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빌헬름은 수송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치솟는 연기 사이로 전투기와 헬리콥터들이 날아다녔다. 헬리콥터 뒤로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다니는 게 보였다. 수송기 조종사는 레이더를 흘깃거리면서 연방 침을 삼켰다.

 "라인하르트 씨,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겁니다."

 조종사가 말했다.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갑옷을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짧은 기합을 넣고 투구를 썼다. 그는 수송기 좌석에 눕혀둔 로켓 해머를 가볍게 이리저리 휘둘렀다. 조종사가 그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기내에서 그 짓은 안 하기로 하셨잖습니까?"
 "어차피 나뿐인데 아무렴 어떤가? 뭐 부술 일은 없을 테니까 운전에만 집중하게."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조종사는 한숨을 내쉬면서 전진 기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라인하르트는 창문 밖으로 자신의 전장이 될 곳을 둘러보았다. 고층 건물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기지에서 쏘아 올린 포탄들이 천둥처럼 시가지를 내리치고 장갑차와 전차, 구급차들 사이로 군인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수송기는 기지 한복판에 착륙했다. 천막 아래에 모여 있던 장교들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수송기를 쏘아보다가 오버워치의 마크를 확인하고 반색했다.

 "도착했습니다, 라인하르트 씨. 이번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종사가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옴닉 따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할 걸세."

 라인하르트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면서 말했다. 수송기는 라인하르트를 내려놓자마자 쏜살같이 기지에서 벗어났다. 장교들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한 장교가 둘둘 만 작전 지도를 옆구리에 끼고 라인하르트에게 다가갔다.

 "라인하르트 씨, 쾰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오신 겁니까?"

 "어쩔 수가 없었네. 다들 워낙 바빠서 말이지."

 라인하르트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몇 시간 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옴닉의 파상 공세가 진행 중이었다. 그가 작전실에서 보았던 세계 지도의 화면에선 유럽의 주요 도시에 전부 빨간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버워치의 요원들은 부득이하게 따로따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조국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자원했다.

 장교는 통신기에 발송된 메시지를 확인해보고 나서 천막으로 돌아갔다. 라인하르트는 로켓 해머를 어깨에 짊어지고 그 뒤를 따랐다. 한창 바쁘게 움직이던 군인들이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 선망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교는 홀로그램으로 라인하르트에게 쾰른의 시가지를 보여주었다. 옴닉이 거리를 점거하고 각종 화기를 난사하는 짤막한 영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보시다시피 저 망할 고철 덩어리들이 온 사방에서 깽판을 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저놈들이 여기까지 들어오게 놔둔 건가?"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주력이 동부 지역을 수비하는 동안 놈들은 거대 굴착기들을 동원해서 후방으로 침투했습니다. 방어선을 뒤로 무를 수가 없어서 저희만 이쪽으로 파견됐습니다. 놈들의 병력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시가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서 진압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내가 뭘 해야 할 지 알겠군. 들어가서 모조리 때려 부수면 되는 건가?"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놈들이 도시 안에 갇혀 있는 동안에 라인하르트 씨께서 마무리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선발해둔 호위대와 함께 들어가시면 됩니다."

 "호위대? 나한테 그런 건 없어도 되는데…."

 라인하르트가 턱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장교는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막 옆에서 대기 중이던 분대를 불렀다.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 아홉 명이었다. 군복에 달린 계급장에 비해 앳돼 보이는 얼굴의 분대장이 라인하르트와 마주 보았다.

 "여기 헬무트 중사가 인솔하는 부대가 당신과 함께할 겁니다. 지금 바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지. 어서 빨리 적들을 쳐부수고 싶구만."

 "좋습니다. 중사, 안내 잘 해드리게."

 라인하르트는 장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군인들 사이를 뚫고 바리케이드를 넘어갔다. 헬무트는 경례로 급히 대답을 마치고 라인하르트의 뒤를 쫓아갔다. 안개처럼 연막이 드리워진 거리 너머에서 요란한 총소리와 폭음이 흘러나왔다. 고층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지면서 파편들이 땅으로 빗발쳤다. 라인하르트는 손을 이마에 대고 연막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뭐가 보이십니까?"

 헬무트가 통신기의 홀로그램 지도를 켜면서 물었다.

 "아니, 정말 지독하게 뿌려놨군. 자네는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가장 가까운 교전 구역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헬무트는 손짓으로 분대원들의 자리를 배정하고 앞장서서 연막 속을 헤쳐나갔다. 라인하르트는 양손으로 로켓 해머를 부여잡고 전장의 소음에 집중했다.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어디에 포격이 쏟아지고 어떤 종류의 차량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지나다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전차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게 분명했다. 헬무트가 길목에서 몸을 내밀자마자 거리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면서 정지 신호를 보냈다.

 "젠장, 놈들이 어느새 여기까지…. 우선 적들의 규모부터 파악해 보겠습니다."

 라인하르트는 헬무트의 말을 듣지도 않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인간형 옴닉 수십 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옴닉들은 라인하르트를 보고 움찔했다가 그에게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옴닉의 뒤로 에너지 주포를 장착한 전차 몇 대가 굉음을 내면서 다가왔다. 라인하르트는 박물관을 관람하듯 옴닉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망치를 휘두르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옴닉들이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 이제부터 내가 본때를 보여주겠다!"

 라인하르트가 소리쳤다. 갑옷의 등에 부착된 추진기가 열을 뿜어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옴닉들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어깨에 맞부딪힌 옴닉 몇 대가 볼링핀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의 곁에 있던 옴닉들은 총을 몇 발 쏴보기도 전에 로켓 해머에 머리가 깨져 나갔다. 간신히 재앙을 모면한 옴닉들이 건물 안으로 달아나면서 그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라인하르트는 총알과 포탄들을 가볍게 튕겨내면서 로켓 해머를 치켜세웠다. 로켓 해머의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디로 도망치는 거냐? 이리 나와서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그가 로켓 해머를 휘두르자 커다란 불덩어리가 옴닉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불꽃은 옴닉들의 몸을 터뜨리고 건물의 벽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전차들이 그에게 포를 난사했지만, 라인하르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에너지 구체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키보다 높이 뛰어올랐다. 로켓 해머가 포탑에 내리꽂히자 전차는 압착기에 눌린 음료수 캔처럼 포탑이 찌그러지고 연결부가 모조리 터져나갔다. 라인하르트는 로켓 해머를 한 번 더 휘둘러서 포탑을 골프공처럼 거리 밖으로 날려버렸다. 포탑에 얻어맞은 옴닉들이 그대로 땅바닥에 찌부러졌다. 라인하르트는 징검다리를 건너듯 다음 전차를 향해 도약했다. 그의 귓속에 옴닉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피가 끓어오르는군! 한꺼번에 다 덤벼라!"

 라인하르트의 말과는 반대로 옴닉들은 그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헬무트의 분대는 파괴된 차량을 엄폐물로 삼아 옴닉들을 하나둘씩 처치했다. 라인하르트는 마지막 전차를 마구 두들겨서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어버리고는 다시 한 번 옴닉들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 거리에서 몰려나오던 바스티온 기종들이 전차에 들러붙은 채로 벽에 처박혔다. 하늘에서 헬리콥터들이 옴닉들을 쫓아다녔다. 라인하르트가 하늘 위로 손을 흔들었다.

 "후, 이제야 좀 몸이 풀리는구만. 자네들 내가 활약하는 모습 잘 봤나?"

 그가 분대원들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물론이죠. 소문대로 정말 무지막지하시군요."

 헬무트가 옴닉들의 잔해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그의 로켓 해머에 걸린 옴닉 중에 몸체가 구분이라도 되는 건 한 대도 없었다. 헬무트는 소총의 탄창을 교체하면서 홀로그램 지도의 화면을 넘겼다.

 "옴닉들이 인근 교차로에 집결 중입니다. 바스티온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놈들도 이것들과 똑같은 고철들일 뿐일세. 모조리 박살 내면 그만이지."

 라인하르트가 거리를 누비면서 말했다. 건물 안에서 얼쩡거리던 옴닉들이 그의 화염 강타를 얻어맞고 목이 날아갔다. 헬무트가 라인하르트를 안내해주는 동안에 장갑차들이 교차로로 달려나갔다. 군인들은 교차로의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놓고 그 밑으로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래주머니 위로 총알이 수백 발씩 날아들었다. 헬리콥터 한 대가 프로펠러가 떨어져 나간 채로 교차로 한복판에 떨어졌다. 라인하르트는 부서진 신호등과 가로등 밑으로 바스티온들이 배치된 걸 확인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헬무트가 무전기를 붙든 장교에게 다가가 물었다. 장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보면 모르나? 저 씨발놈들이 미친 듯이 쏴갈기고 있어."

 "겨우 이 정도에 겁을 먹어서야 되겠나?"

 라인하르트가 화염 강타를 날리면서 말했다. 불꽃이 바스티온의 기관포를 뚫고 나갔다. 그러나 곧장 쏟아지는 맹렬한 반격 앞에선 그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장교는 라인하르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라인하르트 씨, 저희가 겁쟁이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닙니다. 포격 지원을 요청한 게 이십 분 전인데 아직 깜깜무소식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해결책을 찾아야지! 내가 놈들을 한꺼번에 눕힐 수 있을 걸세. 그때 자네들이 뒤에서 놈들을 처리해주게."

 라인하르트가 헬무트에게 말했다. 헬무트는 못 미더워하는 분대원들을 재촉하면서 교차로 뒤편으로 이동했다. 라인하르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모래주머니 위로 얼굴을 내비쳤다. 그 탓에 바스티온들은 라인하르트가 있는 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장교의 무전기에서 헬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바스티온이 무력화되면 그때 진입하겠습니다."

 "좋아, 소리가 나면 바로 들어오게."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그는 전차를 사냥했을 때처럼 있는 힘껏 뛰어올라 로켓 해머로 거리를 내리쳤다.

 "망치 나가신다!"

 라인하르트의 외침과 함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아스팔트에 금이 가면서 땅이 한순간 뒤흔들렸다. 경계 모드의 바스티온들이 흐트러지면서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라인하르트는 미리 찜해둔 바스티온에게 달려들었다. 바스티온 한 대가 그의 몸집에 짓눌린 채로 주차되어 있던 트럭에 처박혀 박살이 났다. 헬무트의 분대원들의 일제 사격으로 쓰러진 바스티온들은 전부 정리되었다. 바리케이드에 있던 옴닉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헬리콥터들이 로켓포를 퍼부었다. 라인하르트는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헬리콥터에 응사 중이던 옴닉들이 로켓 해머 끝에서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그의 코앞에서 로켓포를 쏘던 옴닉은 졸지에 자기 공격에 휘말리고 말았다. 라인하르트는 끄떡없다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얼마든지 쏴보시지, 이 약해 빠진 것들!"

 "이미 다 쓸어버리셨으니까 진정 좀 하세요."

 헬무트가 소총으로 전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분대원들은 쓰러진 옴닉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고 있었다. 교차로 너머에서 고층 건물 한 채가 폭삭 무너져내렸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면서 흙먼지가 교차로를 휩쓸었다.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군."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예, 그런 것 같군요. 그래도 저희가 엄호할 수 있게 조금 천천히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헬무트가 말했다.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도 새로운 전투를 찾아 전차 같은 기세로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운 없게 그와 마주친 옴닉들은 앞서 부서진 동료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헬무트의 분대는 라인하르트를 쫓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면서도 그의 측면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라인하르트는 옴닉들의 잔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뒤에야 피로를 느꼈다.

 "조금 쉬었다가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라인하르트가 바스티온의 잔해를 밀쳐내면서 말했다. 헬무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지로 복귀할까요?"'

 "아니, 아직 적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아무 데서나 잠깐 앉아 있으면 되네."

  헬무트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분대원들을 파견했다. 그는 안전을 확인한 다음 라인하르트와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의 희미한 전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주차된 차량 주변으로 짐가방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헬무트는 기지에 자신들의 위치를 보고하고 승용차의 보닛 위에 앉았다. 라인하르트는 투구를 벗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헬무트가 그에게 수통을 건네주었다.

 "고맙네, 친구. 역시 전투 뒤에 마시는 물맛이 최고지."

 "라인하르트 씨의 활약 덕분에 옴닉들의 기세가 많이 수그러들었다고 합니다."

 헬무트가 통신기의 메시지를 확인해보면서 말했다.

 "옴닉은 이제 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고 있을 걸세. 내가 오늘 안에 떨거지들까지 싹 다 치워보도록 하지."

 "당신은 정말 지치지도 않는 것 같군요."

 "조국이 위험에 처했는데 내가 지칠 틈이 어딨겠나?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빨리 이 쓰레기들을 몰아낼 걸세."

 라인하르트가 수통을 돌려주면서 말했다. 분대원들은 마음속으로 그의 군인정신에 존경을 표했지만 당장은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전장은 그들에게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헬무트가 기지의 연락을 받고 나서 분대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모두 일어나, 지금 당장 이동해야 한다. 근방에 아직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 무리가 있다. 우리가 그들을 구하러 가야 해."

 라인하르트는 곧장 투구를 쓰고 주차장을 나섰다. 연막은 거의 사라지고 지독한 화약 냄새를 풍기는 연기만이 거리를 웃돌고 있었다. 헬무트가 부대원들을 인솔하면서 라인하르트를 다음 전장으로 안내했다. 몇 블록 앞에서 옴닉들이 아파트 단지를 서성이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그들이 자기를 알아보기도 전에 몇 번의 망치질만으로 황천으로 보내버렸다.

 "203단지…101호라…. 용케도 1층에서 버티고 있었군. 나와 라인하르트 씨만 들어간다."

 헬무트가 말했다. 그는 계단에 널브러진 남자의 시체를 벽에 기대어 놓고 대문을 두들겼다.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더니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의 얼굴이 삐져 나왔다. 그녀는 헬무트를 보자마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감격해 마지않았다.

 "아, 드디어 와줬구만.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어."

 "예, 저희가 구해드리러 왔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딨습니까?"

 "내 남편이랑 손주가 더 있어. 여보, 빨리 루이스 데리고 나와."

 그녀의 부름에 그녀와 비슷한 인상의 노인이 멜빵 바지를 입은 남자아이를 품에 안고 나왔다. 아이는 한쪽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다가 라인하르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저 이 아저씨 알아요! 아저씨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영웅 맞죠?"

 루이스가 물었다. 라인하르트는 투구를 벗고 루이스와 시선을 맞춰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바로 라인하르트란다."

 "우와 최고다! 저…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그…그…이름 적어주는 거…그걸 뭐라고 하는 거였죠?"

 "사인이라고 하는 거란다."

 헬무트가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맞아, 그거요! 애들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그것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여길 벗어나면 얼마든지 해줄게. 잘 따라올 자신 있니?"

 라인하르트의 질문에 루이스는 할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 대문 주변을 빙빙 돌았다.

 "문제없어요!"

 "좋아, 이런 상황에서 나이도 어린 게 제법 당차구나. 마음에 들어."

 라인하르트는 한 손으로 루이스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올려주었다. 루이스는 소풍이라도 나간 듯이 좋아했지만, 노부부는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헬무트는 기지의 메시지를 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나?"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후송 부대가 놈들의 격렬한 저항에 가로막혔다고 합니다.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의 운동장으로 헬리콥터를 보내주겠다고 하는군요. 그 정도의 적 병력이 아직도 여기에 남아있을 리가 없는데…."

 "뭐, 전장이란 게 원래 항상 그런 곳이지 않나. 놈들이 이곳에도 들이닥치기 전에 서두르게."

 헬무트는 분대원들로 민간인들을 원형으로 감싸서 보호했다. 초등학교는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혹시나 있을지 모를 적의 매복에 대비하느라 속도가 느렸다. 루이스는 화약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라인하르트의 눈높이에서 내려다보는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아저씨는 매일 이렇게 보면 어지럽지 않아요?"

 "나이를 먹으면 그런 건 다 없어진단다. 혹시 지금 무섭거나 하진 않니?"

 "음…제가 지금 로봇들을 무서워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단다."

 라인하르트는 초등학교를 보고 루이스를 자신의 등 뒤에 내려주었다. 헬무트가 먼저 운동장에 진입했다. 인조잔디 위로 쓰레기가 굴러다닐 뿐 학교 건물은 멀쩡해 보였다. 분대원들이 사방을 경계하면서 민간인들을 운동장 한가운데로 인도했다.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헬리콥터는 언제쯤 도착하나?"

 헬무트가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헬리콥터? 자네들 지금 아파트에 남아 있는 거 아니었나?"

 오퍼레이터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더러 초등학교로 이동하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런 지시는 없었어. 지금 현장에 도착한 후송 부대가 자네들을 찾고 있어."

 라인하르트는 교신 내용을 엿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등학교의 건물 안쪽과 정문에서 연막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놈들이 우리를 불러낸 것 같군."

 그가 헬무트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제야 헬무트도 옴닉들의 반응을 감지했다. 정문은 이미 옴닉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건물에선 대포 모드의 바스티온들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분대원들을 서서히 둘러싸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몸을 수그려서 루이스의 정면을 가려주었다. 노부부는 분대원들의 틈에 껴서 동요하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씨, 저희가 민간인들을 보호하고 있을 테니 정문 쪽을 뚫어주십시오."

 헬무트가 제안에 라인하르트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럴 순 없네. 놈들의 포화에 노출되면 자네들은 물론이고 민간인들까지 끝장이야. 나도 여기서 어떻게든 버텨보겠네. 지원 병력은 요청했나?"

 "위에서도 저희 상황을 보고 있을 겁니다. 빨리 보내주길 바라야…."

 헬무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옴닉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라인하르트는 온몸으로 총알을 받아내면서 정신없이 로켓 해머를 휘둘러댔다. 그의 불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금세 새로운 옴닉들로 채워졌다. 분대원들은 탄창 한 개를 비워내기도 전에 벌집으로 변해버렸다. 바스티온의 포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라인하르트는 루이스를 끌어안고 등을 돌렸다. 그의 곁에서 헬무트가 처절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라인하르트의 갑옷이 도자기처럼 갈라지고 깨져 나갔다. 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포격을 꿋꿋이 견뎌냈다. 정면에서 날아든 포탄 한 발이 그의 투구에 명중했다. 라인하르트의 투구 반쪽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고꾸라지면서도 루이스가 깔리지 않게 양손으로 몸을 지탱했다. 그의 왼쪽 눈에 생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들지 않고 오른쪽 눈만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분대원들과 노부부는 모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손 앞에 헬무트의 잘려나간 상반신이 있었다. 헬무트가 쏟아낸 피가 루이스의 머릿밑으로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루이스는 입을 헤 벌린 채로 라인하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눈에서 떨어진 피가 루이스의 볼에 묻었다. 라인하르트는 루이스의 볼을 닦아주면서 속삭였다.

 "루이스, 혹시 곰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니?"
 "어…죽은 척을 해야 하나요?"
 "정답이다. 좀 불편하겠지만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곰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엎드려 있으렴."

 루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하르트가 다시 일어서서 로켓 해머를 짊어졌다. 옴닉들의 총구와 포구들이 그에게 쏠렸다. 라인하르트는 우레 같은 고함을 내지르면서 옴닉들에게 달려들었다. 바스티온들이 재빨리 후진했지만, 그의 내려치기 한 번에 전부 엎어져 버렸다. 라인하르트는 바스티온들을 향해 화염 강타를 날리면서 옴닉들에게 달려 들어 미친 듯이 로켓 해머를 휘둘러댔다. 총알들이 갑옷에 생긴 빈틈으로 파고 들었지만, 라인하르트는 광전사처럼 고통마저 잊어버린 채 옴닉들이 로켓 해머에 걸리는 족족 처참하게 깨부쉈다.

 

 후송 병력이 도착했을 때 라인하르트는 의식을 잃고 옴닉들의 잔해 위에 서 있었다. 갑옷이 누더기로 변해버린 것처럼 그의 몸 또한 만신창이었다. 그는 집중치료를 받은 뒤에도 오랫동안 병실에 누워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확인한 건 보이지 않는 왼쪽 눈이 아니라 루이스의 생사였다. 그는 모리슨이 침대 곁에서 꼬맹이는 무사하다고 말해준 뒤에야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얼굴에 한 방만 더 맞았으면 목숨도 건지지 못했을 거야."

 모리슨이 라인하르트에게 며칠 전 신문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신문에는 라인하르트의 활약에 힘입어 쾰른에서 옴닉을 완전히 몰아냈다는 기사가 일 면에 실려 있었다. 기사엔 그가 당한 끔찍한 부상에 관한 내용도 간략하게나마 적혀 있었다.

 "네 팬들이 얼마나 극성인지 몰라. 지금 네 앞에 쌓여 있는 선물만 해도…."

 "내가 그들을 지킬 방법이 있었을 걸세."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니, 애초에 내가 구하러 가지만 않았어도 그들까지 표적이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건 억측일 뿐이야. 넌 네 임무에 충실했어."

 모리슨의 위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앞으로 몇 달간 작전에 투입될 수 없고 왼쪽 눈의 시력을 영원히 잃은 것보다 루이스를 제외한 이들을 아무도 지켜주지 못했단 게 상심이 더 컸다.

 

 라인하르트는 주치의의 소견까지 깡그리 무시한 채 겨우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토르비욘의 작업실이었다. 토르비욘은 엉망진창이 된 그의 갑옷을 투덜거리면서도 깔끔하게 고쳐놓은 뒤였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갑옷의 상태를 보러 온 게 아니었다. 그는 토르비욘에게 새로운 장비를 요청했다. 토르비욘은 그의 요구 사항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건 자네한테 어울리지 않을 텐데…."

 "아니, 그냥 내가 부탁한 대로만 해주게."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토르비욘은 거기에 이의를 더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라인하르트의 재활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모리슨은 작업실 앞에서 라인하르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젠장, 무리하지 말라니까…. 그래, 뭐가 그리 갖고 싶었던 거지?"
 모리슨이 물었다. 라인하르트는 모리슨에게 왼팔을 내밀었다. 갑옷의 왼팔엔 사자 모양의 장식이 추가되어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장식을 떼자 그의 눈앞으로 커다란 방벽이 전개되었다.

 "이거면 몸으로 견뎌내는 것보다 더 많이 버틸 수 있을 걸세."

 라인하르트가 뿌듯하게 말했다. 모리슨의 반응은 토르비욘과 다르지 않았다.

 "글쎄, 너한테 그런 건…."

 "지금까지의 내 방식하고는 상관없네. 내가 이제부턴 그대들의 방패가 되어주겠네."

 라인하르트가 로켓 해머처럼 방패를 돌려보면서 말했다. 모리슨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그걸 바란다면 내가 간섭할 필요는 없지. 일단 몸부터 회복하고 봐."

 모리슨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라인하르트는 한동안 제자리에 멈춰 서서 방벽에 푹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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