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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주 전이다. 

내가 갓 경쟁전이 나온지 얼마 안 돼서 배치를 망치고, 
무간지옥 40점대 심해에서 플레이를 할 때 였다. 하나무라 거점 진입을 해야 했는데 심해 수비의 왕 바스티온을 좀처럼 자를 수가 없었다.

그때 거점 맞은편 창가에 앉아서 화살을 쏘는 노인이 있었다.
정면 진입을 한번 해보고자 바스티온을 잘라달라고 간곡히 요청 했다.


"좀 빨리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바스티온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급하거든 다른 영웅 알아보시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재촉하지도 못하고 잘 잘라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 쏘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자리도 옮겨보고 벽도 타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애꿎은 음파화살만 허공에  쏘아대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빨리 잘라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거점 점령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쏘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픽을 바꿔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딜을 넣을만큼 넣어야 궁이 들어오지, 픽을 바꾼다고 이기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 바스티온만 잘라주면 된다는데 무얼 딜을 더 넣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거점 점령 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바꾸려면 댁이 바꾸시우. 난 안 바꾸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바꿀 수도 없고, 거점 점령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자꾸 빗나간다니까. 바스티온은 제대로 잘라야지, 쏘다가 들키면 쓰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쏘던 것을 멈추고 태연스럽게 채팅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궁각을 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어렵사리 추가시간을 얼마 안남기고, 겨우 거점을 차지했다. 

사실 다 차기는 아까부터 다 차 있던 궁 게이지다. 

노인때문에 5대6으로 고생을 하다 겨우 이겼다고 생각한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플레이를 해가지고 게임이 될 턱이 없다. 조합은 안중에도 없고 제 꼴픽이다. 그래가지고 절대 바꾸지도 않는다. 팀플레이도 모르고 이기적이고 쓸모없는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게임이 끝나고 따지려드니 노인은 대답이 없다.

그때, 오카미 스킨을 하고 자신만만 승리포즈를 하고 섰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장인다워 보였다. 그래도 경쟁전은 이겼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이내 최고의 플레이를 봤더니, 상대 바스티온이 노인이 잘한다고 야단이다. 궁각이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뒤에서 짤짤이나 넣던 모습이 여느 충들과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50점에서 떨어졌다고 주장하는 자칭 바스티온 장인의 설명을 들어보니, 견제를 너무 하면 바스티온한테 발각이 잘 돼고, 궁각이 성급하면 자칫 용을 그냥 방생하기 쉽단다.

요렇게 바스티온 뿐 아니라 다른 적까지 같이 견제하며 궁으로 거점 진입을 돕는 것은 좀체로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예로부터 졌을때 샌드백 격인 4대 꼴픽중 겐지와 트레이서는 후방 교란과 상대방 힐러 차단에 제격이고, 좀처럼 죽지않고 깝치면서 상대의 정신을 무너트린다.

탱,힐이 보아서는 상대를 다섯번을 잘랐는지, 열번을 잘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졌을때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차게 조질뿐이다. 
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스스로 보람을 느낀다.

이 노인도 그런 심정에서 화살을 쐈을 것 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조합은 생각도 안하고 그 따위로 해서 무슨 거점을 뚫는담." 하던 말은 
"그런 장인이 나 같은심해 유저들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최고의 플레이가 나올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전리품 상자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차단되어 귓말조차 보낼 수 없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열심히 경쟁전을 돌리다가 우연히 거점 너머를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오오카미요 와가테키오 쿠라에(늑대여, 나의 적들을 삼켜라)!" .. 그의 대사가 새어나왔다.

오늘 경쟁전을 돌렸더니, 대회에서 2한조를 픽했다고 한조충들이 난리다.
기껏해야 위도우 포지션에서 갈래화살이나 날리고, 시간이 차면 맞지도 않는 눈먼 궁을 날리는 벌레새끼들이다.

문득 몇주 전, 화살 쏘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