녀는 방어 포대에서 멀쩡해 보이는 융합포에 다가갔다. 포대에서 떨어져 나가긴 했어도 상태는 괜찮았다. 장교가 그녀의 곁에서 혀를 찼다.

 "이건 실패작들입니다. 워낙 급하게 배치하느라 실험용으로 보관해둔 것까지 다 꺼내왔는데 결과가 매우 실망스러웠죠. 사람이 들고 다니면 모를까 포탑용으론 영 아니에요."

 "그럼 이걸 제가 들면 어떨까요?"

 장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알렉산드라는 박수를 쳐서 손을 풀고 나서 융합포의 손잡이를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평소에 들던 역기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그녀에게 애들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장교는 사진작가처럼 알렉산드라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랍군요. 당신의 이미지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물건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일단 제가 기술부에 연락해서 당신의 몸에 맞게 주문해 보겠습니다."

 장교가 휴대 전화를 꺼내는 동안에 알렉산드라는 융합포를 들고 마을 밖을 겨누었다. 옴닉이 아무리 많이 몰려오더라도 그녀는 두 번 다시 마을에서 도망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샤샤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샤샤의 할아버지와 러시아의 군인들이 마지막까지 조국을 지탱해준 것처럼 그녀도 모든 힘을 발휘해 옴닉에 맞서 싸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